2007년 새해가 밝았다. 아니나 다를까, 새해 벽두부터 주류 언론매체들은 올해 말의 ‘대통령 선거’를 겨냥하고 ‘예상후보’들의 ‘승률’을 점치는 요란한 보도들로 씨끌벅적하다. 다양한 ‘변수’들까지 언급해 가며, 마치 경마의 승률이라도 점치듯 게임의 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소동은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이리라.
물론 언론의 이러한 행태를 비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87년 6월 항쟁 20주년’을 맞는 올해, 바로 그 20년 전, 시민들의 대투쟁으로써 쟁취한 ‘9차 개정헌법’, 그리고 그것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 직선제’에 의해 우리 국민들은 자신의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는 ‘신성한 권리’를 엄연히 갖고 있으며, 어쨌든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 아닌가. 그러한 민주주의의 장(場)인 선거를 통해 우리가 또한번 국민의 대표인 대통령을 신중히 뽑기 위해, 후보로 예상되는 정치인들의 자질을 지금부터 검토하고 따지는 지난한 과정을 ‘소동’으로 치부하는 것은 분명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류 언론매체들의 ‘대선 바람잡기’ 행태에서 건강한 기대감이나 희망보다는 먼저 불쾌감과 짜증, 나아가 어떤 불안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은 단순한 ‘정치 혐오증’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지배 엘리트들과 언론을 비롯한 이 사회 주류 시스템을 중심으로 앞으로 조성해나갈 ‘대선 정국’이라는 거대한 회오리의 ‘구심력’이,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우리사회 각 부문, 특히 풀뿌리 민중의 삶과 관련된 무수한 토론과 논쟁의 각론과 세목(細目)들을 모조리 흡수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우려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시민들의 정신과 에너지를 ‘대선’이라는 한바탕 게임의 자장(磁場) 속으로 한꺼번에 빨아들임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시민들을 민주주의의 주체가 아닌, 사실상 그 게임의 구경꾼으로 전락시켜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 이것은 결코 근거없는 기우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속성상 필연적인 한계라는 지적도 가능하다. 문제는,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공식적인 절차가 정작 풀뿌리 민중의 생존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전면적으로 공론화하고, 그것과 관련된 정책경쟁 및 토론, 선택의 과정으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는가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떤 논자들은 이번 대선은 한미 FTA 체결 여부 및 시기에 따라 그 의미와 무게가 이전의 선거와는 달라질 수도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즉, 한미 FTA 체결 혹은 비준이 대선 이후로 넘어갈 경우, 올해의 대선은 한미 FTA를 중심으로 한 한국사회의 ‘비전’을 두고 다투는 명실상부한 ‘정책 대결’의 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측은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우리에게 설득력 있는 기대감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체결 여부 및 비준 시기의 문제가 어떻게 되든, 지금까지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몇몇 유력 정치인들 사이에 한미 FTA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다지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국사회의 ‘비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도, 그들 사이에 도대체 어떤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더구나,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달려온 성장과 개발 중심의 길에 대한 회의나 반성이 그들 중 누군가에 의해 심각하게 제기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비록 수사(修辭)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경제성장’ 또는 ‘선진화’라는 지고지선의 목표는 그들 대부분이 공유하는 ‘비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기에, 최근 한 여론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유권자 대부분이 차기 대통령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서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제1순위로 꼽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이때의 ‘경제 문제’가 농민과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와 자연환경에 대한 약탈에 근거한 비윤리적이고 지속불가능한 경제를 극복하고, 땅과 농(農)의 가치에 기반한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자립경제’, ‘순환경제’를 회복하는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앞으로 다가오는 ‘대선 정국’의 향방과 그 결과가 우리사회의 진정한 ‘비전’과 관련하여 과연 얼마만큼 의미있고 생산적인 기회가 될지 매우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러한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에 갇힌 채, 언론과 지배 엘리트들이 소용돌이치면서 만들어나갈 그 획일적인 ‘구심력’에 그저 굴복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이 시스템의 막강한 ‘주류 캠페인’(단지 ‘대선 캠페인’만이 아니라)에 맞서 ‘다른 캠페인’을 아래로부터 끈기있게 조직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들 생존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인 땅과 농업, 지역공동체를 지키고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풀뿌리 민중에게 가장 긴급한 의제임을 지속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민중의 삶을 끊임없이 식민지화하고 약자와 자연환경에 대한 약탈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산업문명과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건드리지 않은 채 ‘간판’만 바꿔 다는 ‘아무개 정부’ 따위가 우리의 궁극적인 대안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석유고갈 및 에너지 위기에 대한 경고를 무시한 채 저들이 떠벌이는 경제성장의 논리는 민중의 생존과 평등, 정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끈질기게 이야기해야 한다. 안전하고 건강한 밥상을 지키기 위한 노력,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를 가르치고 배우는 ‘흙의 교육’을 통해 우리 자신과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비전’이라고 말해야 한다. 크고 작은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 민중의 자치와 자립, 상호부조의 능력과 지혜를 회복해나가는 것, 그리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진정한 용기로써 모든 폭력과 전쟁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정책’이라고 말해야 한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는 먼저 ‘인간의 법’에 앞서는 ‘자연의 법’에 겸허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는 아프다!”고 외치는 모든 약자들의 절규를, 인간의 오만과 획일주의 아래에서 ‘살처분’되는 생명들의 절규를 외면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이 땅 곳곳 수많은 ‘전태일’들의 외침이 억눌리고 묻히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 속에 와서 크게 울리도록, 닫힌 마음을 열고 그 울림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풀뿌리 민중에게는 지금 가장 긴요한 ‘경제’와 ‘정치’, ‘민주주의’라는 것, 지배 엘리트들과 주류 시스템에 의해 전도되어온 그 ‘언어’들을 이제는 우리 스스로 바로잡아야 하겠다는 의지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풀뿌리의 경제, 풀뿌리의 정치, 풀뿌리의 민주주의에 ‘희망’을 함께 거는 더 많은 동료 시민들을 만나고 손을 잡아야 한다.
감히 말하건대,《녹색평론》이 독자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일은, 바로 이러한 ‘다른 캠페인’, ‘풀뿌리의 힘’을 아래로부터 조직하는 데 부족한 능력이나마 기여하는 것이다.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는 아니다”라고, 재일(在日) 정치학자 더글러스 러미스는《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서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가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길 가운데 하나는 ‘무력감’을 스스로, 함께, 극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대다수 시민들이 느끼는 무력감이야말로, 지배자들에게는 가장 안정적인 정치적 ‘숙주(宿主)’가 아닌가.)
감히 바라건대, 우리를 잠식하기 위해 수시로 기회를 넘보는 이 ‘무력감’을 떨쳐버리는 데에《녹색평론》이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동안 하나의 ‘정신적 공동체’를 이루고 고통과 희망을 함께해온 많은 독자들, 후원회원들, 그리고 작년부터《녹색평론》기획과 편집을 위해, 아무런 물질적 대가도 없이 헌신해주는 여러 편집자문위원들이 계시므로, 이것은 결코 헛된 바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시민의 불복종〉에서 이렇게 말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볼티모어인가 어딘가에서 대통령 후보를 뽑기 위한 전당대회가 열린다고 하는데, 주로 신문 편집인들과 직업 정치인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하건대,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이 독립심과 지성을 갖춘 한 존경할 만한 인사에게 어떤 의미를 갖겠는가.
소로우는 이어서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지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그러나 소수가 전력을 다해 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