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민주주의는 중산계급이 확립된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일반통념―배링턴 무어의 “부르주아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는 단호한 언명에 반영되어 있는 믿음―에 대한 도전으로 씌어진다. 농민이야말로 자유를 지키는 정치질서를 위한 최선의 사회적 기반이라고 생각했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단서를 취해서, 나는 농민이 민주적 정부 시스템을 건립할 수 있다는 가설을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 들고자 하는 사례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나라 산마리노이다. 산마리노의 장구한 역사는 민주주의 확립의 배후 추진력은 교육받은 부유한 중산계급일 필요가 없으며,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농민계급이 이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이 발견은 서구의 정부, 학자, IMF 및 세계은행과 같은 기구들이 제3세계 국가들을 위해서 관례적으로 행하는 바로 그 처방이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지난 20세기―또 21세기 초반까지도 계속해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지구의 구석구석에까지 ‘자유’민주주의를 퍼뜨리기 위한 노력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확산은 앵글로색슨 국가들(그리고 그보다는 덜하지만 서유럽)이 내세우는 공식적 정책으로서 많은 자금에 의해 뒷받침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민주주의의 진척상황은 보잘것없다. 왜 전세계적인 민주주의의 성장이 지지부진한가라는 의문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이 글에서 개발도상국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려는 노력들에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민주적 정체(政?)를 건립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농민의 역할, 그리고 서구의 설계자들이 개발도상국들에 심어주려고 하는 민주적 질서의 본질이다.
농민은 민주적 정부 시스템을 건립할 수 없는가
민주주의의 진화에 관한 다수의 문헌은, 다소 단정적으로, 민주적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부유하고 교육받은 중산계급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부르주아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라는 단호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는 배링턴 무어의 주장에 가장 확고히 표현되어 있는 관점이다(배링턴 무어,《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주목할 것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주창자들도 똑같이 민주적 정체를 건설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주체는 바로 중산계급이라는 데 동의했다는 사실이다. 중산계급의 미덕에 대하여 여하한 의심도 불식하려는 나머지 친(親)민주주의 이론가들은 궁극적인 증인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내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중산계급만이 ‘민주주의’를 성립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 것으로 흔히 잘못 인용되고 있다.
나는 많은 서구 국가에서 중산계급이 민주주의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부르주아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는 언명에 함축되어 있는 보편성이다. 그러한 주장은 비과학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유럽 국가에서도 민주주의는 농민에 의해 확립되어 왔기 때문이다(주요 사례는 스위스, 아이슬랜드공화국, 아일오브맨(the Isle of Man), 안도라, 그리고 대부분의 코사크 부족이다). 단크와크 러스토우의 흥미로운 관찰에 따르면, “전형적인 서구 국가에서, 과두정에서 민주정으로 권력의 이동을 궁극적으로 강제했던 것은 산업혁명 이후 증대하고 있던 하층계급 세력”이었다. 더욱이, 배링턴 무어의 명제는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상거래와 제조업에 종사하는 중산계급이 출현하기 훨씬 이전부터 농민들이 마을 민주주의를 실천해온 유럽 바깥의 상황을 그가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민공화국들은 통상적으로 확장주의적 성향이 없기 때문에 규모가 작다. 역사가나 정치이론가들의 고려 대상에서 그들이 제외된 이유도 그 작다는 점일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 학자들이 흔히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주저없이 묘사하는 약 3천년 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 역시, 어떠한 기준으로 보아도 규모가 매우 작다. 흥미롭게도, 플라톤이 생각했던 민주적 정체의 이상적인 규모는 정확하게 5,040개 집안의 우두머리들(시민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시민이 하나의 장소에 모여 연설자의 말을 명료하게 들을 수 있는 규모가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여하튼,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민주적 정체의 모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어설픈 논리이다.
주로 앵글로색슨 문화권에서 (그리고 맑스주의에서) 보여주는 중산계급에 대한 집착은, 영국의 법체계가 대부분 게르만 부족(농민)의 법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리고 원래 농민에 의해 창설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의회가 있는 아일오브맨(the Isle of Man)이 영국의 영토에 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만큼 더 의아스럽다. 생각이 깊은 이론가라면 이러한 농민문화의 자취들을 통해서 중산계급 이외의 다른 집단도 민주적 구조를 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편단심 중산계급만을 찬미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농민을 열등한 존재로 무시하는 영어사용 국가들의 성향” 탓인지 모른다. 물론 이러한 성향은 고전적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와 평등이 지배적인 정치적 가치가 되는 민주적 질서의 지원세력으로서 농민이 첫째이며, 목자(牧者)가 그 다음이라고 생각했다. 농민의 특별한 덕성은 그들이 비록 행정관을 선출하고 입법활동을 감시하는 자신들의 권한을 고집하면서도, 토지로부터 생계를 도모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불필요한 회의를 소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스의 중장비 보병(hoplite army) 대부분이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적 열망은 가볍게 무시될 수 없었다.
그동안 이태리 도시국가들을 찬양하는 중세 이태리에 관한 연구가 많이 행해져왔다. 그런데 그 도시국가들을 지배하던 중산계급은 민주적 질서를 차례차례 권위주의 정부 시스템에 내어주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농민 민주주의는 무시되어왔고, 민주적 정부 시스템을 보존해온 외로운 나라, 산마리노는 언급도 되지 않았다. 앵글로색슨 이론가들에게 왜 농민계급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으로 돌아감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규모 자작농도 사회의 중간영역의 귀중한 일원이라고 여긴 반면에, 상거래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당연히 지지할 수 없는” 활동에 종사하는 것으로 여겼으며, 그런 활동은 불평등을 만들어냄으로써 정치의 정상적인 작동을 위험에 빠트린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현대의 민주주의 이론가들의 주장, 즉 일정 수준의 재산과 교육이 민주적 정치체제의 성립에 필수불가결한 요건이라는 주장과 현저하게 대조된다. 실제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중산계급의 정치적 미덕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상찬(賞讚)은 실은 18세기 유럽 자유주의 사조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사조는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나 그것과 얽혀있는 자유방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존 그레이) 것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절대군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고자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기 계급을 위해서였지 사회 전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한 요건으로 일정수준 이상의 부(富)를 처방하는 것은,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도, 대중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일정한 교육수준이 필요하다는 널리 말해지고 있는 주장도 역시 똑같은 목적에 봉사한다. 즉, 교육을 덜 받은 하층민의 권력에 대한 접근을 막으려는 목적 말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도, 산마리노에서도, 교육의 결여가 민주주의의 실천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이제 배링턴 무어, 아담 스미스, 칼 맑스에 의해 개괄된 민주주의는 부유하고 교육받은 중산계급을 주연 배우로 한 것으로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조건부 없이 기술된 단순한 민주주의, 가난하고 교육받지 않은 농민들에 의해 실행되는 민주주의와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연결시키는 오늘날의 유행은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 둘은 양립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은 상호 적대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다. 반세기도 더 전에 폰 하이에크는 “우리 세대는 민주주의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섬기는 가치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게 사실일지 모른다… 민주주의는 본래 하나의 수단, 국내의 평화와 개인의 자유를 방위하기 위한 공리적인 장치이다”라고 날카롭게 통찰했다. 본질적으로, 사람들은 ‘좋은 정부’를 원한다.
‘좋은 정부’의 뜻은 사회마다 다르다. 종교규범, 고래(古來)의 법, 전통, 신화, 변화에 대한 갈망, 유행하는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무엇이든 한 특정 사회에서 ‘좋은 정부’로 여겨지는 것에 충실하면 그 정권은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것이 정당성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서구세계에서, 우리는 ‘좋은 정부’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환상에서 깨어난 시민들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는 점점더 무의미한 선거 의식(儀式)과 의회제라는 허튼 장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최근에야 새로운 정부 시스템을 가지고 실험을 시작한 사회의 시민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러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높이 평가된다면 그것은 민주적 기구나 정치가들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추구한다는 목표 때문이다. 정권의 정당성이나 ‘좋은 정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지도층이 민중의 필요와 이익에 응답하는 정책을 실행하느냐 않느냐에 달려있다.
산마리노 이야기
산마리노를 세상에 소개하려는 노력은 그동안 거의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산마리노에 관해 영어로 된 책은 겨우 2권이다. 그리고 그 둘도 한 세기도 더 전에 나온 것들로서, 19세기 앵글로색슨 학문적 관행―서구의 지혜와 전통의 성채(城砦) 바깥에 기원을 둔 것이면 무엇이든 내려다보는―의 전형적인 스타일로 씌어졌다. 따라서 얼마간의 기초적 자료를 여기서 제공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산마리노 공화국의 영토는 사방이 이태리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면적은 61평방킬로미터가 못되며, 아드리아해(海)의 항구 리미니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1994년 기준으로 주민은 24,335명이었다. 그중 5% 이하가 농업부문에 종사했고, 1991년의 1인당 소득은 미화 6,000달러를 나타냈다. 최초의 의회선거는 1906년에 있었는데, 투표권은 각 가정의 가장(家長)과 대학졸업자들에게 한해서 주어졌다. 참정권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1958년에는 여성도 선거권을 획득하였다.
현재의 산마리노는 전형적인 중산계급 사회이며, 특별히 주의를 끌 만한 특이한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를 위한 산마리노의 투쟁의 역사에 눈을 돌릴 때 우리는 이 작은 나라가 민주적 모델 건립에 끼친 특이한 기여를 발견하게 된다. 산마리노 공화국은 서기 301년 2월 3일에 창건되었다. 나라의 이름은 달마티아 출신의 기독교도였던 석공 마리노에게서 따온 것인데, 그는 종교적 박해로부터 도망쳐 움브리아 산맥의 티타노산에서 피신처를 구했던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려는 그의 경건한 신앙과 단호한 의지가 비슷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이 은신처로 불러들였다. 366년 그가 임종할 무렵에는 신앙심이 깊은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들은 자신의 신념과 생활방식을 그 누구에게서도 방해받지 않으려는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이나 신화에 근거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신화는 일단 사람들에게 수용되면 역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느냐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일정한 방향성을 형성한다. 이 공화국의 소박한 농민들 사이에 자유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공동체의 성립을 둘러싼 상황뿐만 아니라, 마리노의 평등주의적 가르침이라는 신화의 힘이었다. 산마리노 사람들은 그들의 공동체가 원래 박해를 피해 도망쳐온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았고, 20세기에 한참 들어와서까지도 정치적 색깔에 관계없이 모든 난민에게 피신처를 제공했다.
교황령(敎皇領)은 수차례 이 공화국을 지배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산마리노 사람들은 이웃 우르비노 대공(大公)의 자비로운 보호를 수세기에 걸쳐 받는 혜택도 누렸다. 1463년, 그들은 말라테스타가(家) 리미니의 제후들에 대항하여 우르비노 공국(公國), 교황령, 나폴리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전자가 패배하고 전리품이 동맹국들 사이에 분배되었을 때, 산마리노 사람들은 세라발레를 상으로 받았고, 그로써 현재의 국경선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산마리노가 보다 큰 국가들에게 자치체로서 인식되게 된 것이다. 당시의 베니스 역사가 피에로 벰보가 말한 바와 같이, 산마리노는 “그 자신을 공화국으로서 운영하고, 어떠한 왕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
리미니와의 전쟁은 산마리노 공화국이 싸운 마지막 전쟁이었다. 중세 초기에는 티타노산 정상의 막강한 요새가 주민들을 보호해주었지만, 대포(大砲)의 출현으로 이 산악 공동체의 안보는 위태로워졌다. 소규모 인구의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효과적인 방어를 위한 충분한 군대를 가질 희망도 없었고, 용병을 살 수도 없었다. 용병은 보통 자기들이 보호하기로 되어있는 도시에 눌러앉아 때가 되면 권력을 찬탈하였다. 점차로, 산마리노는 정치적 자주 국가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외교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비로소 온전한 인정을 받은 것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이태리의 지도를 새로 그렸을 때였다. 여러 세기 동안 정치적 반대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왔고, 이태리 반도의 약 200개 민주공화국들 중에서 ‘현대’까지 살아남은 사실상 유일한 국가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산마리노를 자유정신의 기념비로 선언했다. 나폴레옹에 의하면, “유럽에서 거의 완전하게 추방된” 자유의 정신은 “오직 산마리노에서만 존재했다.” 유럽의 한 작은 구석에 자유의 정신을 보존해온 산마리노 시민들의 ‘미덕’은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고, 그것은 나라의 독립성을 보존하는 형태로 보상을 받았다.
반세기 후 가리발디가 이태리를 사보이가(家)의 지배 밑에 강제로 통일했을 때, 그 역시 산마리노의 독립을 침해하지 않았다. 그 자신 산마리노에서 한때 피난처를 구했던 가리발디는 여러 세기에 걸쳐 정치적 피신처를 제공해온 산마리노의 공헌을 나폴레옹보다도 더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이 ‘인간정신의 기념비’는 하나의 독립국으로서 보존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산마리노는 중립을 유지했고, 그것은 나치 독일에 의해서도 존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태리가 주요 전황(戰況)의 현장이 되고, 이 소공화국이 약 100,000명의 난민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오직 영국만이 폭격을 가함으로써 산마리노의 중립성을 무시했다. 산마리노 영토에 독일 군부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폭격으로 전황에 사활적인 어떤 이익이 생기는 것이 아닌데도 영국은 이곳을 공격했다.
이 작은 공화국이 살아남은 것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황이 요구하면 무기를 드는 것을 주저치 않았던 강인한 산악 농민들의 영웅적 자질에서 그 원인을 찾아보려는 유혹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1463년 산마리노가 마지막 전쟁에서 싸웠을 때까지만 해당된다. 대부분의 세월 동안 산마리노는 가난한 농업국으로 남아있음으로써 살아남았다. 그렇게 해서 산마리노는 영토확장에 부심하는 군주들의 주의를 끌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산마리노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하나인 안토니오 오노프리는 이 정책을 이렇게 설명했다. “오직 가난하고 미미한 존재로 남아있음으로써만 산마리노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유와 주권을 유지하기를 희망할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마리노는 평등주의적 기독교 복음을 설파했는데, 그 가르침 속에는 신(神)에 대한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그는 공동체의 확고부동한 정신적 지도자였지만, 세속적인 일에 대한 의사결정에 공동체 구성원들의 참여를 장려했다. 힘든 노동, 검약, 간소함이 미덕이었던 반면에, 부(富)의 취득은 도덕적 부패를 낳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가치의 보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공동체적 규율의 제정이었고, 이 규율은 1253년 이래 그들의 ‘법전’ 속에 소중히 보호되었다. 공화국 영토가 티타노라는 하나의 산에 국한되어 있는 이상, 어떤 가족도 세 마리 이상의 염소를 기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토지의 취득에 대한 규정이었다. 토지는 적어도 애초에는 시민들 사이에 고르게 분배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적 계층화가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특별한 기술을 익히거나 혹은 혼인으로 공화국 바깥에 있는 토지를 소유하게 됨으로써 보다 많은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집안들이 생겨났다. 공화국 안에서는 그러한 부(富)를 더 큰 사유지로 변모시키는 일이 법으로 금지되었으므로, 이들은 집을 더 크게 짓고, 예술을 후원하고, 교회와 그 복지 프로그램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교육을 받고, 그럼으로써 ‘고귀한’ 신분을 획득했다. 이 공화국에서 출현한 귀족은 상위의 군주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군사적 봉사를 주된 임무로 하면서 농민계급을 억압하는 기사(騎士)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농민 속에서 나온 ‘평민귀족’이었고, 사람들은 그들이 공동체에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 고맙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과도한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서, 귀족들이 도시의 성벽으로부터 반경 1마일 이내에 집을 짓는 것은 1317년에 제정된 법령에 의해 금지되었다. 또한 산마리노 인근의 기사(騎士)들이 이 ‘평화로운 공화국’에의 편입을 원했을 때 그들의 요청은 거절되었다. 왜냐하면 ‘진짜’ 귀족을 국경 안에 두는 것은 사회의 평등주의 및 공화주의적 본질을 훼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층민 속에서도 다소의 계층화가 일어났다. 특별한 기술을 습득한 사람에게는, 중세 길드의 관행에 따라, ‘님’이라든지 ‘귀하’와 같은 칭호가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산마리노는 기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인 농촌사회였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 오직 부분적으로만 비옥한 환경에 인구증가라는 압력이 가해지면서 경제와 사회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해졌다.
산마리노의 정치제도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마리노가 살아있는 동안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이 어느 정도까지 정식화되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 공동체의 초기 역사의 어떤 단계에서 아링고(arringo)가 출현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는 물론, 초기 농민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통 그러했듯이, 아링고는 남성 가장(家長)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링고 회의에의 참석은 의무적이었다. 정부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에게 행정 일을 맡겨야 할 필요가 있으면 그 회의가 한시적인 임명을 했다. 단지 수백명으로 구성된 농민공동체에서 그러한 입헌적 조치만으로 충분했다. 아마도 아링고에 제출된 가장 중요한 안건은 도로나 정상의 요새를 개선하기 위한 공동노력이나, 난민을 수용하는 문제, 그리고 정치 및 경제적 평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아링고 회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재판소 역할도 했다.
산을 넘어서 바깥 세계와 관계하는 일은 제한되어 있었다. 가난했기 때문에 산마리노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웃 군주들의 제국주의적 설계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를 내버려 두라”라는 것으로 가장 잘 요약될 수 있는 이념적 성향의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도 다른 영토에 대하여 아무런 야심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14세기에 이르러 변했다. 한편으로, “우리를 내버려 두라”는 태도는 내부적인 정치과정에 영향을 끼쳤다. 즉, 매주 열리는 아링고 회의 참석은 많은 사람들에게 점차로 특권이라기보다 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산마리노도 더이상 인근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물러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공식적 정부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아링고의 멤버들)은 아링고와 같은 다수 정치가로 구성된 체제가 너무나 혼란스럽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전권을 ‘60인 평의회’에 양도했다. 아링고는 특별히 중요한 안건을 다룰 경우에는 여전히 소집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해마다 적어도 두번은 회의를 열 권리를 유지하여, 일반적으로 공익에 관한 다양한 안건을 평의회에 청원하였다. 그러나 여러 세기를 지나면서 반년마다 열리는 아링고 회의의 참여도는 떨어지게 되었고, 기본적으로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점을 ‘60인 평의회’에 일깨워주기 위한 기능만 남게 되었다.
‘60인 평의회’는 집단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산마리노의 군주’라는 타이틀을 취했다. 그것은 세 계층, 즉 신흥귀족, 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시장도시의 시민들, 그리고 농민계층으로 고르게 나뉘어져 있었다. ‘60인 평의회’는 비(非)귀족 구성원들 중에서 내각역할을 할 ‘12인 평의회’를 선출했고, 그중 2/3는 매년 교체되었다. 적어도 1244년 이후로는 위계구조의 정상부에 2인의 섭정관이 자리하고, 그들에 의한 양두(兩頭) 정치가 실시되었는데, 이들은 오직 공동으로 행동하고, ‘60인 평의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해야 했다. 두 섭정관 중의 하나는 귀족이어야 했고, 다른 하나는 시장도시의 시민이나 농민계급 중에서 뽑혔다. ‘60인 평의회’ 구성원 중에서 임명된 그들의 재임기간은 6개월에 불과했고, 3년 후에 다시 임명되는 것이 가능했다. 섭정관 임명 절차는 복잡했다. ‘60인 평의회’가 후보 3쌍을 선출하고, 최후의 선택은 공개적인 의식(儀式)에서 어린 소년이 항아리 속으로부터 그중 한쌍의 명단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정치적 쇠퇴의 시기에는 ‘60인 평의회’의 구성원이 80명까지 불어나거나 혹은 1739년의 경우처럼 고작 23명으로 줄어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13세기에 창설된 정치제도가 거의 600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대부분의 시기 동안 평등개념은 상당히 잘 지켜졌으며, 입헌적 질서는 사회의 상이한 신생그룹이나 계급들의 이해관계를 조화시켜왔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경제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하자, 오랜 세기 동안 사회를 다스려온 정치적 합의구조가 붕괴되었다. 자본주의의 도입과 함께 경제적 하층계급이 생겨났고, 그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은 현존 시스템의 ‘퇴폐’를 비난하면서 옛 아링고의 민주적 가치와 실천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60인 평의회’는 짧은 기간 동안 버티다가 결국 장차 재편될 ‘총평의회’의 구성은 보통선거에 의거해야 하며, 그 유권자는 옛 아링고 시절처럼 가장(家長)들과 대학졸업자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1906년의 첫 선거로부터 반세기가 걸려서 여성들에게도 투표할 권리가 주어졌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공산-사회주의 연정(聯政)에 의해 저지되어 있다가 1957년에 이태리와 미국이 관련된 쿠데타 비슷한 상황에서 그들이 실각하게 되면서 이루어진 혁신이었다. 그 이후 산마리노의 정치질서는, 2인의 섭정관에 의한 양두체제라는 기묘한 제도를 제외하고는, 여타 서구식 대의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질서와 대체로 닮은 것이 되어왔다.
결론
이제 우리는 원래 이 탐구를 부추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우리가 답을 찾았는지 평가해야 한다. 즉, 산마리노 정체의 정치적 진화가 민주주의에 이르는 한 특정한 경로로 정당하게 간주될 수 있는가, 그리고 둘째, 이 발견이 개발도상국들에서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역사는 잘못 해석될 수 있고, 산마리노의 역사도 예외가 아니다. 잘못된 해석은 과거의 사건을 오늘의 도덕적 가치에 의해 측정할 때 특히 일어나기 쉽다. 잘못된 해석 혹은 오해의 두드러진 예의 하나는 박식을 자처했던 미합중국의 두번째 대통령 존 아담스에 의한 것이다. 그의 시각에서 볼 때, “산마리노는 전혀 완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 스파르타와 로마가 그랬고, 지금 매사추세츠, 뉴욕, 메릴랜드가 그런 것처럼, 왕정, 귀족정, 민주정의 혼합물이다.” 아담스가 이렇게 썼을 때, 산마리노의 정치제도는 14개의 세기에 걸쳐 작동해왔고, 거기에는 자연히 기복이 있었다. 하지만 아담스가 그릇되게 주장하듯이, 그것이 군주제였던 적도 귀족제였던 적도 없었다. 일종의 귀족이 출현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권력은 늘 엄격하게 제약되어 있었다. 물론, 16세기에 시작되어 절대주의의 전성기에 이르는 동안 산마리노 역시 세계적 추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고, 귀족계급은 분명 공동체에 대한 자신들의 권력을 증대시키려는 기도를 했다. 그러나 1797년에 이르러 ‘땅의 사람들’은 ‘귀족계급의 억압 혹은 폐지’를 요구했으며, 이 함성으로 귀족계급은 오래된 법령을 좀더 엄격히 준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티타노산의 이 공동체는 그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모든 가장들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리―그리고 의무도―를 가진 채, 모든 결정이 집단적으로 또 민주적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이 공화국의 민주적 성격에 대하여 두 가지 이론(異論)이 제기될 수 있을지 모른다. 단지 가장(家長)에게만 정치참여의 자격이 주어진다면 그것이 어떻게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21세기의 기준에 의하면 그런 제한적인 참정권은 명백히 비민주적이다. 그러나 시대의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 나아간 민주적 관행이었다. 둘째, 그 시스템은 권력을 과도하게 ‘평의회’에 위임하였기 때문에 완벽히 민주적인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지만, 당시에는 민주주의 그 자체가 산마리노에서도, 이태리 혹은 세계 어디에서도 시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평의회’의 임무는 ‘좋은 정부’의 기능을 제공하는 것이었고, ‘좋은 정부’란 그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제적 통치나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전체 사회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며,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공화국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농민의 관점에서 볼 때, 근대 자유주의자들의 생각과도 다르지 않게, ‘작은’ 정부가 ‘좋은 정부’이다. 그러나, “나를 내버려 두라”는 농민의 이데올로기는 공사(公事)에 대한 무관심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실은, 그것은 농민이 자신의 특권이라고 느끼는 문제들에 대해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려는 방법이었을 뿐이다.
해마다 2차례 열리는 아링고 회의는 본질적으로 ‘평의회’뿐만 아니라 새로 선출된 ‘섭정관들’에게 주권은 인민에게 있으며, ‘평의회’는 그 존재를 인민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의 정치학의 기준에 의하면 이러한 제도는 순진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세 이태리는 기본적으로 대중적 신뢰 위에 세워진 영속적인 경제 및 정치적 구조들을 창조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교황의 사절(使節) 라니에리가 산마리노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유’를 무슨 뜻으로 쓰는지를 물었을 때, 글자도 모르는 그 농민들은 그것을 웅변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사람은 “자기자신에게 속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만물의 ‘주인’ 이외에 그 어떤 인간에 대해서도 그가 충성을 맹세해야 할 대상은 없기 때문이다.” 즉, 오직 하느님만이 사람들로부터의 복종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농민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중세에 이태리의 다른 곳에서는 중산계급이 자유를 절대군주들에게 넘겨주었고, 20세기에는 파시즘에 굴복하고 있는 동안에, 민주주의가 산마리노에서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옹호라는 점에서는 산마리노보다 더욱 상찬할 만큼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나라가 거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결론적으로, 산마리노가 하나의 민주적 정치체제로서 진화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민주주의의 배후 추진력이 교육받은 부유한 중산계급이 아니라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농민층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것은 우리를 두번째 질문으로 인도한다. 산마리노의 역사적 경험이 제3세계 국가들의 민주화 과정에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옛날 티타노산에서의 상황이 오늘날 개발도상국의 농민대중의 상황과 매우 다르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오래 전 이태리 반도에서 일어난 일, 즉 농민이 자신의 이웃들과 이야기함으로써 공통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던 방식이 오늘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할 타당한 이유가 없다. 실제로, 마을 수준의 토의 혹은 마을 민주주의는 세계 전역에 걸쳐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왔다.
확실히, 이런 종류의 마을 민주주의가 근대적 스타일의 민주적 정치체제로 발전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 오래된 민주적 관행을 유효한 대중 민주정치로 전환하려면 어떤 합리적-논리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단계를 거쳐야 한다. 농민들(그리고 다른 사회집단들)도 실제로는 중산계급 못지않은 ‘미덕’을 갖고 있다는 데 대해서 완고한 중산계급 옹호론자들과 도덕적 논쟁을 해봤자 소득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민이 지배한다”(민주주의)는 원칙에 따른 정치 시스템을 건립하려는 시도가 바로 그 인민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이치이다. 조금 달리 말하자면, 다수 인민이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에서 민주적 정치체제를 건립하는 일에 진정으로 헌신하고자 한다면, 그 어떤 사회공학자나 개혁가도 이 과정에서 농민을 배제하는 비논리적 행위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적 정치체제를 건설하려는 노력에서 농민대중이 보통 제외되는 게 사실이다. 그들에게 맡겨진 유일한 역할은 4년마다 어떤 중간계급이나 상층계급 출신의 정치가들에게 표를 던지는 일이다. 그런데 그 정치가들은 의회에서 농민을 ‘대표’한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계획된 현상이다.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서구의 민주주의 나팔수들이 제3세계에 팔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팔아먹으려고 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세계화, 그리고 지적재산권―그중에서도 특히 외국재산권―을 보호하는 법률 시스템을 포함하고 있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는 꾸러미이다. 그런 시스템 속에 평등, 정의, 공동성, 독립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농민 민주주의를 위한 여지는 없다. 서구의 정부와 사회설계자들, IMF, 세계은행, WTO가 일반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반(半)민주적 시스템이다. 거기에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선거와 조작된 정의(正義), 그리고 개방된 시장이 있다. 그리고 그 시스템 속에서 전통적 혹은 신흥의 중산계급은 자신의 후원자인 외국인들의 이익을 위해서 매판(買辦)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한 정치 시스템은 민간 독재정부나 군사정권 못지않게 정치적으로 취약하다. 이러한 나라에서, 오로지 진실로 대중을 대변하는 토착적 지도자들이 출현하여, 인민대중의 이익을 추구할 때만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세울 만큼 충분한 규모의 교육받은 부유한 중산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개발도상국들에서, 지배 엘리트들과 그들의 서구인 고문(顧問)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選擇肢)가 있다. 첫째, 실행 가능한 민주주의를 창조하겠다는 생각은 묻어버리고,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을 확보하면서 권위주의적 정부 시스템에 매달리는 것이다. 둘째, 대중이 일정한 기간마다 투표소로 몰려가서 지배계급의 권력을 재확인해주는 사이비 민주적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이 시스템은 현실을 위장하여, 예컨대 인도에서처럼, 실제로는 상층계급(혹은 카스트)이 나라를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서구인들로부터 ‘자유-민주적’인 국가라는 칭찬(그리고 대외원조)을 받게 만든다. 셋째, 그들은 서구식 처방은 무시하고, 자신들의 과거의 결함으로부터, 또 산마리노 같은 나라의 역사로부터 배워서, 다수 인민 즉 농민계급을 민주적 정치 속으로 참여시키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중산계급이 정치적 변화의 주체가 될 만큼 강력하지 못하고, 따라서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상황에서 확실히 농민은 소중한 동맹자가 될 수 있다. 만약 이 마지막 선택지가 방기(放棄)된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기한 연기될 것이다. (김정현 옮김)
이 에세이는 호주 퀸스랜드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되는 학술지 The Australian Journal of Politics and History, 2003년 6월호에 게재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에세이의 원제목은 “Peasants and the Process of Building Democratic Polities: Lessons from San Marino”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