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의 나라인가?
이른바 민주사회에서 이름 없는 소시민들이 자신의 재산과 삶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싸움 끝에 불에 타죽는 끔찍한 일이 발생한 지 한달이 넘었는데도, 국가권력은 단 한마디의 사과도, 납득할 만한 진상조사도, 재발방지를 위한 어떠한 적극적인 방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오히려 권력은 온갖 억지논리를 펴면서, 희생자들의 ‘폭력성’을 탓하고, 애매한 사람들만을 구속하면서 ‘질서’니 ‘법치’니 하는 공허한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시민들의 추모집회는 경찰에 의해 번번이 봉쇄되었고, 급기야 추모집회에 참석한 유족이 구타당하고 심지어는 희생자의 영정마저 경찰의 구둣발에 짓밟히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것은 이미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할 상황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과연 ‘인간의 나라’에 살고 있는지 어떤지를 물어보아야 하는 상황이다. 어쩌다 사태가 이런 기막힌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용산 참사’를 둘러싼 핵심적인 의혹사항의 하나는 멀쩡한 보통시민들에 의한 농성현장에 왜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었으며, 그것도 그토록 신속히 투입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특공대란 테러의 발발과 같은 긴급한 위난(危難)에 대응하기 위한 경찰조직이 아닌가. 경찰에 의한 과잉진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런저런 말이 많지만, ‘망루 농성’을 시작한 ‘철거민’들을 경찰이 설마 테러범으로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 내용을 정확히 알 도리는 없지만, 지금 국가권력 ―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재벌 ― 은 최소한의 생존권을 요구하는 보통시민들의 어떠한 집단적인 시위도 용납하지 못할 만큼 다급히 쫓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국가권력이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를 때, 그것은 그만큼 그 권력이 허약하다는 것을 뜻하기 쉽다.
비록 선거에 의해 집권했다고는 하나, 처음부터 도덕적 권위라고는 없었을 뿐더러, 기본적인 사회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태도로 일관해온 정부는 오로지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 ‘경제’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지금 이 정부와 그 지지자들의 고민일 것이다. 아마도 ‘경제’만 잘 풀렸다면, 원래 자신들에게 표를 주었던 유권자들의 계속적인 지지를 받는 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지금 ‘선진화’라는 슬로건을 걸어놓고 추진하려는 경제회복 정책이라는 게 세계경제와 한국경제를 지금과 같은 나락으로 빠트려온 바로 그 원리와 방식을 아무런 반성 없이 그대로 확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파멸의 원인을 가지고 파멸을 치유하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하여 온 나라, 온 백성을 끝없이 유린하는 부동산 투기와 ‘토건경제’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일시적인 성공이나 실패에 관계없이, 이것이 장기적으로 그들 자신도 포함하여 이 나라 전체의 운명에 괴멸적인 피해를 줄 것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계속 말을 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나 다음 세대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공생하지 않으면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징후들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되풀이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공황의 초입에 들어선 상황은 그동안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유린하고 왜곡해온 경제논리를 철저히 반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와 자연에 대한 억압과 수탈 없이는 지속될 수 없는 체제이다. 자본주의의 번영과 확대를 위해서 지난 수백년간 무수한 민초들이 희생당했고, 자연이 끔찍하게 파괴되어왔다. 소수 특권계층을 제외하고, 세계 전역의 민초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 문명은 가공할 테러이자 홀로코스트였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부족들이 거의 멸종되다시피 대량학살을 당하거나 밀림 속으로 쫓겨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은 아프리카의 무고한 젊은이들이 북미대륙으로 끌려와 노예의 삶을 강요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과 정확히 같은 원인, 같은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었다. ‘용산 참사’는 이러한 끔찍한 비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끊임없이 변화된 형태로, 더욱 음험하게, 우리 자신이나 우리 이웃들의 삶터 한복판에서 언제라도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지금 정말로 필요한 것은 진실로 인간을 위한 경제, 즉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상이다. 그 사상의 수립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온 우리 자신의 공범성(共犯性)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노력이 시급히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지난 수십년간 개발 혹은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무수히 많은 우리의 이웃들이 재산과 삶터를 강탈당하고 쫓겨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대부분 수수방관하면서 살아왔다. 생각해보면, 철거민은 단지 거주지의 이동을 강요당하는 게 아니다. 철거를 강요당할 때, 그들은 공동체를 빼앗기고, 이웃들 간의 상호부조의 인간관계를 상실하고, 그 가난한 공동체에서만 가능했던 삶의 기쁨과 슬픔을 박탈당해야 했다. 마침내 용산에서는 목숨까지 잃어야 했다. 국가와 자본에 의한 이 야만적인 테러는 더이상 용납되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