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 기구들이 부서진 것을 종종 본다. 우리 모녀가 잠복취재한 결과, 시소나 그네 조랑말을 부수는 이는 술 취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다. 바로 아이들이다. 대략 초등학교 고학년들. 이들이 놀이터에 들르는 시간은 학원에서 학원으로 옮겨가는 10~20분 남짓. 짧은 시간 거칠게 논다. 논다기보다 부순다. 마구 당기고 밀어 망가지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리기라도 하듯이. 처음에 그런 아이들을 보면 나무라기도 했는데 애들이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을 알았다. 한창 나이에 시간에 쫓겨 농구나 줄넘기마저 주말 체육학원에서 몰아 할 정도니, 힘을 어디에 쓰겠는가. 거친 형태로 입으로 나오고 손발로 나온다. 방학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일제고사 부활 이후 중학생들까지 강제 보충수업으로 방학을 빼앗겼다. 정말 마음이 안 좋다.
(김소희, 《씨네21》 2009년 8월 30일)
교육과 관련하여 기막힌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자포자기하는 마음 없이는 바라보기 힘든 이 야만과 몰상식들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아이들을 이렇게 키워도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은 이들의 압도적인 힘에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한다.
때때로 우리는 위 글에서처럼 아이들의 모습에서 어떤 묵시록적인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그렇지만 완전한 파국에 이르렀음을 확인하기 전까지 이 체제는 그럭저럭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교육운동의 일선에서 얻은 실감으로 말하건대, 이에 대한 교육 주체들과 시민들의 대응이 완전히 무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학교의 변화가 무언가 급류를 타고 있는 듯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든다. 우선,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방학이 사라지고 있다. 고등학교에서 방학이 사라진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이번 여름방학의 경우 많은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학습부진아 지도나 일제고사 대비 등의 명목으로 짧게는 4일부터 길게는 4주에 이르기까지 보충수업이 실시되었다. 초등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는 횟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서울의 한 지역교육청은 초등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매달 시험을 치르라는 공문을 내려보냈고, 이미 초등학교 3학년에서 1년 동안 아홉차례나 시험을 치른 학교가 있다고 한다. 우리 지역에도 월말고사를 치르는 초등학교가 생겨났다. 중학교에서는 7교시 수업이 의무화되어가고 있다. 불과 1년만에 일어난 변화다.
서울과 부산에서 15곳의 자율형사립고가 지정되었고, 이런 추세는 전국적으로 곧 확산될 기세다. 그리하여 과학고―외국어고―자립형사립고―자율형사립고―기숙형공립고 등 특화된 고등학교군을 정점으로 나머지 학교가 일렬로 줄을 서는 체제가 곧 완비될 태세다. 고교 평준화는 사실상 끝났다.
‘미래형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국어·영어·수학 교과의 비중이 더욱 확대되고, 음악·미술·체육 등 예체능 교과와 기술·가정 등 실과형 교과들이 이름만 남거나 퇴출되는 상황이 곧 도래할 것 같다. 근대 공교육체제가 공히 채택하고 있는 ‘전인교육’이라는 이념을 사실상 폐기하는, 아마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가공할 사태다.
대학 입시제도는 입학사정관제를 정점으로 크게 요동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잠재능력을 중심으로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취지와 상관없이, 그간 지역별·계층별 교육 격차의 완충 역할을 해주던 고교 내신을 무력화시키고, 고교 등급제를 부활시키는 기제로 활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이 입학사정관제로 인해 ‘스펙’(성적, 자격증, 해외연수 등 체험학습, 봉사활동, 수상 기록 등 자신의 역량을 표현할 수 있는 외적 데이터를 지칭)이라는 반교육적이기 이를 데 없는 신종 괴질이 창궐하게 될 것이다. 입학사정관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 대학별 전형 정보를 효율적으로 습득하는 것과 스펙을 ‘관리’하는 능력인데, 이런 체제에 가장 발빠르게 적응할 유한계층의 자제들에게 가능성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교육 시장이 광범위하게 생겨날 것이다. 벌써 서울과 대도시를 중심으로 입학사정관제에 대비한 컨설팅 업체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들은 수능과 내신성적 외에 외국어능력 시험, 봉사활동, 수상 경력, 추천서와 자기소개서, 그리고 교내외 활동의 기록들을 담은 포트폴리오 작성과 면접 요령에 이르기까지, 입학사정관 앞에서 자신을 ‘프리젠테이션’할 수 있도록 관리해주는 신종 사교육 기업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포함하여 일제고사는 한국 교육을 파국의 임계점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역할을 할 것으로 예측된다.
참담한 마음으로 이 모든 변화를 지켜보다가도 “이제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한다. 일제고사 문제를 들여다보면, 우리 교육의 미래가 보인다.
일제고사가 이루어낼 교육 내적 변화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교육과정평가원’이 설치된 이래 지금까지 매년, 국가 수준의 학업성취도 평가라는 이름으로 일제고사를 실시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일선 교사들조차도 실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전체 학생의 0.5~1퍼센트만 표집으로 삼아 조사했고(최근에는 5퍼센트까지 늘어났다),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일제고사는 공교육체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매머드급 폭탄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전과 달리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이 시험을 치르게 하고1), 2010년부터 ‘학교알리미(www.schoolinfo.go.kr)’라는 사이트에 그 학교 학생 중 우수 등급을 제외한 보통, 기초학력, 기초학력미달 학생의 비율을 공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고사는 아이들이 학창시절 치르는 골백번의 시험 중 한번에 불과하다. 고등학교의 경우, 각 과목별 전국석차까지 세세하게 가르쳐주는 수능모의고사에 비하면 매우 느슨한 시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고사가 이렇게 폭발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인터넷에 공시된 학교 간 자료들을 조합하면 금세 전국석차가 나오게 되고, 이는 곧 국가가 공인하는 학교 간 서열이 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생겨날 일들은 한국 교육현실에 대한 평균적인 이해만 갖고 있어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우선 학교 안에서 일어날 변화를 하나씩 따져보자. 이 시험을 주관하는 교육과학기술부는 일제고사가 기초학력 부진 학생들을 진단하고 이에 대한 지원책을 강구하기 위해서 실시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거짓말이다. 2010년으로 예정된 성적 공시까지 앞당겨 2008년 시험결과를 임의로 발표하고, 일제고사에 대한 선택권과 체험학습을 안내한 교사 10여명에게는 파면과 해임 등 중징계를 남발하면서 광분하지만, 기초학력 부진 학생들에 대해 통상적으로 해오던 것 이상의 지원책은 아직 발표한 바 없다. 어쨌든, 미국과 영국은 국가 수준의 성취도 평가를 통해 학력이 낮은 학교와 학생들에 대해 엄청난 규모의 국가재정을 투여했지만, 우리 교육당국은 오직 학교 간 비교와 경쟁을 불붙이는 일에만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예전부터 교육당국은 각 학교의 학력을 학교 관리자와 교사를 평가하는 척도로 삼겠다고 공언해왔는데, 이제 일제고사 성적이 명확한 데이터가 될 것이다. 모든 조직이 그러하지만, 평가 결과를 인사문제와 연결짓게 되면 그때부터 평가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핵심 사안이 되어버린다. 교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성적을 올리려고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이제 교사는 자신의 교육철학이나 아이들의 상황에 맞는 독자적인 수업을 준비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이 상식적인 교육적 노력을 ‘감행’하는 데는 비상한 용기가 필요하게 된다.
이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학생의 인간적 역량이나 학교의 교육적 역량의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교육활동은, 그것이 교육이기 때문에, 측정이나 평가가 용이하지 않거나, 불가능한 요소가 매우 많다. 일제고사의 객관식 문항과 단답형 주관식 문항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수―학습 과정의 성과물에 담겨 있는 교육적·인간적 의미를 거의 드러내지 못하는, 사실상 빈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독일의 발도로프 학교에서는 성적표가 학부모에게 보내는 편지 한통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에게 보편적으로 통할 수 있는 평가란 사실상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수치가 아니라, 그 아이가 처한 환경, 발달상황의 추이, 그 속에서 이루어낸 변화가 ‘개별적으로’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점수와 석차가 가장 객관적이며, 그것이 곧 변별력이라는 사고방식은 참으로 퇴폐적인 발상이다. 이야기가 조금 엇나가지만, 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초등교사를 꿈꾸면서 오랫동안 교대 진학을 준비해온 한 학생이 있었다. 일찍부터 임길택, 권정생, 이오덕 선생의 책들을 읽어왔고, 어린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학생이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지방의 어느 교육대학 수시모집에서 내신 환산점수 0.3점의 차이로 탈락하고 말았다. 3년 동안의 고교 내신성적 중에 아무 과목이라도 한등급만 높았어도 합격할 수 있었지만, 그야말로 습자지 한장 두께의 차이로 그 학생은 초등교사의 꿈을 접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어린 영혼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초등교사의 자질을 평가할 수 있는 기제가 고작 내신성적, 수능등급 따위의 수치밖에 없단 말인가. 그런데 이 사회는 그런 얄팍한 차이로 매우 훌륭한 초등교사의 자질을 가진 학생을 탈락시키는 것에 대해 아무 문제의식도 없고, 오히려 이를 “공정하고, 객관적이다”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일제고사는 교사들을 부정과 반교육적 행동으로 이끌 것이다. 올해 2월, 일제고사 성적이 발표되었을 때, 수도권지역 학교들의 성적이 낮게 나온 것에 대해 교과부의 한 고위 관료는 “수도권에는 이주노동자와 탈북자의 자녀가 많아서 평균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경향신문〉 2009년 2월 17일자). 교육관료로서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이 서글픈 발언은 일제고사로 벌어질 반교육적 사태들이 대략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당장, 한 학급에서 같이 지내는 많은 친구들이 졸지에 ‘평균을 갉아먹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이미 많은 학교에서 운동부 학생들을 시험에 참여하지 않게 했던 사례가 있고, 성적이 낮은 학생을 시험 당일날 의도적으로 결석시킨다는 영국 등의 사례가 우리나라에서도 재현될 것이다. 이미 2008년 시험에서도 채점 부정과 상급 교육청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데이터를 조작한 사례가 속출했다고 언론은 전하고 있다.
일제고사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또한번 상처를 남길 것이다. 기초학력 부진 학생들은 대개 가난한 아이들이다. 영국에서, 급식지원 대상자인 빈곤층 학생의 비율이 높은 순서대로 나열한 학교 명단을 거꾸로 뒤집으면 곧장 학교 간 성취도 순위가 되듯이, 이는 우리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아이들은 이제 기존에 얻었던 낙인에 더하여 “웬만하면 우리 학교에 없었으면, 혹은 입학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어쨌든 이 아이들의 성적을 끌어올리라고 국가에서는 학교로 ‘돈’을 내려보낼 것이다. 학교는 그 돈을 써야 할 것이고, 그래서 한동안은 아이들에게 차비도 대주고 급식비도 대줘서 방학 때 학교에 나오게 하여 영어·수학 문제를 풀게 할 것이다(올해 여름방학에 우리 지역의 한 전문계고가 실제로 이런 식으로 보충수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아이들에게 당장의 성적을 올리기 위한 프로그램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들이 처한 소외와 빈곤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관계의 변혁’이 전제되지 않고서 벌이는 이 모든 일들은, 그저 어른들이 살기 위해 벌이는 수작일 뿐이다. 아이들은 이로 인해 또한번 열등감과 수치심이 일깨워지게 될 것이며, 거대한 세금 낭비로 귀결될 것이다.
일제고사가 이루어낼 교육 외적 변화
이야기를 잠시 돌려, 우리나라의 일제고사가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과 영국을 바라보자. 영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 보수당 내각에서 국가 단위 성취도 평가를 실시하고 순위를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성적순위는 사실상 빈곤층 학생의 유입 정도가 결정지었는데, 그 결과 광범위한 학군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부유층, 중산층, 그리고 빈곤층으로 학교의 구획선이 그어진 것이다. 영국에 유학 중인 교육학자 이병곤이 《교육비평》에 기고한 바에 따르면, 영국의 검색 포털에 ‘school league table’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3,800개가 넘는 잉글랜드의 중등학교 성적이 1등부터 순위대로 뜬다고 한다. 그리고 1등부터 400등까지는 대부분 연간 평균 2,200만원 이상의 학비를 내야 하는 사립학교들과 소수의 그래머스쿨(선발시험을 따로 치르는 공립학교)이 자리잡고 있고, 중상위권에는 부유한 동네에 자리잡은 공립학교가, 중위권에는 일반 공립학교, 그리고 하위권에는 예외 없이 이민자와 극빈층이 밀집된 도심지역의 공립학교들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일제고사는 사실상 부시 행정부가 2001년 제정한 NCLB법(No Child Left Behind)에 의한 성취도 평가 체제를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경희대 성열관 교수). 이를 통해 성취 수준이 높지 않은 많은 학교가 폐교되었고, 백인 중산층들이 유색인종과 혼거하는 학교를 떠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계층과 인종을 중심으로 학군 조정이 이루어졌다. 이제 미국의 학교들은 도심의, 낮은 교육비에, 과밀학급에다, 가난한 유색인종의 자녀로 넘쳐나는 학교와, 도심 외곽의 부유한 백인 자녀들의 학교로 분리되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에 설치한 분리장벽처럼, 미국사회는 학교를 중심으로 인종과 계층의 분리장벽이 생겨났다. 미국의 교육운동가 조너선 코졸에 따르면, 마틴 루터 킹을 기념하는 ‘마틴 루터 킹 고등학교’는 학생의 96퍼센트가 흑인과 히스패닉으로 채워지는 악명 높은 인종 분리 학교가 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낸 영웅적인 흑인 변호사의 이름을 따서 설립된 ‘서굿 마셜 학교’ 또한 흑인들만의 학교가 돼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학교의 교장은 아이들에게 서굿 마셜을 아예 기업의 모범적인 중견 간부쯤으로 바꿔서 소개하며, 서굿 마셜의 맹세라면서 “나는 주의를 기울여 듣고 지시에 잘 따를 것입니다. 모든 일은 나한테 달렸습니다”라는 다짐을(물론 날조된 것이다) 아침 조회 때 30번씩 외치도록 가르친다고 한다.
이제, 일제고사가 정착된다면, 한국에서도 이런 현상은 (물론 구체적인 양상은 다르겠지만) 그대로 재현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교육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한다면 그 변화는 더욱 극악할 것이다. 당장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초·중·고등학교의 학군이 일제고사 성적을 기준으로 확실한 기준점을 잡게 될 것이다. 그 기준점에 입각하여 그 일대의 부동산 가격과 주거지의 등급이 결정될 것이다. 학력이 낮은 (다른 의미로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이 많이 입학하는 학교들은 당연히 기피될 것이고, 그 학교가 속한 지역은 ‘가난하고 찌질한 동네’로 확실하게 자리매김될 것이다. 중·고등학교의 내신성적은 상급 학교 입시에서 똑같이 대우받지 못할 것이다. 국가에서 공인한 확실한 성적과 순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등학교는 자연스럽게 중학교 등급제를, 대학들은 고교 등급제를 실시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대학뿐만이 아니라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에까지 모두 세세하게 서열이 매겨지게 되고, 아이들은 아주 이른 나이 때부터 자신이 다니는 학교와 주거지로써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판별받게 될 것이다. 1950~1970년대, 소수 명문 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경쟁체제보다 훨씬 광범위한, 유사 이래 가장 극악한 학벌 경쟁체제가 완성되는 것이다.
교육이란 ‘섞이는’ 것
이를 통해 저들은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예컨대, 미국에서 부시 행정부를 주도한 네오콘들이 국가 수준의 성취기준을 설정하고, 이른바 ‘고부담 시험’을 통해 만들고자 했던 질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미국의 교육학자 마이클 애플이 통렬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그것은 유럽,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에서 건너온 다양한 인종들의 혼거로써 성립하고 지탱해온 나라를, 백인들만이 유일한 정통성과 권력을 갖는 사회로 재편하려는 편집증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는 결국 하나의 인종, 하나의 계층만이 의미있는 교육적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체제가 마련되었다. 요컨대 그것은, 거칠고, 가난하고, 무식한 유색인종들로 넘쳐나는 학교로부터 자신들처럼 건전하고, 명민한 아이들로만 채워진 학교로 자신의 아이들을 탈출시키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한국사회에서 ‘영어유치원―사립초등학교―국제중―특목고/자사고―명문대학’으로 대표되는 성장코스에 자신의 아이들을 집어넣으려는 중·상류층의 편집증과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결국 저들에게 교육이란, 특권을 갖고 태어난 자의 특권을 한층더 강화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5년을 지금처럼 지내고 나면 그들의 소원은 거의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끼지 못할 절대 다수의 아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따위 황폐한 성장코스에 따라 자라날 아이들의 불행은 어찌할 것인가. 교육이란 ‘섞이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가장 훌륭한 교육환경은 온갖 출신배경과 특성을 가진 아이들이 두루 섞여있는 교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에는 남학생도, 여학생도,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못하는 아이도, 갑부집 아이도, 철거민의 자녀도, 다문화가정의 아이도, 이주노동자 자녀도, 장애를 가진 아이도 모두 섞여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장애 학교에서는 그 학교의 전부이던 장애가, 귀족 학교의 전부이던 부유함과 지적 총명함이, 실업계 학교의 전부이던 가난과 일탈이 실은 우리의 인간됨을 구성하는 다양한 배경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 존재에 찍힌 가난과 열등의 낙인이, 부유함과 우월의 표지가 실은 별것 아님을, ‘나는 그저 나일 뿐’임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때서야 그는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주장에 당장 불안을 느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섞이는 것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아마도 ‘하향 평준화’라는 그럴싸한 명분에 기대어 표현할 것이다. 교육은 이러한 ‘현실적 이해관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수많은 연구결과들은 또한 평준화로 인해 학업성취도가 더 향상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완전한 평준화체제인 핀란드가 국제적인 성취도 평가에서 거두는 괄목할만한 성과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설사 실제로 하향 평준화되더라도 아이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섞어야 하는 것이다. 공교육체제는 이와 같이 아이들이 서로 섞여서 자라나도록 도와주고, 거기서 생겨나는 문제들을 함께 풀어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국 교육은 단 한번도 이러한 ‘섞임’의 문제가 공론의 장에서 논의된 적도, 이에 바탕한 사회적 합의에 따라 그 진로가 결정된 적도 없다. 교육문제를 오직 정권 창출과 연장의 수단으로 바라본 국가권력과, 경쟁과 효율성밖에는 아는 것이 없는 일군의 지식인들, 그리고 교육을 통해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실현하려는 중·상류층들의 집요한 욕망만이 우리 교육의 장을 주름잡았을 뿐이다.
저항을 위하여
한국의 공교육체제가 아이들에게 가해왔던 억압은 이제 일제고사로 인하여 그 임계점을 돌파하게 될 것이다. 경제성장이 미약하던 시기에는 학교가 앞장서서 경쟁을 조장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일정 단계에 진입한 이후 사교육으로 대표되는 금전의 경쟁이 시작되었고, 이는 대체로 학부모가 주도했다. 그리고 그동안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교육적인 활동이 시도될 여지가 어느 정도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 일제고사가 정착된다면, 학교와 학부모가 공교육과 사교육 모든 측면에서 그야말로 아이들을 들볶는 체제로,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분이 없는 총력전체제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생겨나는 고통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가될 것이다. 분명, 이로 인해 목숨을 끊을 아이가 속출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제안하는 것은 이번 10월 13~14일 예정된 일제고사에 대한 광범위한 보이콧이다. 일제고사는 이 신자유주의적 교육 시장화 정책의 핵심 고리이자, 그 극점이면서, 끝내 한국 교육을 파국으로 이끌 것이다. 일제고사는 폐지되어야 하고, 성적 공시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공교육은 교육의 권리 주체이자 납세자인 시민의 것이다. 이 체제는 학부모가 양육의 권리와 의무를 국가권력에게 양도하여 성립한 것이다. 따라서 학부모는 자녀를 위탁한 사람으로서 자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국가의 반교육적 행위에 대해 반대할 명백한 권리가 있다.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학부모들에게 학교가 흔히 자행하는 으름장과 협박은 주객이 전도된 어처구니없는 것이며, 학부모는 여기에 끌려다닐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제 한국 교육의 야만과 몰상식의 물적 토대가 되었던 경제성장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그리고 일제고사를 포함하여 지금과 같은 극악한 시장화의 흐름이 지속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교육은 파국을 맞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낸 어떤 질서, 어떤 흐름이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광범위한 보이콧과 그로 인한 ‘혼란’이다. 그 속에서, 진정한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성찰, 상상력 그리고 살아있는 경험의 세계를 지향하는 교육적 열정이 분출할 공간이 열릴 것이다. 지금 이 혹독한 공기 속에서는 그 어떤 교육적 열정도, 몸부림도 숨을 쉴 수가 없다.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작년 12월, 중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한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학교 앞 1인 시위에 참여했던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다. 지금껏 제 자식 얼굴만 보고 살았는데, 그때 학교 앞에서 한시간 동안 1인 시위를 하면서 등교하는 그 학교 아이들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중학생 꼬맹이들 누구도 즐겁고 기대에 찬 얼굴로 등교하는 아이가 없더라면서, 마음이 아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한시간 동안의 저항의 행동을 통해 오늘날 우리 학교 교육에 긴박(緊縛)된 아이들의 창백하고 파리한 얼굴을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깨달음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일제고사로 한국의 교육은 더 나빠질 것이 없는 지점에 이른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지금보다도 더한 끔찍한 고통을 겪는 것을 반드시 목격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 지옥에서 유일한 희망은 우리가 만들어낼 저항과 혼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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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험은 이틀 동안 치러지며, 국어·영어·수학·과학·사회에서 각 과목당 객관식 30~40문제, 주관식 수행평가 6~12문제 등 도합 210문제를 풀게 된다. 이 성적의 결과에 따라 학생들은 각 과목별로 네등급(우수, 보통, 기초학력, 기초학력미달) 중에 한등급의 성적을 통지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