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당유기농지의 위기―한강 9공구
녹색평론에서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 그렇지 않아도 4대강 사업에 마음이 불편하고 가만있는 것이 죄짓는 양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옳아, 이 기회에 강을 만나리라’ 하고 냉큼 승낙했다. 조막손이 달걀 잡는다고, 분에 넘치는 일이었지만, 나도 평생 강물을 먹고 강을 보고 자랐으니 한사람으로서 충심을 보이자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4대강 정비사업, 예산이 22조원이라지만 실제로 40조원에 달하리라1)는 예측 불가능한 사업, 홍수예방과 수질정화, 생태공간이 목적이라지만 한강과 낙동강, 금강, 섬진강에 열여섯개의 대형 보를 세워 물길을 막고, 생태계를 훼손하고, 식수원을 오염시킬 국책사업. 한마디로 전국 곳곳이 공사터였다. 어느 하나 사안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곳이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다 뛰어갈 수 없어서 직접 가볼 곳을 몇군데 정했다. 첫번째로 떠올린 것이 팔당유기농단지였다. 4대강 사업 지역으로 포함되면서, 이때까지 유기농단지로 칭송 받다가 북한강 하천을 훼손하고 홍수를 유발한다고 단박에 국토해양부에게 누명을 뒤집어쓴 곳, 자전거도로와 생태공원을 짓겠다고 없애버리자는 곳이다. 서울에서 중앙선을 타고 양평역에 내렸다. ‘농지보존 친환경농업 사수를 위한 팔당상수원공동대책위’ 방춘배 사무국장이 직접 역까지 안내해주러 왔다. 반년 넘게 계속된 싸움에 지쳤을 법도 한데 뜻밖에 표정이 밝았다. “이곳 분위기는 어때요?” “저희는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안의 어려움과 상처도 있었지만 이번 일로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다졌습니다.” 유기농지를 지키자는 서명운동이나 그간의 소식을 얼핏 들으며 상황을 대충 알고 있었기에 뜻밖의 대답이었다. ‘함께하는 행복’을 지금 말할 수 있는 상황일까?
팔당유기농단지는 남양주시 조안면과 양평군에 44만여평에 걸쳐있는 곳이다. 4대강 사업이 실행되면 25만평이 사라지게 된다. 양평에 늘어선 비닐하우스 앞에 ‘농업사수’라는 검은 깃발이 꽂혀 있었다. 하우스 안에는 양상추와 딸기 순 같은 것들이 자라고 있다. 한곳에 들어가보니 농부 최요왕 씨가 오늘 생협에서 발주 받은 양상추 서른통을 따고 있었다. 이곳에는 젊은 농부들이 있구나! 생산물은 날마다 이곳에서 생협으로 바로 직송된다. “귀농한 지는 4년 됐어요. 여기 영농조합이 있으니까 그 그늘 아래 젊은 사람들이 모인 거죠. 개인적으로는 만족하는데 저는 아직 영농규모도 작고, 식구들 필요를 다 충족하기에는 기반이 취약한 게 좀 고민이에요.” 그가 속한 팔당생명살림 영농조합은 양평과 조안면에 걸쳐 생산자 100여명이 속해 있다고 했다. 팔십평 되는 비닐하우스에서 딸기 순을 정리하던 서규섭 씨 또한 젊었다. “지금 순을 정리하고 멀칭한 곳에 순을 밖으로 내주어야 하는데 4대강 사업 발표 후로는 일손이 안 잡혀서 밀렸어요”라고 했다. 농막에서 커피 한잔을 같이 마시며 서규섭 씨와 최요왕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팔당은 1973년 댐이 만들어진 곳입니다. 팔당댐이 만들어질 때 명분이 전력 생산이었지만 완성 후에는 물 공급과 식수원이라는 이유로 바뀌었어요. 댐이 만들어지기 전 어로작업을 하던 사람들은 더이상 고기를 잡지 못하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땅을 빼앗기고 강제로 이주를 해야 했어요. 어른들은 ‘눈앞의 물이 저주스럽다’고 일부러 물을 더럽히려고까지 했어요. 농지와 마을과 집이 잠기고 물에 안 잠긴 땅만 일부 남았어요.”
“이곳은 상수원지역이라 개발이 못 들어와요. 그린벨트나 일고여덟개 법 규제에 묶여서 유일한 방법이 친환경 농법이에요. 유기농업을 잘 모르던 30년 전에 정농회의 철학을 가지고 시작해, 동네 주민을 설득하고 규합해서 역사나 지역 문화를 만들어낸 곳이에요. 유기농업을 했기 때문에 농산물이 생기고, 소비자들이 생기고, 지역경제가 살아나고. 정부가 해주지 못한 것을 지역 주민이 스스로 해놓은 땅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올해 4대강 사업을 발표하고 유기농을 없애려고 해요. 지금 없애려는 곳들이 강 건너 조안면 송촌리의 농지까지 해서 영농조합 매출액의 70~80퍼센트를 차지하는 지역이에요. 싸워야죠. 이기기 쉽지 않다지만 지기도 쉽지 않아요.”
“대토는 어떻습니까?”
내가 질문하자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진다. 최요왕 씨가 나를 한번 쳐다보았다. “아직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에요. 대토를 이야기하면 우리 싸움은 끝나는 겁니다.” 지금 이곳은 똘똘 뭉쳐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기농으로 일군 땅을 버리고 ‘대토’를 말한다는 것 자체가 상처가 되었다. “착공은 12월에 한다고 들었는데요?” 그러자 두 농부는 몸이 굳는 것 같았다. 그 이유를 나는 나중에 단식농성장에서 유영훈 위원장의 말을 듣고 알았다. “10월 26일과 28일 강제 측량함으로써 설계를 위한 마지막 작업을 했습니다. 우리가 트랙터로 장산벌(진중리 북한강변) 입구를 막고, 마지막으로 이곳을 지키자고 하는데 경찰들이 보트를 타고 뒤쪽 물에서 들어와 쳤습니다. 지금 공사업체가 선정돼 있어요. 사무소와 부지 선정하고 곧 공사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기공식이 12월이라는데 우리가 연말은 넘겨야 합니다. 상상을 초월해서 12월이나 2월에 올 수 있어요. 농부들은 아직 보상을 안 받고 있어요. 지장물 평가한다고 감정평가사가 들어왔을 때 쫓아냈어요. 하지만 개별 농민에게 집요하게 연락해서 회유합니다. 몇사람은 포기하고 보상에 응했어요.” 이런 내부 긴장이 있는 상황에서 위원장은 농민들을 결집시키려고 단식을 결심했다. 정부는 11월 27일에 여주에서 한강 구간 공사 착공식을 가졌고, 한강 9공구(남양주 조안―가평 자라섬 31킬로미터)의 공사에 착수하려고 한다. “북한강변은 12월에 착공한다고 하고, 두물머리는 2단계 공사라고 3월에 착공한다고 합니다.” 내키지 않는 말이었겠지만 서규섭 씨가 대답해주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착공을 앞둔 이곳은 폭풍전야 같은 긴장과 정부와의 힘겨루기가 보이지 않게 스며 있었다.
답답하다는 듯이 최요왕 씨가 언성을 높였다. “하천변 땅 진짜 좋아요. 좋은 땅에 농사를 못 짓게 해요. 계곡이나 산에 있는 토지보다 서너배 생산량이 나와요. 그 땅을 없앤다니 농사꾼 입장에서 가슴 칠 일이지. 가장 중요한 게 땅이지, 국가 차원에서도. 유기농해서 일궈놓은 좋은 땅은 버리고 갯벌은 매립해서 농토 만들고!” 게다가 이곳은 수도권의 유기농 생산물 최대 공급지다. 이곳 사람들만이 아니라 35만명 생협 조합원들이 이곳에서 자란 것을 먹고산다.
“우리가 서울의 생협이란 생협은 채소 다 공급해요. 가장 힘이 되는 건 야당도 아니고 행정가도 아니고 소비자 아주머니들이에요. 이곳이 어려울 때마다 오고, 아파트 베란다에 현수막 걸고, 전단지 배포할 때 나서서 나누고, 경찰을 몸으로 막는 분이 소비자 분들이에요.” “에이, 막말로 팔아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여기까지 오니까 눈물겹죠.” 최요왕 씨가 거칠게 말했다. 눈물이 나오니까 꿀꺽 삼키느라 그러는 것이다. 벌써 이들의 몸에 싸움의 흔적이 하나씩 새겨지고 있다. “그분들을 보고 제3자 개입이라고 하네요. 유기농업의 가치를 모르는 거죠. 왜 그 사람들이 여기에 와 있는지 모르는 거예요.”
오늘 건네받은 전단지를 내려다보았다. “슬픔과 절망에 잠겨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참여! 를 요구합니다.” 이들은 마음이 아니라 참여를 필요로 했다. 4대강 사업으로 피해를 입은 다른 곳에 비해 언론의 주목도 많이 받고 정치인들도 드나들었지만, 싸움의 승패는 자신들의 결집에 달려있다는 걸 이들은 알고 있었다. 각 공사 구간이 지역별로 분할되어 고립된 속에서, 이들에게는 팔당을 지켜내는 것이 곧 4대강 사업을 막는 것이었고, 정부에서는 멈칫멈칫하며 이들의 결속을 가늠해보고 균열의 틈을 엿보고 내려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이대로 농사짓게 해다오
12월 12일, 단식 9일차, ‘4대강 사업 중단과 팔당유기농지 보존을 위한 생명살림 단식농성장’이라고 현수막을 붙인 컨테이너박스 안에는 유영훈 위원장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비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위원장을 앞에 두고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사랑방에 모인 것처럼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다. “지금 느낌이나 바람은 어떠세요?” 염치없이 바싹 다가앉아 녹음기를 들이댄다. 가까이서 보니 위원장은 얼굴에 붉은 열기가 올라 있고 거칫했다.
“단식을 하면서 무척 행복합니다. 땅을 빼앗길 위기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우리는 함께 간다는 거, 이 지역 생산자들이 끝까지 함께 가는 거지요.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음이 하나로 모이는 계기가 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 기쁩니다. 친환경유기농업은 4대강 사업의 정면에,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땅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함께 농사지어온 땅속 수억만마리 미생물과 팔당의 오리, 철새, 갈대숲, 이 생명의 일꾼들을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버티려 합니다. 이곳이 자전거길이나 공원, 다중이 모이는 휴양시설로 바뀌는 것을 저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계속 ‘행복’에 대해 듣고 있다. 내친 김에 몇가지를 더 물었다. “걱정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위원장은 한곳을 골똘히 본다. “4대강 싸움은…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바람직한 삶은 무얼까, 더불어 건강하게, 후손들에게 건강한 자연을 물려주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는 말을 끊고 지친 듯이 한곳을 보았다. 아까처럼 내 질문이 너무 일렀던 것이다. 위원장은 결국 걱정을 말하지 않았다. 그와 다른 농민들이 안간힘으로 지키는 희망이 느껴졌다. 위원장에게는 굶주림보다 몸을 더 상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람들의 생각들일 터였다.
위원장은 측량하던 날 찍은 영상물을 노트북으로 손님들에게 보여주었다. 측량을 비호하기 위해 경찰 900여명이 들이닥쳤다. “내 생전 측량하는 데 경찰이 오는 건 처음 봤어.” 한 농부의 말. “강제 측량, 결사반대” 농민들은 다같이 늘어서서 온몸으로 그 앞을 막고 나섰다. 경찰들은 방패를 앞에 내세우고 새까맣게 둘러쌌다. 농민들은 자리를 지키려고 몸부림치다가 경찰에게 끌려갔다. 농부들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삿대질하는 생협 조합원들도 있었다. 여경들이 그네의 팔다리를 꽉 붙들고 잡아간다. “농사짓는 게 뭔 잘못이여!” “이건 정당한 거야!” “이거 놔! 놔!” 고함들이 터졌다. 측량은 어두워지면 하지 못하게 되어있으니까 싸우고 버티다 잡혀가면서 “해 떨어진다!”고 마지막으로 외치고 연행되는 농부도 있었다. 하늘을 보고 해가 지도록 기다리면서 싸운 사람들이다. 공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이다.
조안면 송촌리에 산다는 농부 윤한규 씨를 만났다. 몸집이 크고 얼굴이 거무스름한 그는 마흔여덟살 된 농민이었다.
“난 이곳 사람이에요. 전에 댐이 생긴다고 우리 땅 절반이 잠겼어요. 1972년 그때 평당 270원 받았어요. 수몰지니까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기억하는데, 어릴 때 그때 댐이 없을 때 지금 여기서 수심 100미터 들어가야 실제 강이 있었어요. 정월대보름이면 밤새 그 강변에서 불들이 환하게 타올랐어요. 열살 때 아버지 따라 소 풀 먹이고 일했어요. 그 모든 게 저 물 속에 들어갔어요. 댐 물 속에 처박혀버렸어요. 그 위에서 스키 타고 모텔도 생기고. 그래서 물이 더러워진 거예요.”
말은 술술 나오지 않았다. 그는 유기농 농부들이 환경을 오염시켰다는 말에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그는 자신들이 물을 더럽힌 게 아니라는 말을 몇번을 반복했다.
“유기농 농사를 지으시겠네요?”
“내가 10년 객지생활할 때 어머니 혼자 농사지었는데, 돌아와 94년부터 농사를 지었어요. 삼대째 여기서 살고 있는 거예요. 유기농 포도를 하고, 상추, 참나물을 해서, 삼천평을 지어요. 애들이 밭에서 내가 농사지은 포도를 따 먹을 때 ‘농약 쳤으니 먹지 마’ 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에요. 그래서 남들이 다 말리는데 유기로 농사를 지었어요. 좋아서 했고, 내 15년 열정이 있는 곳이고. 지금도 한평에 지렁이가 몇십마리씩 살고 있는데….”
“국가에서 4대강 사업을 한다고 하는데 어떠세요?”
“포도 농토가 강이랑 가까워요. 4대강 사업이 하천과 일반농토 경계구역을 나누는데, 임의적이예요. 내 사유지인데 하천으로 편입되었어요. 15년 동안 내가 일군 땅을 내놓으라고 해요. 무시하고, 절차도 대안도 없고, 우스운 논리로 친환경을 오염이라 몰고. 잘 모르면서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려요.”
그는 떨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는데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일그러졌다. “내가 기른 포도를 생협에 실어다주고 오는데, 올해가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울었어요.” 그는 안간힘을 써서 무언가를 참고 있는 거 같았다. “억울해서 끝까지 버틸 겁니다. 이 땅이 하나 생기려면, 유기물이 쌓여 이 옥토가 생기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고 애써야 하는 건데요.” “속상하시겠어요.” 내 말에 윤한규 씨가 기가 막혀서 ‘허, 허’ 웃었다. 가벼운 위로는 욕이 되는 고통이 있다. 모든 빈말을 꿰뚫는 고통이 있다. ‘녹색성장’을 앞세운 구호는 그 고통과 마주하고 있다.
“이 농지가 한 많은 농지야.” 이제는 사랑방이 된 단식농성장에서 일흔이 다 된 정정수 씨가 모인 사람들에게 한 말이었다. “댐 건설 하면서 한전에서 땅을 해발 25미터까지 담수지로 사고, 홍수 대비 2미터를 여유분으로 더 샀지. 댐 짓는다고 조안면 땅을 논 320원, 밭 280원에 강제로 다 가져갔는데 땅이 남았거든, 그 하천부지를 돌려받으려고 농민들이 한전과 싸웠어. 한전에서 그걸 한사람한테 장기 임대한 걸 돌려받으려고 3년을 싸워서, 나눠서 농사를 짓게 된 거야. 그 아들들이 지금 농사짓고 있잖아. 골재 채취장 만든다고, 4차선 고속도로 만든다고 해서 또 싸웠지. 4대강 한다고 또 땅을 빼앗는다네. 아니, 농민은 땅만 들여다보고 사는데, 내놔라, 빼앗겠다 그러니 마음 참담하지. 그래도 어떻게든 지켜 농사지을 수 있지 않겠어?” 그는 옛날에는 이것보다 더 심하게 싸웠다고 했다. 옛날 고통이 지금의 고통을 위로해줄 수 있는 것처럼, 옛날의 고통이 어마어마했다고 거듭 말함으로써 지금 고통은 가볍게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주고 싶은 것처럼 그는 점점더 열을 내어 말했다.
하늘에서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어대었다. 허공에 줄이 쳐지고 흰 천조각들이 나란히 줄지어 매달렸다. 이번 추수축제 때 여성민우회에서 아이들이 손으로 쓰고 그려놓은 것들이라고 했다. 올해가 마지막이 될까봐 또박또박 써넣은 글씨들이다. “강아, 흘러라”, “4대강에 손대지 마세요”, “강물아 흘러흘러 바다로 가거라”. 흔들리는 그 손수건들 아래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얼굴이 그을린 한 젊은이가 카메라를 들고 행사 풍경을 찍고 있었다. 세계유기농대회 한국조직위 홍보팀장인 정영기 씨였다. 그는 내 질문에 흔쾌히 대답했다. “역사적으로 아이폼(세계유기농운동연맹)은 농민이 주체적으로 대회를 받아안아야 하는 행사입니다. 연맹의 정신이 그래요. 이벤트나 경기도지사의 치적 쌓기가 아니에요.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함을 주제로 하는 행사예요. 다른 나라에서는 농산물도 전시하고 학자들뿐 아니라 농민들도 경험을 논문으로 발표하는 열린 자리예요. 지금 팔당의 농민들이 밀려나 살 수 없는 상황인데, 세계연맹도 이 대회를 지자체나 중앙정부와 하려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농민들을 몰아내고 유기농을 없애는 건 대회의 본질이 없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경기도에서 돈만 들이고 알맹이 없는 행사를 하겠다고 하면 아이폼 역사에 큰 욕을 먹일 수도 있어요.”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세계유기농대회 캐서린 회장은 김문수 경기도지사 앞으로 ‘지속가능한 환경보전 모델로서의 유기농업’이라는 자료를 보냈다. 회장은 ‘깨끗한 식수 확보, 수자원 보존, 환경보호에 있어 유기농업의 긍정적 공헌’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삼십년 동안 이곳은 홍수가 나지도 않았다. 수질개선본부는 팔당호 수질이 지속적으로 1급수를 유지한다고 밝혔다. 친환경농업이 수질과 환경을 오염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환경영향평가는 무산되었다. 대부분이 유기농 농부로 살아가는 이곳에, 땅을 빼앗고 사람들을 내쫓고 왜 자전거도로를 만들려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정영기 씨는 어떻게 줄곧 즐거운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4대강을 취재하면서 초상집 문상객처럼 죽을상을 하고 나선 나는 그것이 영 낯설고 궁금하다.
오후에 마을 음악회가 시작되자 추운 날에도 사람들은 백여명 가까이 단식농성장 마당 안에 모여 앉았다. 위원장도 무릎에 담요를 덮고 나와 맨 앞에 앉았다. 남양주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분들도 많이 오고 동네 주민들도 많이 왔다.
송촌리에 사는 농부 표기원 씨가 앞에 나왔다. 날씨가 추워 하모니카를 잠바 속 가슴에 품고 있다가 꺼내어 분다. “저 양반 잘 부네.” “전날 밤새도록 연습하셨대.” 앵콜을 하라고 하니까 “난 떨려서 앵콜은 못해요” 하더니 하모니카를 옷에 슥슥 닦고 〈예수사랑〉을 불고 〈섬마을 선생님〉을 분다. 사람들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얼굴들이 석양에 붉게 물들었다. 시를 읽는 목소리도 들린다. “산천이여 제발 의구해다오…, 아리랑 강물소리에 손대지 마라, 본래 지닌 모습 그대로 건드리지 마라, 손대지 않는 것이 최대의 개발이고 최상의 보존이니 태어난 제자리 이 땅을 이 모습을 망치지 마라, 강물만이라도 건드리지 마라, 제발.”
자리는 조용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쳐다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을 모으고 고개를 떨군 사람이 있었고, 팔짱을 끼고 굳은 사람이 있었다. 마스크 낀 아이를 안고 고개를 숙인 여자도 있었다. 앉아 손끝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사람이 있었다. 서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리를 흔드는 노인도 있었다. 웃는 얼굴을 하며, 다 말하거나 드러내지 못하지만 모두 알고 있는 한가지 아픔이 흐르고 있었다. 댐으로 막힌 자리에서 이곳으로 오기까지 삼십년이 걸렸다. 모든 것을 잃고 물을 저주하던 자리에서 사람들이 함께 땅을 일구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곳은 횃불을 빙빙 돌리던 그 마을의 강가였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포클레인의 굉음 앞에서, 그들은 타협하지 않고 썩어 나아갈 밀싹 같은 시간을 선택했다. 나는 그 순간 그들이 행복하다는 말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가 이러면 안되잖니껴―낙동강 영주댐
낙동강은 이번 4대강 사업에서 가장 크게 훼손될 처지에 놓였다. “4대강 사업은 낙동강 사업으로 불러야 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사업 예산의 60퍼센트가 쏠려 있고, 그중 반 이상이 경북 지역에 집중된다. 낙동강 선도사업지구인 경북에만도 댐이 세개나 지어지고, 보 6개소, 저수지 19개소가 들어선다. 나는 경북 낙동강 순례에 참가했다. 상주보 공사현장과 물에 잠기게 생긴 예천의 회룡포, 안동의 구담습지를 둘러보았다. “4대강 정비 사업을 전광석화같이 착수해 질풍노도처럼 밀어붙여야 한다”는 정치인의 말처럼 도둑질당하듯 강이 무섭게 파헤쳐지고 있었다. 좌르륵좌르륵 강바닥에서 끌어올려져 땅바닥에 쏟아지는 모래흙을 눈앞에서 보니 가슴이 철렁한다. 하지만 더 놀란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민들이 모른다는 것이었다. 병산서원 옆에서 만난 식당주인은 토지주택공사에서 온 보상 통지서를 들고 와, “하회보가 취소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건 뭔 일이냐? 구담에도 보가 생긴다고?” 하고 되물었다. 주민들이 알까봐 쉬쉬하며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공사였다. “낙동강에 하천한다면 운하가 간다고 봐야지” 하고 주인은 상식적으로 말했고, 아내는 “밀어붙이는 거는 전두환, 박정희보다 더한 놈”이라며 “그런 놈을 찍어주다니 눈이 까집혔다”고 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농민들에게 그것은 아무 관심거리도 아니다”라고 상주에서 농민회 활동을 하는 이철수 씨는 말했다. “보상 받는 사람은 웃고, 뺏기는 사람은 막막하고” 하는 사이 낙동강은 사라지고 있었다. 낙동강 상류의 내성천이 흐르는 지역에 세워지는 대형 댐이 영주댐이다. 아직도 댐을 짓는구나. 나는 잠시 영주에 눌러앉았다. 낙동강 살리기 사업으로 속전속결로 추진되는 영주댐. 높이 55미터, 길이 390미터, 총 저수량 1억8천만톤 규모, 사업비 8,380억원, 목적은 낙동강 하천 유지용수.
영주댐반대범시민연대 공동위원장인 천경배 성공회 신부를 만났다. 그는 반갑게 악수를 청해왔다. 서로 한다리 건너면 다 친분관계인 지역에서, ‘면(안면)이 받혀’ 대표는 서로 하지 않으려 해서 자기가 맡게 되었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근엄하지 않아서 편하다. 같이 점심식사를 하면서 천 위원장은 “낙동강 문제는 그 누구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삶을 보는 감성이나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옆자리에 마침 시청 공무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작년에 상수도 민영화 문제 때문에 싸웠던 담당 공무원이 나가며 위원장에게 인사를 해온다. 직접 반대는 못하지만 ‘반대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공무원도 있다고 했다. “왜 사람들이 직접 반대 안하는지 모르겠어요.” 위원장은 그 점이 항상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함께 이산면에 사는 김진창 씨를 만나러 갔다. 58년생이라는 그는 영주댐 ‘결사’반대 이산면 투쟁위원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벼 육모 공장을 하고 있어서 마당에 모판이 한가득 쌓여 있고 비닐하우스 안에는 비료가 쟁여 있었다. 바쁜 중에 그는 앉자마자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저 댐을 하면서 얼마나 우리를 속였나 하면, 1999년 처음에는 봉화, 예천, 영주 물 부족 땜에 댐을 한다고 하다가, 야, 우리 물 부족한 거 없으니까 그만해라 했더니, 2002년도 가물 때 가뭄 대비용으로 짓겠대요. 암만 가물어도 낙동강이 가물어서 모 못 심고 하는 거 없거든요. 공갈치다 안되니 이번엔 4대강에 슬쩍 끼어 넣어 낙동강 유지수다 그래요. 진짜로 필요한 댐이에요? 아니잖아요. 댐을 그냥 할라 카는 목적뿐이에요. 할라 카는 목적. 공사를 왜 할라 하는가면 이득을 보는 단체가 생기잖아요. 이거는 농부는 뒤지라는 이야기랑 똑같애요. 국책이다, 꼼짝마라, 민주주의가 이러면 안되잖니껴. 그냥 죽니 싸우다 죽어야지.”
“어떤 단체가 이득을 본다고 생각하세요?”
“수공이죠. 턴키공사라 하는 게 시공하는 사람이 설계와 감리를 다 하는 거예요. 건드리면 돈이 되는 거예요. 살인사건이 나면 용의자는 이득을 보는 사람이잖아요. 이걸로 인해 돈을 가장 버는 사람이 누구예요? 보상받는 사람이에요? 아니잖아요. 댐을 해야 한다는 목적은 귀에 갖다 붙였다 코에 갖다 붙였다 하면서 자기들 돈을 벌려는 목적뿐이에요. 수몰된 데에 관광단지를 조성하겠다는데 토착민은 전혀 덕을 못 봐요. 땅장사지 뭐. 땅만 수용해 다녔고, 국가가.”
김진창 씨의 목소리가 커진다. 수자원공사는 턴키방식을 선호했다. 1년도 채 안되는 동안 바로 계획하고 발주, 착공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몰 지구 위쪽에 살고 있어서 당장 수몰은 되지 않지만 환경의 변화를 걱정했다. 농사꾼한테 10퍼센트 농작물 피해가 생긴다 해도 소득이 얼마 없는 상황에서 거의 전부가 피해를 입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안동댐과 충주댐 등 다른 댐들의 피해 자료를 들고 와 나에게 보여주었다. 어떤 피해가 나는지 국가나 지자체가 주민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 그가 스스로 찾아낸 자료다. 댐이 지어지면, 수몰이 되는 지역의 농업과 임업이 중단되고 골재 채취권을 상실하고 기후변화와 건강 문제까지 생겨 이 지역이 해마다 1,000억에서 1,800억은 피해를 입을 거라고 추산되고 있다.
“국가사업 중에서 주변이 최고로 피해보는 게 댐이거든요. 댐이라는 거 사람 잡는 거라. 효과는 적고 피해는 배 이상 나와요. 우리가 선진국이라는데 피해만 나는 사업을 국책사업이라 해요. 국책사업이라는데 내가 어쩔 수 있나, 사람들이 그래 포기한다니까요. 우리가 피해 본다고 질문하면 돌아오는 답변 뻔하거든. 법대로 해주겠다. 피해 보라는 거지. 물이 차면, 남는 게 없어져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면 싸우다 죽어야지, 그지요? 이거 깡패국가 아닙니까? 국가가 하는 사업이 공갈만 치고, 개인에게 피해 주고 환수도 안해주고, 조폭이나 마찬가지지요, 안 그래요?”
토박이 농부 김진창이 단언했다. ‘농부를 뒈지라고 하는 국가는 깡패 국가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영주시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항의 글을 올렸다. ‘노적가리 불 싸지르고 튀밥이나 주워 먹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그는 썼다. 그가 즐겨 쓴다는 내성천 이야기까지 물어보았다.
“우린 지하수를 먹으니까 여서 살면서 내성천의 물을 먹고 컸어요. 나를 키워준 게 내성천이에요. 사람은 물 아니면 못 사니까. 내성천에 소 몰고가 풀 뜯어먹이고, 고기하고 개구리하고 내성천하고 나하고 같이 살았는데… 그런데 그전에 몰랐는데… 없어진다고 하니…”
갑자기 말이 끊겼다. 그가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농작물 피해며 농민이 다 죽게 생겼다는 말에는 울지 않던 그가 ‘내성천이 없어진다’는 생각에 그만 줄줄 눈물을 흘리고 만다. 강이 사라지는 것이 내 몸이 사라지는 것처럼 아픈 것이다. “그만합시다.” 그는 목이 잠겼다. “겪지 않으면 알지 못해요.” ‘내 몸을 준 강’이라는 토박이들의 눈물에는 강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심리적 저항이 완강히 있었다. 자신이 살아야 하는 것처럼 당연히 강도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땅을 팔고 내쫓긴 할매들은 청보리밭을 밀어버린 보 공사현장을 보고 눈물부터 흘린다고 했다. 인디언들처럼, 그들은 사라진 땅과 물 앞에서 울었다.
그날 밤, 영주댐 반대를 위한 실무자들의 회의가 열린 도토리서원에서 활동가 장경욱 씨를 만났다. 그가 내게 물었다. “진보 언론조차 낙동강을 취재하면서 〈1박2일〉에 나온 회룡포가 사라진다, 이런 얘기만 해요. 선생님도 여기 와서 보고 찬성 있다, 반대 있다, 이런 식으로 기사를 쓰고 말 겁니까?” 뭐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마는, 그는 댐 예정지에 가서 보고 난 소감을 계속 물었다. “눈물이 절실하더라구요.” 그 말에 더해 ‘나도 그들처럼 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말은 못했다. 그는 영주댐에 대한 질의서에 의회 의원들 몇명이 답해온 내용을 분석해 표로 그리고 있었다. “전에 상수도 민영화 문제 때는 의원들이 답변도 하지 않았어요. 운동의 성과가 쌓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농촌에는 있던 사람도 떠나고 텅 비어가는데 박탈감은 쌓이고, 이제 살아갈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영주댐은 어쩌면 종기와 같고 이런 상황에서 개발문제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모두 알다시피, 농촌은 끝났다. 하지만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다, 강이 사라진다고 울 줄 아는 사람들이. 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더 많은 눈물이 필요한지 모른다.
돌멩이들이 외칠 것이다
다음날 영주시 평은면에서 수몰민 대책위원회의 신수학 씨를 만났다. 평은면은 수몰 지구여서 땅과 집이 모두 물에 들어가는 곳이다. 그는 조심스러웠다. 답할 때마다 “개인적인 거요, 대책위 생각이요?” 하고 스스로 입을 단속하는 기미였다.
“댐이 안되는 거 맞죠. 내가 수몰 지역이 아니고 밖에 있으면 난 적극적으로 반대해요. 99년부터 송리원댐 하겠다고 했을 때 주민들이 엄청 반대를 많이 했어요. 그때는 4대강이 아니고 낙동강 유지 관리수 차원에서 대두가 됐어요. 수자원공사 찾아가고 시의회도 찾아가고 끈질기게 싸웠죠. 그 당시 한창 하시던 육십대 분들이 이제 칠십대예요. 반대하고 2년 후에 또 터지고, 반대하면 또 터지고 이제 고령화가 되고 농업을 할 자녀들이 없으니까 어른들이 포기를 해버렸어요. 게다가 이번에는 이명박 정부가 직접 나서서 기습작전으로 하잖아요. 우린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갑자기 4대강 살린다고 밀어붙여요. 고시가 되고 공고가 되고 사업이 착수되는데 수몰민 대책은 누가 세웁니까? 정부? 영주시? 수자원공사? 그래서 우리 젊은 사람 오십대가 모여서 그나마 대책위를 만든 거예요. 얼마나 답답해요. 지금 보상가다 고시다 막 쳐들어오는데, 건설업자도 삼성건설로 정해졌는데, 설계 확정되고 12월 30일 잠정적으로 착공에 들어가는데. 놋점에 공사제단지구 들어가고 있잖아요. 그쪽 땅이 보상이 확정돼서 이번에 개인에게 통보가 됐어요. 일부는 수령을 하고 일부는 거부하는 입장이에요. 이 사람들이 내년쯤 이주해야 하는데, 불과 3, 4개월 남은 거예요.”
“반대하시기 어려운 건가요?”
“우리 수몰민이라 하는 게 한계가 있어요, 소위 말하는 정부시책에 반대에 섰다가 불이익을 당할까 싶어서. 또 우리가 반대하면 수몰민들 보상 많이 받았는데 왜 반대하냐 하고. 정부가 우리한테 시간을 안 줬어요. 미래가 불투명해서, 보장이 안돼서 그게 제일 불안해요.”
“결국은 보상문제죠.” 그의 말이었다. 대책위는 보상을 받아 다른 곳에 기반을 옮겨 살아가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 그들은 살아남아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칼날처럼 벼린 초조함을 품고 있었다. 떠나야 할 이유는 그들도 몰랐다. 2009년,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영주댐(송리원댐)을 짓겠다고 6월 29일 갑자기 고시가 되었다. 10월 12일 사업자가 일부 주민을 초청해 일방적으로 공청회를 열었다. 댐을 기정사실화하고 사업설명회를 하는 식이었다.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주민공청회가 합법적으로 열리지 않은 것이었다. 민주당 홍희덕 의원은 국감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인 ‘영주 다목적댐 건설사업’의 환경영향평가에서 미국국립지리원의 자료를 바탕으로 기상 피해 평가를 한 것에 대해 질의했다. 국립기상연구소 소장은 잘못을 시인했다. “미국국립지리원 자료는 우리나라를 사바나기후로 분류했기 때문에 부정확한 것이며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국토해양부 자료에 근거해 평가해야 한다”는 답변이었다. 그렇게 영주댐에 대한 환경영향평가는 오래되고 부적절한 자료를 쓴 졸속 평가였다. 시민들은 제대로 된 환경영향평가와 주민공청회를 요구하려고 대구지방환경청장에게 청원서를 내었다. 그러나 공사는 12월에 바로 시작해 2014년에 완공한다고 했다. 상류건 하류건 아무 곳에도 물이 부족한 곳은 없는데, ‘낙동강 유지수’가 왜 필요한지 이들은 알 수 없었다. 국토해양부는 영주댐의 목적을 중하류지역의 수질 개선과 내성천 연안지역의 홍수 방지, 경북 북부지역의 안정적 용수 공급라고 했지만 정작 이곳은 용수가 부족하지도 홍수가 난 적도 없었다. 낙동강 수질 개선을 한다면 상류에 댐을 지을 게 아니라 중상류지역인 구미 같은 공단의 오염 규제가 필요한 참이었다. 올해 들어 갑자기 상주며 안동에 보를 짓고 기존의 안동댐과 임하댐에 더해 영주댐과 보현댐에다 또 댐을 짓는데, 이 많은 물이 갑자기 왜 필요하다는 건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수몰이 된다는 마을들을 둘러보았다. 산 아래 열집 정도 수굿하게 모인 마을도 있었고, 백년이 넘은 교회와 괴헌고택이 자리잡은 마을도 있었다. 물에 잠긴다는 평은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중 수몰 예정지에 속한 평은면 금광리는 450여년 동안 살아온 집성촌이 있다. 마을에는 장씨 고택과 한옥들이 늘어서 있었다. 산기슭에 있는 마을은 단단한 기품 같은 것을 띠고 있었다. 몇백년 된 나무가 품고 있는 것 같은 침묵이었다. 내성천이 굽어 흐르고, 논밭이 있고 집과 가게가 있다. 이 오랜 살림이 일시에 잠기는 것이었다. 앞에 보이는 산허리의 솔숲까지 물이 차오른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노인들이 마을 뒤쪽 노인정 앞에 모여 있다길래 가보았다. 열댓명 노인들이 마당에서 게이트볼을 하고 있었다. “어쩐 일로 오셨소?” “수몰 지역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는데요.” 손님이 오셨다고 노인들이 하던 놀이를 중단하고 우르르 들어왔다.
“여기 사람들이 남의 토지도 많이 부치고, 지금 돈을 가져가는 거는 서울 부산 대구 사람들이 다 가져가는 거래요. 여기 일하던 사람들은 거지예요, 거지꼴 되어 나가요.”
나이가 칠십인데 가장 어리다고 자기를 소개한 분도 입을 떼었다.
“우리가 여기 고향을 한 몇백년 앉혀놓고 사는데 이제 농사 못 짓고, 아무도 없어. 고향 안 버려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은 반대할 수 있겠지만 나는 찬성해요. 참말로 자기 생활터전 논밭 이십여, 열댓 마지기 있으면 이 사람들은 어디 가도 또 밥 먹고 앉아있을 수 있어.”
그분은 통보된 보상가를 얘기하다가 다른 노인과 입씨름이 붙었다. 이만원 차이가 나는 금액을 놓고 한참을 틀리다, 아니다, 정확히 말해라 입씨름을 한다. “보상 단가가 너무 낮았어요. 대토를 하려 해도 지금 읍, 면에 여기 댐 된다는 소리에 평당 15만원까지 올랐는데 6, 7만원 갖고 어디 갑니까.”
“토지가 적거나 없는 분들은 어떡해요?”
“남의 소작을 하던 사람은 소작에 대해서 3년 실질 경작비를 준다 카는데 경작비를 가지고 또 남의 낯설고 물 설운 데 가서 못하잖아요. 또 지주하고 임대차계약을 안한 분은 지주가 반을 갈라 주시오, 하면 줘야지. 그러니까 지주 측에 힘이 많다는 얘기예요.”
“경작비를 준다니까 토지 임자들이 소작인한테서 땅을 도로 가져가고 자기들이 경작하기도 하지요, 댐 한다 소리 듣고 이곳에 돌아와서는.” “없는 사람은 죽으란 얘기야.”
“2003년도에 반대해서 안하기로 한 다음, 그렇게 알고 안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올해 6월에 댐을 한다고 결정난 거라.” 무거운 침묵이 돈다. “보상 받는 분은 말이 쉽게 나와요. 받을 게 없는 분은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아요.” “댐이 분위기를 다 깨뜨리네. 이게 참 문제예요.” “편이 갈려요. 댐을 한다 하면 싸움만 남아요. 형제간에 친척간에 싸움만 남는다 하이.”
어른들은 소주를 마시고 속의 말을 하나둘 꺼내놓는다. ‘돼지고기’라면서 어른들이 먹지 않고 내 앞에 밀어주는 것은 식은 순대다.
“해운대 영화 봤겠지만 여기서도 그런 돌발적인 사고가 안 날 수가 없어요. 안동댐 있지, 임하댐 있지, 영주댐까지 하면, 전국에 댐이 몇갭니까? 쓰촨성 지진 난 게, 과학자들이 그러대요, 댐을 많이 해서 지진이 났다고. 난 대한민국이 답답합니다. 영주 지역으로 여기 이산, 평은, 문수, 장수는 모래땅이에요. 여기서 물을 가둬놓으면 영주 시내 어떻게 됩니까. 골칫거리예요. 언젠간 새지요.”
“사람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물과 흙, 이게 생명의 원천이거든요. 흙에서 나오고 흙밖에 안되는 게 맞는데. 이 면적에 사람이 생활하는 먹거리가 나오고, 여 나는 산물이 한해 300억원이 돼요. 게다가요, 서울에 애들 쌀 부치고 뭐 부치고 김칫거리 부치고, 그래 먹고 사는 인구가 한 사오천세대가 더 사는데 댐 하면 먹거리도 없어지고. 불량 공사해서 해마다 보상비 7억 준다고 하는데 그거하고 우예 바꿉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저절로 곪아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누굴 믿고 삽니까. 앞에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안하이께네 우리는 누굴 믿고 살아요.” “아무 동네 가도 보상 얼마 없어요. 마구 노할매들 있지요, 앞의 몇분만 잡앗부면(잡으면) 할매들은 좋다, 도장 다 찍어주거든요. 자네 가면 나도 갈라네, 죽여도 모르고 살려도 모르고, 이래 동의가 다 됐단 말이요.” “정부에서 하는 일이, 이런 식으로 밀어붙여서 하는 거예요. 자기네 일만 해결할라고 주민들이 죽든지 말든지 바꿔치기 해서.” “토종, 토종 하지만 어릴 때 있던 그 자리에 있는 게 토종이지요, 평생 고향에서 살다 나가면 그 설움을 어떻게 할 거야.”
낮술을 마신 어른들의 얼굴이 붉어진다. “뭔 죄를 져서 형제간에도 입을 못 뗀다.” “나는 못 떠나요. 댐 되면 산 밑에 움막이나 짓고 살든지.” “대대로 살던 고향을 뺏기고 이제 어디서 죽을지도 모르고 떠나야 돼요.” “가기는 또 어디로 가요.” “우리가 뭔 죄를 졌습니까.”
그들은 이제 ‘조상의 묘를 파내’ 떠나야 한다. 끝난 농촌에는 댐이 아닌 무엇이라도 지어질 수 있다. 귀농한 젊은이 한둘도 없다는 구석진 땅. “우린 이대로 행복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여기에는 없다. “우리는 슬프며, 전혀 행복하지 않으며, 대놓고 말하면 ‘손을 꽁꽁 묶고 소리 소문 없이 죽여버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댐을 반대한다”고 말하는 늙은 목소리가 숨죽인다.
“여기 511가구가 수몰되는데 그중에는 소작하는 분들이 많고, 나가서 살기 어려운 분이 많습니다. 토호들이나 외지에 살면서 땅을 소유한 지주들은 이득을 얻겠지만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워요.” 천경배 신부가 들려준 말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록해놓아야 한다고 했다. “이곳을 다큐멘터리로 찍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이건 한이에요. 이 한을 기록해야 돼요. 이건 억울한 임종을 지켜보는 거나 똑같아요. 저 댐은 누굴 위한 겁니까? 저는 끝까지 댐공사 하지 말라고 할 거예요. 지을 때는 못 짓게 할 거구요, 다 지어도 헐으라고 얘기할 거예요. 우리가 못하면 돌멩이들이 일어나 외칠 거예요.”
“우리에게 염원이 있습니까?”
낙동강 순례를 할 때, 상주보 공사현장을 둘러보고 저녁에 식당에 둘러앉았을 때였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게 오보에서 비롯했다는 걸 아세요?” 지율 스님이 말했다.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 기자회견에서 여행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는데, 한 외국 기자가 언제부터 발효되냐고 물어서 서기장이 엉겁결에 ‘지금부터’라고 대답한 거예요. 그 말이 ‘장벽이 무너졌다’로 보도가 된 거예요. 그 보도를 보고 독일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와 장벽을 깨부쉈어요. 경비대원들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니 총을 쏠 수 없어 보고만 있고 하룻밤 새에 몇십년 동안 있었던 장벽이 허물어졌어요. 그게 가능했던 건 독일사람들이 모두 통일을 열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보도를 보자마자 뛰쳐나가서 다같이 장벽을 깰 수 있었던 거예요. … 우리에게 그런 염원이 있습니까?” 스님이 물었다.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어떤 기회가 왔을 때, 4대강 사업을 멈추라고 다같이 뛰쳐나갈 수 있는 그런 염원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모두 말이 없었다. 염원이라니, 우리들의 염원이라니. 지율 스님은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지금 끊임없이 기록한다고 했다. 사진을 찍고, 자료를 모으고 사람들을 부르고, 강에서 일어나는 일을 손끝으로 가리키고, 그 손끝을 한사람이, 열사람이, 백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한다고 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상주의 활동가 김영희 씨가 말했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안 알고 싶어 해요, 알면 마음이 불편해지니까. 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해요.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 아이들이 알게 해야 해요. 무엇이 일어나는지 봐라. 물에 잠기는 게 이런 것이다. 이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이 모두 물에 잠겨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염원할 수 있을까. 제대로 말할 수도 울 수도 없는 사람들이, 모두 고향을 떠나 흩어지기 전에, 농부가 평생 일군 땅을 빼앗기기 전에,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들이 죽어가기 전에, 강가의 나무가 다 베어지고 강바닥의 모래가 모두 끌어올려지기 전에, 사람은 흙과 물에서 난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가 사라지고 강과 함께 우는 울음이 완전히 그치기 전에 우리는 다같이 바랄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무덤 위에 난 자전거도로와 경마장과 생태공원에서 뛰놀라는 사탕발림에 진저리치며, 더이상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 개발하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는 열망할 수 있을 것인가? 더 늦기 전에 아니다, 이건 정말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강을 흐르게 하라”는 평범한 말이 이렇게 눈물 나게 하는 소리인 줄 나는 길을 떠나기 전에 알지 못했다. 이보시오, 당신, 눈먼 흙으로 돌아가, 서럽게 토막난 강 사이를 떠돌기 전에, 지금은 사람으로서 눈물을 흘릴 시간이라고, 베어져 쓰러지는 강가의 나무들은 우리들에게 먼저 유언을 남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