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이것은 잘 알려진 성서 속의 말이다. 원래의 문맥 속에서 볼 때,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참된 믿음을 우리가 어떻게 갖느냐에 관한 말이다. 성 요한은, 이런 확신은 우리가 하느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장소에 ― 기적적으로 ― 서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하느님이 계시듯 존재한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두려움 없음은 사랑이 우리 자신을 통해서 작동하는 것을 보고 아는 데에서 나온다. 이때의 사랑은 사적인 애정이나 긍정적인 감정, 혹은 심지어 친절한 행동도 아니며, 사람들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들고, 이 세상에 새로운 어떤 것을 가져오는 그런 사랑이다. 상황의 엄청나게 복잡한 얽힘에 대응하는 하느님의 사랑, 예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본질인 바로 그 사랑이다.
환경문제에 대한 우리의 관여를 가장 깊이 뒷받침하는 종교적 근거는, 하느님의 사랑이 당도한 바로 그 장소에 신의 부름에 따라 우리가 존재하고, 또 그렇게 할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져있다는 깨달음이다. 하느님은 세상을 보시며 ‘좋다’라고 하셨다. 그 성서의 확신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구현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한 지혜가 온 우주에 걸쳐 환희롭게 울려 퍼지는 〈잠언〉 속의 놀라운 이미지를 상기하면서, 하느님이 ‘창조’ 속에서 발견한 기쁨을 우리의 삶이 반향(反響)하게 해야 한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하느님은 우리가 창조된 세계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를 바라신다. 이 믿음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해 번민도 하지 않을 것이며, 환경을 통제하는 방법을 기를 쓰고 찾지도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환경’을 이해하고, 그것의 근원적인 ‘좋음’과, 정교하고 상호의존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하기 위한 희망찬 모색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만약 어떤 ‘두려움’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전해진 유산(遺産)을 망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이 선물의 압도적인 규모와 깊이를 망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우리의 책임, 즉 창조된 세계를 보살펴야 할 일을 망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그리고 우리가 동료인간을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하듯이 창조세계에 대해서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일이지만, 이 지구가 모든 인간과 미래세대들의 안전한 집이 되도록 보전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동료인간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또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이 두려움은 우리를 만들어냈고, 우리를 지탱해주는 그 사랑에 우리가 다시 가닿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현재 우리는 여러 세대에 걸쳐 지구를 올바르게 사랑하지 못한 실패의 결과에 직면해있다. 그리고 또한 그 결과가 덜 파괴적인 것이 되게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선택에 직면해있다. 개인으로서, 다국적기업으로서, 정부로서 우리 모두는 각자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를 이 지점까지 데리고 온 탐욕적이고, 중독성이 강하며, 사랑이 결핍된 행동을 되풀이하면서 내리막길을 계속 가야 하는 게 우리의 운명은 아니다. 그런데도 두려움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과 상상력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정에 따르는 대가를 껴안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우리는 기존의 생활방식이 주는 안락함을 버리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우리는 새로운 정책들이 유권자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우리는 좀더 젊고 활기찬 경제가 우리를 희생시킬 것이라고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좀더 오래된,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경제가 생태적 책임감을 구실로 정당하고 공정한 발전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부정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한마디로, 진정한 변화를 위한 결정을 회피하게 해주는 훌륭한 핑계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만 그 핑계들의 기원에 관해서 우리는 적어도 솔직해지자. 그것은 두려움이다. 반드시 비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심지어 순전히 이기적인 두려움은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두려움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한,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 창조세계 그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눈으로 창조세계를 보아야 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을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후손들이 안정되고 생산적이며 균형 잡힌 세계에서 살 수 있도록 우리는 온 힘을 다해서 노력해야 한다. 완전히 혼돈스럽고 분열된 세계, 황폐화된 불모의 세계, 생물학적으로 빈곤하고 열악한 세계를 물려주어서는 안된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지구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가장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것은 사랑일 것이다. 우리는 상황의 긴박함을 서로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두려움을 강조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 상황이 아주 좋지 않다, 너무 위협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사실, 우리는 아직도 인류가 스스로 자초한 불길한 상황 앞에서 충분히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있다고 쓰라린 마음으로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질병을 다른 질병으로 퇴치하려는 것과 같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런 종류의 두려움은 우리를 마비시킬 뿐이다. 그리하여 문제가 너무 엄청나서 차라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재앙을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낳을 수 있다. 게다가, 그저 서로를 탓하거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먼저 행동을 취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생명력 있는 변화를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이다. 인류역사의 중대한 순간에 우리는 지금 신앙인으로서 만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그저 애원하거나 장광설을 늘어놓기 위해서가 아니며, 하물며 겁을 주고 무서움을 조성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두가지의 단순한 얘기를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과, 우리의 정부들에게 말하기 위해서 여기에 모였다.
첫째, 두려워하지 말라. 그 대신 세상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비추어 지금 여러분이 따르는 정책들과 당연시하는 생활방식이 어떠한 것인지 물어보라. 이 세계와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라. 그것은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의 기쁨과 지구에 대한 존경을 어떤 식으로든 드러내 보이는 관계여야 한다. 긍정적인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라. 즉, 우리가 하느님의 창조세계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둘째, 이 질문과 자원이 유한한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신뢰하며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을 분리하지 말라. 그런 세계 속에서는 정의(正義)가 없으면 신뢰가 있을 수 없다. 내가 불안이나 위험에 부딪혔을 때 내 이웃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지 않고서는 신뢰는 있을 수 없다. 필요한 곳에 자원이 확보되도록 보장하는 국제기구들을 우리는 어떻게 세울 것인가? 예를 들어, 어떻게 ‘녹색 세금’의 도입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고, 어떻게 가장 준비가 덜된 사람들을 다치지 않는 방식으로 경제패턴의 변화를 이룰 것인가?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서한에서 약속된 바와 같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믿음을 갖고, 믿음과 신뢰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면, 창조질서 전체가 호응을 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죄악과 이기심에 의해 창조질서에 강요된 ‘노예상태’는 종식되고, 해방의 길이 열릴 것이다. 인간적 자유와 함께 동시에 세계 전체의 운명도 완전히 실현될 것이며, 그 결과는 ‘영광’일 것이다.
이 강림(降臨)의 계절에, 우리는 그런 미래가 가능하다는 확신에 찬 희망을 다시 새롭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을 깨고 우리의 해방을 위한 역사(役事)를 개시한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크리스마스 선물에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의 믿음과 책임감을 재확인한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는 데 미적거리고 있는 모두에게,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사랑을 위해 행동하라. (김정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