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의 특강시간에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평소에 제가 존경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제가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뺏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그러나 제 실력 이상으로 좋은 얘기를 드릴 수는 없기 때문에 비록 시시한 얘기가 되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얘기는 돈에 관한 것입니다. 이 자리에도 저희 독자들이 계시겠지만, 요즘 부쩍 《녹색평론》에서 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평소에 가난하게 더불어서 행복하게 살자고 해온 잡지가 뜬금없이 왜 돈 이야기를 열심히 하는지 궁금하시겠죠. 실제로 작년 가을부터 거의 매호 거르지 않고 돈에 관한 글을 게재하고 있으니까요. 아직까지는 번역된 외국자료를 별 설명 없이 실어왔기 때문에,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해가 잘 안될지 모릅니다. 그런 점을 해명도 할 겸 오늘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돈, 즉 화폐문제에 우리가 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지 조금 자세히 말씀드려 보고 싶습니다.
사실 1996년에 제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지역화폐라는 개념을 소개한 이래 이 화폐라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어요. 지역화폐에 관해서는 그동안 《녹색평론》에 간헐적으로나마 꾸준히 글을 게재하면서 독자들의 관심을 촉구해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세계의 일반적인 상황과는 달리 왜 우리나라에서는 지역화폐운동이 활기를 띠지 못하는지, 늘 아쉽고, 또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세계적인 금융위기 상황에서 금융문제의 파장이 넓고 깊은 것에 새삼스럽게 전율을 느꼈습니다. 사실 IMF 파동 때 우리가 다 실감한 일이지만, 그때는 제가 아직 준비가 안돼서인지 금융문제의 근원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몇가지 우연이 겹쳐서 최근에 와서 이 문제를 조금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어요. 그러다가 돈이 무엇인지 좀더 철저히 알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진 사회운동이라도 돈문제를 우회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어서는 결국 변죽만 울리는 헛된 노력일 뿐이라는 생각이 확실해졌습니다.
따지고 보면, 지금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없습니다. 여기 교회에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하기는 교회에서는 늘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된다고 가르치죠. 우리가 사람답게 살려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는지 한번 냉정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물론 내 식구를 사랑하고, 내 친구를 사랑하고, 가까운 이웃까지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경계를 넘어 만인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인군자라면 모르죠. 보통사람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왜 안될까요. 모든 사람이 타인을 경쟁자로 보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생존을 하고, 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정된 물자와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차지하려는 투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자본주의사회라는 얘기죠.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사람들끼리 피나는 경쟁을 해야 할 정도로 정말 우리가 사는 세상에 물자와 서비스가 절대적으로 모자란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가만히 보면, 오히려 지금은 적어도 산업사회라고 일컫는 사회라면 물건과 서비스가 넘쳐나고 있어요. 밤낮없이 쏟아지는 광고를 보세요. 실제로 사람들의 필요보다 더 많이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인위적인 수요창출을 위해서 광고가 온 세상을 도배하는 거 아니겠어요? 이런 상황인데도 서민들은 늘 곤궁하고, 생활에 허덕입니다. 이른바 풍요 속의 빈곤이죠. 왜 이렇게 되어있을까요. 간단히 말해서, 구매력, 즉 돈이 넉넉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늘 돈이에요.(웃음) 물자와 서비스는 넘쳐나는데, 그것을 실제로 획득하는 데 필요한 돈이 없거나 고르게 분포돼 있지 않다는 게 문제죠. 우리가 생활을 하자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시스템에서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고, 내가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를 핍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상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게 가능한 일이 아니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 생활을 포기하거나 희생해야 합니다. 이런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남들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지구상에 과연 얼마나 있겠어요?
제가 《녹색평론》을 발간하기 시작해서 이제 20년 가까이 됩니다만, 그동안 고민이 많았습니다. 지금과 같은 지속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생활이 계속되어서는 조만간 파국에 봉착하리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이제는 다 알고 있습니다. 지속이 불가능한 방식을 지속이 가능한 방식으로 전환하자면 무엇보다도 경제성장논리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아요. 아무리 경제성장이 중지돼야 한다고 말해봤자 실현 가능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헛소리에 불과해요. 예를 들어, 우리 모두가 좀더 검소하게 살고 공생의 도리를 익혀야 한다는 것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에요. 저도 그런 얘기 많이 해왔고, 요새는 그런 말 하는 사람 아주 흔해졌어요. 요즘 가령 4대강 관련 집회에 가면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 집회니까 그렇기는 하겠지만, 생명에 대한 외경을 말하고, 욕심을 버리고, 천지만물은 하나라는 인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등, 그런 얘기를 흔히 듣게 됩니다. 실은 너무 자주 흔하게 듣게 되니까 좀 지겨워요. 전에는 그런 얘기를 하면 완전히 미친 놈 취급을 하던 분위기가 어느새 이렇게 되었습니다. 격세지감이 느껴져요. 물론 이런 생명옹호사상이 보편적인 상식이 되면 좋은 일이죠. 그러면 그게 우리사회 전체를 관류하는 기본교양이 되어서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기업인, 관료, 언론인들이 개발이나 성장에 대해 좀더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죠.
그러나, 어림도 없어요. 역시 돈문제가 해결돼야 합니다. 아무리 주관적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생명사상을 익힌다 하더라도 그러한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 사회적 약자나 자연을 희생시켜도 어쩔 수 없다는 현실논리 앞에서는 간단히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끊임없는 경제성장을 강요하는 시스템, 약육강식을 구조적인 원리로 하고 있는 시스템을 그대로 방치하고 아무리 윤리적인 덕목을 강조하고, 정신적인 재무장을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입니다. 기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원래 기업이란 물건이나 서비스를 생산하여 소비자에게 팔아서 최대한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조직입니다. 그런 조직에 대해서 이윤 욕심을 내지 말고 사회적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기업은 윤리적 덕목을 실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국가가 제 기능을 하느냐 하는 것이죠. 국가는 기업이 공익을 해치지 않도록 일정하게 규제하고 통제할 권한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지 현실의 국가는 기업, 특히 재벌의 이익을 위해서 기꺼이 하인노릇을 합니다. 오늘날 의회민주주의라는 것은 금권독재정치를 합법적인 것으로 분식해주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건 길게 말할 것도 없죠.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부패도 문제지만, 좀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국가와 자본은 늘 결합하게 돼있습니다. 게다가 근대국가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에 깊숙이 빠져있기 때문에 경제성장논리를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경제성장은 사활적인 문제로 오랫동안 인식되다 보니까 이제는 일반 시민들도 경제성장이 안되면 다들 죽는 줄로 알고 있어요.
비록 국가가 양심적인 정치가, 관료들에 의해 운영되는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경제성장을 포기할 수는 아마 없을 거예요. 그것은 물론 자본주의시스템 때문이죠. 그런데 다들 자본주의체제를 지목하고 있지만, 과연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의 어떤 메커니즘이 계속적인 성장을 강제하는지, 거기에 대한 명확한 해명은 사실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아요. 이 문제를 오늘 좀 생각하고 싶습니다.
무상급식과 농사
여러분들 점심 다 드셨죠? 제가 안심하고 좀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앉아계신 분들에게는 대체로 좀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를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서요.
먼저 이번 지방선거 얘기를 조금 해야겠군요. 이번에는 과거의 지방선거와는 상당히 다른 결과가 나왔지요? 물론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지만. 과거에 지방선거라면 영남에는 완전히 한나라당, 호남에는 민주당이 싹쓸이하는 식으로 돼서 결과적으로 지방자치라는 게 사실상 무의미했는데, 이번에는 진일보한 측면이 분명히 있어요. 아마 이명박의 공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도 엉터리로 하니까 이렇게 놔둬서는 안되겠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동안 선거에 관심 없던 사람들도 이번에는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서도 미약하나마 사회변혁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번 선거결과는 꽤 고무적인 데가 있어요.
그중에서도 저는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의의는 ‘무상급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거 동안에 제일 인상적인 공약이 무상급식 전면 실시라는 것이었죠. 친환경 무상급식이라는 얘기도 나왔죠? 무상급식문제가 이렇게 주요 선거이슈가 되고, 그게 유권자들에게 먹혀들었다는 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각하기 어려웠던 현상입니다. 소위 진보진영의 후보들이 대개 이 무상급식 공약 때문에 당선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게 참 중요해요. 아마 한나라당도 앞으로 선거에서 이와 비슷한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으면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앞으로는 복지정책을 둘러싸고 여야가 서로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 같아요. 좋은 현상이죠.
그런데 무상급식이 활성화되면 무엇보다 농촌이 살아날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이게 제일 반가워요.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는지 모르지만, 농촌이나 농민을 이렇게 경시하는 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치인이나 기업, 관료, 주류 언론, 학자는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진보진영도 마찬가지였어요. 겨우 생각한다는 게 식량생산 기지로서의 농촌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고, 아마 지금도 그럴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금 노동운동이 저렇게 힘이 빠져버린 것도 결국은 농촌이 죽어버렸기 때문이에요. 도시의 노동자들이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자립의 근거지로서 농촌이 살아있어야 노동운동이 강건해질 수 있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이치거든요.
4대강만 하더라도, 우리사회에 농사의 중요성에 대한 건강한 상식이 살아있었다면 저런 무모한 공사가 처음부터 계획되지도, 실행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금 4대강 문제로 걱정되는 게 하나둘이 아니지만, 그중에서 농경지가 대규모로 사라지는 것도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옥토 중의 옥토인 강변 둔치들이 마구잡이로 파헤쳐지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강바닥을 파헤친 소위 준설토를 처리할 데가 없으니까 인근의 멀쩡한 농경지를 적치장으로 만들어, 준설토를 쌓아놓고는 휴경을 시키고 있잖아요. 몇년이나 지나야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에요. 게다가 그동안 강바닥 깊숙이 숨어있던 독성물질들이 노출되어 어떤 부작용을 끼칠지 모릅니다. 과연 지금 준설토를 쌓아놓은 경작지가 다시 온전한 농토 구실을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런 거 보면 소위 4대강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제반 관련문제에 대해서 면밀한 검토가 없었던 게 너무나 분명해요. 덮어놓고 서둘러 공사를 시작해놓고 보니까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들이 불거져 나오는데,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할 맘은 없으니까, 예를 들어, 농경지리모델링 운운하며 가당치도 않은 단어를 급조해가며 국민들을 속이는 거죠.
아무튼 농사라든지 농민이나 농촌이 중요하다는 데 대한 최소한의 인식이 있다면 이런 짓은 할 수가 없지요. 지율 스님의 조사에 의하면, 4대강 공사로 사라지는 농토는 가령 상주시 같은 데서는 전체 농지의 1/3이나 된다고 합니다. 정부의 한심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런 문제를 지적해줘야 할 언론은 뭐하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인간의 생존방식에 대해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인지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세계적으로 식량위기가 닥치게 돼있는 현실이잖아요. 저는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10년 안에 90년대에 이북이 겪었던 대량 기아사태 못지않은 처참한 상황이 남한에서도 되풀이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이북은 그래도 식량자급률이 65퍼센트 이상이에요. 우리는 석유공급에 이상이 생기면 그날로 망합니다. 지금 남한은 식량자급률 겨우 25퍼센트 정도밖에 안되면서도 그것도 대부분 석유로 짓는 농사입니다. 게다가 수출해서 팔아먹는 공산품도 전부 석유제품이잖아요. 이 나라에 석유 이후 시대를 위한 대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대비를 하건 농사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상급식이라는 아이디어가 나오고, 그게 선거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을 보니 반갑지 않을 수 없죠. 정말로 이런 프로그램이 잘 작동해서 농민들이 지금보다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환경이 조성되면 좋겠어요.
무상급식과 기본소득
그리고 또하나, 무상급식이라는 아이디어가 이제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게 됐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가 있어요. 그동안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의가 꽤 있었지만 실은 아직도 이 프로그램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지금 한나라당 쪽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라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일반 사람들이 제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뭐냐면 부잣집 아이들까지 왜 국가가 점심을 먹여줘야 하는가 하는 거죠. 이건희 손자들한테까지 왜 국가가 밥을 먹여줘야 하느냐, 이해가 잘 안되죠. 그런데 무상급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집이 가난해서 점심을 못 가지고 오는 아이들에게 국가가 밥을 먹여줘야 하되, 자기들만 공짜로 먹는다고 생각하면 아이들이 소외감을 느끼고 심리적으로 상처를 받는다, 그러니까 선별을 하지 말고 무조건 차별 없이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는 거죠. 물론 이것은 교육적으로 중요한 논리죠. 아이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배려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얘기예요. 그러나 이런 논리도 결국은 약자에 대한 보살핌 혹은 시혜라는 인도주의적 관점에 서있는 게 문제예요.
무상급식을 약자에 대한 특별한 혜택이라고 봐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국가의 의무입니다. 모든 아이들은 점심을 굶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냥 이 나라에서 자라고 있다는 자격 하나만으로 그럴 권리가 있는 거예요. 이런 기본전제를 사회전체가 군말 없이 승인하느냐 마느냐가 결국 좋은 사회를 실현하는 관건입니다.
모두 잘 아시겠지만, 신약성서의 비유 중에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에게 품삯 주는 얘기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침부터 와서 일한 사람이든 점심때 온 사람이든 해 지기 전에 와서 잠시 일을 했을 뿐인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똑같은 품삯 1데나리온을 받잖아요. 그러니까 아침부터 와서 일한 사람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겠죠. 사실 우리도 그래요. 일을 많이 한 사람과 조금밖에 못한 사람이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는 것은 특히 오랫동안 자본주의적 관행에 길들여져온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잘 안 가죠. 그러나 이게 바로 하느님 나라의 계산법이라는 거예요. 저는 이 비유에 대한 신학자들의 해석을 조금 유심히 들여다봤는데, 제 마음에 드는 해석이 별로 없더군요.(웃음)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계산법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는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얘기되기 시작한 ‘기본소득’ 개념과 유사한 게 아닌가 싶어요.
들어보셨겠지만, 이 기본소득이라는 것은 생계수단이나 소득수준을 일절 묻지 않고, 또 직업이 있는지 없는지도 따지지 않고 모든 시민에게 무조건 일정한 소득을 정기적으로 국가가 주는 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인도주의적·복지적 관점입니다. 갈수록 고용상황이 악화되는 현실에서 일종의 보편적 복지시스템의 하나로서 기본소득을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여기서도 이게 그냥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책이라면 왜 국민 모두에게 무차별로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하는지 설명이 잘 안됩니다. 가난한 사람, 소득이 없는 사람만 선별해서 따로 혜택을 주면 되잖아요. 사실 그런 것은 이미 저소득층이나 노령층에 대한 지원이라는 형태로 기왕에 시행되고 있죠. 이런 복지프로그램을 교육이나 의료를 포함한 기초적 생활영역 전반으로 확대한다는 게 지금 대체로 진보진영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인데요. 이 방향에서 보면 기본소득은 좀 의외의 논리라고 할 수 있어요. 기왕의 복지서비스라는 게 거의 예외없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것인데, 이 기본소득이란 것은 빈부차이, 지위고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기초생활비를 지급한다는 아이디어란 말이에요. 부잣집 아이 가난한 집 아이 가리지 않고 밥을 준다는 무상급식 프로그램과 기본적으로 발상이 같은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복지프로그램의 하나로만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사실 이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역사가 꽤 오래됐습니다. 이미 18세기에 영국에서는 토마스 페인이라는 급진주의 정치사상가가 기본소득과 유사한 정책을 제창하였고, 가까이는 미국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많이 읽혔던 에릭 프롬의 책 《존재인가 소유인가》에도 기본생활보장비에 대한 언급이 나와있어요.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저서들에서도 에릭 프롬은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걸 보면 기본소득에 관해 꽤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제일 흥미있게 본 것은 1920~193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클리포드 더글러스라는 사람이 제창한 기본소득론입니다. 더글러스는 원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항공기 제조공장에서의 회계사 근무 경험을 토대로 거의 독학으로 경제학을 연구하여 ‘사회신용론(社會信用論)’이라는 독특한 이론을 수립한 인물입니다. 사회신용론이란, 간단히 말하면, 종래 민간은행에 의한 신용창출제도를 페기하고 국가나 지자체 같은 공공기관이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 즉 신용의 사회화 혹은 공공화를 통해서 기본소득을 실시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과월호 《녹색평론》에 자세히 소개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더글러스의 지론에 의하면, 기본소득은 결코 복지혜택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들 개개인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야 하는 일종의 ‘배당금’입니다. 마치 기업이 결산을 한 뒤에 주주들에게 배당을 주는 것처럼 말이죠. 왜 배당금이냐 하면, 더글러스에 의하면, 한 나라의 부는 일차적으로는 기업과 개인들의 창의적인 노력의 총화지만, 그런 부가 창출될 수 있는 근원적인 바탕은 그 나라 혹은 공동체 전체의 문화적 공통유산이고, 따라서 그 문화의 상속자인 구성원 전원에게는 공동체의 부를 나누어 가질 당연한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극히 타당한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기업이나 개인이 물건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내어 장사를 하고 이익을 낼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사회에서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꾸준히 전승되거나 쌓여온 지식과 기술, 철학, 교양 등등, 문화적으로 공통한 토대 때문이거든요.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에요. 이런 발상에서 더글러스는 기본소득을 ‘국민배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도 더글러스의 입장에 공감해서 기본소득이라는 용어보다는 배당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국민배당이라는 말 대신에 ‘시민배당’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시민배당’으로서의 기본소득
그런데 기본소득이든 시민배당이든 이 개념이 아직 보통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게 사실입니다. 복지 차원에서 특별히 국가의 지원을 받아야 할 약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모든 시민들에게 무조건 일률적으로 돈을 준다는 방식이 쉽게 이해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방식에서는 소득이란 아이들이나 노인들이 가족들에게서 받는 용돈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당연히 무엇이든 일을 한 데 대한 대가였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상식을 뒤집는 사례들이 지금 세계 여러 곳에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지만, 미국 알래스카주(州)에서는 이미 수십년째 모든 주민들에게 매년 일정한 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기록을 보니까 한국 돈으로 계산해서 연간 1,000만원 가까운 금액이더군요. 그 돈을 알래스카에 상주하고 있는 미국시민이면 무조건 주는 거예요. 알래스카에서 나오는 석유수입이 그 재원(財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물론 재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심사 없이 무조건 시민들에게 생활비를 준다는 발상 자체입니다. 브라질에서도 부분적이지만 금년부터 기본소득제도를 도입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규모는 작지만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한 시골에서는 벌써 몇년째 주민 전부에게 기초생활보장비를 지급한 결과,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마을에 활기가 생기고, 장래에 대해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의욕적인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해요. 나미비아에 대해서는 세계의 많은 시민운동가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데, 최근에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에서도 현지 취재를 하고 그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어요. 아무 희망도 없이 인간 이하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누군가의 아이디어 하나로 기본적인 생활이 해결되면서 다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는 것은 감동적인 이야기예요. 물론 이 프로그램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현재까지는 유럽의 시민운동단체의 지원으로 기금을 마련해서 운영돼왔다고 하는데, 이 기금이 곧 고갈된다고 합니다. 무슨 대책이 있어야 되겠지요. 사실,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말씀드리죠.
하여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빠른 속도로 기본소득이 지금 세계 전역에서 새로운 상식이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여러 나라의 정치가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이 프로그램의 도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모양입니다. 앞으로는 계속 실업자가 양산될 것이 틀림없는데, 그에 대한 대책으로 기본소득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얘기죠. 독일 연방의회에서는 벌써 여러 해째 기본소득 도입문제를 놓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직은 극소수지만 수년 전부터 몇몇 연구자들이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있고, 정당 차원에서는 사회당이 강령으로 기본소득 전면 실시를 걸어놓고 있어요. 워낙 작은 정당이라서 아직 언론의 주목을 못 받고 있지만, 저는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복지시스템의 구축이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경제위기를 포함한 사회적, 생태적 위기상황 전체를 고려할 때, 이 방법밖에 출구가 없다는 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용과 소득의 분리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기본소득에 관련해서 가장 문제되는 게 재원확보 방법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기본소득이라는 생소한 개념에 대해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위화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기본소득 혹은 시민배당에 대해서 보통사람들의 이해를 방해하는 것은 어떻게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돈을 받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언젠가 우리사회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본격적인 토론이 벌어지게 되면, 기득권층에서 반발이 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상급식에 대한 오해처럼 그 반발도 기본적으로 오해에 근거한 것일 겁니다. 실업자가 줄어들고, 서민들의 생계가 안정되고, 전체적으로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야 기득권의 이익도 장기적으로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반발하겠지만, 결국은 상황이 더 나빠지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종래와 같은 경제성장을 고집하다가는 모두가 공멸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날이 조만간 닥치게 돼 있으니까요.
아무튼 제일 큰 걸림돌은 사람들의 고정관념, 즉 소득은 노동의 대가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일도 하지 않았는데 돈을 준다는 말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더 저항감을 느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시스템 속에서 오랜 세월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괴로운 일을 하면서 살아왔고, 그래서 소득이란 그 괴로움에 대한 대가라는 생각에 깊이 젖어왔으니까요. 사실, 소득과 관계없이 즐겁게 자발적으로 하는 일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게 서민들의 생활이죠. 기본소득은 무엇보다도 고용과 소득을 분리시키는 데서 성립하는 개념인데, 그런 생각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거 당연하죠.
그래서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대개 나타내는 반응이 뭐냐면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기본소득을 받게 되면 그럼 일은 누가 하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지금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데, 독일사람들이 만든 다큐멘터리 비디오가 하나 있습니다. 제목이 〈문화적 충동으로서의 기본소득〉이라고 돼있습니다. 아주 유익한 비디오예요. 거기 보면 재미있는 대목이 있어요.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간단히 기본소득에 관해 설명을 하고 소감을 물어봅니다. 그러면 열명 중에 여덟명 정도는 그거 좋은 제도라고 찬성을 하면서도 꼭 토를 달아요. 취지가 좋기는 하지만, 그런 제도가 실제로 실현되면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고요. 그러면 당신도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으냐 하고 계속해서 질문을 하면, 자기는 일을 계속할 거라는 거예요. 다만, 다른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으려 할 것 같다는 거죠. 재미있죠? 사람들이 대개 이렇습니다. 남들을 믿지 않는 거죠.
그런데 기본소득이라고 해봐야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넉넉한 생활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기초생활보장비이기 때문에 보통사람이라면 기왕에 해오던 일자리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또 기왕에 일자리가 없던 사람이라면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일도 중단하지 않을 거고요. 다만, 지금처럼 쫓기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다급한 마음에 노예노동에 가까운 일을 감수하거나 하는 일은 없어지겠죠. 실은 이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사회에서 노예노동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거 말이에요.
에릭 프롬도 바로 그런 얘기를 했어요. 기초생활보장 소득제가 실현되면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그렇지 않다고요. 원래 사람은 일 없이는 살지 못해요. 기본소득 때문에 사람들이 일을 안하고, 그 결과로 사회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견입니다. 돈이 있다고 한평생 생산적인 일 없이 빈둥거리며 지낼 사람은 별로 없어요.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은 반드시 금전적인 소득을 얻기 위해서만은 아니거든요. 일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은 고양되고, 의식이 확장되고, 인간관계가 풍요롭게 됩니다.
그래서 기초생활이 보장된다면 그때부터 개인들은 각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게 될 공산이 커져요. 그러면 그 일은 재미로 하는 일, 유희 같은 게 되는 거죠. 꿈 같은 얘기죠? 실제로 지금도 그런 식으로 살고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술가들 말이에요. 예술가는 원래 돈 때문에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일이 좋아서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예술가라면 가난하게 사는 거 별로 문제가 아니죠. 자신이 온몸을 바쳐서 하는 일이 늘 있으니까 행복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굶어 죽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그런 예술가를 위해서라도 기본소득이 실시되면 좋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 예술의 질이 크게 향상될지도 몰라요.
노예와 예술가의 일
그러니까 기본소득은 단지 실업자 구제책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다소간 예술가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해준다는 점에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예술가만이 자유롭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모든 사람이 다 자기 나름의 보람있는 일을 가지고 행복한 인생을 살 권리가 있잖아요. 그러자면 노예노동을 강요당하지 않고 어느 정도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자신의 일을 가져야 하는데, 그게 기본소득으로 가능해진단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이 기본소득이란 게 굉장한 혁명적 잠재력을 갖고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예노동 얘기를 했지만, 만약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아마 제일 먼저 기업들이 긴장하겠죠. 지금처럼 돈 몇푼 때문에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생명의 위험을 느끼며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동자들이 웬만하면 그런 회사에는 들어가지 않으려 할 테니 말이죠. 그러면 기업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작업현장을 개선하지 않을 수 없고, 비인간적인 노동을 종업원들에게 더이상 강요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발암물질에 노출되어 종업원들이 죽어나가도 나 몰라라 하는 대기업들의 횡포에 맞서서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본소득 실현을 서두르는 것입니다. 기업의 비윤리성을 규탄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에요. 그냥 기업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적인 노동조건과 환경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시스템을 고치는 게 더 중요한 거죠.
교육지옥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저는 기본소득으로 교육문제도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제일 심각한 문제가 교육문제인데, 수십년 동안 온갖 방책이 나왔지만 갈수록 이해관계가 난마처럼 얽혀서 이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아무도 모르게 됐어요.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은 한번밖에 없는 성장기를 교육지옥 속에 갇혀서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고 어이없이 망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도대체 지금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아이들을 망가뜨려놓고 있는 사회가 지구상에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육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이 사회는 미래가 없는 사회예요.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교육의 근본문제는 대학을 나와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풍토에 있거든요. 그것도 가급적 일류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거죠. 실제로는 이제 소위 일류대학을 나와도 장래가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가 되었는데도,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다들 좋은 대학 가려고 미쳐있고,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서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사회 전체에 널려있어요. 대학들도 돈을 벌려고 환장해 있고요. 요컨대 모든 사람들이 이 교육문제에 관련해서 제정신들이 아니에요. 자기 아이 사교육비 마련을 위해서 어머니가 몸을 판다고 하는 사회니까 더 말할 게 없죠.
어떤 사람들은 서울대학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 우리나라 교육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당장에 없애야죠. 우리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는 게 서울대의 존속보다도 훨씬더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러나 서울대를 없앤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서울대를 없애면 또다른 서울대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문제의 근원은 특정 학교의 존재가 아니니까요.
중요한 것은 왜 모두들 대학에 가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실제로는 지금은 대학 나와봤자 정규직 일자리 얻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취직이 되어도 대부분 40대 중반에 정년이에요.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런 현상은 앞으로 완화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도 부모들이나 아이들은 자기만은 예외가 될지 모른다는 환상을 갖고 이 격심한 입시경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욱이, 설령 대기업에 취직을 해봤자 어차피 노예신세를 면치 못하는 현실인데도 그래요. 여러분도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 보셨지요? 대기업의 사장들이 그룹총수와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몇시간이고 오줌도 누러 가지 못한다는 얘기, 그 책에 나오잖아요. 완전히 노예예요. 일류대학 출신의 엘리트 사원들이 하는 주요 업무가 비자금 현금 꾸러미를 나르는 일이라잖아요.
아무리 급료를 많이 받아도 노예는 노예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통사람은 생계수단이 어느 정도 확보된다면 노예생활은 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게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입니다. 그래서 기본소득이 중요하다는 거죠. 가령 한달에 100만원이든 얼마든 일정한 돈이 규칙적으로, 그것도 죽을 때까지 지급된다면, 결국 노예생활에 귀착하는 취직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그런 취직을 하겠다고 소중한 성장기를 희생하면서 지옥 같은 입시전쟁에 뛰어들 이유가 없어질 게 분명합니다. 간단하죠?
사실, 지금 진짜 학자나 연구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대학 가는 학생들 별로 없잖아요. 다들 취직하기 위해서 가는 거죠. 그러면 그 아이들을 불필요하게 괴롭힐 거 없잖아요. 노래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살고 싶은 아이들이 지금은 수학을 못하면 음대도 미대도 들어갈 수 없어요. 수학공부에 흥미를 못 느끼는 아이들에게 그걸 강요해봤자 사회 전체의 문화수준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만 상처받을 뿐이에요. 대학이 뭐길래 이 나라의 수많은 아이들이 이렇게 괴로움 속에서 아까운 성장기, 사춘기를 보내야 하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인천에서 열린 어떤 백일장에 불려가서 고등학생들의 산문을 읽어본 적이 있어요. 다른 심사위원들도 그렇게 느꼈겠지만, 제가 그날 100편이 넘는 산문을 읽었는데 참 기가 막히더군요. 고등학생들의 글이 아니라 대여섯살짜리 유아들의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장에 나타나 있는 정신적 성숙도라는 게 말할 수 없이 낮았어요. 제가 요즘 그 또래의 아이들을 가까이서 접촉할 일이 없기 때문에 더 놀랐는지 모르겠어요. 고등학생이라면 사회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이 나타나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날 백일장 제목이 ‘집’이었으니까 가령 용산에서 집을 강제로 철거당하고 불에 타 죽은 사람들에 관한 언급이 조금은 있을 법도 한데, 하나도 없어요. 그 대신 자기 주변 가족이나 친구들에 국한된 별 의미도 없는 얘기를 피상적으로 늘어놓는 게 거의 전부였어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이건 아이들이 우리한테 복수하는 거다. “그래 당신들이 우리들을 이렇게 바보가 되도록 키웠으니까 우리가 바보가 될게.” 그런 메시지가 학생들의 산문에서 읽혔어요.(웃음)
물론 모든 문제를 기본소득으로 다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어떻든 지금처럼 대학 안 가면 안된다는 광적인 집착에서 많은 사람들이 해방될 것은 틀림없어요. 그러면 아이들 생활도 저절로 밝아지고 건강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되는 거죠.
작은 정부의 실현
교육문제뿐만 아닙니다. 기본소득을 가지고 중요한 사회정책을 위한 수단으로 쓸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말썽 많은 세종시문제만 해도 그래요. 원래 노무현 정부가 세종시를 들고 나온 것은 수도권 인구과밀 현상을 해소하고 이른바 국토 균형발전을 위해서라는 거잖아요. 그래서 원래는 수도 자체를 옮긴다는 계획이었는데, 그게 헌법재판소에 의해서 제동이 걸리니까 중앙행정기관들을 옮기는 쪽으로 변경한 거 아니에요? 그런데 청와대와 국회까지 다 같이 옮긴다면 모를까 핵심부분은 빼고 중앙관서들을 옮겨 가면, 문제가 많을 것은 당연하죠. 그걸 부정하는 것은 억지예요. 세종시계획의 원안을 반대하면 국토의 균형발전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합리적인 태도가 아니죠. 세종시를 행정도시로 개발한다면 그냥 수도권만 확장하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요.
그런데 수도권 과밀인구를 해소하는 아주 간단하고도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국적으로 기본소득을 시행하면서 수도권 주민들에게는 5년이나 10년 정도 기본소득 지급을 보류하는 정책을 실시하면 돼요. 그러면 수도권 사람들이 대규모로 지방으로 내려갈 게 틀림없어요. 얼마나 간단해요? 지금 사람들이 수도권에 몰려와서 사는 것은 여기가 좋아서가 아니잖아요. 고향에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모두들 서울 쪽으로 몰려온 거란 말이에요. 지금 귀농을 하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선뜻 결행을 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가족들의 생계문제와 아이들 교육문제예요. 그런 사람들이 기본소득이 실시되면 아마 제일 기뻐할 것 같아요.
기본소득제도가 도입되면 국가의 기능이 지나치게 강화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반대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이 제도가 실시된다면 기왕의 복지서비스들 중 상당수가 불필요한 것이 될 게 확실하니까요. 예를 들어, 지금 생활보호 대상자에게 주는 생계보조금제도 같은 게 그런 것이죠. 기본소득이 실시되면 생활보호 대상자를 정하기 위한 까다로운 선별작업이 전혀 필요없게 돼요. 그러면 공무원도 그만큼 줄어들게 되겠죠. 지금처럼 개인의 자존심을 다쳐가면서 가족관계나 수입상태를 일일이 조사하는 번거로운 일이 없어지니까 결과적으로 국가행정사무가 간편해지고, 관료기구가 축소될 수밖에 없는 거죠. 궁극적으로는 보건복지부가 필요없어질지 모릅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교육문제도 사실상 해결된다고 보면, 교육부도 폐지될지도 모르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중앙행정부서 대부분이 없어져도 돼요. 그냥 국민들의 통장에 매달 일정한 기본소득을 입금해주는 공무원 몇사람만 있으면 충분해요. 기본소득으로 국민들의 경제생활이 간단명료해질 것이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복잡한 관료조직이 있을 이유가 없는 거죠. 그렇게 되면 진짜로 작은 정부가 실현되는 거예요. 보수파들이 늘 주장하는 게 작은 정부인데, 기본소득제야말로 그걸 래디컬하게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책인 거죠.
재원?
농담처럼 들리죠? 너무나 간단하니까요. 너무나 간단한데 왜 이걸 못할까요? 생각하면 기가 차죠. 사람들이 잘못된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서 불필요하게 고생하면서 산다고 생각하면 더 기가 찹니다. 굳이 혁명을 일으킬 것도 없고, 그냥 기왕의 시스템에 약간의 변경만 가하면 모든 게 순조롭게 잘 돌아갈 텐데 말이에요. 기본소득제가 실현만 된다면 사회가 안정되고 평화로워질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들 개개인의 삶에도 엄청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게 확실합니다.
자, 그러면 기본소득 실시에 필요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되겠죠. 기본소득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이 증세(增稅)입니다. 이른바 부유세를 거둬서 재원을 확보한다는 생각을 하는 논자들도 있는 것 같아요. 아까 말씀드린 독일의 기본소득 운동가들은 새로운 세금을 만들 필요가 없고, 기왕의 세금구조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면 얼마든지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 관점에 상당히 공감하는 편입니다. 가령 소비세 같은 것은 과세 형평성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 것인데, 그것을 지금 철회하기는 어려우니까, 소비세로 거둬들인 세금을 기본소득이라는 형태로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죠. 그리고 또 정부가 세금을 얼마나 합리적으로 집행하는가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치가나 관료들의 부패도 큰 문제지만, 예를 들어,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4대강 공사에 퍼붓는 막대한 세금은 나중에라도 반드시 따져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사실 그런 규모의 돈이면 기본소득을 시작하는 데 충분한 금액이고, 기본소득은 당연히 일반 서민들의 구매력 증대에 기여하고, 그로 인한 국민경제 전체의 안정화 효과는 4대강 토목공사 따위와는 비교가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소득의 재원을 세금에서 찾는 것보다 더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대체로 국가가 돈을 마련하는 방법은 세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요.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과 국채를 발행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가가 화폐를 직접 발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국유재산을 매각하는 방법도 있고, 수수료 따위에서 생기는 국가수입도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논외로 하죠. 크게 보아 이 세가지가 국가의 수입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세금은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죠. 근대국가는 조세국가라고 할 만큼 국가가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돼왔으니까요. 실제로 또 근대국가의 존립명분이라고 할 수 있는 재분배 기능도 주로 세금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죠.
그 다음에 국채인데, 이건 좀 따져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는 흔히 국가가 국채를 남발하면 결국 그 이자부담이 국민에게 지워지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국채란 결국 빚이라는 뜻이죠. 그 빚은 물론 국채를 사들인 은행 혹은 투자자들에게 진 빚이죠.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국채란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가장 안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수익성이 높은 투자상품이겠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물어봐야 할 것은 국가가 돈이 필요하면 그냥 화폐를 발행하면 될 것이지 굳이 왜 국채라는 것을 발행해서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서, 그것도 이자를 물어야 하는 돈을 마련하느냐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의아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돈이 국가가 발행한 것이지 누가 발행한 것이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실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돈의 대부분은 국가가 발행한 게 아니고, 은행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서 조금 자세히 말씀드리죠.
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여러분, 실제로 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십니까? 물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폐와 동전은 한국은행에서 찍어내죠. 그런데 이 지폐와 동전이 전체 통화량 중에서 얼마나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세요? 요즘 우리가 직장에서 봉급을 현금으로 받는 일은 거의 없죠. 상인이나 기업들이 결제를 할 때도 현금을 주고받지 않습니다. 개인들도 그래요. 요즘은 밥 한끼, 차 한잔 사먹고도 대개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돈이라고 하는 건 대부분 우리가 만져서 실감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냥 종이 위에 찍혀진 숫자에 불과해요. 일반적으로 산업국가에서 이런 식으로 통용되는 돈이 전체 통화량의 97퍼센트 이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통계는 제가 못 봐서 모르겠습니다만, 별로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이게 전부 은행에서 만들어진 신용화폐라는 게 중요합니다.
신용화폐란 은행이 고객의 대출신청을 받아서 일정한 담보물을 근거로 언제까지 상환하겠다는 서약을 받고 돈을 빌려줌으로써 창조되는 돈입니다. 이게 은행의 신용창조 기능이라는 거고,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돈이 이 과정에서 새로 생겨나는 거죠. 왜냐하면 이때 은행이 빌려주는 돈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은행이 보관하고 있는 돈 중에서 일부를 꺼내어 대출하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 은행이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냥 대출받는 사람의 통장에 일정한 액수를 적어 넣어줄 뿐이죠. 그러면 그게 돈으로 통용되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니까 오늘날 화폐는 거의 전부 은행에서 대부받은 돈, 즉 빚입니다. 게다가 이자까지 붙는 빚이죠.
사실, 이런 얘기 대개 처음 들으실 거예요. 캐나다에서 누가 조사를 해봤는데, 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는 시민은, 경제학자까지 포함해서, 거의 없더랍니다. 99퍼센트가 실상을 모르고 있더라는 거예요. 조셉 슘페터라는 경제학자에 의하면, 1920년대까지 화폐시스템에 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경제학자들이 거의 없었다고 해요. 요즘 경제학 교과서에는 오늘날의 화폐가 은행에서 만들어진 부채라고 씌어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언급하고는 대부분 그냥 간단히 넘어가버려요. 그런 화폐시스템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과연 그게 자연스러운 것일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현대의 은행들이 이익을 취하는 주된 방법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대개 예금자의 돈을 보관해 있다가 그 돈을 다른 사람에게 대출해주는 금전 중개업이 은행의 주된 업무인 줄 알고 있죠. 그래서 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차액으로 생긴 수익이 은행의 수입원이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은행은 신용창조라는 이름으로 사실상의 화폐를 발행하고, 화폐발행에 따른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국가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한국은행권’이라는 지폐와 동전만이 화폐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화폐가 민간은행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게 오늘날의 화폐시스템입니다.
이렇게 민간은행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것은 ‘부분지급준비제도’라는 것 때문입니다. 부분준비제도라는 것은 고객이 맡긴 돈의 일부만을 은행이 보관해두고 나머지는 대출이 가능하도록 된 규칙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은행은 실제로 갖고 있지도 않은 돈을 대출할 수 있는 셈이죠. 그래서 케인즈도 부분준비제도란 “무(無)에서 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메커니즘”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민간은행들은 대개 3~10퍼센트 정도의 지급준비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해놓고 고객들에게 대출하도록 규칙이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준비금의 비율은 예금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일단 10퍼센트라고 가정하고 이 부분준비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잠시 보죠. A가 은행에 100만원을 예금합니다. 그 은행은 중앙은행에 준비금으로 10만원을 예치해놓습니다. 그러면 은행에 남아있는 돈 90만원은 대출이 가능합니다. 은행은 B에게 그 90만원을 융자하고, B는 자신의 거래상대자인 C에게 상품대금으로 그 돈을 지불합니다. 그러면 C의 계좌에 90만원이 입금되고, 그 은행은 중앙은행에 준비금으로 10퍼센트에 해당하는 9만원을 예치합니다. 은행은 나머지 81만원을 또다른 사람에게 대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고객들이 전부 동일한 은행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은행이라는 닫힌 회로 속에서 연쇄적으로 예금, 준비금, 대출, 예금, 준비금, 대출 … 과정이 반복되면서, 은행 전체로 볼 때 원래의 예금 100만원으로 900만원까지 새 돈을 만들어내는 게 가능합니다. 이렇게 거의 무(無)에서부터 많은 새로운 돈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전문용어로 통화승수(通貨乘數)라고 부르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이처럼 은행이 코도 안 풀고 만들어낸 돈이지만, 그것을 빌린 사람은 부채를 이자까지 붙여서 갚아야 합니다. 은행의 입장에서는 대출을 많이 할수록 이자수입이 많아져서 좋고, 만약 채무자가 돈을 갚지 못하면 담보로 잡은 토지나 주택이나 주식을 헐값으로 차지할 수 있게 되니까 아무 손해볼 게 없죠. 꿩 먹고 알 먹기죠. 게다가 최근 월스트리트 금융사고에서 보는 것처럼 은행이 크게 사고를 치면 구제금융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나서서 세금으로 손실을 메워줍니다.
“그건 사기처럼 들리는데요!”
그런데 이 부분준비제도에 의한 대출에 관련해서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있어요. 1969년에 미국 미네소타의 한 법정에서 다루어진 소송사건인데요. ‘몽고메리 제일은행 대(對) 댈리’ 사건이라고 알려진 이 재판은 제롬 댈리라는 변호사가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지 않아 담보물이 몰수처분을 받은 것에 항의하여 소송을 제기했던 것인데, 그의 주장은 원래 은행이 대출을 했을 때 자기에게 아무것도 빌려준 게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빌려준다고 할 때는 빌려주는 물건을 미리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은행은 이 돈을 실제로 갖고 있지 않았다는 거죠. 다만 1만몇천달러라는 숫자표기만을 했을 뿐이라는 거죠. 처음에 판사들은 이 변호사의 논리가 괴이하다고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증인석에 나온 그 은행의 행장이 “은행은 통상 대출금을 허공에서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표준적인 은행업무”라고 말하는 바람에 모두 놀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재판장은 격앙된 어조로 “그건 사기처럼 들리는데요!”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결국 재판은 댈리의 승리로 끝나고 법정은 은행의 담보물 몰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재판의 결과가 상급법원에서도 인정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은행들이 갖고 있는 모든 담보물, 채권, 채무관계가 전부 무효가 되고, 은행에서 대출받은 모든 사람은 돈을 갚을 필요가 없어지고, 부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겠죠. 다시 말해서 현행 금융시스템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거죠. 우연인지 모르지만, 그 판결을 내린 판사는 그 후 6개월 만에 의문의 사고를 당해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부채로서의 돈과 그 압력
민간은행이 부분준비제도에 근거해서 이렇게 별 제약 없이 돈을 만들어내어 끊임없이 이자수입을 챙기면 은행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폐해를 끼칩니다. 은행 돈은 기본적으로 부채인데다가 이자가 붙는 돈이에요. 그러니까 대출을 받은 사람은 원금에다가 이자를 붙여서 상환하지 않으면 안되죠. 그런데 은행이 대출을 해줄 때 그 대출금 속에는 원금만 있지 이자는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회 속에 유통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통화는 원래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으로만 구성돼 있지 이자분에 해당하는 돈은 없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이자를 물기 위해서는 다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도리밖에 없어요. 그러면 필연적으로 부채는 점점 증가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회 전체가 빚에 허덕이게 되는 거죠.
빚에서 헤어나기 위해서 개인은 개인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악전고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자를 갚기 위해서 은행에서 다시 대출을 받는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역시 다음에 갚을 때 필요한 이자는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빚을 청산하려면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돈을 뺏는 수밖에 없어요. 마치 의자는 다섯개밖에 없는데 열명의 아이들이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려면 서로 뺏고 뺏기는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그렇게 해서 세상은 자연히 약육강식의 치열한 경쟁의 장으로 변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기업은 최대한 상품가격을 올리고 종업원을 줄이는 따위 소위 경영합리화와 구조조정에 몰두하고, 개인은 소득향상을 위한 피나는 투쟁을 전개하게 마련입니다. 내 자신이 개인적으로 은행 돈을 대출받은 적이 없다고 해서 여기서 예외가 되는 건 아닙니다. 이미 우리 모두가 생활을 위해서 사용하는 모든 물건과 서비스에 이미 은행 돈이 가하는 압력이 반영돼 있으니까요. 어떤 통계를 보니까 오늘날 산업국가에서 물가의 약 30퍼센트가 이자분(利子分)이라고 합니다. 이자란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 압력 때문에 계속적인 경제성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돈이 많아지는 만큼 빚이 많아지고, 그것은 결국 경제규모가 커진다는 뜻이지만, 이 경제가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꾸만 더 확대되고 팽창할 수밖에 없는 거죠. 한정된 경제규모 안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착취함으로써 은행 빚을 갚을 수 있겠지만, 일정한 한도를 넘으면 흔히 다음 세대의 몫까지 미리 끌어당겨서 쓰는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환경오염과 환경파괴를 수반하는 경제개발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경제개발이란, 간단히 말해서, 미래세대에 대한 착취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나 은행 돈 상환압력은 사회적 약자나 자연을 착취하는 것으로도 벗어나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수출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수출을 통해서 획득하는 외화는 따지고 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은행 빚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역흑자라는 것도 결국은 다른 나라의 사회적 약자와 자연에 대한 간접적인 착취의 결과인 셈이죠.
그러다가 이것도 저것도 순조롭게 되지 않으면 마침내 전쟁입니다. 알고 보면, 근대 이후 거의 모든 전쟁은 근본적으로 금융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클리포드 더글러스가 쓴 글 중에 〈전쟁의 원인〉이라는 글이 있는데, 거기에서도 바로 그 점이 명확히 지적돼 있어요.
더글러스의 이런 관점은 예외가 아닙니다. 전쟁의 원인이 화폐시스템 혹은 금융제도의 구조적 결함에 있다고 본 사람은 그동안 많이 있었고, 현재도 많이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주류 경제학에 의해서 늘 외면당하고, 무시당해왔을 뿐이죠.
특히 1920~1930년대에 그런 비주류 경제사상가들이 많이 출현했던 것 같아요. 그때가 대공황 시기였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죠. 대공황은 주류 고전파 경제학들에 의해서는 해명이 불가능한 미스터리였거든요. 대공황 직전 경기는 대호황이었습니다. 이른바 광란의 20년대라고 부르는 시기였죠.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이 저금리 정책을 썼기 때문에 돈이 넘쳐났고, 싼 돈을 빌려서 사람들은 부동산, 주식 따위에 투자함으로써 일확천금을 노리던 시대였죠. 실제로 벼락부자들도 많이 생겼어요.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이 바로 이 시기였으니까요.
또, 피라미드 판매방식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폰지 방식’이라는 게 이 시대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원래 찰스 폰지라는 이태리계 미국인이 당시 통용되던 ‘국제우편 반신 쿠폰’의 허점을 이용하면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을 한 뒤에 투기꾼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해놓고는 결국은 사기를 친 사건입니다. 폰지는 단시일에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과장광고를 냈고, 이것을 본 투기꾼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자 원래 계획했던 쿠폰사업은 젖혀두고 그냥 신참 가입자의 돈으로 앞선 가입자에게 이익금을 분배하는 식으로 사기행각을 계속하다가 결국은 발각되어 쇠고랑을 찼습니다. 이 사건은 폰지라는 개인보다도 그 시대를 잘 드러내는 사건이죠. 투기열풍으로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시대였습니다. 주식시장의 활황도 근본적으로는 폰지와 똑같은 방식의 사기수법으로 부풀려진 거품이었습니다. 이런 거품을 조장한 근본적인 책임은 결국 은행에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대출조건을 완화하고 이자율을 낮춰서 사람들이 뭐든 저당 잡히고 투기에 열중하도록 만든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연방준비은행이 국채를 공개시장에서 팔기 시작하고, 대출 준비금을 줄임으로써 통화량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금리가 올라가고, 대출이 어려워지고, 돈이 귀해지는 건 당연하죠. 주식시장이 가라앉고 투자자들은 조금이라도 건지겠다고 너도나도 주식투매에 나서면서 하룻밤에 주식시장이 붕괴된 거죠. 그게 공황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은행에서 저금을 빼내오고, 은행은 은행대로 대출금 회수에 나서면서 통화량이 대폭 감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29년에서 1933년 동안 통화량이 1/3로 줄었다고 합니다. 돈이 고갈되니 상품이 팔리지 않고, 기업은 생산을 중단하거나 축소할 수밖에 없고,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는 소득이 없고, 소득이 없으니 구매력이 없고, 그래서 다시 상품이 팔리지 않고 재고만 쌓이는,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죠.
공황이라고 해서 농사가 안되고, 공장의 생산능력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농사가 잘되었는데도 판로가 없어서 농민들은 수확물을 썩어가도록 버려두어야 하고, 공장에서는 상품이 팔리지 않으니까 멀쩡한 기계들이 녹스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거죠. 풍성한 수확물이 있고, 생산능력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 공황입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당시로서는 거의 혁명적인 참신한 논리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케인즈였죠. 내핍으로 재정균형을 맞추려 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돈을 풀어서 유효수요를 창출하면 공황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게 그 이론이죠. 그 이후 케인즈의 이론은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으로 구현되었고요. 흔히 뉴딜정책이 아니라 2차대전을 통해서 비로소 공황탈출이 가능했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따져보면 케인즈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사적 목적이기는 하지만, 하여튼 공공지출에 의한 대대적인 수요창출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케인즈도 정부의 재정지출을 위하여 돈을 빌려오면 된다, 즉 적자재정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정부가 바로 돈을 발행하면 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은행에서 대출한 부채로서의 화폐라는 기왕의 금융시스템 자체를 건드리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오늘날 화폐시스템의 발본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케인즈의 결정적인 한계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케인즈의 이론으로는 궁극적으로 전쟁을 방지할 수도, 파멸적인 경제성장을 막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화폐주권과 민주주의
화폐발행의 주체는 원래 국가 혹은 주권자입니다. 서양말로 화폐발행으로 인한 이익을 ‘시뇨리지’라고 하는데, 그 말의 어원은 군주(君主)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옛날에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그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가 금속화폐를 주조하거나 지폐를 찍어내어 자신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 내에서 유통시켰습니다. 지폐는 중국에서 처음 시작됐다고 하죠. 송나라 때 황제가 지폐에 자신의 옥쇄를 찍어서 돌린 게 지폐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 후 몽고의 쿠빌라이도 지폐를 대량으로 발행하여 썼습니다. 중국의 황제나 몽고의 지배자들은 지폐를 발행하는 데 아무 제약을 느끼지 않았고, 그 지폐는 훌륭한 교환수단으로 통용됐습니다. 서양에서도 중세까지는 화폐발행은 군주의 소관이었습니다. 가령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 여왕 시대는 안정과 번영을 누리면서 영국이 유럽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던 시기였는데, 그 안정과 번영의 토대는 기본적으로 국왕이 화폐발행권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유력한 해석이 있습니다. 국왕이 직접 발행하는 화폐이기 때문에 그것은 국가의 부채가 아니고, 이자를 물 필요도 없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만들어 쓰면 되는 거죠. 그 전에는 화폐발행은 금장(金匠) 혹은 환전상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고 국가는 그들에게 이자를 물고 돈을 빌려다 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694년에 최초의 근대식 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면서 국가의 화폐발행 권리가 민간금융업자의 손으로 넘어가버립니다.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윌리엄3세가 프랑스 왕과 전쟁을 하면서 전비를 마련키 위해서 금융업자들에게 돈을 빌리려고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훌륭한 선례가 있었는데도, 정치가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17세기의 영국사회에서 화폐에 대한 주도권은 민간금융업자들에게 도로 넘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런던의 금융업자들은 국왕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에 ‘부분준비제’에 의한 화폐발행권을 국왕이 정식으로 인가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 요청이 수락됐습니다. 이게 근대식 은행의 출발입니다. 그 이후 국가는 돈이 필요할 때는 국채를 발행하거나 하여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쓰는 관행이 제도적으로 구축된 거죠.
민간금융업자들의 사익 추구 기관이면서도 ‘잉글랜드은행’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것도 다분히 계산된 작명이라고 할 수 있죠. 마치 국가기관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죠. 우여곡절 끝에 1913년에 설립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마찬가집니다. 누구라도 명칭만 들으면 국가기관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엄밀히 말해서 미국의 이 중앙은행은 민간은행입니다. 그것도 아주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은 민간조직입니다. 비록 의장을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그것은 형식일 뿐이죠.
‘잉글랜드은행’은 1946년에 국립은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연준(FRB)은 여전히 민간은행입니다. 하여튼 이 두 선구적인 근대식 은행은 그 후 세계 전역의 각국 중앙은행의 모델이 되었고, ‘부분준비제’에 의한 은행의 신용창조 방식은 별로 큰 저항에 부닥치지 않고 금융의 기본적인 관행으로 굳어져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행일 뿐이지,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할 내적 필연성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중요한 사실이에요.
물론 지금과 같이 민간은행에 의한 신용화폐 발행이 국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하는 방법보다 시장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더 바람직하다고 보는 논리가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역사적 선례를 돌아보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역사를 한번 보죠. 어떤 의미에서, 미국의 역사는 두개의 대조적인 세계관이 건국 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대립하고, 경쟁하며 싸워온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쪽은 초대 정부의 재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이 대변하는 흐름이고, 다른 한쪽은 초대 국무장관이자 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이 대변하는 흐름이죠. 해밀턴은 원래 성공한 상인 출신으로, 독립전쟁 당시는 조지 워싱턴의 보좌관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을 대토지소유자, 상공인, 금융가들이 주도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산업국으로 발전시킬 복안을 가지고, 금융제도도 영국의 선례에 따를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제1합중국은행’이라는 실질적인 중앙은행 설립을 주도했죠. 그러나 제퍼슨은 기본적으로 독립자영농민과 소상공인, 서민들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분권, 민주주의의 신봉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근대식 금융제도가 기득권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반민주적 제도임을 꿰뚫어 보고, 그 제도를 통해서 화폐발행권이 민간금융업자들에게 넘어가면 사실상 나라의 주권이 뺏긴다고 주장했습니다.
공공화폐 혹은 정부지폐의 경험
제퍼슨이 그렇게 근대식 은행에 대해 완강히 반대한 것은 독립전쟁 이전 식민지시대의 경험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즉, 식민지에서는 영국 돈이 아니라 식민지에서만 통용되는 지폐, 즉 독자적인 지역화폐를 만들어 썼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회고록에 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국 여행 중에 프랭클린은 당시 본국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식민지의 경제가 안정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영국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그것은 식민지의 독자 통화 덕분이라고 말했다는 거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식민지의 지역화폐는 은행업자들에게 빚진 돈이 아니기 때문이죠. 프랭클린의 이 발언을 접한 ‘잉글랜드은행’ 측은 국왕과 의회를 설득하여 식민지에서의 독자적 통화 발행과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그 결과, 단시일 내에 식민지의 경제상황은 다시 음울해지고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프랭클린은 미국 독립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바로 이 화폐문제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이 발행한 ‘그린백’이라는 화폐도 주목할만합니다. 링컨이 전쟁수행을 위해서 국제금융가들에게 돈을 빌리려고 하자 그들은 연리 30퍼센트 이상으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링컨의 약점을 노리고 큰 이익을 노린 거죠. 너무 비싼 대부조건 때문에 고민 중이던 링컨에게 그의 친구 한사람이 그러지 말고 정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할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간단하죠? 아무도 그것을 미처 생각 못했다는 게 이상한 일이죠. 그래서 미국정부가 직접 만든 화폐가 ‘그린백’입니다. 뒷면을 녹색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그린백이라는 거죠. 이 그린백 지폐로 군수물자를 구입하고, 군인들과 공무원들의 봉급도 지급하면서 링컨은 남북전쟁을 훌륭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대통령에 재선된 지 얼마 안되어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아직까지 그 암살의 배후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린백’을 발행한 것과 링컨의 죽음 사이에 연관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린백 지폐 발행 당시 영국 신문 〈런던타임즈〉(1865)에 이런 논평기사가 실렸기 때문입니다.
북아메리카에 기원을 둔 이 악질적인 금융정책이 만약 관행으로 굳어진다면, 그 정부는 자신의 돈을 아무 비용 없이 공급하게 것이다. 그리하여 부채를 청산하고, 이제부터는 부채 없이 지낼 것이다. 앞으로 그들은 상거래에 필요한 돈을 충분히 갖게 될 것이고, 세계 역사상 전례 없는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계 각처에서 두뇌와 부가 북아메리카로 모여들게 될 것이다. 이 나라는 파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상의 모든 군주국이 파괴될 것이다.
이 기사가 재미있는 것은 금융업자들이 정부화폐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부화폐가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사실 때문에 정부화폐를 좌절시켜야 한다는 논리죠. 정부화폐를 허용하면 금융업자 자신들과 기득권 세력이 망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한 셈이죠.
그린백 지폐는 링컨의 죽음과 동시에 더이상의 발행이 금지되었지만, 그 전에 발행된 지폐는 상당히 오랫동안 유효하게 사용되어 20세기 전반까지 일부에서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링컨 사후에도 이 그린백 화폐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은 풀뿌리 민주주의 사회운동가들 사이에서 끈질기게 계속되어, 한때는 ‘그린백당’이라는 이름으로 꽤 정치세력화까지 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화폐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부화폐의 전범은 이 ‘그린백’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론보다 실천적 경험이에요. 미국의 식민지시대나 남북전쟁 때의 경험을 보면, 공동체나 정부가 직접 발행하는 화폐시스템에 어떠한 내재적인 결함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두 경우 모두 외부적인 압력이나 공작에 의해서 좌절된 것일 뿐이죠. 민간은행이 하던 화폐발행이 정부의 손으로 넘어가면 무책임한 정치가들에 의해서 화폐발행이 남발되고, 그 결과로 심한 인플레 상황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지금처럼 시민들에 의한 아무런 감시도 통제도 받지 않고 어디까지나 금융업자들의 이해관계가 우선적일 수밖에 없는 통화시스템에 비하면, 정부화폐 발행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늘 민주적인 감시와 통제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화폐를 발행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면 ‘부분준비제도’에 근거한 민간은행의 신용화폐 발행은 당연히 사라지게 됩니다. 법으로 금지할 필요도 없죠. 정부화폐를 발행하여 무이자로 유통시키면 민간은행에서 이자가 붙는 돈을 빌리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죠. 그러면 통화량이 막대하게 줄어들겠죠. 그러나 국가의 기간사업이나 교육, 의료, 문화, 예술분야에 공공기금으로 정부화폐가 투입되면 전체적으로 통화량은 넉넉해질 게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정부화폐로써 국민 각자에게 ‘기본소득’을 정기적으로 지급하면 통화량 부족은 완전히 해소됩니다. 그렇다고 인플레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글러스는 ‘국가신용국’의 설립을 통하여 통화량에 대한 모니터링을 계속할 것을 제안하고 있지만, 그것은 중앙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별도로 새 기구를 만들 필요도 없죠. 그래서 만약 통화량이 너무 많다 싶으면 정부가 세금 혹은 다른 정책으로 넘쳐나는 돈을 거둬들이면 되는 일이고요.
사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허황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기본소득이나 화폐시스템 개혁의 문제는 더이상 미뤄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계속적인 경제성장 없이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제안된 방책 중에서는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고용상황은 악화되었으면 되었지 나아질 가망은 없습니다. 정치가들은 일자리 만들기를 늘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전혀 믿을 게 못됩니다. 이미 세계 전체적으로 만성화된 과잉생산문제는 산업발전에 따른 구조적 현상이기 때문에 새로운 고용의 기회는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기계화, 자동화로 인한 ‘노동의 종말’을 예견한 제레미 리프킨의 미래는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의 현실입니다. 조만간 인류의 1/4의 노동력으로 인류 전체에게 필요한 물자와 서비스의 생산은 가능하다는 연구도 나와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실업자인 셈이죠. 그러므로 노동 혹은 고용을 통한 소득이라는 낡은 관념에 매달려 있다가는 전면적인 파탄에 봉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위기상황에 대한 출구로서 가장 합리적인 게 기본소득 혹은 시민배당이라는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물론 그것은 정부화폐 혹은 지자체에 의한 공공화폐 발행을 통한 배당이라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령 세금이라든지 국채발행이라든지 하는 방법으로는 계속적인 경제성장을 불가피하게 강요하는 결과가 될 것이니까요.
선거와 지역화폐
오늘 별로 아는 것도 없이 장황하게 얘기를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지는 간단합니다. 결국 통화제도의 발본적인 개혁과 기본소득 지급에 의한 ‘배당경제학’의 실현이라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방책이, 설령 많은 시민들의 공감을 얻는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가까운 시일 안에 실현되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기득권 구조가 워낙 강고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포기할 수는 없죠. 무슨 방도를 찾아야죠.
그래서 다시 선거 얘기로 돌아갑니다. 사실 저는 예전에는 투표는 빠짐없이 하지만, 선거결과에 대해서 별로 기대를 한 적이 없는데, 이번에 지방선거를 보면서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어요. 아, 선거라는 것을 잘 활용만 한다면 뭐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지방선거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배당경제학’의 실현은 먼저 지역 차원에서 시도해볼 필요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선거를 활용하는 방법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국가 차원에서 단번에 해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어쩌면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역이라는 토대를 먼저 견고히 하는 노력이죠. 또, 그 방법만이 오늘날의 국가·자본권력의 압력에 대항하여 자립과 독립성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 풀뿌리 차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함께 학습을 하여, 다음 지방선거에서는 이 배당경제학을 주요 선거이슈로 부각시킨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번에 무상급식에 대해서 시민들의 공감을 얻어낸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하면, 지자체의 시장이나 의회에 진출하는 후보들이 지역화폐 발행과 기본소득 지급을 경쟁적으로 공약하고 실천하는 상황이 전개될지도 모르니까요. 어떻습니까?
결국 지역화폐로 시작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의 화폐와 병존하는 지역화폐를 각 지역의 사정에 맞게 만들어 그 지역 내에서만 통용되게 하자는 거죠. 물론 지금도 세계 각처에서도, 그리고 소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지역화폐를 열심히 실행하고 있는 지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레츠(LETS)형태입니다. ‘레츠’는 물론 공동체적 친밀성을 장려한다는 점에서 좋은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참가자의 규모가 작을뿐더러 물건을 구매하거나 서비스를 제공받을 때마다 일일이 사무소에 보고를 하거나 기록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 등으로 아무래도 협소성을 면할 수가 없어요. 그런 점 때문에 확산되기가 쉽지 않고, 또 경제생활 전체에서 ‘레츠’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게 어려운 게 아닌가 싶어요.
지역화폐운동도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 모델을 참고로 할 수 있지만, 아까 말씀드린 정부화폐와 기본적으로 같은 성질을 가진 지역화폐로서 대표적인 게 1932년에 오스트리아의 소도시 뵈르글에서 시행됐던 지역화폐입니다. 그 무렵 대공황의 여파로 이 소도시에도 경제상황이 말할 수 없이 저조했다고 합니다. 인구 5,000명 정도의 도시에 1,500명 이상이 실업자였다고 하니 심각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그 도시의 시장이 미하엘 운터구겐베르거라는 사람이었는데, 이분이 현명한 사람이었어요. 오스트리아 중앙은행이 발행한 돈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기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그는 시의회의 승인을 얻어서 ‘노동증명서’라는 이름의 그 지역에 국한해서 통용될 수 있는 지폐를 만들었습니다. 시장과 시의회가 보증하고, 그것으로 공무원의 봉급도 지불하고, 그것으로 세금납부도 가능하게 되니까 당연히 그 증서는 당당한 화폐기능을 하게 된 거죠. 화폐란 별게 아니거든요. 하찮은 나무토막, 조개껍질이라도 그것을 공동체에서 화폐로 인정하면 화폐기능을 하게 되는 거죠. 화폐 본연의 기능, 즉 교환수단으로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를 떠나 그것을 축적수단으로 삼을 때 온갖 비극과 재난이 일어나는 거죠. 뵈르글의 시장이 고안한 것은 철저히 교환수단으로서만 기능을 하는 화폐였습니다. 그것도 가급적 빨리 순환하게 하는 화폐였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뵈르글의 이 노동증서는 매달 초에 액면가의 1퍼센트에 해당되는 공용스탬프를 증서의 뒷면에 첨부하지 않으면 무효가 되게 고안해놓았던 거죠. 재미있는 아이디어죠? 그러니까 증서를 갖고 있으면 있을수록 손해가 되게 되니까 사람들은 서둘러 이 증서를 사용했고, 그 결과 기존의 은행권보다도 5배 이상의 속도로 빠르게 순환되었다는 거예요. 교환수단으로서 화페가 제 기능을 하자면 화폐량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순환하는 속도도 중요합니다. 장롱 안에 돈을 넣어두고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게 아니라 경제를 죽여버리죠. 아무튼 그래서 단기간에 뵈르글의 경제는 활기를 띠고, 실업자가 사라지고, 붕괴된 다리와 도로와 공공건물이 말끔히 수리되고, 전체적으로 도시가 밝은 기운을 되찾게 되었다는 거예요. 소문이 나자 수십개의 인근 도시들도 이 방식을 모방하려는 시도를 하고, 심지어 프랑스 수상까지 와서 견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오스트리아 중앙은행이 개입을 해서는 화폐발행은 중앙은행의 독점적 권리라고 주장하면서 국가의 명령으로 금지시켰어요. 그 바람에 1년 넘게 성공적으로 계속된 뵈르글의 이 창조적인 실험이 중지돼버렸어요.
뵈르글의 경우에도 이 지역의 독자적인 공공화페가 내적인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해서 좌절돼버렸습니다. 자주적인 정부화폐나 공공화폐가 늘 이렇게 외부의 기득권 세력의 개입에 의해서 좌절된다고 해서 이러한 시도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죠. 끊임없이 기득권 세력이 개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이 운동이 세계 전체의 민초들의 이익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죠. 저는 이 지역화폐 혹은 공공화폐 운동의 성공여부는 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현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껍데기 민주주의이기 쉽습니다.
교환시스템, 문명생활의 기초
오늘 돈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 것 같군요. 그러나 돈문제는 결코 회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좋은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는 환상이 하나 있는데, 뭐냐면 돈 없이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증여경제라든가 품앗이라든가 그런 것에 관해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저도 한때 그랬어요. 그러나 화폐가 없이 문명사회가 성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찾아보니까 문명생활을 했던 사회로서 화폐가 없었던 사회가 유일하게 하나 있는데, 잉카제국이에요. 여러분,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아시죠? 거기 보면 이 이야기가 나와요.
《유토피아》가 나온 게 1516년이니까 이미 그 무렵에는 신대륙 아메리카를 여행하고 돌아온 유럽인들이 쓴 기행문들이 많이 출판돼 있었어요. 토마스 모어는 그런 여행기들을 읽다가 《유토피아》를 구상한 것입니다. 흔히 《유토피아》를 일종의 가상의 공산사회를 그린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엄연히 살아있는 모델이 있었고, 그게 바로 잉카였습니다.
잉카제국에는 화폐가 없었다고 해요. 그러나 그 대신, 다른 사회라면 화폐가 수행했을 역할을 한 게 따로 있었어요. 그게 잉카의 도시마다 마을마다 있는 공동물품저장고였습니다. 주민들은 농사면 농사, 수공업이면 수공업에 종사하면서 자기가 생산한 물건을 공동저장고로 가지고 가서 거기에 쌓아놓습니다. 그러고는 생활하면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그 저장고로 가서 자기가 쓸 만큼 자유로이 가져다 씁니다. 늘 있는 공동재산이니까 필요한 것 이상으로 가져올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불안 없이 잉카사람들은 살았습니다. 그런 삶을 보증한 공동물품저장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명사회에서 시장과 화폐가 하는 기능을 수행한 셈이죠. 화폐를 쓰지 않는 문명생활을 하려면 적어도 이러한 공동저장고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대일의 물물교환 수준으로는 문명생활이 성립 가능하지 않습니다.
화폐는 우리 생활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혼자 고립해서 살 수 없고,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교환시스템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교환시스템이 과연 지속가능한 것이며,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화폐시스템은 꼭 극복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