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자리 없는 공익
여기 또하나의 자유무역협정(FTA)이 있다. 한―유럽연합FTA(한유FTA)이다. 그 안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골목시장, 여행사, 미용실, 폐수처리장, 삼겹살, 광우병, 자동차 범퍼, 전기담요가 들어있다. 협정 조항들에는 우체국에 근무하는 공익요원까지도 등장한다. 그런데 그 안에 ‘농약’이라는 말은 없다. ‘농약’ 대신에 ‘식물보호제품’이 들어있다. 그래서 공무원이나 시민들이 협정문을 읽어보면서, ‘식품보호제품’ 회사들이 한국에 제품을 출시할 경우, 한국정부는 그것을 판매 허가하기까지 사용한 시간만큼 그 특허권의 존속 기간을 늘려주도록 한 조항(10.35조)과 마주치더라도 저항감이 들지 않는다. 그 조항이 농약회사의 독점 판매수익을 위한 것인 줄 사람들이 알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한유FTA를, ‘농약을 농약이라 부르지 않는 FTA’라고 부른다.
한유FTA는 농약으로 인한 환경파괴와 건강 위해의 위험에 대한 걱정보다 이렇게 농약회사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농약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 환경보전을 위한 여러가지 정부의 공공정책이 그 과녁에 올려져 있다. 한유FTA의 세계에서는 한국정부는 유럽의 전기담요 제조회사에게 안전인증을 요구하는 일조차 어렵게 된다. 해당 전기담요가 안전하다는 유럽 전기담요 제조회사 자체의 ‘적합성 선언’ 대신 국가의 인증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회사들이 제시한 적합성 선언이 “인간의 건강과 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증명”부터 해내야 한다.
한국에서 자동차 범퍼의 충격흡수 안전기준을 새로 만들 필요가 있더라도, 만일 그런 기준을 유럽(유엔유럽이사회)이 곧 만들 예정인 경우에는 한국은 ‘자제’해야만 한다. 유럽산 자동차를 ‘리콜’하기 위해서는 한국은 그 조치를 취하기 전에 먼저 “객관적이고, 논증되며, 충분히 자세한” 설명을 유럽 자동차회사에 통지해야만 한다. 한국에서 유럽산 쇠고기에 대해 광우병 검역을 하고자 할 경우에도(광우병의 최초 발생지가 유럽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유럽이 제공한 정보에 ‘근거’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공공질서’를 위하여 유럽 ‘회사’의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것도 “사회의 근본적인 이익에 대하여 진정하고, 충분히 심각한 위협이 제기되는 때”에만 할 수 있다.(7.50조) 외환위기가 발생해서 외환이 빠져나가는 것을 제한하는 경우에도 6개월 동안만 할 수 있으며, 만약 그 기간을 연장하려고 한다면 사전에 유럽과 ‘조율’을 해야 한다. 국가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농업에 조성된 중대한 장애
한유FTA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농업에 있다. 유럽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의 농업 강대국에 속한다. 이런 유럽과 우리가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쌀을 제외한 모든 식품이 무역의 대상으로 포함되게 되었다. 정부는 그러나 그 대신 높은 관세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고 농민들에게 해명해왔다. 한유FTA가 비극적 전환점이 되는 것은 그것으로 한국정부가 바로 그러한 약속을 배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관세율이 21퍼센트인 건포도의 경우 FTA 발효 즉시 관세는 없어져버린다. 관세율 27퍼센트인 냉장 오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관세가 폐지되면 유럽산 건포도와 냉장 오이의 국내 가격은 그만큼 대폭 싸게 된다. 콩기름용 콩은 관세율이 487퍼센트인데, 5년 후에는 관세가 없어진다. 유럽산 콩의 가격이 지금 국내에서 587원이라면, 5년 후에는 100원이 된다는 뜻이다. 지금 관세율 30퍼센트인 설탕저장처리 생강이나 조제저장처리 양파, 27퍼센트인 냉동 감자의 경우에도 5년 후에는 관세가 없어진다. 냉동 돼지 갈비살(관세율 25퍼센트), 냉동 돼지 다리고기(18퍼센트)도 마찬가지이다. 복숭아(45퍼센트), 단감(45퍼센트)도 10년 후에는 관세가 없다. 고추, 마늘, 양파, 콩나물 콩 등은 현행 관세를 유지하기로 했지만, 그렇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한유FTA 안에 이미 “추가적인 관세 철폐”를 위한 검토 일정이 잡혀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나마 WTO 아래에서는 ‘농업긴급수입제한관세’라고 해서, 특별히 농업에 대해서는 수입 피해를 줄일 여지를 남겨놓았었는데, 한유FTA로 이러한 보편적 구조와 완전히 이별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품목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앞으로 대략 15년 후에는 한국은 문제의 제도를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된다.
한유FTA는 이제 한국은 한국농업이 어렵다는 말을 더이상 대외적으로 하지 않겠다는 신호나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 최강의 농업 대국인 미국과 유럽에게 농업을 개방하면서,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들이나 중국이나 남미 나라들에게 한국의 농업이 매우 취약하다고 말하며 보호하려 드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위선이다. 만일 한국이 유럽과 미국과 중국과 모두 다 FTA를 체결한다고 하면 한국의 농업은 어떻게 될까? 일본의 2005년 연구에 의하면, 한국이 중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여 농산물의 관세를 철폐할 경우, 중국산 쌀 343만톤이 매년 한국에 수입되게 될 것이라고 한다.(스즈키 노부히로, 《FTA와 食料》) 2010년, 한국에서 생산된 쌀의 총량은 약 430만톤이었다.
한 나라가 자동차 몇대를 외국에 더 팔겠다고 자국 농업의 뿌리를 흔드는 일은 어리석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유럽사람들이 한국사람들의 밥상을 책임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아가 한유FTA에는 그 어디에도 유럽이 한국으로의 식량 수출을 무단으로 통제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조항조차 없다. 만약에 유럽에서 식량부족 사태가 발생하여 식량의 수출을 금지하려고 할 경우에는 단지 한국에게 30일 전에 통지하기만 하면 된다. ‘자유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있어도 유럽에서 식량 수출 통제가 생기면 한국은 속수무책이다.
FTA라는 불장난
유럽과 FTA를 체결한 칠레나 멕시코들은 높은 실업률과 무역 적자로 허덕이고 있다. 칠레의 실업률은 10퍼센트 가까이 된다. 멕시코는 미국(1992년)과 유럽연합(2000년), 일본(2005년)과 모두 FTA를 체결한 나라이다. 그러나 2009년까지 12년 연속으로 상품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급기야 2009년, 멕시코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470억달러를 빌려야만 했고, 다시 2011년 1월에 720억달러를 꾸어야 했다. 이 액수는 IMF 역사상 최고액이다.
사정이 이런데 왜 그들은 유럽과 미국 그리고 중국과 같은 거대 경제권과의 동시다발적 FTA를 자꾸 말하는 것일까? 나는 그 핵심에 한미FTA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럽연합과의 FTA에 대해서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국에 한미FTA 비준을 압박할 요소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한―유럽연합FTA였다”.(《김현종, 한미FTA를 말하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불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27개 나라로 구성된 유럽연합을 단지 미국을 끌어들이는 미끼로 이용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다. 오히려 유럽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은 한미FTA와 번갈아 가면서 한국의 코를 꿸 것이다. 한유FTA에서 유럽은, 미국은 참여하지 않은 유럽 자동차 기준(UNECE)을 한국에서 관철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또한 코냑, 샴페인, 스카치위스키 등에서 유럽 농업이 갖고 있는 강점인 ‘지리적 표시’를 하도록 강력히 관철하였다. 그래서 앞으로 한국의 세관은 그러한 유럽의 지리적 표시를 따르지 않는 술 제품은 통관을 금지시켜야 한다. 이것은 상표를 위조한 상품을 단속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우리나라 관료들은 5년간 한국 자동차의 유럽 수출이 약 10억달러 늘어날 것이라고 홍보하고 있지만, 한편 유럽연합은 한국산 자동차가 유럽에 더 많이 진입하는 사태를 막기 위하여 새로운 조치를 착착 마련해가고 있다. 올해 1월에 유럽 의회 통상위원회를 통과한 긴급수입제한조치 법안을 살펴보면, 유럽은 한국의 자동차 제조회사들이 외국산 부품을 사용하여 자동차를 제조한 경우에 돌려받게 되는 관세환급제도에까지 무단으로 손을 댔다. 제3국, 예컨대 중국산 라디오의 한국 수입 증가율이 그것을 부품으로 사용하여 제조한 한국산 자동차의 유럽 수출 증가율보다 10퍼센트 이상 클 경우에, 한국의 자동차회사들이 돌려받을 관세환급을 삭감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 근거는, 한국 자동차 제조회사들이 다른 나라의 라디오보다 중국산 라디오를 평균보다 과잉 사용했고, 그것으로 관세환급을 받아 이를 기화로 유럽에 자동차 수출을 늘렸기 때문에 관세환급을 막아야겠다는 것이다. 대단히 일방적 논리이다.
사실 애당초 유럽연합과의 FTA에서 관세환급을 대폭 억제하는 장치를 한국이 허락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이렇게 유럽은 한국과의 FTA에서 한국산 자동차의 유럽 진입을 경계하여, 한국의 자동차 제조회사가 자동차 부품에 대하여 관세환급을 받지 못하게 하는 독소 조항을 만들었는데, 유럽연합이 다른 나라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상대국의 관세환급제도에까지 침범한 것은 한국과의 FTA가 처음이다. 관세환급제도는 현재 세계무역기구(WTO)에서 허용하고 있는 국제적으로 적법한 제도이다. 한국의 수출 회사들이 매년 환급받고 있는 관세액은 연간 3조2,000억원이 넘고 있다.(2009년 기준) 그런데도 유럽 의회는 애초에 합의에 없던 조건을 일방적으로 정해버린 것이다.(참고로, 한유FTA 협정문은 유럽연합에서는 법률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그 자체는 법이 아니고, 따라서 어떠한 권리나 의무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실상 중요한 것은 유럽연합이 만들고 있는 ‘한유FTA 이행법’이다.) 이처럼 유럽연합은 미국을 유인할 낚싯밥이 결코 될 수 없다. 한유FTA, 한미FTA, 두개 자유무역협정은 한국에게 매우 위험하다. 이 둘을 다 막아야 한다.
시민과 농민이 손을 잡고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 농업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는 FTA를 체결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만이 대안이다. FTA는 수출 위주 대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내수경제와 농업에서 생긴다. 국가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경제의 탈락자들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국가의 지원이라는 것도 따져보면 탈락자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납부한 세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탈락자가 양산될 수밖에 없는 틀을 만드는 일부터 하지 않아야 한다. 시민이 자신들이 마실 물, 먹을 식품, 살 집, 받을 의료혜택 등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민주주의가 없는 사회에서 복지란 양의 탈을 쓰고 가해자가 또한번 피해자를 착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FTA체제하에서는 민주주의도, 진정한 복지도 불가능하다.
영화 〈올드 보이〉로 잘 알려진 배우 최민식은 2002년 스크린쿼터 사수운동을 하면서 농민들 앞에 큰절을 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농민들의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비단 최민식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너무 많은 한국사람들이 농민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FTA는 자신의 일상사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울시내 주택가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동네슈퍼마켓을 운영하던 시민들은, 재벌들의 동네슈퍼 진출을 적절하게 막아달라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FTA 위반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게 되자 이제 FTA에 반대하게 되었다. 거대 경제권과의 FTA체제는 더욱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구제역과 식품값 폭등이라는 사태 앞에서 우리 시민들은 넘칠 정도로 풍요로운 밥상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이제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농업과 지역을 유지하는 것이 도시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고 있다. 농촌과 도시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때에, 농약을 농약이라 부르지 않는 FTA를 막아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