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문화와 분단현실
2011년 1월 22일에서 23일 양일간에 걸쳐 ‘생명평화결사’ 새해 순례계획의 일환으로 연평도를 다녀왔다. 연평도 포격사건이 터진 지 두달 만이다. 한반도에 만연한 전면적인 생명위기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생명평화결사 회원들 간에 팽배해 있었다. 〈경향신문〉 1면에 우리의 의견을 담은 600만원짜리 광고를 낸 지 일주일 만에 광고모금이 완료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004년 3월 1일, 도법 스님을 단장으로 하는 생명평화순례단이 지리산 노고단에서 천제를 지낸 후 5년 동안 전국을 걸어다니며 생명평화세상의 도래를 선포하고 다녔으나 정권교체와 함께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이윽고 작년 말 실전에 버금가는 포격전과 광적인 살처분 그리고 아무리 얘기해도 듣지 않는 하천생태계 파괴행위를 보며 생명평화결사는 결연의 의지로 다시 순례에 나서기로 했다. 지난해 12월 중순 평화결사는 운영위원회를 열어, 현재의 반생명적인 사회분위기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먼저 ‘100일 순례’를 한 뒤, 일상 속에서 생명평화를 상시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100년 순례’를 도모하기로 결의했다. 연평도 순례는 그러한 장기적인 순례를 알리는 선포식이었던 셈이다. 첫 순례지를 굳이 연평도로 잡은 것은 현시점에서 생명위기와 평화위기를 알릴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제 3월 1일부터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제주 강정마을을 기점으로 100일 순례가 시작된다.
1월 22일 오전 10시 동인천 스페이스빔 건물 2층. 순례선포식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순례참여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미미한 홍보와 침체된 사회분위기 탓인지 모여든 인원은 겨우 30여명. 전날 주요 언론기관에 보도자료를 보냈음에도 현장에 온 언론사는 〈경향신문〉 사진기자 달랑 한명이었다. 아이돌 가수의 시시콜콜한 일상사가 연예란도 아닌 시사뉴스 톱에 실리는 언론계 현실에서, 헛된 기대는 건강을 해칠 뿐이다. 약 30분에 걸쳐 생명평화순례의 취지 설명과 성명서 낭독을 마치고 건물 앞 널따란 공터에서 참석자 전원이 동그랗게 둘러서서 순례 성공을 기원하는 3배를 올렸다. 인천의 인구밀집지역 안에 그렇게 넓은 공터가 있는 것이 참으로 희한했다. 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 이성수 수석의 설명에 의하면, 인천시에서 주거지역을 관통하여 길을 뚫으려고 토지를 수용하여 집들을 다 밀어냈으나 개발방식을 두고 주민들과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렇게 공지 상태로 있다는 것이다. 국가나 지자체의 원대한(?) 구상으로 인해 토착 지역주민의 생태환경이 일방적으로 변경되는 것은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마주치는 현상이다. 어찌 보면 연평도도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장소이다. 그곳은 대한민국 안보구상의 최전선으로 주민들의 일상적 삶은 언제 어떻게 변경될지 알 수 없다. 도심 재개발지구야 보상을 받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대대로 고기를 잡아 연명해온 연평도 주민들은 만약의 사태를 당하면 어디 갈 곳이 없다. 지금 연평도 주민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김포의 한 미분양 아파트에 임시로 머물러 있는데 사실 전쟁난민 신세나 다름이 없다.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5도는 사실상 ‘적진’에 붙어있는 섬들이다. 인천에서 가려면 뱃길로 3시간이나 걸리지만 연평도에서 가장 가까운 북녘땅은 12킬로미터밖에 안 떨어져 있다. 이 지리적 조건이 연평도 사건의 근본원인이다.
순례의 성공을 비는 3배를 올린 뒤 우리는 일렬을 지어 인천연안부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저마다 가슴에 순례자임을 알리는 ‘몸자보’를 부착했지만 거리의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우리사회가 낯선 풍경에 익숙해져 있거나 아니면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이다. 하긴 자동차가 주인노릇하는 시대에, 도심 아닌 곳의 인도를 걸어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한시간 남짓 부지런히 걸어 연안부두에 도착했고, 연평도 순례단원 17명이 대연평도행 쾌속선에 올랐다. 순례단원은 14살짜리 중학생에서 70대 할아버지까지 분포되어 있었다. 떠나온 집도 멀리 목포와 강릉에서 서울까지 정말 다양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미지의 장소로 떠나는 배에 올라타자 연평도 주민과 군인들이 골고루 섞여있는 배 속에서 금세 하나의 친밀한 공동체로 돌변하는 것이 신기했다. 점심으로 가져온 빵과 물을 나눠 먹으며 얘기꽃을 피우다 보니 어느새 배가 한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멀리 연평도가 보이는 지점에서 갑자기 속도가 늦춰진다. 창밖을 내다보니 앞에 마치 아이스크림을 부어놓은 것 같은 하얀 띠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유빙이다. 겨울에 연평도 가는 배가 늦어지는 것은 풍랑 외에 유빙도 큰 이유란다. 유빙 지역을 벗어나자 다시 배가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선내 대형 TV에서는 아이돌 가수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비춰졌다.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해병 청년들은 분명 아이돌 세대일진대 지금과 같은 남북대치상황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했다. 생각해봐야 답이 없으니 그저 복무기간이 지나가기나 바라고 있을까, 아니면 ‘북괴 침략자’들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올라 하시라도 전쟁이 터지기를 바랄까. 해병대는 자원해서 가는 것이므로 첫번째 생각을 갖고 있는 젊은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생목숨을 들이미는 전쟁을 환영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분단된 나라에 태어나 피할 수 없는 군복무이니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뽀대’나는 부대에서 군생활을 해보고 싶은 것이 아닐까. 힘든 군대생활을 통해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을 것이다. 정훈시간에 교육장교가 북한의 적화통일 의도에 대해 입이 닳도록 얘기하겠지만 오늘의 시대에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민족에 대한 뿌리 깊은 적개심과 불신만큼은 세대를 이어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젊은이들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지 않아도 인터넷에 들어가 그들의 댓글만 읽어봐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정말로 궁금한 것은 저들이 즐기는 아이돌문화가 2차 세계대전 때 서부전선에 투입된 연합군 젊은이들이 열광하던 할리우드문화와 동일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당시의 할리우드문화는 군인들의 지친 심성을 위로하는 달콤한 피로회복제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돌문화는 고도의 상업적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탈이념적 문화라는 점에서 젊은 군인들의 머릿속을 정치적으로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요소가 다분히 있다. 거기에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초감각주의, 허무주의가 깔려있어 젊은 군인들이 처해있는 현실과 대조가 된다. 저출산시대 마마보이의 증가로 인해 군대에서도 집에 있는 엄마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는 돌격명령을 함부로 내릴 수 없다는 자조 섞인 말이 들리는 기이한 세태에 말이다. 어찌 되었건 지금 연평도를 지키고 있는 젊은 군인들은 내가 군생활을 하던 시절의 군인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남북의 대치상황과 정치현실은 변화가 없다.
戰線의 모습
대연평도 부두에 내리니 연평도성당 김태헌 신부가 마중을 나와있다. 해질녘까지 시간이 많지 않아 짐을 매표소에 맡겨놓고 바로 신부님의 안내를 따라 도보순례에 나섰다. 섬 가장자리를 따라 한바퀴 도는 것인데 중간중간 잠시 머물며 걷다 보니 약 2시간이 걸렸다.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 것은 포격 이후 새로 갖다 놓았다는 MLRS다연장로켓포였다. 이는 북한의 방사포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한꺼번에 발사된 포탄이 공중에서 터져 축구장 3배 크기의 면적을 순식간에 초토화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무기 자체는 가공해 보이지만 해안절벽 구멍 속에 숨어있는 북한군에게 과연 타격이 될는지 의심스러웠다. 대략 도로변 따라 10문 정도 늘어선 것으로 보이는데 대당 가격이 57억원이나 된다고 하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치고는 너무 비싸지 않나 싶었다. 전문가들이 고심하여 배치한 것이니 아마추어가 뭐라 할 말은 아니지만 실질적 타격 효과가 적은 비싼 무기를 서둘러 배치한 데에는 다른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순간, 내년부터 동굴 속에 숨어있는 해안포대를 타격할 수 있는 무기체계를 도입하겠다는 뉴스가 올라온다. 긴 해안선을 따라 숨어있는 포대를 무력화시키려면 아마도 조(兆) 단위 무기 구입비가 들 것이다. 이런 뉴스를 들을 때마다 워싱턴에 있는 무기 로비스트들이 적국의 공격전술마저 조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지경이다. 실제로 남한의 무력은 북의 도발에 맞추어 지속적으로 확충되었는데 그 또한 미국의 경제적 필요와 기가 막히게 일치하고 있다. 다연장로켓포 로켓탄 하나가 현대 그랜저 수출가격과 비슷하다고 하니, 우리는 TV와 자동차를 팔아 죽어라고 돈을 벌어 미국 무기업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꼴이다.
연평도 서쪽 능선 꼭대기 해안절벽 위에 멋진 목조 전망대가 있다. 그 아래 해안선이 기암절벽인데다 바로 맞은편이 북한 땅인지라 안보관광코스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김 신부가 일행을 앞에 두고 해설하는 모습을 보며 최전선에서의 사목활동이 간단치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번 포격 때 포탄 하나가 성당 마당에 떨어져 성당에서 사용하는 승합차가 박살이 나고 사제관 유리창과 문이 부서져 현재 신부님은 한 신자 댁에 기거하고 있다고 한다. 육지에서 무수한 언론기자들이 들이닥쳐 포격사건을 취재해갔으나, 국가로부터의 보호와 피해보상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은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 신부는 이제는 아예 기자들이 묻더라도 불만사항에 대해서는 말을 않는다고 한다. 어떤 기자는 왜 이런 위험한 곳에 사느냐고 철없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는데, 김 신부는 만약 연평도에 일반 주민이 없다면 군인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지금보다 훨씬 심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나마 민간인이 군인들과 뒤섞여 있어 북의 무차별 공격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전망대 앞에 펼쳐진 바다는 원래 조선시대 이래로 유명한 어장이었다. 조기 하면 전라도 영광을 떠올리지만 사실 영광에서 잡히는 조기는 없다. 지금의 영광은 조기의 가공지일 뿐이다. 연평도야말로 우리나라 조기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작은 섬에 한창때는 3,000척의 어선이 몰려들었다 하니 가히 짐작이 간다. 한 주민에게 여쭈어보니 1968년 무렵에 갑자기 조기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조류(潮流)가 변해 그렇겠거니 하지만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단다. 비록 조기는 사라졌지만 연평 앞바다는 다양한 어종이 서식하는 천혜의 어장이다. 이즈음 가장 ‘짭잘’한 어종은 꽃게이다. 하지만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고기잡이란 늘 불안하기 마련이다. NLL문제로 남북 양쪽에서 고기잡이가 불가능해지자 그 틈을 노려 멀리 중국에서 온 어부들이 그 좋은 어장의 고기를 싹쓸이하고 있단다. 중국 어선들은 한번에 수백척씩 떼를 지어 몰려와서 촘촘한 그물로 바닥까지 훑어간다고 한다.
어장관리와 남북 긴장완화를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해 5도의 해역을 공동관리구역으로 설정하고 남북이 평화롭게 이용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빨갱이 소동에 그만 묻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이성적으로 따져봐야 할 사안이다. NLL(북방한계선)에 대해 네이버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1953년 7월 27일 이루어진 정전협정에서는 남·북한 간 육상경계선만 설정하고 해양경계선은 설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던 클라크가 정전협정 직후 북한과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설정하고 북한에 공식 통보도 하지 않은 해양의 한계선이다.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NLL’로도 부른다.”
당시에 전작권을 가지고 있었던 클라크는 우세한 해군력을 믿고 이승만 대통령이 계속 북쪽으로 밀고 올라갈 것을 두려워해 자의적으로 북방한계선을 그어 남측 해군에만 통보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선은 북측이 아니라 남측이 밀고 올라갈까 보아 임의적으로 정해놓은 선이다. 북측은 20년 동안 잠자코 있다가 1972년부터 갑자기 북방한계선은 자기네가 동의한 적이 없다며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서해 5도는 황해도에 거의 붙어있는 섬인지라 북측에서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점유자인 남쪽이 NLL 이남의 바다를 대한민국 영해로 간주하고 해상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비록 국제법적으로 모호한 점이 있더라도 관행적으로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북측은 1999년 제1 연평해전을 겪고 난 뒤인 2000년 3월 23일에 휴전선을 바다 쪽으로 연장한 선을 기준으로 그 이북을 북쪽 영해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서해 5도가 속해있는 바다는 ‘실질적으로는’ 남한의 영해이고, ‘심정적으로는’ 북한의 영해인 셈이다.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하고도 당당하게 뻗대는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다. 남측이 비록 연례행사라고는 하지만 연평도에서 서해바다를 향해 포사격연습을 했을 적에 북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네 영해에 포를 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늘 있던 일이지만 필요할 때 시비를 거는 것은 우리가 세무조사에서 자주 보아왔던 행태이다. 문제의 소지를 없애려면 서로 협의하에 선을 다시 그어야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북이 계속 치고빠지기식으로 무력도발을 감행하면 남은 어쩔 수 없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서해 5도에 엄청난 돈을 들여 무장력을 강화시킬 것이고, 이는 곧 비효율적인 장소에 과도한 투자를 하는 셈이다. 남과 북이 서로 긴장을 완화하면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노 전 대통령이 제안한 평화구역 설정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전망대를 떠나 군부대가 즐비한 북쪽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니 숲 속에 여기저기 불탄 흔적들이 많이 보였다. 북측이 군부대뿐 아니라 숲과 민가 등 연평도 전역에 걸쳐 골고루 포격을 했다는 증거다. 도로 연변에 북측의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새로 판 참호와 포대 등이 줄지어 보인다. 마을로 내려가기 위해 삼거리 언저리에서 잠시 쉬는데 바로 앞의 숲 역시 포격을 맞아 시커멓게 그을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포탄이 하필이면 커다란 소나무 정수리에 정통으로 맞아 나무가 부러지고 근처에 불이 붙었던 모양이다. 그 나무의 하단에 붙어있던 ‘불조심’ 현수막이 반쯤 탄 채로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드디어 섬을 한바퀴 돌아 마을로 돌아왔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작은 섬에 상당히 많은 건물과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대부분은 군부대 관련이지만 연평마을도 섬치고는 꽤 큰 마을이다. 공식적으로 1,700여명이 들어와 있다고 하는데 포격 이후로 주민 대부분이 외지에 나가있다고 한다. 마침 설 전이어서 왕래하는 배에 사람이 많았는데 연평 주민 거의 대부분이 뭍으로 나가 설을 쇤다고 한다. 뭍에 나가 사는 자녀들이 명절에 섬으로 들어왔다가 일기불순으로 제때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또 주민들도 오랜만에 육지구경도 할 겸해서 그런 관행이 자리잡았다고 한다.
예약한 민박집에 짐들을 들여놓고 우리는 다시 포격피해를 입은 마을을 돌아보았다. 마침 동행한 〈경향신문〉 기자가 포격 당시에 취재차 드나든 경험이 있어 맞춤한 안내를 해주었다. 마을은 작은 면적에 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어 골목이 몹시 비좁았다. 그 좁은 골목길을 따라 정육점, 횟집, 당구장, 미용실, 다방, 노래방, PC방 등 없는 게 없었다. 그렇게 밀집된 지역에 포탄이 떨어졌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상상하며 흉측하게 부서진 집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파괴된 모습을 보니 떨어진 포탄의 종류가 여러가지인 것 같았다. 어떤 집은 불이 나서 초토가 됐는가 하면 어떤 집은 충격에 의해 부서지기만 했다. 천만다행인 것은 목조주택이 거의 없고 대부분 시멘트벽돌과 함석으로 지은 것이라 집들이 다닥다닥 붙었음에도 불이 크게 번지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파괴된 한 횟집의 수족관이 기억에 남는데, 물이 빠져버린 수족관에 물고기들이 박제처럼 바닥에 누워있는 게 마치 초현실주의 회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진짜로 전쟁이 나서 고층아파트가 즐비한 서울지역에 포탄이 우박처럼 떨어지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똑같은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발칙한 상상을 하였다. 에너지와 식품이 공급되지 않는 고층아파트 주민은 물이 공급되지 않는 물고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진기자가 한 집 앞에 서더니 여기가 안상수 씨가 보온병을 가지고 포탄이라고 말했던 곳이라고 하고, 또 한 집 앞에서는 송영길 인천시장이 타다 남은 소주병을 들고 폭탄주라고 말했던 곳이라고 가르쳐준다. 그 끔찍한 파괴현장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우리 정치인들의 유머감각에 쓴웃음을 지으며 과연 그들이 피해자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얼추 보아도 민가에 떨어진 포탄은 수십발이 넘었다. 그런데 이렇게 밀집된 지역인데도 죽거나 다친 주민이 하나도 없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죽은 민간인 2명은 군부대에 용역을 나간 외지인이라 한다.) 그날 포탄이 바로 옆에 떨어져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는 증언들이 많은 것으로 보면 북측이 조준하여 포격을 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우리네 농촌현실의 한 모습이 큰 역할을 하였다. 대낮에는 농촌마을 대부분의 집들이 비어있다. 난방비가 비싼 겨울에는 특히 그렇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따뜻한 마을경로당에 모여 시간을 보낸다. 게다가 포격 당시가 썰물 때여서 많은 주민들이 개펄로 조개를 주우러 갔다고 한다. 만약 포격이 아침이나 저녁에 이루어졌다면 틀림없이 많은 사상자가 속출했을 것이다.
궁지에 몰려있는 북한
왜 북측은 전시에도 잘 하지 않는 민간인지역에 대한 포격을 감행했을까? 보수단체와 언론들은 연일 북한의 비인간적 야만성을 성토하고 있지만 이 점을 냉철하게 헤아리지 않으면 장차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먼저 극한상황에서 야만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한국인의 특이한 기질을 감안해야 한다. 6·25 전후,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저질러진 양측의 잔인한 살육전을 비롯하여, 베트남전 당시 점령지역에서 자행된 한국군의 엽기적 살상행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전쟁만 하더라도 그때까지 인류가 경험한 전쟁 가운데 가장 잔인한 전쟁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내가 감옥에 있을 적에 27년을 복역하고 나온 넬슨 만델라를 보고 전세계 지성들이 환호를 했는데, 같은 시각 40년이 넘게 독방에 갇혀있는 김선명 선생을 보며 그래도 남아프리카 백인 지배자들은 우리에 비해 한참 양반이라고 중얼거린 기억이 있다. 어찌하여 한국인들이 이토록 잔인한지는 문화인류학적인 검토가 있어야 하겠지만 오늘날처럼 발달된 무기체제가 특이한 잔인성과 결합될 때의 결과는 상상하기도 싫다. 남한이 북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우수한 무기체제와 장비를 가지고서도 북한의 전쟁수행능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잔인함 때문이다.
우리는 1970년대 이래 고도경제성장의 그늘 속에서 끊임없이 물질적 편리를 추구한 결과 타고난 잔인성을 많이 잃었지만(그 잔인함과 악착같음이 남다른 경제성장의 배경인지도 모른다) 북한은 스스로 선택한 주체노선 속에서 반세기가 넘게 잔인함과 악바리 근성으로 버텨왔다. 북의 주적은 미국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유사 이래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나라를 상대로 큰소리치며 대항해온 것은 상대방을 진저리 치게 만드는 잔인함과 악바리 근성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순례단 가운데 개성공단에서 3년간 일을 했던 친구가 전해주는 북한사람들의 행태 속에서도 같은 점을 발견한다. 극단적인 궁핍과 억압 속에서 인간에 대한 정상적인 배려나 도덕관념 같은 것은 아예 생각도 말라는 것이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기이한 대치상태가 반세기 이상 지속되는 가운데 한쪽은 극도의 결핍 때문에, 또 한쪽은 지나친 물질욕으로 인해 인간성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결론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인간성을 상실한 두 당사자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지금처럼 계속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으르렁거려야 할까?
남한 언론들은 그동안 북측의 호전성과 벼랑끝 전술만을 부각하여 보도해왔지만, 북측의 ‘상대방’이 저지른 만행(?)도 결코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영화 〈실미도〉에도 나오는 북파공작원의 존재이다. 얼마 전 자유선진당 이진삼 의원이 자신이 현역시절 북한에 들어가 북한인민군을 33명이나 죽였다며 자랑 섞인 고백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북파공작원 규모(1951년에서 1994년까지 1만3,000명 양성, 그 가운데 7,800명 사망·실종)만 하더라도 한반도의 대치상태가 얼마나 긴장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1968년에 “박정희를 까러” 왔던 김신조 일당도 시점으로 보아 어쩌면 그 직전에 있었던 이 의원 일행의 북파활동에 대한 보복일지도 모른다. 이것뿐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수없이 보아왔던 북측의 느닷없는 파괴활동은 대부분 남북 간에 끊임없는 쟁투가 지속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빵 하고 터진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6·25도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 남북 양측에 독립정부가 들어서고 전면전이 발발하는 2년 동안 38선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한쪽의 보도만을 근거로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이성적인 태도라 할 수 없을 것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북측이 보이고 있는 극단적인 벼랑끝 전술의 배경에는 미국이 있다. 알다시피 1989년,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체제변화를 거부한 쿠바와 북한은 극심한 내핍의 시기에 들어선다. 그동안 국가기간산업을 돌리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에너지와 기계류를 소련에게 의지해왔던 두 나라의 타격은 실로 커서, 문자 그대로 생존의 위기에 빠져있었다. 쿠바는 지혜롭게도 유기농의 자급화로 활로를 모색했으나 북한은 수령의 죽음에 이은 연속된 자연재해로 식량생산 기반이 통째로 무너지고 만다. 북한은 에너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핵발전프로그램을 가동하려 했으나 미국은 그것이 핵무기 제조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2003년까지 경수로 방식의 핵발전소를 지어줄 테니 자체적인 핵프로그램을 폐기하라고 압박한다. 미국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북한이 곧 붕괴될 줄 알았던 것이다) 북한은 이후 독자적으로 핵개발에 몰두한다. 이렇게 전력생산 수급계획이 차질을 빚자 북한은 매년 벌목과 홍수, 가뭄의 악순환에 시달리게 된다. 그 사이 북녘땅에서는 350만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한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분석가들은 북한이 수년 내에 붕괴할 것이라고 내다봤으나 북한은 굶주림 속에서도 핵무기 개발을 대내외에 과시하며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전개과정으로 보아 북한이 “우리식대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지속적인 핵전력 강화’와 ‘일치단결’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미국과 남한의 대북정책은 이 두가지를 무산시키자는 것인데 그것은 국가공동체로서 북한의 해체를 뜻하기에 이러한 정책기조를 유지하는 한 이 땅에 평화란 기대할 수 없다. 미국의 대북관련 예산의 내용을 보면 모두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는 연평도에서 저질러진 민간인지역 포격사건을 통해 북한의 처지가 얼마나 처절하고 열악한 상태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생명평화공동체
민박집에서 싱싱한 미역과 생김으로 저녁만찬을 먹고 순례단 일행은 한방에 모여 순례에 임하는 각오와 소감을 나누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저 도심의 휘황찬란함과 이곳 변방의 스산함이 빚어내는 극단적인 대비였다. 한쪽에서는 포격을 당하고 방공호에서 날을 지새우는데 도심의 불빛 아래에서는 대책없는 빨갱이 타령을 안주 삼아 흥청망청 날을 새우고 있었다. 그 전쟁과 난리를 겪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일까?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의 한계인가? 두눈을 반짝이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는 두 중학생 순례자에게 이런 얘기들을 낱낱이 들려줄 수 없어 답답했다. 순백의 저 어린 학생들의 마음에 생명평화에 대한 간절한 울림이 내면으로부터 울려나오길 바랄 뿐이다.
밤이 깊어 순례단은 셋으로 나뉘어 민박집 방으로 흩어졌다. 다섯이면 꽉 찰 각 방에 여섯이나 눕고 보니 조금 불편했다. 그래도 따뜻한 방바닥에 등을 지지고 있으니 만사가 귀찮아진다. 비몽사몽간에 한시간이나 잠이 들었나? 한밤중에 잠이 깨어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편히 누워있는 것이 비좁은 자리보다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포격 첫날 연평도 주민이 대피해 있던 방공호가 떠올랐다. 그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 난방연료가 없어 추위에 새우잠을 자고 있을 북녘동포들도 떠올랐다. 이왕 체험하러 왔으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살며시 일어나 내게 할당된 얇은 홑이불 하나와 누군가 가져온 여름용 침낭을 찾아 들고 마을 한가운데 있는 방공호로 갔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초등학교 교실 두개 크기만한 콘크리트 방에 두꺼운 스티로폼만 달랑 깔려있다. 난방시설이라든가 화장실은 물론 없다. 이런 시설이라면 밖에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용변은 참아야 한다. 그런데 이놈의 철문이 약간 틀어져서 아무리 닫으려 해도 안 닫힌다. 문을 10센티미터 정도 열어놓고 자는 수밖에 없었다. 얇은 침낭에 들어가 지퍼를 올리고 홑이불을 덮었다. 상체는 오리털파카를 입어 그런대로 견딜만 했는데 하체가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침낭이 워낙 비좁아 몸을 새우처럼 굽힐 수도 없다. 통나무처럼 일자로 해서 아침까지 견디는 수밖에. 그래도 난방시설 하나 없는 옥방에서 13년간 단련된 몸인지라 그럭저럭 잠이 든 것 같다. 아침에 순례단이 ‘생명평화 100배 절명상’을 하기 위해 방공호로 들어오는 바람에 깼는데 그 렇게 조금만 더 있었으면 동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방공호에서 생명평화를 염원하는 절명상을 하고 밖에 나오니 함박눈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원래 오전 10시에 돌아가는 배가 오기로 되어있었는데 기상악화로 오후 3시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마침 일요일이고 해서 전날 순례단을 위해 오후 내내 수고를 해주신 신부님께 인사도 드릴 겸 미사에 참례하기로 했다. 그 눈보라 속에서도 남아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저마다 유모차를 끌고 성당으로 향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곳에서는 특이하게도 노인들이 지팡이 대신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 여러가지로 쓸모가 많았다. 폭격 이후 썰렁했던 성당에 17명이나 되는 순례단이 참여해서일까 신부님의 집전하는 목소리가 낭랑하니 기운차 보였다. 신부님은 생명평화순례의 앞날에 하느님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축원해주셨고, 우리는 연평도의 비극이 하루빨리 치유되어 남북의 어부들이 배를 맞대고 평화롭게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 기도했다. 미사 후에 신부님은 순례단에게 컵라면을 대접해주셨는데, 포격으로 부서진 성당 마당을 바라보며 함박눈 속에서 먹은 컵라면 맛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인천항으로 돌아가는 쾌속선 안에서 우리가 하는 이 순례가 과연 한반도생명평화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최선의 행동인가 다시금 생각했다. 우리민족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 싸우지 말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데, 과연 어디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가? 그동안 무수한 논객과 정치인들이 갖은 주장과 활동을 벌였지만 상황은 더욱 암담해지는 것 같다. 제국의 질서는 여전하고 그에 빌붙어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세력들의 지배구조는 완고하다. 백성은 저들이 퍼트려놓은 ‘네가 없어져야 내가 산다’는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입만 열면 증오와 저주의 말을 내뱉고 있다. 그리고 언론에 비춰진 북한의 행태는 여기에 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모르긴 몰라도 북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는 행위를 강제하는 제국의 질서가 없는 대신 오랫동안 고여 썩을 대로 썩은 지도부가 있을 뿐이다. 남과 북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기묘한 동반자관계를 만들어왔다. 엄격히 말하면 세계사에 유례없는 남과 북의 번영은 이러한 적대적 공생관계에 힘입은 바 크다. 다만 북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남쪽에 비해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생존의 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다. 수없이 얘기하지만 평화의 전제조건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인정이다. 북이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도 다른 누군가로부터 부정당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럴 맘은 없으면서 상대를 부정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모순으로, 그러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언젠가는 생명의 순환구조 속에서 도태되고 만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지금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호혜적 공생관계’로 바꾸어나가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민족이 살 길이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길이다. 이를 국가와 지도부가 알아서 해준다면 고마운 일이나 그 변화의 시작은 백성 개개인의 마음에서부터 비롯한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순례가 좋은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걷기를 통해 제국이 내 몸에 심어놓은 분열의 문화와 과거의 상처를 살펴보고, 순례를 통해 그러한 깨우침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자는 것이다. 순례를 시작하며 우리는 이번 순례의 궁극적인 목표가 ‘한반도생명평화공동체’라고 명시하였다. 그것은 추상적인 말놀음이 아니라 내 안에서 북녘의 동포들과 하나되는 체험을 하고, 그러한 마음들이 모여 경제·사회·정치·군사 모든 분야에서 호혜적 공생관계를 이루어나가자는 결의이다. 연평도 앞바다에서 북녘땅을 바라보며 되뇌고 또 되뇐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