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다카기입니다.
저는 원자핵화학이라는 좀 낯선 학문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방사능을 다루는 화학이죠. 원자력과는 시초부터 대단히 깊은 관계가 있는 분야입니다. 그러니까 원자력발전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런 학문을 공부한 때문에 저는 대학을 나와 원자력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제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 일본에는 아직 원자력발전소가 한곳도 없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은 그때부터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려는 준비과정에 있었으며 발전을 하지 않는 조그만 원자로가 몇갠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원자력에 대한 기대가 컸었고 아직 원자력에 대한 문제점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물론 방사능에는 위험이 있고 원자력발전을 하면 반드시 연소찌꺼기가 생긴다는 것(죽음의 재라는 말이 있죠) 때문에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은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에게 어떤 재해를 갖다주는가 또는 실제로 방사능이 어떻게 밖으로 새어나오는가 등에 대한 것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당시는 원자력발전소에 반대한다거나 비판하는 데는 전혀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열심히 일하다 보면 원자력은 에너지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죠. 그때가 60년대 초였으니까 80년대 중반쯤 되면 원자력은 꽃을 피울 것이다, 그래서 전기를 마음대로 써도 요금이 공짜나 다름없이 돼서 그러다가 전기회사가 망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저 열심히 원자력과 씨름을 한 게 제 지난날의 역사입니다. 저는 요즘에 와서 완전히 기만당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하튼 당시는 그들의 말대로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방사능과의 인연
당시 제게 주어진 건 이런 일이었죠. 이것은 원자력발전소에서 연료로 쓰는 우라늄 펠릿입니다. 물론 모형이고 진짜 우라늄은 아닌데 이런 걸 파이프에 가득 넣어서 연료봉을 만듭니다. 그 속에서 핵분열을 일어나게 하지만(이건 원자탄의 원리와 똑같습니다) 원자탄처럼 순간적으로 핵분열시키지는 않고 좀더 천천히 연소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발전을 하는 겁니다. 원자탄처럼 단박에 태우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강하게 연소시키죠. 100만킬로와트짜리 대형 원자력발전소쯤 되면 이런 펠릿이 모두 1,300~1,400만개가 원자로에 들어있습니다. 하루에 히로시마형 원자탄 세개를 폭발시킨 것만큼의 연소를 하게 합니다. 원자탄은 그것을 1초의 몇분의 1이라는 시간에 순간적으로 연소시켜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천천히 조절해서 태우는 것인데 그래도 하루에 원자탄 세개를 폭발시키는 것과 같은 엄청난 열을 냅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원자탄 세발분의 죽음의 재가 나옵니다. 1년에 원자탄 1,000발분의 죽음의 재가 나오는 셈이죠.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이러한 죽음의 재가 밖으로 새 나오는가 나오지 않는가 하는 게 처음이자 마지막 문제가 되는 겁니다. 결국 뭐라 해도 방사능문제가 최대 최후의 문제입니다. 그 밖에도 부수적으로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결국 방사능이 기본문제가 됩니다.
제가 회사에서 맡았던 일도 이러한 펠릿에 담겨있는 죽음의 재에 대한 데이터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우라늄을 원자로에서 태우면 온도가 엄청나게 올라갑니다. 그때 높은 온도 때문에 방사능이 증발해서 밖으로 새어나오지는 않는가 또는 펠릿이 열이나 방사능의 영향으로 깨져서 방사능이 새는 일이 없는가 ― 이런 문제에 대한 데이터를 만드는 일을 한 것입니다. 실제 실험에서는 이렇게 큰 펠릿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런 걸 쓰면 방사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다루기 어려워서 이것보다 훨씬 작은 것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걸 원자로에 넣고 기송관이라는 것으로 압축공기를 이용해서 튕기면 제가 있는 실험실에서 원자로까지 날아가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잠시 핵분열을 일으키는데 이게 흔히 말하는 우라늄을 태우는 것입니다. 태우고 나서 생긴 죽음의 재가 들어있는 것을 다시 압축공기로 튕겨서 회수하는 겁니다. 이때 그 속에 있는 방사능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 이를테면 온도를 올렸을 때 밖으로 새는지 또는 이 덩어리 속에서 밖으로 어떤 방사능이 나오는지, 속에는 어떤 방사능이 있는지 조사하는 게 제 일이었습니다. 꽤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방사능은 엄청나게 강한 것입니다. 조그만 원자로에서 태워도 말입니다. 태운다든가 혹은 방사능을 보유하게 하는 작업을 저희들은 ‘그슬린다’고 하죠. 아주 작은 원자로에서 조금 그슬렸는데도 기송관을 통해서 원자로에서 회수되었을 때는 엄청나게 강한 방사능을 띠게 됩니다.
가이거계수기라는 게 있죠. 방사능을 측정하는 기계입니다. 삐삐, 끼익끼익 하고 소리를 냅니다. 방사능이 너무 강하면 끼익끼익 하고 연속음을 내는데 그게 더 강하면 끽끽끽, 삣삣삣삐이 하다가 뚝 끊어져버립니다. 너무 강하면 측정기계가 작동하지 않을 정도로 포화되어 소리를 멈춰버리죠. 저는 지난날 그런 데서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솔직히 말해서 좀 무서웠습니다. 역시 방사능이니까요. 그러나 자꾸만 익숙해지니까 덜 무서워졌습니다. 가이거계수기가 소리를 내지 않게 되는 것처럼, 저도 그만 거의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방사능에 반응하지 않게 되어도 그게 당연한 것처럼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될수록 방사능에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래야 제몫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말하자면 전문가 근성이라고 할까요?
당시 저는 원자력발전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데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요, 회사에 있으니까 말하자면 숲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숲 전체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겁니다. 원자력발전의 본질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매일매일 원자로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거기서 그슬려 나온 것(죽음의 재)을 가지고 온도를 올려보기도 하고 화학처리하기도 하면서 측정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 일에 대해서는 굉장히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자력에 대한 그 밖의 문제는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진짜 문제가 되는, 이를테면 원자로가 어쩌다 폭주하는 게 아닌지 또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방법은 있는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웃해 있는 연구실에서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방사능 측정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가끔 가까이 있는 연구실을 잠시 둘러보기는 해도 그곳에서 무엇인가 질문했다가는 남의 일에 간섭 말라고 해서 질문도 할 수 없는 거죠. 서로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전문가끼리의 약속 같은 게 있으니까 점점 모르는 것투성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원자력발전이란 게 잘하는 건지 잘못하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자코 있거나 말을 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하다 보니까 방사능의 거동은 우리가 애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더 기괴해서 어쩌다 보면 그만 그놈의 방사능이 새어나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글로브박스라는 게 있는데 관 속의 공기는 별도로 처리되는 그런 장치 속에 장갑 낀 손만 넣고 다루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자 밖으로는 절대로 공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된 데서 방사능을 다루는데, 이때 복장도 완전히 몸을 보호할 수 있게 만든 특수한 실험복으로 바꿔 입고 또 방사능이 강할 때는 납이 들어있는 유리안경을 끼고 특수한 마스크까지 낍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을 하다가 끝나면 반드시 가이거계수기로 오염되지 않았는가 검사를 하게 되어있는데, 측정기를 접근시키면 끽, 끼익 하는 겁니다. 그런 일이 일주일에 한번은 있었습니다. 야단법석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치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글쎄 방사능에 오염되면 여간해서 깨끗해지지 않는 겁니다. 비누나 세제로는 깨끗해지지 않는 겁니다. 이처럼 방사능을 다루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틈으로 오염이 진행되는 일입니다. 이를테면 전열기 위에 비커를 올려놓고 그 속에 방사능 액체를 주입하고 잠시 딴 일 때문에 자리를 떴다가 돌아와보면 비커에 들어있는 방사능이 모두 날아가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언저리 전체가 오염된 일도 있습니다. 이건 제가 실험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고, 방사능 실험을 해본 사람은 외부로 방사능이 새어나가지 않았다 해도 자기 주변 전체를 오염시킨 경험은 몇번이고 겪게 마련입니다. 제가 겪은 일은 아니지만 같이 일한 동료가 우라늄액을 폭발시키는 사고를 낸 적도 있습니다. 대체로 누구나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러한 일을 빠짐없이 회사에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출한 보고서는 묵살돼버렸는데, 회사의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보고서가 여간해서 위로 올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다 보니까 저도 차츰 알게 되었습니다. 회사가 원자력발전소를 도입하는 계획을 짜놓고, 발전소 계획에 도움이 되는 여러가지 데이터는 환영하지만 그렇지 않는 것은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반핵운동에 투신하기까지
결국 저는 4년 반쯤 후에 마침 도쿄대학 원자력연구소에서 기초연구를 할 연구조수를 모집한다기에 거기 응모했더니 다행하게도 채용이 돼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회사에 나가던 마지막 시기에는 원자력발전이라는 것과 저 자신과의 관계가 어렴풋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지만 원자력발전소 반대운동을 하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런 까다로운 문제에 빠져들어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쿄대학 원자력연구소에 나가서 우주의 역사를 연구하게 돼 마음을 놓게 되었죠. 우주의 일은 세상의 일과는 관계가 없으니까요. 가끔 배를 타고 태평양으로 나가서 자료를 채취하고 고래 같은 것을 보면서 작업을 하는데, 낭만도 있었습니다. 원자력회사에 나갈 때는 굉장히 긴장되어 있었는데 이때는 마음의 긴장도 풀었죠. 계속 그렇게 나갔으면 사회적인 문제 같은 건 관심 밖에 두고 원자력이니 뭐니 하는 문제와 무관하게 보통 학자로 살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생이란 그렇게 순탄한 게 아닌지, 또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우주의 옛날, 지구의 옛날 몇백만년 몇천만년 전쯤에 생긴 방사능을 측정하려고 찾아나섰는데, 어디를 가나 자연에서 채취한 자료를 측정하면 그 표층의 방사능이 굉장히 높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태평양의 흙을 떼어내 1미터짜리 막대모양의 자료(이걸 코어라고 합니다)를 채취해 옵니다. 그런데 제일 밑부분이 확실히 방사능이 낮은 겁니다. 그게 차츰 위로 올라가면서 마지막 1밀리미터쯤 되는 부분에 오면 방사능이 갑자기 엄청나게 높아집니다. 이 부분이 요컨대 인간이 방사능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정확하게 말해서 원자탄 이후 형성된 거죠. 원자탄 이후 핵실험을 뻔질나게 하는 동안 죽음의 재가 쌓인 것입니다. 그러한 죽음의 재가 알프스산에서 자료를 가져와도 남극에서 가져와도 남태평양에서 가져와도 지구상 어디서 자료를 가져와도 발견되는 것입니다. 아주 얇은 껍질인데 이것을 통해 그만 인간의 발자국을 확인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놀랐습니다. 놀라고 또 놀랐습니다. 실험실의 방사능만 알았을 뿐 자연이 얼마나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는지 전혀 모르는 자신에 대해서 크게 놀랐던 것입니다. 발견된 방사능은 계기에 약한 소리를 낼 정도일 뿐이었습니다. 끽끽 할 그런 정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염 자체에도 놀랐지만 그 소리에도 그만 놀란 것입니다. 과거에는 끼익끼익 끼이익 하고 끊어져도 놀라지 않던 제가, 놀란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어지간히 생각을 했죠. 이때 확실히 저 자신은 변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할머니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뭘 하는 사람이냐고 하기에 전 그냥 “방사능을 재고 있어요” 했더니 “그러면 방사능이 나오는 거야?” 하는 겁니다. 조금이지만 여기서도 나온다고 했더니 “방사능은 몸에 해로운 게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때 전 말문이 막혀버린 겁니다. 아아 그렇구나, 방사능은 역시 몸에 나쁜 거라고 할머니가 말하는데 그런 나쁜 방사능을 측정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항상 전 방사능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때 비로소 방사능에 대해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왜 나는 이것을 깨닫지 못했는가 생각을 해보니까 그것은 실험실이란, 완전히 죽은 곳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란 걸 알았습니다. 실험실은 생명이라든가 살아있다는 관점에서 사물을 보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저 데이터와 둘이나 셋 또는 넷 하는 숫자로서만 모든 걸 다루는 곳입니다. 방사능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이거계수기가 끊어지면 끊어졌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끽끽끼익 해도 소리가 듣기 싫다고 볼륨을 줄이거나 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을 하고 있었죠. 그러니까 그만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서 사람도 기계의 한부분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건 완전히 하나의 톱니바퀴죠. 인간의 감각으로 사물을 보지 않는 거죠.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면 전문가로 성공도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저도 그런 전문가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방사능 자체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처음으로 자연 속에 나와보니까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물고기가 놀고 있었으며 새가 울고 꽃이 피어있었습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각으로 이런 것들을 보고 있으려니까 이제 끽끽 하는 작은 소리에도 그만 공포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아아! 그렇구나, 나는 이제까지 전문가라는 울타리 속에서 기계가 되어있었구나, 여기 나와보고 이제 비로소 사람이 되었구나, 인간의 감각으로 방사능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180도 다른 방향의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 펠릿을 통해서도 전혀 다른 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원자력회사에 있을 땐 이런 펠릿을 가지고 하는 설명을 듣고 감격했습니다. 이 펠릿을 잘 태우면 한 가정이 1년 쓰는 전기가 나온다, 이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인가, 이게 원자력의 매력이다, 이걸 석유로 치면 트럭 석대분이나 되는 거다, 참으로 대단한 물건이구나 하는 관점에서만 원자력을 봐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에는 이 속에서 방사능이 생기고 죽음의 재가 생겨서 사람에게 독이 된다는 말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명의 자리에서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 속에 들어있는 방사능의 크기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암 치사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대강 5만명 정도의 치사량이 됩니다. 이 속에서 가정에서 1년간 쓰는 전기가 나온다, 인간이 이렇게 엄청난 기술을 가지게 되었구나 하는 것은 원자력을 하는 사람들의 주장이지만, 그것을 생명의 자리에서 보면 야만스러운 공포의 기술이니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어느 편에 서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됩니다. 실험실에서 한쪽에서만 보는 데 익숙해지고 여하튼 여기에 불을 당기는 것만 생각하다가, 여기서 나오는 죽음의 재가 찌꺼기로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된 저는 딴 세상을 보게 된 셈입니다.
그뿐인가요. 이게 이대로 나가다간 지구는 그야말로 죽음의 재투성이가 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에 이르렀을 때 저는 제가 일생을 걸고 이것을 문제삼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재 ━ 결코 끌 수 없는 불
이 문제를 맞대응해보자고 마음먹은 후에 제가 내린 결론은 결국 원자력발전은 ‘끌 수 없는 불’이라는 것입니다. 원자력발전의 운전을 멈추게 하는 것은 거의 모든 경우에 가능합니다. 하기는 체르노빌 사고는 운전을 정지시키지 못해서 폭주가 일어난 것이지만 대개의 경우에, 스리마일도 그랬지만, 제어봉을 삽입하면 운전은 정지됩니다. 이렇게 운전을 정지시킨 단계에서 불이 꺼지면 간단한데 원자로라는 것은 여간해서 정지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재라는 모양으로 불이 남는 까닭입니다. 죽음의 재라는 말은 대단히 상징적인 말인데, 일본의 어느 신문기자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날카로운 감각으로 잘 지은 말이지만 사실은 이것은 재가 아닙니다. 여기서 나온 것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재가 아닙니다. 재라고 할 때 싸늘하게 식은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그 재는 싸늘하게 식은 게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벌건 숯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재는 벌건 숯불이지 차디차게 식어버린 재가 아닙니다. 죽음의 재에서는 방사능과 열이라는 형태로 에너지가 방출되고 있습니다. 죽음의 재는 몇년 몇십년 몇백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입니다.
방사성물질이 방사능을 방출하는 시간을 방사능의 수명이라고 말하는데, 수명이 다하면 죽어버립니다. 세슘은 30년이 지나야 방사능이 반감합니다. 60년이 지나야 반의 반, 즉 1/4이 되죠. 플루토늄은 반감기가 2만4,000년이니까 2만4,000년이 지나야 반으로 줄어든다는 이야기이고 보면 사람보다 엄청나게 오래 사는 물질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이 먹이를 통해서 동물의 체내로 들어가면 체내에서도 계속해서 탑니다. 그래서 방사능에 오염되면 두고두고 몸에 장해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저는 방사능을 꺼지지 않는 불, 끌 수 없는 불이라고 합니다.
원자력을 하는 사람들은 원자력의 불을 크게 하는 일은 이제 잘합니다. 100만킬로와트니 130만킬로와트니 하는 대형 원자력발전소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원자의 불을 끄지 못한다는 것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빨간 불을 끄는 기술은 아직도 없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고준위 폐기물을 제대로 처리하는 방법은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못합니다. 인간은 방사능의 불을 인공적으로 꺼보려고 많은 실험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다른 핵반응을 일으켜서 수명이 긴 방사능을 짧은 것으로 바꾸기만 하면 불은 꺼질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방사능이 없는 물질로 바꿔보려고 흡사 옛날 연금술 같은 실험도 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여러가지 방법을 써서 해보았지만 잘 안되고 말았습니다. 방사능 불이 꺼졌는가 하면, 딴 방사능의 불이 붙고 해서 한놈을 두들겨 패면 모가지가 쏙 들어가지만 딴 놈이 모가지를 불쑥 내미는 두더지놀이처럼 아무리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수명이 아주 긴 방사능이 남게 됩니다. 개중에는 이를테면 5만명의 치사량에 해당하는 게 원자력발전소에서 꺼낸 죽음의 재에서 생깁니다. 이놈은 수백년이 흘러도 아직 수백명분의 치사량에 해당하는 게 남아있습니다. 100만년이 지나도 아직 10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게 남아있다면 얼마나 끔찍합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꺼지지 않는 불, 끌 수 없는 불, 독성이 남아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불을 만들었다는 것은 에너지기술을 만든 게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불이라면 끄고 싶을 때 끌 수 있어야죠. 원자력의 불은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지만 끄고 싶을 때 끌 수 없다는 점에서 빵점짜리 기술입니다. 마음대로 못하는 기술입니다. 따라서 이건 완전한 기술이기는커녕 인간이 의존할 기술도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오늘 확신을 가지고 원자력을 반대합니다. 사고가 있건 없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사고란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체르노빌이 없었더라도 전 원리적으로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반대하지 않으면 어딘가 꺼지지 않는 불, 끌 수 없는 불이 남아서 장래의 인간에게 고통을 주게 됩니다. 우리시대에 사고가 나지 않는다 해도 말입니다. 원자력을 없애야 합니다.
하늘의 불과 땅의 불
저는 원자력은 하늘의 불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지구상에서 태워야 하는 불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의 자연과학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밤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원자의 불이 타고 있는 것입니다. 핵융합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을 보고 있으면 번쩍 하고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핵분열이죠. 핵이 빛나는 것, 핵이 별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 우주의 불, 하늘의 불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생물은 하나도 살지 않습니다. 역시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이치는 다르기 때문에 하늘의 이치가 있는 데는 생물이 사는 세계가 아닙니다. 생물이 있는 세계에 이런 핵의 불이 있으면 그건 재앙의 불이 됩니다.
지구라는 것은 태고시대에 우주의 부스러기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생성되었을 당시는 방사능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늘의 불이 남아 지구에 죽음의 재가 가득히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는 이러한 타고 남은 찌꺼기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꽤 강한 방사능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지구에 생물이 없었던 시대였죠. 아주 원시적인 생물이 생기는 데 10억년쯤 걸렸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말입니다, 방사능이 식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수억년이 걸려서 방사능이 차츰 식은 후에야 마침내 생물이 살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렇게 생물이 살 수 있게 된 지구에 다시 인공적으로 새 방사능을 만들어서 방사능의 불을 일으킨 것이 바로 원자력발전인 것입니다. 확실히 하늘의 불을 훔친 것은 인간의 오만이 저지른 잘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욥기의 경고
제가 아까 하늘의 이치니 땅의 이치니 하는 말을 했습니다만 저와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계시를 주는 것은 성서에 나오는 욥기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욥이라는 사람은 대단히 신앙심이 두터운데도 갖가지 재난을 겪게 됩니다. 자기는 신앙심이 두터운데 왜 이러한 재난을 받아야 하는가 하면서 깊은 시름에 빠져서 친구들과 대화를 합니다. 이때 친구들이 이러쿵저러쿵 타이르지만 결국 그들의 말은 응보주의적인 대답일 뿐이고 욥의 깊고 진실한 고뇌를 어루만져주지 못합니다. 욥을 만족스럽게 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욥은 신의 진실한 말씀을 듣고 납득하게 됩니다. 진실로 겸허한 마음이 되는 데서 욥은 구원되는 것입니다.
욥기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38장에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 마지막에 나오죠. 그중 31절에 “네가 북두칠성에 굴레라도 씌우고 오리온성좌의 사슬을 풀어주기라도 할 수 있단 말이냐? 네가 성좌들을 정한 시간에 이끌어내고 대웅좌 소웅좌를 인도해내기라도 한단 말이냐?”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늘의 법칙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별이 돈다는 이야기죠. “네가 천상의 운행법칙을 결정하고 지상의 자연법칙을 만들었느냐?” 이렇게 말씀하실 때 이것을 저는 하느님이 너희 인간은 하늘의 법칙을 아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라고 봅니다. 욥기에서 욥은 욥 개인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이 짊어진 근원적 죄라든가 고민을 욥이 대신 받아서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너희가 이렇게 오만해졌는데도 하늘의 이치를 아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부분도 있습니다. “보라, 베헤못(하마)을! 너를 만든 나는 이 짐승도 만들었다.” 그리고 “너는 레비아탄(악어)을 갈고리에 걸어서 끌어 올리고 그 혓바닥을 새끼줄로 꿰어서 굴복시킬 수 있느냐? 너는 그의 코에 새끼줄을 걸고 턱을 꿰뚫어 멍에를 씌울 수 있느냐? 그는 너에게 저를 가엾이 여겨달라고 되풀이해서 애원하고 정중하게 말할 것 같으냐? 그가 너와 계약을 세우고 영원히 너의 종복이 되거나 할 것 같은가?” 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욥기에 갑자기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땅, 이 자연계는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인간이 자연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아버린 것도 아닙니다. 진실로 인간은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묻는 겁니다. 넌 그것을 아느냐 하고 물으시는 겁니다. 자연의 깊이, 자연의 전체적 균형, 그런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오만하게도 그것을 개조하려는 인간에 대해서 엄중한 경고를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늘 하는 이야기지만 환경의 위기라는 말 자체가 이미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있고 그 둘레가 있다는 그러한 관점에서 하는 말입니다. 환경이라는 말은 인간을 싸고 돌아가는 경계입니다. 이를테면 이 말은 영어에서 ‘environment’라고 하는데 이것도 인간을 둘러싸는 것이라는 뜻이고, 독일어의 ‘Umwelt’도 둘레의 세계라는 뜻이니까 인간이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게 아니라 우주와 전 자연이 있고 그중의 아주 작은 일부가 인간이라는 뜻이 되어야죠. 지금 환경의 위기라고들 말하는데 그것은 환경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의 위기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주위에 위기상황이 일어나서 그게 인간을 못살게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게 아니라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체념을 넘어서
이제 제 이야기의 중심테마를 목소리를 크게 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원자의 보전, 원자의 안정입니다. 땅의 원리는 원자의 안정을 토대로 해서 성립된 것입니다. 과학적인 변화는 이렇게 저렇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원자끼리의 연결고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원자 그 자체가 변화되면 반드시 인간의 몸에는 상처가 생깁니다. 인간만 그런 게 아니고 지상세계의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핵에너지라는 것은 이러한 원자의 안정을 파괴하는 데서 비로소 생기는 것입니다. 별이 반짝이는 것은 끊임없이 원자가 결합되고 깨지고 하는 데서 에너지가 방출되어 빛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상세계의 현상입니다. 지상세계의 원리가 아닙니다. 지상세계의 원리와 천상세계의 원리는 명백하게 다르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원자의 안정이란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원자의 안정을 깨뜨림으로써 에너지를 얻는 방법에 인간이 의존하다가는 이 지상세계를 결국 파괴해버릴 것입니다. 원자력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어딘가 폐기물이 남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한개의 펠릿이 있고 여기서 1년치의 전기가 나올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5만명분의 치사량에 맞먹는 쓰레기도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전력회사가 원자력으로 발전을 하니까 25~30퍼센트 정도 전력에 원자력의 전기가 섞여버리고 말았습니다. 5만명쯤의 치사량에 해당하는 쓰레기가 만일 여러분 가정 어느 구석에 쌓인다면 이때는 그 누구라도 그건 안돼! 싫어! 하시겠죠. 또 이런 전기를 쓰기보다는 차라리 25퍼센트는 안쓰고 견디겠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누군가가 어딘가에다 잘 처리해주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저 마음 편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기쓰레기는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잘 처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전기쓰레기는 넘쳐서 이를테면 오늘 시모기타반도, 아오모리현 록카쇼에 모두 쌓이고 있는 것입니다. 록카쇼로 가져가면 결국 록카쇼 사람들의 뒷마당에 갖다 버리는 것입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결국은 여러분 자신들의 뒷마당으로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록카쇼에 묻힌 것도 언젠가는 지하수를 오염시켜 재해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저는 원자의 안정을 이제부터 우리 삶의 새로운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시간과 공생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 말은 요컨대 이제부터 태어날 사람들과 공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태어나는 세대에 대해서 사악한 범죄가 되는 불을 남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의 문제는 단순히 원자력발전소에 반대하는 좁은 입장에서 이야기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인류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이고 더 나아가서 살기 위해서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저는 지금 원자력발전에 반대하는 일을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만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생활 가까이 있는 문제부터, 지금까지 제가 말한 공생이라는 관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체념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성서에서도 인간은 늘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되풀이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는 산다는 것은 다음 세대에 희망을 이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체념 때문에 나쁜 일이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자력발전소 문제, 핵의 문제가 생활 주변에서 일어났는데도 여간해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내가 한다고 뭐가 될 것도 같지 않고, 벌써 이렇게 많은 방사능이 지구를 더럽혀놓았는데 이제부터 떠들어보았자 이미 때는 늦었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제가 가장 잘 아는 것은 원자력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체념했다는 사실입니다. 원자력의 미래에 확신을 갖고 있는 원자력기술자는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옛날 동료들은 아직도 그 세계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만나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라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체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게 좋아서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예까지 왔으니 이제 별수 없잖아, 안 그래?” ― 거의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원자력기술자의 체념이 바로 재해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반대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좋으니까 신념을 가지고 희망에 차서 반대하는 일을 해나가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원자력을 없애자는 희망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는 일을 하자는 겁니다. 우리의 반핵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건전하게 살고 싶다는 희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핵이 없는 데에서 살자는 우리의 희망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때 반드시 미래는 열릴 것이라고 믿고, 또 그러한 믿음에서 다시 희망이 용솟음쳐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김원식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