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난 이후 반년이 경과하고 있다. 《녹색평론》은 이번호까지 포함하여 세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원자력 문제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여러 측면에서 집요하게 계속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기는 후쿠시마 사태의 직접 당사자인 일본사람들도 이제는 거의 평상시의 생활 리듬으로 돌아간 것 같은 분위기이고 보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바다 건너에 있는 우리들이 지나치게 심각해질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이 예전의 모습을 회복해가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다. 사고가 난 후쿠시마와 인근 주민들의 기막힌 사정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금 일본 전역에서 허다한 사람들이 심각한 정신적·심리적 상해를 입고 있음이 확실해 보인다. 이것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 관련 증언, 문헌, 자료를 세심하게 읽어보면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이 내면적 상해의 진상은 나날의 피상적인 뉴스거리에 골몰할 수밖에 없는 매스컴에 의해서는 간취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더 지난 뒤에, 다양한 인간적 기록이나 예민한 문학적·예술적 증언에 의해서 그 실체가 좀더 분명히 드러날지 모른다. 여하튼 지금 일본사회가, 적어도 그 내면풍경에 있어서는, 더이상 후쿠시마 사태 이전과 같은 사회는 아니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것은 일본인들에게 국한된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민감한 감수성의 소유자라면 세계 어디서든 후쿠시마 사태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지만, 한국의 우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아마도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장 인접해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충격이 컸던 것은 단순히 당장의 방사능 피해에 대한 우려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생활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하고, 불합리하며, 위험천만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우리들의 생활은 막대한 전력(電力) 사용 없이는 성립 불가능한 구조가 된 지 오래이다. 게다가 전력의 상당부분은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 모두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들 대부분은 이 기본적인 사실에 눈을 감고, 근본적인 질문도 하지 않고, 치열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일도 없이 그냥 고개를 돌려서 외면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아마 이 정신적인 나태와 무책임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도 충격의 원인이 되었을지 모른다.
충격이 컸던 만큼 당연히 일본의 상황에 대해서 사람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와 동시에, 국내의 원자력발전소와 핵폐기물 처리 문제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모처럼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한국정부도 국내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일제 점검을 실시함으로써 시민들을 안심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는 상황까지 갔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 직후의 이러한 분위기는, 불가사의하게도, 잠깐 지속되다가 곧 가라앉아버렸다. 정부에 의한 원전 실태 조사가 과연 얼마나 견실하고, 신뢰할만한 것인지를 추궁하는 언론도 없었다. 일본의 사고현장 상황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후쿠시마에서는 여전히 사고 수습 전망이 불투명한 상태이고, 지금도 대기와 바다로 방사능이 끊임없이 방출되고 있다.
하기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별의별 흉측한 사고와 사건들이 빈발하는 사회에서 원자력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방사능은 사람의 오관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고농도 피폭을 제외하고는 당장에 피해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사고 직후에는 정부기관에서 남한 각지의 방사능 측정치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그것도 어느새 유야무야되어버렸다. 언론이나 시민들로부터의 강한 요구나 압력이 없는데, 정부가 뭣 때문에 방사능을 측정하거나 측정치를 발표하려고 하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방사능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소수겠지만,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문제를 조금이라도 깊게 들여다본다면, 재앙은 지금부터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고 직후 후쿠시마를 방문한 영국의 방사선 전문가 크리스 버스비는 이미 일본 동부 지역이 광범하게 오염된 사실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그는 사람들이 오염된 땅에서 자란 농산물을 소비함으로써 먹이사슬에 의한 내부피폭을 당연히 입게 될 것을 예견하여, 장차 이번 사고로 희생될 인명이 수십만에서 백만까지도 될 수 있다고 추산했다. 그는 가능하다면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멀리 떠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양심적인 전문가·과학자는 사실 한둘이 아니다. 예를 들어, 도쿄해양대학의 명예교수인 해양생물학자, 미즈구치 겐야(水口憲哉)에 의하면 이제부터는 사실상 “지옥의 문이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극단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은 대량 방출된 방사능으로 이미 바다가 심각히 오염되었고, 그 결과 먹이사슬을 통한 해양생물들의 체내 방사능 농축이 시작되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방사능의 생물에 대한 치명적인 영향은 주로 체내에서 축적·농축되는 그 성질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수산물 대량 소비가 오래된 식습관이 되어 있는 일본에서 장차 대규모 피해는 필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떨어져 있다고 해서 한국의 우리들이 안심할 수는 없다. 생물의 먹이사슬 메커니즘에서는 국경이란 게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기 중으로 방출되었거나 지금도 방출되고 있는 방사성물질의 강하(降下)는 반드시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미량이라도 일단 호흡기관에 흡수되거나 토양과 물을 오염시키면 결국 사람과 기타 생물체에 치명적인 위험요소가 되는 것이다. 독립적 과학자들이 되풀이하여 강조해왔듯이 방사능 피폭에는 그 이하의 선량(線量)이라면 무해한 ‘역치’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아무리 미량이라도 방사능 피해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 한반도도 피재(被災)지역에 속한다고 해야 옳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정부와 원자력 관련업계와 주류언론과 어용학자들은 결코 상황의 심각성을 솔직히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을 인정한다면 광범위한 주거지와 삼림, 농토 및 어장을 포기하는 데 따르는 사회적 대혼란과 재정적 부담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 후쿠시마 사고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배상이나 피난·이주에 따른 비용은 제외하고, 단순히 정부가 인정한 오염된 땅 ― 산야와 주거지를 포함한 ― 에 대한 제염 비용만 산정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20년 이상에 걸쳐 50조엔이 넘는 천문학적 액수가 들 것이라는 게 최근 어떤 연구자의 추산이었다.
하지만 재해(災害)를 해결하는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재해의 규모와 수준을 최대한 축소·은폐하면서, 피해자 구조를 방기하는 것이다. 요컨대 기민(棄民), 즉 민중을 버리는 정책을 쓰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 기민정책은 자본과 국가에 의해 일상화·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좀처럼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실은 늘 되풀이되고 있는 정책이기도 하다.
흔히 원자력 마피아라는 말을 쓴다. 그것은 물론 원자력발전소를 건설·운영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자본가·기업가들과 그들에게 협력하거나 기생하면서 살아가는 정치인, 관료, 언론, 학자들을 총칭하여 부르는 호칭이지만, 문제는 이 원자력 마피아의 힘이 너무나 강고하다는 것이다.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좋은 삶이 있을 수 있고, 또한 다른 식으로 얼마든지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원자력발전이 계속하여 존속·확장되어온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이 원자력 마피아의 존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막강한 권력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자력절대체제’라고 불러 마땅한 기괴한 독재체제가 되어버렸다. 이 체제에서 결정적으로 훼손되는 것은 자연과 사회적 약자의 삶,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이다.
맨해튼프로젝트 이래 핵산업이 존속·확대될 수 있었던 근저에는 언제나 거짓과 속임수와 은폐공작이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직후부터 시작된 방사능에 대한 거짓된 정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방사능의 가공할 독성작용을 은폐하거나 축소해왔고, 심지어는 미량의 방사능은 오히려 인체 면역력을 길러준다는 가당찮은 논리까지 만들어 유포해왔다. 이처럼 늘 거짓말을 하는 것은 방사능의 진실을 다수 시민들이 알게 되면 핵무기도, 원전산업도 그날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전은 사고 없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미량의 방사성물질을 유출하고, 그 결과 인근 주민들이 현저한 건강장애를 각오해야 한다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원자력 마피아는 이것을 당연히 부인하지만, 여러 독립적 역학조사는 그게 엄연한 사실임을 입증했다. 또한 자주달개비꽃이라는 식물이 저선량 방사능에도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특성이 있음을 발견한 유전학자 이치카와 사다오(市川定夫)는 정상가동 중인 원전 부근에 이 식물을 심어놓고 반응을 살핀 결과, 미량 방사능이 계속 유출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관건은 방사능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정보이다. 그러나 국제원자력위원회(IAEA)는 물론이고, 일반적으로 꽤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세계보건기구(WHO)조차도 방사능 문제에 있어서는 일관되게 거짓정보를 생산·유포하는 데 협력해왔다. 예를 들어, 1959년에 맺어진 IAEA와 WHO 사이의 협약은 WHO라는 유엔기구가 국제 원자력 추진세력 앞에서 얼마나 허약한지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 협약은 방사능에 관한 한, WHO의 독자적인 조사·평가와 그 연구결과의 공개를 일절 금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WHO는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피해상황에 대한 학술대회를 두차례나 개최하고도 그 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못한 채 그냥 앵무새처럼 IAEA의 견해를 되풀이하여, 체르노빌 사고 피해자가 수천명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믿기 어려운 WHO의 굴종적인 행태는 관계된 관료·과학자들의 왜소함뿐만 아니라, ‘원자력체제’가 얼마나 가공할 반생명·비윤리성에 기반하고 있는가를 암시해주고 있다.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슬로건 밑에서 시작된 원자력발전 시스템은, 핵무기에 못지않게 생명과 평화에 위협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본적으로 원자력발전과 핵무기는 일란성 쌍생아라는 사실이다. 이번호에 전재·소개된 인터뷰 기사에서 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원전은 핵무기 개발을 전제로 한 산업이기 때문에 핵무기를 꿈꾸는 국가는 원전을 결코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지만, 이것은 약간의 과장이 있을지 몰라도 핵심을 찌르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원전은 온갖 측면에서 전력생산 시스템으로는 가장 위험하고 비경제적이며 불합리한 시스템이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결국 군사적 혹은 배타적 국가주의 논리를 떠나서는 존립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전을 허용하면서 평화를 말하고, 민주주의를 말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이자 위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원자력발전 시스템의 존속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될 제일 절박한 이유는, 이것이 현재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서 미래세대의 삶의 토대를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극히 비윤리적인 시스템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방사능에 관한 숱한 문헌과 자료를 읽다 보면,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기 쉽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무수한 핵실험, 원자력발전소 가동, 핵폐기물 해양투기 따위로 세계 전역은 이미 방사능으로 심각하게 오염되고 말았다. 게다가 또 열화우라늄탄이라는 이름의 엄연한 핵무기가 세계 곳곳의 전쟁터에서 거침없이 남용되고 있다. 코소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그랬고, 지금은 리비아에서도 그것이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세계는 여전히 방사능 오염에 대해 무감각하다. 원자력 마피아의 이익추구 욕망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이대로 가면 공멸이 분명한데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핵에 대한 무관심·무감각의 결과는 반드시 묵시록적 상황을 낳는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한나 아렌트의 첫 남편이기도 했던 독일 철학자 균터 안더스가 생전에 한 말이다. 그는 핵에 대한 무관심·무감각은 무엇보다도 현대인에게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대사회는 경제성장과 효율성의 원리에 압도적으로 지배되면서 세계 자체가 거대한 기계로 변했고, 인간은 한갓 그 기계의 부품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양심과 책임과 윤리의식, 즉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상상력의 결여는 현대인의 숙명이 되었다 ― 이것이 안더스의 비관적인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죽을 때까지 핵 없는 세상을 위해서 열심히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