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선거철이 되었다. 선거라는 게 민주주의를 가장한 요식행위 이상의 것이 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는 이상, 이맘때면 늘 선거상황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지금은 무엇보다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이 엄청나게 높아져 있는 상황이다. 현 정권이 자행해온 온갖 과오와 실정은 일일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지난 몇년간 우리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에 의해서도, 국가기구가 얼마든지 헌법과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했다.
그런 점에서, 다가오는 4월 총선에서 야당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일단 다행스럽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정권이 바뀌어 봤자 별수 없겠다는 허망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정권이 바뀌면 당장 남북관계가 호전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정권교체의 의의는 클 것이다. 남북간 화해, 협력, 나아가서 평화구조의 정착은 더이상 방치해둘 수 없는 과제임은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수준으로 복구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질적인 성취에 이르자면 남한의 정치와 사회분위기가 훨씬 더 합리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이성과 상식을 존중하는 정치시스템의 확립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원자력 문제도 마찬가지다. 후쿠시마 사태라는 대참사 앞에서도 한국정부는 이것을 오히려 원자력 강국으로 도약할 기회로 삼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이것은 실로 뻔뻔스러운, 불가해한 반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모든 나라가 원자력 문제에 관해서는 적어도 겉으로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데도, 이명박 정부는 다수의 신규 원전을 건설하는 것은 물론, 원전의 해외 진출 계획을 공표하는 극단적인 만용을 드러내고 있다. 이 명백히 자멸적인, 어리석은 작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권력자의 무지와 단견 혹은 탐욕 이전에, 근본적으로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의회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상적인 정치란 결국 이성과 상식에 의거한 발언이 의회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대통령의 권한이 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의회가 존재하는 것은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제어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 성패는 결국 의회에 달려있음이 분명하다.
의회가 제 기능을 하려면, 말할 것도 없이, 양질의 인물들이 의회에 진출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한국의 선거제도로는 사심 없이 행동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들의 국회 진출이 극히 어렵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지금과 같은 소선거구제 지역구 중심의 선거제도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지역 토호들에 영합하고, 금권세력과 결탁하는 자들 이외에 국회 진출은 사실상 막혀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국회의원이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는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현행 선거제도는 국회의원에게 지역구 상황에 끊임없이 매달릴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국회의원은 늘 나라 전체의 균형보다도 언제나 지역구에 대한 충성을 먼저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고, 그 결과는 국가예산 배정의 뒤틀림을 포함한 온갖 부조리, 몰상식, 비리, 부패의 만연으로 나타난다. 일반시민들이 정치라면 무조건 더럽다는 선입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리 정당이 좋은 인물들을 공천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정당은 이기기 위해서 종국적으로는 당선 가능성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고, 그러자면 양심과 관계없는 인물의 천거가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선거에서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은 흔히 돈과 조직 이외에 ‘인지도’라고 한다. 그러나 대중미디어 사회에서 인지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인간의 실제 사람됨이나 능력과는 사실상 아무 관계가 없는 허상이기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늘 정치판이나 대중적 시선이 모여드는 곳에서 익히 보던 얼굴들이 쉽게 당선되고,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후손들에 의한 정치판 독점 현상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정치가계급이라는 기이한 세습적 집단의 형성이다.
지금과 같은 선거제도로는 헌법정신이나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헌법적 가치의 실현을 구조적으로 저지하고 있는 게 바로 선거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급한 것은 헌법 개정이 아니라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동안 이 문제를 환기하는 사회적 여론이 없었던 게 아니다. 예를 들어, 비례대표제의 확대를 요구하는 논리가 바로 그런 것이다. 생각해보면, 전면적 비례대표제야말로 이상적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적어도 독일연방의회 수준만큼이라도 비례대표제가 확대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합리적인 의회기능이 발휘되는 날은 영영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거제도의 개혁도 결국 현재의 국회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게 문제이다. 현직 국회의원의 최대 관심사가 오로지 또다시 국회의원이 되는 것에 있다면, 그들이 자신의 개인적 이익에 반할지도 모르는 선거제도 개혁에 나서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실제로, 최근 야당 일각에서 비례대표의 비중을 좀더 확대해야 한다는 얘기가 조금 나오더니 어느새 없던 일이 되어버리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한심한 것은 현재 제일 큰 야당세력, 즉 민주통합당의 자세이다. 그들은 절치부심, 다시 다수당이 되어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노무현 정부 시절의 사람들이 주축이 돼있는 민주통합당이 어떻게 새롭고 좋은 정치를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노무현 정부의 과오에 대해서 깊게 성찰을 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 다만 현재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해 다수 국민이 느끼고 있는 환멸과 절망의 정서에 편승하는 것만으로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으로 그들은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 후에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이명박 시대는 말할 것이 없지만, 노무현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도 끔찍한 일이다. 이런저런 변명을 하고 있지만, 세계경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한미FTA 협상을 개시하고 한사코 밀어붙인 정부가 노무현 정부였음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 역시 사회의 장기적인 생존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토대가 농사라는 사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한미FTA의 폐기에 관해서 말하던 민주통합당의 지도부가 최근 들어서는 폐기가 아니라 재협상을 얘기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농사와 농민과 농촌공동체를 살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참여정부’ 시절에 비해 별로 나아진 게 없다는 게 분명하다. 값싼 석유가 풍부하게 공급되던 시절이 끝났음을 암시하는 징후들이 훨씬 뚜렷이 드러난 지금은 더이상 경제성장이 지속되기 어렵다는 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성적인 판단력을 갖췄다면, 농사의 중요성을 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농사를 처음부터 포기할 것을 기본전제로 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에 더이상 손톱만큼이라도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기가 아니라 재협상을 하겠다는 것은 아직도 농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면, 미국과의 조약을 파기하는 게 두렵다는 생각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 한심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처한 위상을 다각적으로 고려한다면, 한국이 한미FTA를 폐기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미국에 통보한다면, 한국은 세계적으로 단연 주목을 받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제 국제사회라는 것은 아무리 군사력이 강하다 하더라도 미국 혼자서 맘대로 설쳐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라크 침공 때에도 미국은 비록 형식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유엔의 승인 없이는 안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더욱이 지금은 이라크 침공 때에 비할 바 없이 미국의 도덕적 권위와 영향력이 현저히 추락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그동안 미국이라면 덮어놓고 숭배하고 복종해왔던 한국이 미국과의 협정을 파기한다면 오히려 국제사회는 한국을 새롭게 바라보고, 어쩌면 존경의 눈으로 볼지도 모른다. 그러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좀더 많은 발언권을 획득하고, 좀더 자주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될지 모른다. 동시에, 그것은 한국이 정치·사회적으로 질적인 도약을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한미FTA를 파기하면 미국으로부터 응징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왜소한 생각에 빠져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계상황에 대한 무지 혹은 상상력의 결핍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지금은 미국에 의한 일극적(一極的) 지배질서가 끝나가고 있음이 확실하다. 어떤 의미에서, 현재 세계 전역에 걸친 혼돈상태는 세계가 다극화(多極化) 질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의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지금은 온 세계가 금융위기, 석유 및 자원 고갈의 위기, 기후변화·환경위기라는 돌이키기 어려운 복합적인 위기상황에 처해있다. 이 복합적인 위기는 재생불가능한 자원과 에너지의 낭비를 구조적으로 강요하는 미국식 생활방식이 더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려주는 사태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대한 사실은 이제부터는 종래와 같은 경제성장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난 반세기 이상 산업사회는 석유라는 ‘마법의 물질’이 값싸고 풍부하게 공급되는 덕분에 경제성장을 계속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성장이 지속되려면 석유 이외에도 값싼 원료, 값싼 노동력이 풍부히 제공되어야 하지만, ‘값싼 것들’의 시대는 사실상 끝났기 때문이다.
2008년 미국에서 터지기 시작한 금융파산 사태는 이제 유럽으로 건너가 막대한 손상을 끼치고 있지만, 결국은 동아시아에도 파장이 닥칠 것이다. 금융위기는 은행에 대한 규제와 감독을 방기해온 국가권력의 직무유기 그리고 금융업자들의 부도덕한 탐욕도 문제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대 금융시스템 자체에 내포된 구조적인 결함이다. 그 결함이란 오늘날 금융통화시스템의 작동원리는 경제성장이 계속되지 않으면 붕괴될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에 의존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의 금융시스템의 운명은 경제성장을 뒷받침해온 핵심 요인, 즉 값싼 석유공급 상황이 지속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피크오일 이후의 상황에서도 과연 현재와 같은 세계의 금융시스템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합리적인 정치라면 성장이 멈추고, 관행적인 금융시스템이 무너진 이후에 어떻게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고, 안정된 생활을 하며, 환경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경제성장 없는 시대를 상정한 근본적인 성찰은 그 어떤 정치집단한테서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복지국가에 관한 논의는 무성하지만, 성장이 안되면 그 모든 계획·제안이 다 헛것이 될 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완전히 몰각되어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성장 없는 시대에 대비한 지혜의 결집이다. 이를 위해서도 시급한 것은 국가 차원의 정치적 이성이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의 확보이다. 문제는 참신한 인물의 영입이 아니라 양심적인 인간들이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제도의 구축이다. 하지만 구태의연한 선거제도가 계속되는 한,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척박한 풍토에서도 까다로운 장벽을 뚫고 마침내 녹색당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녹색당 참가자들은 대부분 지금까지 정치와 무관하게 살아온 민초들이다. 그들은 소위 엘리트들에 위임된 정치로는 결코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통절히 깨닫고, 공생공락의 새로운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반정당적 정당’을 형성하여 결집했다. 이 사회의 장래는 이 새로운 정치결사체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