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을 땅에서 축출하는 농정
평소 존경하는 사람이 얘기를 할 때면 귀를 쫑긋 세우고 듣게 되는데 글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지금도 기억한다. 김성훈 선생님 얘기다. 참여정부 때 농수산부장관을 지낸 이분을 나는 몇번 만나지 않아 좋아하게 되었다. 1993년쯤에 우리쌀지키기 운동본부 일을 하실 때 서울역 집회장에서 처음 뵈었는데 중앙대학교 부총장인가 하는 자리에 계실 때다. 수수한 풍모가 시골 아저씨 같은 분으로, 특히 눈이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같이 유순해서 더 그렇다. 유머와 비유도 최고 수준이다. 그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농업을 빨리 망하게 하는 세 가지 비법이 있는데, 농지 소유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첫째라고 했다. 농사를 짓건 안 짓건 아무나 농지를 사고팔 수 있게 하면 우리나라 농업은 금방 망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외국농산물이 마구 들어오게 하는 농산물시장 개방이었다. 이때가 이명박 정부 초기였는데 당시 정부의 농정 기조가 바로 이랬다. 정부 관료가 농업이 망해도 농민문제는 복지정책으로 풀면 된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복지정책으로 농민문제를 푼다는 것은 농민 다수를 농사에서 노골적으로 퇴출시키겠다는 것에 다름없는데, 이때 먼저 퇴출되는 농민이 바로 소농이다.
쌀소득보전직불금만 해도 그렇다. 매년 달라지는 지급 대상자와 대상 농지 기준은 오로지 지급 대상을 줄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급액도 계속 줄어든다. 한마디로 농사짓지 말라는 것이다. 누구? 늙은 사람, 땅 적은 사람, 돈을 많이 동원할 수 없는 사람, 대형 농기계를 쓰지 않을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은 농사 그만 지으라는 것이 정부의 변함없는 농업정책이다. 요즘은 농민 개인에게 지원하는 농자재와 농자금은 거의 끊겼다. 농업회사 법인이나 영농조합 법인으로 대상을 바꾸었다. 작년부터는 농업경영체등록이라는 것을 해야만 예취기 면세유라도 받지, 안 그러면 아예 농사짓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오죽하면 정부 공식 호칭에서 농민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농업인 또는 농업경영인이라 부르겠는가. 정부의 영농 관련 시책에 제안서를 내려 해도 마찬가지다. 가족단위 소규모 농사꾼은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런 정책은 이명박 정부에 와서 좀더 심해졌을 뿐이고, 참여정부뿐 아니라 김대중 정부 때도 그랬다. 아니, 대한민국이 생기고 나서 줄곧 그래왔다. 그 덕분에 대한민국 농토는 확 줄어버렸다. 농민 수도 줄었다. 농가소득과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의 격차도 계속 벌어졌다. 뭐 하나 나아지는 건 없고 농가부채만 늘었다.
재밌는 것은 농업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왔는데도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 때는 농업구조개선사업이라는 이름으로 42조원을 농업에 투입했다. 많은 이들이 향수를 갖고 있는 노무현 정부는 ‘6ha 7만 농가 육성’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119조원을 농업농촌종합대책으로 내놓았다. ‘억’도 아니고 ‘조’ 단위다. 그 돈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돈은 대부분 기업에게로 갔다. 특히 대기업들, 기계공업, 전자공업, 석유화학공업, 제약회사, 석유회사로 갔다. 제약회사로 농업지원금이 갔다고 하면 다들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내막을 알면 기가 막힐 뿐이다. 농업정책자금이라는 이름의 돈은 거의 다 농민은 이름만 빌려주는 꼴로, 돈은 기업들로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 촌놈 등쳐먹는 세상은 변하지 않고 있다.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농사짓는 사람도 자가용 굴리고 대형 농기계로 힘든 노동을 대신하니 겉은 번지르르해 보이지만 그게 속 빈 강정이다. 대기업과 관료, 사기꾼들 배만 불리는 시스템은 더 교묘하게 강화됐다. 농사판이 중공업화가 되어서 그렇다. 대형 농기계, 시설농사, 비닐멀칭, 석유화학제품으로 된 농자재, 석유에서 뽑아내는 비료와 농약 등 농업의 공업화의 예는 끝이 없다.
이 과정이 소농 축출 과정이다. 농어촌 지자체들이 연소득 1억 이상 농가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가족노동력 중심의 소농은 안중에 없다. 농식품부 발표에 따르면 2011년에 1억 이상의 소득을 올린 농가가 1만7,000여 호에 이른다고 한다. 2억 이상 소득 농가도 760호나 된다고 자랑이다. 이런 농업정책은 농업을 경쟁력 강화, 농사 규모 확대, 기계화, 첨단 과학화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나온다. 소규모 가족농은 생산비는 높고 생산성은 낮다는 평가도 같은 논리에서 비롯된다. 농산물 수입을 전제하고 시장 개방을 기준으로 삼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다. 그러니까 소농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소농이 뭔지에 대한 얘기는 뒤로 미루고, 과연 경쟁력을 높이는 농업, 생산성이 높은 농업, 농사 규모가 커지고 기계화가 진척되면 우리 농업의 미래가 밝을까?
일그러진 이 땅의 농사 현실
작년 봄, 농업관련 신문에 놀라운 소식이 실렸다. 바다 밑 1,000m 아래 차가운 물속에 사는 물고기 유전자를 딸기에 이식해서 딸기가 냉해를 입지 않게 되었다는 보도였다. 겨울철 딸기 생산에 연료비가 절감된다는 설명도 덧붙어 있었다. 우리 농업의 현주소와 잘못된 먹을거리의 범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리가 GMO(유전자변형농산물)식품을 멀리하는 이유가 뭔가. 나중에 어떤 변이를 일으킬지 모르는 시한폭탄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육종과는 달리 GMO는 서로 다른 종의 생물을 교합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잡초와 콩, 옥수수와 바이러스 등을 실험실에서 인위적으로 교합시킨 것이다. 가장 많이 재배되는 비티옥수수는 ‘바실루스 튜링기엔시스’라는 토양박테리아를 옥수수 속에 집어넣은 것인데, 이 박테리아는 벌레를 죽이는 독성이 있다. 그래서 벌레들이 감히 옥수수에 달려들지 못한다. 이런 옥수수를 사람이 먹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게 이 종자를 만들어낸 다국적기업 몬산토의 주장이다. 과자나 양념, 간장 등으로 변신하여 GMO옥수수가 우리 밥상을 점령한 지 오래다. 사료로 만들어진 것은 축산물을 통해 우리 입으로 들어온다.
문제의 심각성은 생물농축에 있다. 수은이나 카드뮴, 납 등의 중금속과 DDT, BHC 등의 농약, 합성수지 성분인 PCB는 자연 속에서 분해되거나 배설되지 않고 생체에 쌓였다가 먹이사슬을 따라 상위 개체로 이동하는데, 먹이사슬 위쪽으로 갈수록 농축비율이 급격히 높아져서 심각한 장애를 일으킨다. 토양이 오염되면 풀이 오염되고 풀이 오염되면 초식동물이 오염되고 육식동물도 오염된다. 마지막에 육식을 하는 사람에 이르면 수천 배 오염도가 높아진다. 오염물질은 분해되거나 배설되지 않기 때문이다. 4단계 먹이사슬을 거치는 동안 농축도가 1,000배 높아진다는 보고가 있다. 농약류와 합성수지류는 뇌종양, 뇌출혈, 위장장애, 근육마비 등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이 경쟁력과 효율성, 시장경제를 우선시하는 농업의 일그러진 실태를 보여주는 예는 부지기수다. 종이 다른 식물과의 교합은 물론, 바이러스와 교합된 유전자조작 옥수수도 회피할 마당에, 물고기 유전자를 떼어다 집어넣은 딸기를 먹을 때 우리 몸속에서 몇 년에 걸쳐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
추석을 앞두고 벌어지는 기막힌 사과농장의 현실을 보자. 추석 전에 사과를 출하하기 위해 사과밭에 지베렐린이라는 성장촉진제를 쓴다(작년에는 농식품부장관이 나서서 공공연하게 농가소득을 올린답시고 지베렐린 살포를 촉구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지베렐린이 무엇인가? 성장촉진제인데 벼의 키다리병을 일으키는 병원균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지베렐라 푸지쿠로이’라는 병원균을 배양해서 만든 농약이다. 현대 농업에서는 온갖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식물 성장을 조절하는 장치를 만들어 쓴다. 씨 없는 포도도 지베렐린으로 만든다. 시클라멘이라는 개화촉진제로 꽃을 강제로 피게 한다. 담배농사에선 겨드랑이 눈 억제제로 ‘말레산히드라지드’라는 약물을 쓰는데 이 약물은 두통, 현기증, 말초신경염, 간장애 등의 부작용이 있다. 동물은 어떨까? 소와 돼지도 ‘EC―X’라는 발정제를 사용해서 억지로 새끼를 배게 한다. 발정제를 투약해서 발정을 하면 그때 수놈 정액을 주입해 인공수정을 하는 식이다. 이 동물들은 인간의 돈벌이 때문에 세상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짝짓기 한번 못 해보고 일생을 마친다. 인간의 야만이 다른 생물종에까지 광범하게 미치는 현실이다. 농사에 쓰이는 화학물질 중에 ‘카바릴수화제’라는 적과제를 빼놓을 수 없다. 적과제는 과수밭에서 열매를 솎아내는 약물이다. 손으로 꽃을 따주어야 열매가 적당히 열려 굵어지는데, 일일이 손으로 딸 수 없다 보니 농약을 쳐서 이제 막 맺히기 시작한 열매를 죽여버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농법이다. 돈벌이가 목적인 농업이다. 농산물을 먹은 사람들 몸에 당장 무슨 일이 생길지, 내일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관심도 없고, 알 바도 아닌 그런 농업이다.
봄철에 마트에서 딸기를 사보면 애기 주먹만큼이나 크다. 붉기는 어찌나 붉은지 붉은색 물감을 발라놓은 것 같다. 볼레로, 엘란, 플라멩코 같은 비닐하우스에서 공장식으로 생산한 개량종 딸기들이다. 모든 종자 개량의 목표는 동일하다. 크게, 달게, 균일하게, 생육기간을 짧게 하는 게 유일한 목표다. 이 목표를 달성하면 ‘우량종자’가 된다. 생산성·경쟁력 있는 농산물이 된다. 그러자니 다른 요소는 부차적이다. 허약하기 짝이 없는 종자, 물, 비료를 계속 줘야 된다든지 하는 요소들은 비용개념으로 취급된다. 비료도 일종의 성장촉진 약물이다. 성장이 빨라야 생산기간이 단축되고 비용이 절감된다. 완전히 공장논리다. 생명이라는 개념은 없다. 그런데 덩치가 큰 데다 빨리 성장하다 보니 허약하다. 살충제와 살균제 농약을 먹고 자랄 수밖에 없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농약의 지속성을 높이기 위해 유착제도 뿌리고 색깔을 좋게 하기 위해 착색제도 뿌린다. 벌이만 좋다면 비용이 더 드는 것은 얼마든지 감수한다. 이런 화학농법으로 생산한 농산물이 사람 몸에 이로울 리 없다.
석유화학농업의 종식이 임박했다
문제는 언제까지 이런 농법이 가능하느냐는 점이다. 이미 끝났다고 본다. 관변학자들마저도 더이상 통할 수 없는 농사법이라고 지적한다. 우선 땅이 망가진 점을 든다. 대형 농기계 사용으로 땅이 굳어버렸다. 이를 경반층이라고도 하고 비독층이라고도 한다. 트랙터 삽날이 헤집고 들어가는 30cm 정도 아래는 십여 톤에 이르는 대형농기계가 계속 짓누르고 다니다 보니 바위보다 더 딱딱하게 다져져서 공기도 안 통하고 배수도 되지 않을 뿐더러 뿌린 농약이나 비료가 그곳에 고여있게 된다. 경반층과 비독층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품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할 수 없다.
화학농법은 토양유기물을 남기지 않으며 토양미생물도 다 죽여서 결국 땅을 죽게 만든다. 땅이 죽으면 농사는 끝이다. 유기물이란 미생물 활동에 의해 분해가 되는 것으로 분해가 되면 식물의 먹이인 무기질의 원료가 된다. 각종 농사 부산물인 콩대, 옥수수대, 깻대, 콩깻묵, 어분, 비지, 부엽토, 미강 등에 톱밥, 왕겨, 가랑잎 등이 다 토양유기물이다. 이런 유기물이 풍부해야 땅을 기름지게 하는 토양미생물이 활동하기 좋다. 이 부분에서 토양미생물의 역할과 기업형 화학농업과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토양미생물이 작물에 주는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미생물 얘기를 할 때는 콩과식물과 뿌리혹박테리아와의 공생관계를 예로 드는 경우가 많다. 토끼풀이나 콩, 팥, 싸리나무 등이 다 콩과식물인데 이런 작물의 뿌리에 들어온 박테리아는 숙주식물의 영양분으로 살아가고, 대신 공기의 81%나 되는 질소를 끌어당겨서 뿌리가 먹기 좋은 유기질소로 바꾸어 식물에 제공한다. 그런데 농기계를 들이대고 농약을 치면 이 모든 것들이 다 죽는다. 유기물이 많고 미생물이 잘 살고 있어야 흙은 떼알구조가 되어 작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토대가 되는데, 정반대 쪽으로만 가니 땅은 죽어 비가 조금만 와도 토사가 지고 습해장애도 일으키고 가뭄을 탄다. 떼알 조직이라는 것은 습기를 보존하면서 배수도 원활하게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연출하는 흙을 말한다. 이런 흙은 통기성도 좋아 작물 뿌리에 산소를 잘 공급한다. 바로 유기물과 미생물이 흙을 살아있게 하는 것인데 현대 시장논리에 포박된 생산성 중심 농업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다.
땅이 죽으니 죽은 땅을 부축해서라도 농작물을 생산하기 위해 시설농사라는 비닐하우스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온실효과를 노리고 비닐하우스를 만들었으나, 이제는 자연상태에서 스스로 자랄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작물들을 모아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인위적 조작과 조절을 통해 농산물 생산이 이뤄지는 공간이 비닐하우스다. 농작물이 마치 요즘 청소년 같다고 하면 좋은 비유가 되겠다. 칼로리 높은 음식만 먹고 운동량은 부족하니 100m 달리기를 하면 끝까지 달리는 애들이 없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극성스런 부모가 다 챙겨주니 스무 살이 넘어도 자립은커녕 제 손으로 밥상 하나 차릴 줄 모른다. 허드레 잡일로 돈을 벌어 마트에서 사 먹을 줄만 안다.
비닐하우스 덕분에 한겨울에 오이도 먹고 딸기도 먹고 채소도 먹는다. 싱싱하다 못해 퍼런 상추가 겨울 식당에 삼겹살과 함께 오르기 일쑤다. 그런데 새파란 겨울 채소를 절대 먹지 말라고 경고한다. 채소, 과일, 견과류는 건강의 기본인데 채소를 먹지 말라니? 이유가 뭘까? 질소 과다 식품이기 때문이다. 발암물질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색이 진하고 윤기가 나며 보기도 좋은 이런 엽채류는 액상 질소비료를 줘서 키운 비닐하우스 출신이다. 과다 질산태질소는 우리 몸속에서 아질산염으로 바뀌고, 헤모글로빈과 결합하여 메트헤모글로빈을 형성해 혈액의 산소 운반능력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산소결핍증이 생긴다. 채소를 먹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경쟁력 중심 농업, 생산성 중심 소득증대 농업이 차넣은 자살골들이다. 이런 질소성분 많은 채소와 삼겹살을 먹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채소류의 질소 함량이 500ppm 이상이면 위험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비닐하우스 겨울 채소들은 2,000~6,000ppm을 웃돈다는 보고가 있다. 10,000ppm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건 짐승에게도 못 줄 폐기 대상인데 버젓이 밥상에 오른다. 망가진 땅은 망가진 먹을거리를 만들 뿐이다.
망가진 땅 다음으로 지적되는 것은 석유문명의 종말이다. 성인 한 사람이 200일 동안 할 농사일을 단 16시간으로 단축시킨 것이 석유다. 석유 한 숟갈이 성인 남자 1시간 노동량이라고 하니, 보통 생활수준의 현대 가정은 평균 노예 50명씩 거느리고 사는 것과 같다는 지적은 석유문명에 도취된 현대 물질사회를 잘 드러낸다. 학자들 간에 이견은 있으나 대략 석유 총 매장량은 2.2조 배럴이라고 한다. 퍼 쓸수록 매장량은 줄다가 끝내 사라진다. 한정되어 있는 자원이기 때문이다. 석유생산정점은 몇년 전에 지났다는 게 정설이다. 석유문명의 종말과 함께 농업도 과거로 회귀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석유에 의존하는 지금의 농사가 결코 계속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소농을 경건하게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소농운동은 새로운 문명운동
자연은 힘이 세다. 힘이 셀 뿐 아니라 신비하다. 자연의 복원력·치유력·회복력은 인간의 어떤 약물도 따라갈 수가 없다. 사람도 자연상태에 보다 가까워지면 병도 없고 갈등도 없다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다. 바로 이것이다. 소농 말이다. 자연에 살며시 얹혀살며 자연의 복원력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짓는 농사가 소농이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 현대 농업의 반(反)자연성, 중화학공업화를 길게 얘기했다. 부메랑이 되어 제 발등 제가 찧는 꼴이 되어있는 현실에서 농업도 예외가 아님을 역설한 것이다. 최근에는 빌딩농업, 식물공장이라 하여 아예 흙 없이 수경재배를 통해 어떤 계절이건, 어떤 기상이변이 오건 일정한 수량의 청정농산물을 생산해낼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을 듣는데, 농사의 끝장을 보는 기분이다. 농사는 그것의 이른바 다원적 가치 때문에 천하의 근본이라 했거늘, 망가진 흙에 사죄하고 이를 살릴 생각은 않고 빌딩을 지어 농사짓겠다면 농사를 통해 얻는 자연정화라든가 정서적 순화, 수자원 보전 등 다원적 기능은 포기하는 셈이다. 소농은 철 따라 씨앗을 뿌리고, 그 지역의 제철 음식으로 밥상을 차리며, 핵·석유에너지 의존을 줄이거나 벗어나서 몸에너지·자연에너지·가축에너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농사법이다. 농사 규모만을 기준으로 삼아 대농/중농/소농으로 나누던 시절을 떠올린다면 틀렸다곤 못하지만 맞다고 할 수도 없다.
오래지 않아 인류가 맞게 될 지구적 환경위기 때는 농사가 무엇보다 소중해지면서 지구를 지키는 기본 산업으로서의 가치가 빛나게 될 것이다. 이를 대비하고 미리 나선 사람들이 소농들이다. 지구 위기에서 인류가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 곳은 농업과 농촌과 산촌이다. 왜냐하면 이렇다. 간단하다. 사람은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데 있어 밥과 물, 공기는 필수다. 그래서 소농을 다가오는 새로운 문명의 중심이라 하는 것이다. 소농의 기본은 순환농사다. 사람, 가축, 농장, 하늘, 땅, 물, 이웃이 막힌 데 없이 잘 소통하고 순환하는 삶이다. 그래서 농사 부산물을 외부로 유출하거나 특별히 외부에서 들여올 필요가 없다. 논과 밭, 식구와 이웃, 가축과 농기구 등이 균형을 잘 맞춘 농사다. 모자라서 전전긍긍하지도 않고 남아서 흥청망청하지도 않는다. 자연에서 빌려 쓰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농사다. 농사짓고 생긴 부산물은 반드시 본 땅에 돌려주고, 밭과 그 주변 식물들은 죽이거나 뽑지 않고 베어서 깔아준다. 음식물쓰레기와 똥오줌은 다시 밭으로 보낸다.
요즘 순환농사가 많이 거론되는데 돈벌이 목적으로 순환이다 유기농이다 하면서 접근하는 대규모 농기업은 자연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않는다. 순환을 말하려면 자연에 인간의 작용력을 최소화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농약과 비료만 안 쓰면 유기농이라고 생각한다면 단순한 생각이다. 순환농사는 순환의 대상과 범위 또는 순환 주기 등을 최소 단위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순환이라는 개념을 물리적 차원에서 인문·사회적 차원까지 확대해서 접근하는 것이 진정한 소농의 정신이라 하겠다.
소농의 첫째 정신이 순환하는 삶이라면, 두 번째 정신은 자립하는 삶이다. 자립은 자급에서 출발한다. 자급능력이 자립의 기초가 된다. 먹을거리도, 입을거리도, 교육도, 건강도, 놀이도, 문화도, 노동력도, 자급률을 일정 부분씩 때로는 100% 이상 확보하는 삶이 소농의 삶이다. 에너지, 물, 맑은 공기도 자급체제를 갖추고 재난에 대비하는 체제가 소농의 삶이다. 때로는 지역 차원의 자립 품목이 있을 것이고, 때로는 원거리 교환을 통한 자립이 있을 것이나 자급의 삶에 뿌리를 두는 농사가 중요하다. 농사에서 입을거리, 집짓기, 에너지, 건강, 교육 등이 생산되도록 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소농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적 삶이다. 이것이 소농의 세 번째 정신이라 하겠다. 선한 공동체, 밥상공동체, 수행과 함께 가는 공동체, 여민동락하는 공동체, 마을공동체, 뜻의 공동체 등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삶을 지향하는 것이 소농의 삶이다. 공유와 사유의 대상이나 범위를 현재의 삶에 맞게 잘 조직하는 것이다. 공동체적 삶이 무너진 현대의 자본주의 삶을 극복하는 대안이다. 파편화된 분열적 삶을 관계 속에서 회복하는 것이다.
미국은 농가당 경지면적이 120ha다. 한국은 1.45ha. 노무현 정부 때 규모화의 목표로 삼았던 7만 가구 6ha가 이룩된들 경쟁이 될 수 없다. 일본도 한 농가당 경지면적은 1.57ha에 불과하다. 규모화를 통해 국제 농산물시장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은 공업을 위한 농업 희생 전략을 윤색한 것으로 보인다. 농사는 그 본령이 경쟁이니 효율이니 하는 것을 중심에 둘 수 없는 특별한 영역이다. 결코 산업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농민’은 사라지고 ‘농업인’이 되는가 싶더니 이제는 ‘농업경영인’이 되어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로 되어 사람을 교육산업 자원으로 전락시킨 것과 같다. ‘농사’도 사라지고 ‘농업’만 남았다. 농사는 하늘 뜻을 알고 온 정성을 다하는 것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기계와 기술이 장악해버렸다. 그래서 시·군마다 ‘농업기술센터’다.
소농은 과일나무 꽃을 솎기 위해 적과제를 뿌릴 수 없다. 그것은 사람으로 치면 황우석 파동 때 생명윤리 논란을 일으켰던 배아줄기세포를 죽이는 것이다. 이미 생명체로 봐야 하는 아기 열매를 약을 쳐서 몰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사후 피임약 복용마저도 금하는 엄격한 생명윤리를 채택하고 있다. 생명존엄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이미 동물, 가축에 대해서는 꽤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식물에까지, 즉 농작물에까지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 먹고살기도 힘든데 동물복지니 식물복지니 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배부른 소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벌이 사라지면 인류가 4년 안에 절멸한다는 사실 앞에서 동물복지, 식물복지가 배부른 소리가 아님은 자명하다. 이것은 떠도는 소문이 아니라 인류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오히려 복지 운운하면서 마치 인간이 시혜라도 베푸는 듯한 표현이 어색할 뿐이다.
음식이 오염되면 사람이 죽는다. 음식은 이동과정, 조리과정에서도 오염되지만 농산물 자체가 오염되어 있으면 근원적인 오염이다. 농산물은 땅이 오염되면 치명적이다. 지금 우리의 땅은 과잉영양으로 영양지수가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다. 사막화가 진행되어 땅심은 사라졌고 겨우 인공시비 영양제 투입으로 연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에는 이제야 겨우 밝혀지는 진실들이 많다. 돈벌이 기업들이 일단 삐까번쩍하게 만들어서 팔아먹고 보는 식이니 그렇다. 시골집 슬레이트지붕은 한때는 각광받던 지붕 마감재였으나 발암물질 덩어리라는 것이 밝혀져 이제 걷어내기 바쁘다. 석면도 그렇다. 건설현장의 최고 단열재였었다. 유리섬유도 그렇다. 석유화학제품의 대명사인 멜라민 수지 그릇이 예쁘고 견고해도 녹도 슬지 않는 신비한 주방용기지만 페놀이라는 환경호르몬을 뿜어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테프론이라는 불소코팅으로 만들어 눋지 않는 후라이팬도 마찬가지다. 열이 가해지고 긁혀서 코팅이 조금이라도 벗겨지는 순간 납이나 카드뮴 같은 중금속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게 이제 밝혀지고 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지금처럼 대형농기계와 화학약품으로 짓는 농사가 빚어내는 재앙은 하나하나 폭로되고 있다. 소농의 등장이 시대적 요청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구를 지켜온 사람들―소농
자연의 섭리를 잘 익히고 그에 따르는 농사가 소농이다. 소농은 농사 규모라기보다 농사법에 가깝다. 농사법이라고 하기보다는 삶 전체의 개벽을 암시하고 있다.
감자밭에 드문드문 울콩을 심어 공기 중의 질소를 끌어와서 거름을 삼게 한다. 가뭄이 오래되어도 식물 뿌리에 바로 물을 주지 않고 멀찍이 물을 줘서 뿌리가 스스로 물기를 찾아 뻗어 나오게 한다. 더디 자라지만 그래야 건강한 농산물이 된다. 고추모종을 옮겨 심을 때는 이삼일 그늘진 곳에 물도 주지 않고 놔두었다가 고추모종의 모든 에너지가 물을 찾아 뿌리로 집중하게 한 뒤에 밭에다 옮겨 심고, 고추 심은 지 한달 동안은 지지대에 묶어주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바로 서도록 하는 게 소농의 농사법이다. 고추 심을 밭에 미리 비료랑 거름을 듬뿍 넣어 로터리 치는 일은 없다. 풀을 매기보다는 남은 상추 씨앗이나 호밀을 골에 뿌려 다양한 식생이 어우러지면서 잡초가 번성하지 않게 하는 식생 과학이 소농에 접목된다. 태양이 주는 풍부한 에너지로 전기도 만들고 온수도 만든다. 현재의 햇볕에너지로 농사를 짓고 과거의 햇볕에너지인 석유와 석탄, 천연가스 등에 대한 의존을 획기적으로 줄인다. 사람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잘 활용하여 육체노동의 신성성을 체득하면서 덤으로 건강을 챙기는 삶이 소농이다.
비닐 없이는 농사 못 짓는다는 말이 나오지만 비닐멀칭이 얼마나 땅과 작물에 해로운지를 알고 비닐로 땅의 숨구멍을 틀어막지 않는 게 소농 농사법이다. 요즘 들판을 둘러보면 너도나도 감자 심은 곳이나 고추 심을 곳에 검은 비닐을 덮어씌웠다. 그렇게 하면 온실효과로 발육도 좋고 잡초도 안 난다. 보습효과를 노리고 비닐을 씌울 때는 비가 온 다음날 씌운다. 이건 한 가지만 알고 나머지는 모르는 것이다. 비닐에 숨이 막힌 땅속 생명체들은 낮에 50℃ 이상 올라가는 고온과 과중한 습기에 다 죽어버린다. 잡초는 안 나겠지만 땅이 죽는다. 작물의 뿌리도 부실해진다. 밤낮 일교차가 너무 커서 물에 잠기다시피 한 잔뿌리가 상한다.
소농은 참나무나 밤나무 등의 활엽수종이나 대나무밭 아래 부엽토를 모아 토양미생물을 배양하여 밭에 뿌려 밭에 지렁이와 땅개, 거미, 무당벌레가 번성하게 한다. 하루에 자기 몸무게보다 더 많은 흙을 먹으면서 그 양만큼 배설을 하는 지렁이가 그 과정에서 해로운 미생물을 제거하고 일반 흙보다 5배나 많은 질소, 2배나 되는 칼슘, 7배 칼륨을 만든다는 사실을 잘 안다.
육식도 즐기지 않는다. 가축이 아니라 축산이 되어버린 고기는 오염이 심해서만이 아니라 학대에 가까운 비참한 동물의 일생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멀리한다. 해물도 비슷하다. 성장호르몬을 강제로 조절당한 양식장의 연어는 옥수수 사료를 먹고 급성장하며 일반 연어보다 15배 크게 자란다. 연어는 원래 초식 물고기가 아니다. 연어는 어릴 때는 강에서 살며 수생곤충을 잡아먹는다. 커서 바다로 나가면 동물성플랑크톤을 먹다가 더 성장하면서 갑각류, 어류 또는 갑오징어나 꼴뚜기 같은 두족류를 먹고사는 육식성 물고기다. 이런 연어를 속성으로 키우기 위해 유전자조작을 해서 옥수수를 먹이는 것이다. 이런 물고기를 즐겨 먹는 것은 소농의 식성이 아니다. 소농은 모든 인위적인 돈벌이 목적의 수단들을 경계하고 배제한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실험결과가 있다. 일반 물고기 6만 마리 속에 유전자조작으로 덩치가 큼직한 물고기 60마리를 넣은 실험이다. 유전자조작 물고기는 덩치도 크고 번식률도 일반 물고기의 4배에 달해서 일반 물고기는 점점 줄고 유전자조작 물고기가 늘더니만, 겨우 5세대 만에 일반 물고기 개체 수를 추월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유전자조작 물고기는 성체가 될 때까지 살아남지 못하는 특징이 있어서 특정 시점에서부터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40세대가 되는 시점에서 모든 물고기가 멸종했다. 끔찍하지 않은가?
자연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몬산토에서 만든 고약한 제초제로 라운드업이라는 게 있다. 이 몬산토는 지금 우리나라에 떠도는 엄청난 괴담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삼성과 함께 새만금 부지에 세계적 규모의 GMO 생산기지를 만든다는 괴담이다. 그럴듯하나 진위는 오리무중이다. 정부의 골든시드 프로젝트가 이를 부추기는 측면도 있다. 어쨌든 라운드업은 녹색식물은 다 죽인다. 그러나 ‘라운드업레디’라는 몬산토가 유전자조작으로 만든 콩만이 안 죽었다. 콩 종자와 제초제가 짝을 이뤄 팔렸다. 그런데 웬걸, 슈퍼잡초가 등장했다. 라운드업에도 죽지 않는 잡초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주요 농업지역에서 출산율이 저하되는가 싶더니 암 발병이 급증했다. 제초제와 유전자조작의 독성이 돌고 돌아 사람의 밥상을 덮친 것이다. 자연은 녹록하지 않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콩과 옥수수의 95%가 유전자조작된 것이다. 우리나라 콩 소비량의 93%가 수입이다. 옥수수 자급률은? 0.8%다. 끔찍하다. 자 어떤가. 이래도 지금과 같은 방식의 농업을 고수할 것인가. 낭떠러지에 선 현대농업의 현실을 알기에, 스스로의 행위가 자신을 해치는 꼴이 되는 현대 물질문명병을 알기에, 임종갑 박사 같은 농학자는 소농을 진정한 애국자고 진정한 지구 파수꾼이라 칭송하지 않았겠는가? 쓰노 유킨도(津野幸人) 같은 일본의 농학자도 지구를 지켜온 사람은 소농이라고 했다. 이때 뒤따를 질문이 예상된다. 그렇게 농사지어서 먹고살 수 있겠냐고? 지구의 식량난을 어떡할 거냐고? 한마디만 하자. 현재 전세계 농지의 1/3에서 동물 사료작물이 재배되고 있다.
지난 총선 때 녹색당은 농민기본소득제를 주창했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사회적 기여도를 감안하고 농지 보전 역할에 대한 정당한 응대로서 기본소득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많은 공감을 얻었다. 소농의 역할은 수출 많이 하는 대기업 못지않다. 아니,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대기업은 공기, 물, 땅을 해치면서 돈을 벌어 공공의 부담을 가중시키지만, 농사는 그 행위 자체가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다. 물론 소농의 농사법일 경우에 그렇다. 중화학공업에 포박된 현대 농사는 그 반대다. 오죽하면 지구생태계와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위험요소가 자동차 등의 이동수단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축산업이라고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2005년에 보고서를 냈을까.
농민기본소득보장제는 이런 정신에서 출발한다. 뿐만 아니라 농민이 인구의 15%는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한 농가가 여섯 가정을 먹여 살리는 정도의 농사가 적절하다 하겠다. 자연의 복원력을 해치지 않는 농사 규모가 어떤지는 더 연구해야 하겠지만 자연을 맹렬히 훼손하는 현재의 농업이 물러가면 그 자리를 메워나갈 사람들이 필요하다. 바로 다음 문명을 이어갈 소농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