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협력이라는 말은 언제 어디로 사라져버렸는가. 몇 달째 계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살벌한 정세는 실로 답답하고 통탄스럽다. 6·25전란이 끝난 지 60년이 지났음에도, 지금 또다시 대량살상과 처참한 파괴가 현실이 될지 모른다고 걱정해야 하는 이 터무니없는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어느 쪽의 책임이 더 무거운지 따지기 전에 민족 전체로서 한심하고, 부끄러운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87년 민주화 이후 시작되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동안에 괄목할 만하게 진행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들 덕분에 이제는 적어도 전쟁 걱정만은 덜었다는 게 한동안 우리들 대부분의 생활실감이었다. 그래서 ‘실용주의’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정치가 잘못되면 모든 게 허사라는 것을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원래 남북관계란 극도로 민감한 것이어서 신뢰 구축은 어렵지만 파탄은 언제든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의 이 극히 예민한 성격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력이나마 갖고 있다는 증거를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내용도 잘 모르면서 북한체제의 붕괴만을 바라며 기다리는 것 말고는 어떠한 실효성 있는 대북정책도 내놓지 않은 채 5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했던 것이다.
그 어리석고 무책임한 정책 아닌 정책의 결과, 마침내 북한은 지금 자신이 핵무장 국가가 되었다고, 그리하여 위협적인 세력이 되었음을 소리 높이 주장하고 있다. 물론 미국정부가 북한의 주장과 요구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가 관건이기는 하다. 그러나 만약 미국이 계속해서 이 상황을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위해서 활용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한다면, 동아시아는 혼돈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때는 설혹 전쟁이 아니더라도 전쟁 직전의 긴급상황이 일상화될 것이고, 군비경쟁이 끝없이 확대될 것이다. 전쟁 장사꾼들의 이익을 위해서 모든 것이 제물로 바쳐져야 하는 이러한 상황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우리들의 미래는 실로 암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벌써 일본의 극우세력은 이 상황을 군침을 흘리며 반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군대의 보유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현행 ‘평화헌법’의 폐기를 단단히 벼르고 있는 자민당 정권은 곧 다가올 참의원 선거에서의 압승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들에게 ‘핵무장 국가 북조선’의 등장은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지금 북한 핵무장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일본 국민들이지 지배층은 아닐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국민들이 불안을 느끼면 느낄수록 자신들의 호전적 목적 달성이 더 쉬워진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동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역사의 명백한 후퇴이다. 한때 급속한 경제성장과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이유로, 세계문명의 중심축이 동아시아로 이동할 것이라는 예측이 성행한 적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동아시아의 새로운 문명이 세계를 구할 것이라는 둥,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냉정히 살펴보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금 저마다 골치 아픈 난제들을 껴안고 헤매고 있는 실정이다. 개탄스러운 것은, 이른바 정치지도자라는 자들이 이 난제들을 해결하는 유력한 수단의 하나로 국가 간의 분쟁 혹은 적대감 조성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수법에 기댄다는 점이다. 현재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물론 일본의 정치권력이다.
2011년 3월,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미증유의 재앙으로 가공할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동시에 대규모 방사능 재해로 인근 국가들을 포함하여 세계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막대한 피해를 끼친 가해자이기도 하다. 그러한 처지이면서도 일본이라는 국가는 지금까지 어떤 이웃나라에게도 한마디 죄송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불가사의한 것은, 이 상황에서 ― 또한 여전히 방사능 유출이 계속되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 ― 오히려 그들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이라는 역사적 과오에 대한 책임을 새삼스럽게 부인하고, 군국주의를 옹호·정당화하는 논리를 거리낌 없이 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타자(他者)에 대한 배려가 철저히 결여된 자세이다. 싫든 좋든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갈 존재로서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인정한다면 이처럼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일본의 극우 지배층이 과연 무엇을 믿고 저토록 오만한, 그러나 한없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전역에서 아직도 압도적인 것은 배타적인 국익 논리이다. 제국주의 시대는 지나가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제사회’라는 관념이 확립된 지도 오래라고는 하지만, 오늘날 여전히 국가 간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연대와 협력이 아니라 배타적인 경쟁 혹은 약육강식의 논리인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현상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축소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한때 사회철학자들은 번성하는 국제무역이 국제평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현실은 그 반대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넘쳐나고 있다. 오늘날 미국 주도의 글로벌 ‘자유무역’체제라는 것은 야만적인 침탈·약탈을 무역의 논리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제도화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자유무역’의 ‘자유’가 뜻하는 것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자유로운’ 강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확실하다.
약 70년간 지속된 소비에트사회주의는 허다한 모순을 내포한 체제였다. 그리고 그 모순들이 누적된 필연적인 귀결이 소비에트사회주의의 붕괴였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볼 때, 그 ‘현실사회주의’가 세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자본주의의 ‘인간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소비에트사회주의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사회주의라는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경쟁체제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본주의체제는 어느 정도 자기절제를 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노동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일정한 양보를 하고, 중요한 복지정책들을 실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에서의 사회복지시스템이 소비에트사회주의체제 존속 기간 동안 흔들리지 않고 건재해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사실은 또한 대처와 레이건 정부에 의해 주도된 신자유주의 논리가 세계 전역을 휩쓴 시기가 어째서 소비에트사회주의 몰락 이후였는지 그 이유를 자연스럽게 설명해준다. 신자유주의란 자본주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형태의 약육강식 논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한 논리가 거침없는 폭주를 하게 된 것은 역시 소비에트사회주의라는 경쟁체제가 소멸됨으로써 자본주의가 더이상 자제력을 발휘해야 할 필요성이 사라진 현실과 따로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는 신자유주의도 완전히 기능부전에 빠졌다. 도덕이나 윤리와는 애초에 인연이 없지만, 신자유주의는 적어도 경제효율성을 높여주고 성장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선전돼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식 처방들의 현실적 결과는 카지노경제의 창궐, 과도한 부의 편중, 대중적 빈곤화, 사회정의의 붕괴, 민주주의의 후퇴, 삶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자연적·사회적 토대의 전면적 파괴 등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지금 인류사회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깊게 생각해보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 위기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적 역량이 이 세계에 과연 존재하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까닭이 있다. 오늘날 정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은 흔히 좁은 이기심과 근시안적 이해관계에 갇힌 좀비정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가 이렇게 왜소화된 것은 그동안 고삐 풀린 자본의 폭주 속에서 인간성의 황폐화와 정신의 빈곤화가 심화·확대되어온 탓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열등한 정신, 질 낮은 정치로는 이 엄중한 상황을 뚫고 활로를 여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또다른 사회는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크고 작은 숱한 실험들이 시도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에 값하는 것은 근년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진행돼온 독특한 정치적 실험, 즉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전 대통령이 명명한 ‘21세기적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차베스의 정치는 국가라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차베스는 대내적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참여민주주의를 적극 장려하여 국가권력이 아니라 민중권력을 강화하려 했고, 대외적으로는 국가 간의 연대와 협력을 통한 호혜적인 교류·교역을 지향하고 실천했다. 그의 정책의 ‘급진성’은 종래의 정치와는 완전히 다른 이 ‘새로움’에서 비롯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제창한 ‘21세기 사회주의혁명’은 러시아혁명의 연장선에 있는 게 아니었다. 러시아혁명은 기본적으로 서구 근대의 산업주의 논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은 수백 년간 억압돼왔던 토착 민중문화 전통에 기초하여 세계의 근본적인 재생을 겨냥해왔다.
차베스가 중심이 된 이런 움직임을 세계의 주류 언론들은 끊임없이 깎아내리고 비난해왔다. 그것은 글로벌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익숙해진 체질로서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화를 받아들이기보다 자멸을 원하는”(W. H. 오든) 자들의 좁은 안목에 기대어 우리들이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새로운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보다 큰 어리석음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