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민주주의
그리스의 통치형태는 도시국가였다. 모든 그리스 도시는 독립국가였다. 가장 좋았을 때, 아테네 도시국가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회가 평화와 전쟁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외부세력이 파견한 사자(使者)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외부세력이 전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결정했다. 그들은 모든 심각한 세금문제를 처리하고, 전쟁 때에는 지휘를 맡을 장군들을 임명했다. 그들은 국가 행정을 조직하고, 관리들을 임명·통제했다.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는 바로 정부였다.
아마도 그리스 민주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추첨, 즉 제비뽑기를 통해서 행정을 조직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스의 많은 공직자 대부분은, 사람들의 이름을 모자에 던져 넣고, 그 모자에서 무작위로 끄집어내어 지명하는 방법으로 선택되었다.
오늘날 평균적인 노동조합 관료나 노동당 의원들은, 무작위로 선출된 노동자 누구라도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기절을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그리스 민주주의를 움직이던 대원칙이었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정부 밑에서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명이 꽃을 피웠던 것이다.
근대 의회민주주의는 대표자들을 선거로 뽑고, 이 대표자들이 정부를 구성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민주주의가 출현하기 이전에 다양한 통치형태가 존재했고, 그중에는 대의제 정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들어서면서 그들은 대의제 정부를 거부했다. 그리스인들은 보통의 시민들이 정부의 업무를 실제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모든 시민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민회가 모든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통제했을 뿐만 아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평등을 뜻하는 말, 즉 ‘이소노미아’는 민주주의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그리스인들에게 이 두 낱말은 같은 뜻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이디오테스’라고 불렀다(오늘날 ‘천치’라는 뜻을 가진 낱말, 즉 ‘idiot’는 거기서 유래했지만, 우리는 그 말을 그리스인들에 비해서 매우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공직자들을 제비뽑기로 선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공직자들의 임기도 제한했다. 한 시민이 한번 공직을 맡으면, 다시 그 공직을 맡지 않도록 배제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은 누구든지 돌아가면서 국가를 운영하는 방법, 즉 윤번제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지식인들은 이러한 시스템을 혐오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일반시민이 아니라 모름지기 유능한 자에 의해 정부가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동안, 철학자들과 정치평론가들은 그리스인들이 진심으로 인간평등을 믿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낀 나머지 이 민주주의를 비난하거나 혹은 직접민주주의는 오직 도시국가에만 어울릴 수 있다고 설명하려고 했다. 그들은 대규모의 근대적 사회들은 그러한 형태의 정부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적 사회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그 사회는 직접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통치되는 것이 그만큼 더 절실히 필요하다고 믿는다(물론 그 직접민주주의가 그리스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일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갈수록 커지는 방대한 관료제를 피할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 민주주의의 헌정체제와 통치형태를 비록 짧게나마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선, 그리스 민주주의가 정의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자. 한동안 그리스 도시들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특별한 유형의 행정관과 재판관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중엽에 민주주의가 세력을 얻게 되었을 때, 사법제도는 전면적으로 재조직되기 시작했다. 민회의 중요한 회기 동안 필요한 인원은 6,000명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매년 연초에는 그들은 각각 500명으로 구성된 12개의 소집단을 제비뽑기로 선출했다. 이 500명이 재판을 다루고, 그들의 결정이 최종적인 것이었다. 그리스 민주주의에서는 행정관이나 재판관은 단지 법정 일을 돕는 서기의 역할만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은 예비적 정보를 제공하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사회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다만 형식적인 것일 뿐이었다. 당시의 시민 배심원들은 오늘날처럼 단지 사실에 대한 판단만을 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법률 자체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렸다. 소송 당사자들은 스스로 변론을 했다. 물론 그들은 법률에 정통한 사람에게 변론 작성을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그 변론은 자신이 직접 읽었다. 그리스인들은 성문화된 법이건 아니건, 법을 크게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저 민주주의자들은 법의 논리를 신봉했을 뿐만 아니라 평등의 원칙을 무엇보다 신봉했다.
비전문가들
이러한 사법제도가 근대적 사법제도보다 열등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매우 용감한 사람일 것이다. 법률가들이 공중에게 벌금을 과하고, 재판은 법정에서 법정으로 이어지면서 한없이 계속되고, 중대한 문제들은 때때로 수백 년간의 판례, 수백 권의 법률서를 통해서 추적해야 할 길고 복잡한 법률과 규정들의 미로를 거쳐서 결론이 내려지는 괴물 같은 근대 사법제도와 비교해서 말이다. 러시아혁명 직후 아직 그것이 영웅적인 단계에 있었을 때, 볼셰비키들은 ‘인민법정’을 실험해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소심했다. 어쨌든 그 실험 중 어느 하나도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다. 그리스인들이 행한 방법의 핵심은 재판권을 전문가들에게 넘겨주지 않고,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의 지성과 정의감에 맡겼다는 점에 있다.
조직 혹은 정부
우리는 아테네의 정부조직에는 어떠한 원시적인 요소가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 반대로, 그것은 어떠한 근대적 정치가, 법률가들의 조직으로도 능히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민주적 절차에 따른 기적적 현상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모든 사람이 투표권을 가짐으로써 평등이 확립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민회는 500명으로 된 평의회를 임명하여 도시를 운영하고 민회의 결의사항들을 집행하도록 했다.
평의회도 평등의 원칙에 지배되었다. 도시는 10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졌고, 1년은 10개의 기간으로 나뉘어졌다. 도시의 각 구역에서 50명을 제비뽑기로 뽑아서 평의회에 참여하게 했다. 각 구역으로부터 온 평의원들의 임기는 1년의 10분의 1 기간 동안이었다. 그리하여 50명이 언제나 행정을 맡고 있었다. 어느 구역 출신 50명의 평의원들이 행정을 담당할 것인지 순서를 정하는 것은 제비뽑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행정에 봉사하는 50명의 평의원들은 매일 의장을 선택했고, 이 선택도 제비뽑기로 이루어졌다. 그 의장이 집무하고 있는 날 민회가 열리면 그는 민회에서 사회를 보는 역할을 했다.
평의회에는 서기가 있었고, 그 서기는 투표로 뽑혔다. 그러나 그의 임기는 1년의 10분의 1 기간 동안이었다.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관료주의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 50명 중에서 선출되는 게 아니라 당장의 행정업무에서 제외되어 있는 나머지 450명의 평의원들 중에서 선출되었다.
한번 평의원으로 일한 사람은 재차 평의원으로 봉사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리하여 누구든 봉사할 기회가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스템이 갖는 큰 장점의 하나를 보게 된다.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는 실질적으로 모든 시민은 행정가의 일원이 될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민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대체로 정부 일에 익숙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민회에 제출되는 안건들은 사전에 평의회가 준비하고 조직한 것들이어야만 했다.
결정이 내려지면, 그것들을 집행하는 것은 평의회에 맡겨졌다. 평의회는 모든 행정관들을 감독했고, 어떠한 사무든지 평범한 시민들이 수행하는 게 가능했다.
그리스 민주주의에서는 상근 공무원들은 극소수만 존재했다. 그리스인들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평범한 시민들로 된 특별위원회를 임명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이들 위원회는 각기 꼼꼼하게 스스로의 활동범위를 정하고 업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다양한 업무 영역들을 조정하는 일은 평의회의 소임이었다. 많은 특별위원회들은 정부의 집행업무 처리를 도왔다. 예를 들어, 10명의 멤버로 된 위원회가 해군 관련 업무를 돌보았고, 또 10명의 멤버로 구성된 다른 위원회는 임기 끝 무렵의 행정관에 대해 제기된 불만사항을 청취했다. 흥미로운 위원회의 하나는 종교의식의 수행에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위원회였다. 그리스인들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제들과 사원 관리자들은 선거에 의해서 뽑힌 일반시민들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주교나 대주교, 교황 등의 종교적 관료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위원회들 중 몇몇은 평의회에 의해 선출되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제비뽑기로 뽑힌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온갖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식료잡화상, 양초제조업자, 목수, 선원, 재단사 등등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을 비상하게 신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직업의 종사자이든, 교육 정도가 어떠하든, 평범한 시민들은 누구든 제비뽑기로 뽑혀 국가가 요구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난센스를 용납하지 않았다. 민회가 보기에 하찮거나 바보 같은 안건을 민회에 제출한 개인들은 엄격한 처벌을 받았다.
민주적 연극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민주주의와 평등을 신봉했느냐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그들의 축제와 연극이다. 그리스, 혹은 좀더 정확히는 아테네에서, 가장 큰 축제의 하나는 디오니소스 축제였다. 그 축제의 클라이맥스는 나흘에 걸쳐 해 뜰 때부터 저녁까지 계속된 연극 공연이었다. 주민 전체가 연극을 보러 나왔다. 관리들은 다양한 극작가들을 골라 서로 경쟁하게 하였다. 공연 날이면 그들의 극이 상연되었고, 우리가 아는 한, 상(賞)은 처음에는 일종의 인기투표, 즉 가장 많은 관중의 갈채를 받은 작품에 수여되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연극패들은 1년 내내 연습을 하는 게 보통이었고, 성공적인 비극작가들은 국가의 가장 위대한 시민으로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동료시민들로부터 영예와 찬사를 얻었다. 그러나 연극을 관람하고 누가 상을 받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1만 5천 내지 2만 명의 관중, 즉 일반시민들이었다.
나중에는 그 결정을 위해서 한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오늘날에는 그와 같은 위원회는 교수들, 성공적인 작가들, 비평가들로 구성될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위원회는 도시의 구역별로 제비뽑기로 선택된 일정 수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이 한군데 모여서 다시 제비뽑기로 자기들 중에서 10명을 선정했다. 이 10명이 심사위원이 되어 공연이 끝날 때 제비뽑기로 수상작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민주주의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태도를 충분히 드러내주지는 못한다.
위원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심사위원들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끼쳤다는 증거가 있다. 그리스인들은 연극 경연장에서 마치 오늘날 축구나 야구장에서의 관중들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격렬한 참가자들이었다. 그들은 발을 구르고 고함을 치고 싫거나 좋은 장면 앞에서 자신들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냈다. 심사위원들은 관객들의 의견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법은 심사가 끝난 뒤 그 결정에 불만을 느낀 사람들은 심사위원들을 탄핵하도록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게 아테네 민주주의가 운영되는 방식이었다).
어쨌든 연극을 발명한 것은 그리스인들이었다. 그들 속에서 탄생한 세 사람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에게 필적할 만한 극작가는 오늘날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희극작가로서 아리스토파네스를 능가할 사람도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을 받으려면 관중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이런 식의 결정에 극히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대중은 아이스킬로스에게 13차례나 상을 주었다.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그리고 나중에는 에우리피데스에게 수상의 영예를 되풀이해서 안겨준 것은 바로 그 평민들이었다. 플라톤이나 그의 철학자 친구들이 심사위원들이었다고 해도, 이보다 더 나은 결정을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리스인들이 일반시민들의 능력과 판단력을 얼마나 믿었던가 하는 것이다. 모든 개개 시민 속에는 그러한 능력이 있다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다.
노예제와 여성들
오늘날, 이러한 민주주의가 노예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중에는 급진파와 혁명가들도 있다. 실제로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노예제에 근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예제를 이유로 그리스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노예들을 옹호하기보다는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의 ‘가족’에 관한 저서에서 그리스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노예제를 분석하였고, 현대의 학자들은 대체로 엥겔스에게 동의하고 있다. 초기에, 그리스의 노예제는 그리스의 사회생활과 경제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 노예는 대부분 가사 노예였다. 나중에, 노예들의 수가 증가했고, 적어도 그 수는 시민들의 수만큼 되었다.
나중에, 노예제가 상업과 산업의 발달과 함께 크게 확대됨에 따라 노동이 천시되었다. 엥겔스는 이 엄청난 노예제의 성장과 그에 따른 노동의 천격화가 위대한 그리스 민주주의의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해둘 필요가 있는 것이 있다. 즉, 민주주의가 한창이었을 때도 그리스에는 많은 노예들이 있었고, 그들은 시민권은 없었지만 보통의 그리스 시민처럼 일상을 영위했다는 점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많다. 가장 중요한 증거의 하나는 플라톤의 발언이다. 즉, 플라톤은 길을 가다가 자유시민(특히 자기와 같은 특출한 시민)이 방해를 받지 않도록 노예한테 포도(鋪道)에서 물러날 것을 명령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불평하고 있다. 불가능한 이유는 노예들의 옷차림이 일반시민의 복장과 흡사해서 누가 시민이고 누가 노예인지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그리스 민주주의를 지독히 혐오한 나머지 말들이나 당나귀들도 마치 자유를 허락받은 존재인 양 거리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다고 불평을 했다. 급진적 민주주의가 끝나갈 무렵, 아테네의 최대 웅변가 데모스테네스는 노예를 대하는 행동규범을 강조했다. 그것은 노예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 시민 자신들을 위해서라고 그는 말했다. 즉, 인간이 다른 인간을 무례하게 대하는 것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광산에서 일하던 노예들의 상황은 끔찍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아테네에서의 노예에 관한 규범은 일찍이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가장 계몽된 것이었다고 유능한 학자들은 이야기해왔다.
또한 아테네 민주주의가 번성했던 기간에 여성들의 지위가 별로 나쁘지 않았다고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이야기되었다. 물론 그 기간에도 여성들은 투표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우리는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여성들은 아이들을 낳고, 남편을 위해서 가사에 전념하고 있던 존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들어왔다. 하지만 몇몇 현대의 저술가들은 보다 면밀히 증거를 조사한 뒤에, 이 오래된 견해를 비판해왔다. 우리는 머잖아 세계가 그리스 민주주의 시대에 여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좀더 균형 잡힌 견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서구문화의 창시자
고대 그리스인들이 인간평등에 입각한 독특한 정부형태를 만들어내고 실천한 것 이외에 별로 이루어놓은 게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후세에 기억될 만한 업적을 성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들이 또한 서양세계의 지적 토대를 형성해놓았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철학과 논리, 변증법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정치와 민주주의, 과두제, 헌법, 법률에 대해서 논한다. 우리는 웅변과 수사학과 윤리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연극에 대해서, 비극과 희극에 대해서 말한다. 또한 우리는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고, 조각과 건축에 관해서 논한다. 이 모든 이야기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는 그리스인들이 발견하고 발달시켰던 토대 위에서 구축된 것들이다.
과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지적 및 정치적 영역에서 지금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과 관행과 절차 등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두 고대 그리스인들이 발견하고 만들고, 분류하고, 분석한 것들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것만 만들거나 발견한 게 아니다. 조각이든 정치든, 철학, 예술, 문학 그리고 의학과 수학 등등 온갖 것을 발명·발견하고 발달시켰던 그들에게 필적할 만한 인간은 지금까지도 없다. 우리가 근대문명사를 쓴다고 할 때, 우리는 대여섯 명의 미국인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조금 더 후하게 접근한다면 열두어 명쯤 될 것이다. 그만한 수효의 영국인을 찾아내는 것도 역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서양문명사를 쓴다면, 적어도 60명 내지 80명의 그리스인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서사시라면 호메로스. 드라마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페데스. 희극은 아리스토파네스. 서정시는 핀다로스와 사포. 정치가는 솔론, 테미스토클레스 그리고 페리클레스. 조각은 올림피아 경기장을 장식했던 거장들과 페이디아스. 웅변술은 데모스테네스. 역사는 투키디데스와 헤로도토스. 철학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과학과 수학에는 피타고라스와 아르키메데스. 의학은 히포크라테스 등등.
이 목록은 오직 가장 잘 알려진 이름들 중의 일부에 불과하다. 여기서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은, 그리고 그리스에 대한 우리의 관점의 기초가 되어 마땅한 것은, 이들 대부분이 그리스 민주주의가 번성하던 바로 그 시절에 살았고, 자신들의 최선의 업적을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근대와의 비교
이것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이다. 모든 시민이 다른 시민들과 함께 평등하게 정부를 운영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했던 바로 그때, 다른 말로 하면, 평등이 극단적일 정도로 실현되었던 바로 그때, 아테네는 세계역사상 가장 다양하고 포괄적이며 뛰어난 천재들을 산출했던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인구는 1억 5,500만 명이다(이 글 집필 당시 ― 역주). 다시 말해서 고대 아테네 인구의 1,500배이다. 경제적 부(富)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인구 2만으로 구성된 어떠한 하찮은 현대 도시라 할지라도 아테네 같은 도시가 그 전성시대에 누리던 것보다 100배 이상의 경제적 자원을 갖고 있다. 더욱이 그 대부분의 생존기간 동안, 아테네의 전 주민들은 영국의 축구장 12개 정도의 면적에서 갇혀 지냈다. 이로써 우리는 고대 그리스 일반이 아니라 아테네 민주주의가 이룩한 믿을 수 없는 성취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세계사적인 성취를 이룩한 것은 바로 그리스 민주주의였고, 그것은 민주주의 없이는 창조될 수 없었다.
그리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문명의 토대를 구축했을 때 위대한 예술가, 철학자와 정치가들을 산출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인들은 서구문명을 방어하기 위한 몇몇 가장 치열한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이겼다. 마라톤·플러티어·살라미스 전투에서 수천 명의 그리스인은 십만 대군을 거느린 동방 페르시아의 전제군주에 맞서서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등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다. 기원전 5세기의 이 전투에서 그리스를 파괴하고자 했던 동방의 야만주의는 20 대 1의 수적 열세를 무릅쓰고 싸운 그리스인들에 의해 패배를 당하고 쫓겨났다. 동방의 폭군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그리스 국가들을 무너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아테네 민주주의자 ― 어떤 사람들이었나?
이것은 늘 중요한 질문이었지만, 그러나 우리가 도달한 사회 단계에서 이것은 근원적인 질문이 되었다. 즉, 그리스의 민주주의자들은 대체 어떤 인간들이었는가? 맑스는 미래의 인간유형, 즉 사회주의사회의 인간은 어떤 인간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맑스에 의하면 그는 “20 종류나 되는 다양한 일을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는 충분히 발달한 개인으로서, 어떤 것이라도 생산할 준비가 되어 있고, 각기 다른 사회적 기능들을 감당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생래적이거나 후천적으로 획득한 능력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 민주주의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 중의 한 사람인 페리클레스가 어떻게 그리스 시민을 묘사했는지를 보자.
모든 것을 감안할 때, 나는 우리의 도시 자체가 그리스인들에 교육의 장(場)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내 생각에, 우리의 시민 개개인은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스스로의 주인임을 입증해 보여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비상한 다재다능함을 가지고 극히 품위 있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맑스나 민주주의와 평등사회에 관해서 말해온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미래의 사건으로 묘사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에게 그것은 도달하고자 하는 갈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정사실이었다. 페리클레스의 이 발언은 민주주의에 관한 가장 위대한 그리스적 발언, 즉 전쟁에서 전사한 아테네인들을 위한 장송(葬送)연설에 들어 있었다.
그리스 민주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예외적인 힘과 다양한 재능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근대 민주주의에 비해 두 가지 장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민주주의의 최성기에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개인주의를 몰랐다는 점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도시국가를 떠난 개인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시국가는 또한 자유로운 개인들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도시국가와 맞선 개인으로서의 자신이나 타인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은 민주주의가 쇠퇴한 뒤에 가능해졌다. 그리스인에게 엄청난 힘과 자유를 부여한 것은 이와 같이 개인과 도시국가 사이의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완전한 균형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적 생활에서도 개인이 원하는 대로 행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야말로 그리스인들의 활력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같은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정치적 삶이 자유롭고 열려진 것이듯이 우리들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영위되는 우리의 일상생활도 자유롭고 열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자기 나름으로 생을 즐기고 있다면 굳이 국가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또 우리는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나쁜 시선으로 그를 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적 생활에서 자유롭고 관용적입니다만, 그러나 공적 생활에서는 우리는 법을 지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법을 깊이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권력을 맡긴 사람들에게 복종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법률 그 자체에 복종합니다. 특히 억눌리는 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에 대해서, 그리고 위반하면 큰 수치가 된다고 여겨지고 있는 법률에 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신(神)들’
이 간단한 말들을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미국은 현대 국가들 중에서도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다수파가 자신들에게 순응하지 않는 소수파를 위협하거나 못살게 구는 나라로 악명이 높다. 영국에서는 이른바 ‘예절 바름’이라는 개념이 미국보다는 덜 야만적이지만 그래도 그에 못지않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스인들이라면 그러한 차별을 야만인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를 그토록 혐오한 이유의 하나는, 페르시아에서는 사람들이 1인의 군주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자신을 낮춰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굴종’이라고 불렀고, 그것은 오직 야만인들에게만 어울리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인들은 전쟁이 한창인 때에도 극장으로 가서(그것은 국가 극장이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통렬한 반전극(反戰劇)에 갈채를 보냈다. 한번은 아테네의 지배자가 외국 귀빈들을 대동하고 공식적인 자격으로 연극을 보러 왔을 때, 아리스토파네스는 연극 속에서 그 지배자를 무자비하게 조롱했고, 그 때문에 그는 기소되었지만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리스 민주주의자가 가진 또하나의 장점은 그에게는 종교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스의 종교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매우 우스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지하게 연구를 해보면 그리스인들의 종교는 그들의 다른 업적들과 마찬가지로 천재성의 소산임을 알 수 있다. 종교란 우주와 그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총체적인 개념이다. 이것이 없다면 개인이나 인간집단은 황야를 헤매는 인간들처럼 된다. 그리고 한 인간집단의 종교적 개념은 대체로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그들 자신의 반응을 나타내고 그것을 발전시킨 것이다. 현대인은 그가 살고 있는 혼돈의 세계를 어떻게 가늠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에게 종교가 없는 이유이다.
그리스 도시국가는 온갖 관계가 이해하기 쉽고 간단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우주 전체와 그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극히 단순한 개념으로 생각했고, 그것은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들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리스의 신(神)들은 기본적으로 보다 우월한 종류의 인간들이었다. 그리스인들은 그 신들을 올림포스 산 꼭대기에 위치시킨 다음에 그 높은 곳에서 우월성을 행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어떠한 시민이라도 그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져서 마치 신(神)처럼 군림할 우려가 있을 때에는 아테네 민주주의는 그를 매우 쉽게 처리했다. 그들은 일종의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반대표가 많으면 그는 10년 동안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올 때에는 자신의 재산을 도로 찾는 게 가능했다. 여하튼 그리스에서 신(神)들은 올림포스에만 머물도록 되어 있었다.
모든 종교에는 커다란 신비와 심리적 및 전통적 연상들이 얽혀 있어서 그것들을 풀어 헤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리스인들의 종교에도 이러한 신비적 요소들이 분명히 개입돼 있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그리스인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나,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차원을 초월한 문제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그리스인은 자신과 동료시민들이 처해 있는 위치를 후세의 어떤 사회에서보다 더 탁월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잘 작동하는 정치
그리스 민주주의 정치의 큰 강점은 다수 시민들이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데 대한 대가를 지불받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한가로운 시간에 하는 여가활동도 아니고, 특별한 보수를 받고 하는 전문가들의 활동도 아니었다. 사회주의사회에서,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조직과 국가의 정치는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듯이 하루하루 생활의 중요하고도 불가결한 일부로 간주될 것임이 틀림없다. 그와 같은 간단한 변화만으로 오늘날의 정치는 하룻밤 사이에 혁명적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민주주의 시스템의 큰 약점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가난한 시민들이 정치 이외에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생존하고 있다. 그리스의 가난한 시민들은, 그리고 로마의 빈자들은 더 많이, 사회의 희생 위에 생존을 영위했다. 마침내 이것은 그리스 민주주의 시스템의 쇠퇴를 초래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 민주주의는 거의 200년이나 계속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제국 시스템은 별로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그리고 세계문명을 주도하는 미국의 역할은 그 역할이 제대로 시작도 되기 전부터 치명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리스인들은 매우 ‘세련된’ 사람들
우리가 여기서 그리스 민주주의에 대해서 일반적인 설명 이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인들의 다양한 생활 국면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는 빈틈들이 존재한다. 학자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참을성을 가지고 주의 깊게 연구를 해온 것들도 실제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고, 그렇게 해석되고 있다. 의견의 차이가 있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사람들도 늘 있어왔고, 지금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여기서 취하고 있는 입장은 가장 건전한 학문적 권위에 근거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즉 자유의 창조적 힘과 보통사람들의 자치능력에 대한 우리 자신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인들의 그러한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들이 이룩한 문명을 이해할 수 없다.
역사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그것은 사실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 대의제 정부와 의회민주주주의가 시대의 긴급한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런 우리는, 예를 들어, 대의제 정부와 의회민주주의가 튼튼하게 정립된 것으로 보였던 1900년경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지금 그리스 민주주의를 연구하고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제비뽑기와 윤번제에 의해 모든 시민이 번갈아 가며 국가통치 업무를 맡았던 시스템을 생각해보자. 그리스인들은, 혹은 좀더 엄밀히 말해서, 아테네인들(물론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아테네를 따랐지만)은 어떤 직책에는 특별히 자격이 있는 사람을 선거로 뽑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군대나 함대의 지휘자들은 특별히 선출되었고, 그들이 선출된 것은 그들의 군사적 지식과 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칫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늘 일반적인 그리스의 민주적 관행에 제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시민들이 ‘전제(專制)’에 대하여 너무나 예민하게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의 장군들은 오늘날의 관료제 혹은 대의제 정부 밑에서 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이다.
페리클레스의 울음
그러나 민주주의를 고도로 세련되게 실천했던 그리스인들은, 예컨대 장군으로 임명된 사람들을 끊임없이 바꾸지는 않았다. 페리클레스는 거의 30년간 장군으로서 아테네를 지배했다. 그러나 지배는 했지만, 그는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재선출되었다. 한번은 그가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은 일도 있다. 그 재판에서 이겼지만 말이다. 또다른 경우에는, 그와 같이 살고 있던 여성 아스파시아가 페리클레스의 정적(政敵)들에 의해 법정으로 끌려 나온 적도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그의 신중함과 평정한 태도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아스파시아가 너무나 큰 압박을 받아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그는 참을성을 잃고 큰 소리로 울었다. 이 광경에 배심원들은 너무 놀랐고, 그리하여 그것은 아스파시아의 방면(放免)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현대의 지배자들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가? 민주국가이든 아니든 말이다.
그리스인들이 페리클레스를 해마다 선거로 뽑은 것은 그가 정직하고 유능한 인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들이 페리클레스에게 불만을 느끼게 되면 언제라도 그들이 그를 내던져 버릴 것이라는 것은 페리클레스 자신도, 그리스 시민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전성기의 그리스 민주주의의 지배적인 정서였다.
그 민주주의는 하룻밤 새 정립된 게 아니었다. 초기 그리스 도시들은 이런 식으로 통치되지 않았다. 토지에 기반을 둔 귀족들이 경제를 지배하고, 정부의 모든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부유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들이 몇 세기 동안이나 아레오파고스라는 통치기구를 통제했다. 아레오파고스는 나중에 평의회로 이전되는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법정의 재판관들도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현대의 지배자들이나 판사들처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위로부터의’ 권력을 행사했다. 그리스 민주주의도 일찍이 전문가와 관료에 의해 통제되는 정부를 경험했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직면한 문제들이 너무나 단순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오늘날처럼 복잡한 문명사회에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단순한 해결책을 발견하고 실천한 것은 아니다. 그런 식의 주장은 오늘날 직접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쉽게 하는 말이고, 심지어 몇몇 학식 있는 당대의 그리스 학자들도 쉽게 입에 올린 말이다. 그러나 그 논리는 철저히 잘못된 것이다. 그 증거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지식인들, 즉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모두 그 민주주의에 대해 통렬히 적대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들에게는 평민에 의한 정부는 원칙적으로 오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정부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뿐만 아니라, 플라톤은 자신의 긴 생애의 대부분을 그리스 민주주의보다 우월한 사회와 통치형태를 만들어내는 방법과 수단을 토의하고 고안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데 사용했다. 그런데 플라톤이 이러한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민주주의 덕분이었던 것이다.
플라톤이 생각하고, 토의하고, 자유로이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민주주의사회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플라톤이 추구했던 완전한 사회에 대한 아이디어들은 오로지 그리스 민주주의 그 자체가 끊임없이 실제적으로 실현 가능한 최선의 사회를 향해서 자기진화를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플라톤과 그의 서클이 개발한 이론과 아이디어들은 사회문제들을 이론적으로 천착해온 모든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소중한 것이 되어왔다. 즉, 그들의 작업은 서양문명의 공통 유산의 일부가 되어왔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게 과거의 역사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책 《국가》는 민주주의를 대신할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를 묘사한 것이지만, 그것은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는 완벽한 전체주의 국가 모델이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플라톤이 오늘날까지 지식인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는 관행, 즉 평범한 사람들이 실제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모든 정치적 사고와 실천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마지막에는 급진적 민주주의가 아테네를 위한 최선의 통치형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지식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관료적 정부를 지지하거나 혹은 때로는 심지어 전체주의적 통치형태를 지지한다. 여러 세기를 통해서 지식인들이 플라톤과 그의 사유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물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러한 명분은 전혀 없다. 우리 모두가 무엇보다 배워야 할 것은 그리스인들이 인간평등에 대한 그들 자신의 관념을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삶에 구현했던 방식이다. 그리스인들은 철학자들의 책을 읽고 민주주의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오로지 몇 세대에 걸친 투쟁을 거쳐서 그것을 쟁취했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어떻게 쟁취했는가
기원전 650년에서 600년 사이 어디쯤에서 법률이 제정되었을 때 그리스 민주주의의 최초의 단계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지 모든 사람이 알도록 법률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믿고,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적인 사태가 아니었다. 늘 그렇듯이, 그리스의 정치상황을 변화시킨 것은 사회구조의 변화였다. 상업과 산업 그리고 화폐의 사용이 귀족의 특권을 깨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고, 향후 다년간 상인과 교역 계층의 성장, 장인(匠人) 계층의 증가, 소규모 공장에서의 노동자와 선원들의 증가에 따라 사회적 격차의 해소, 평등화가 크게 진전되었다. 그리스사회의 이러한 변화와 함께, 상인들은 우리가 최근 수세기 동안 유럽 역사에서 그리고 동양 국가들의 역사에서 보아온 것과 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요구했다.
솔론은 최초로 다소간 민주적인 헌법을 만든 정치가였고, 그 때문에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정치적 현자(賢者)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이 신문의 헤드라인에 곧잘 등장하는 것을 보지만, 그러나 그 기사를 작성한 사람은 솔론이 실제로 행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확언할 수 있다. 그러나 솔론의 이름이 오랫동안 정치적 예지의 상징으로 지속되어왔다는 사실은 솔론 이후의 인간사회에 얼마나 심대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가 끝나기 직전 몇년 사이에 솔론의 헌법 속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솔론의 개혁
도시국가의 시민들은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에 살고 있는 농민들도 포함했다. 솔론은 상인들과 도시 주민 이외에 농민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화폐경제와 교역 및 산업의 성장은 농민들에게 무거운 부채를 안겨주었는데, 솔론은 그 부채를 말소시킴으로써 농민들이 고통스러운 부담에서 풀려나게 했다. 산업과 교역의 성장 그리고 오래된 농민경제의 해체는 솔론의 위대한 헌법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조건을 형성해주었다. 그러니까 솔론의 헌법은 사회적 대격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솔론이 헌법을 도입할 당시의 주변 세계의 상태가 어떠했는가 하면, 그 헌법이 제정되고 난 30년 뒤 성경에 언급돼 있는 왕 네브카드네자르(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바빌론의 폭군 ― 역주)가 죽었다. 이 사실은 그리스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비웃는 자들 모두에게 줄 수 있는 대답이 될 것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을 제외한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일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솔론의 헌법은 위대한 역사적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지만, 그가 출범시킨 민주주의는 나중의 직접민주주의, 급진적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솔론 이후 적어도 한 세기 동안은 국가의 고위 직책들은 재산을 가진 자들에 의해 채워졌고, 재산을 소유한 자들이란 대체로 귀족 태생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솔론의 헌법은 18세기의 영국 헌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계층 간의 실제 관계는 아마도 군대에서 가장 잘 볼 수 있었다. 아테네와 같은 도시들에서는 건강한 신체를 가진 모든 주민이 전쟁에 나가서 싸우도록 소집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권력은 귀족의 손을 떠난 뒤에 수십 년 동안 스스로 갑주(甲胄)와 말들을 조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노(櫓)잡이들의 파워
솔론이 죽은 뒤 90년쯤 되어서 아테네에는 또다른 큰 혁명이 일어났다. 그 혁명을 이끈 인물은 클레이스테네스라는 급진적인 귀족이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진정한 중산계급 민주주의를 구축했다. 서구 역사에서 보듯이 민주주의의 최초 단계는 흔히 헌법의 제정이다. 그 이후 헌법을 중산계급과 하층계급으로 확대시키는 단계가 온다. 그리스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평민은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민주적 권리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지위로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평범한 시민, 보통의 노동자, 보통의 장인들은 나중에 그들이 갖게 되는 것과 같은 특권을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그러한 그들이 어떻게 민주적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매우 교훈적이다.
상업의 발달로 아테네는 처음에는 하나의 상업도시로, 그 다음에는 지중해와 그 주변 다른 지역들 사이에서 활발히 교역을 하는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그러나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중산계급 민주주의가 건설된 지 몇년 후, 강대한 국가 페르시아로부터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490년에 마라톤 전투가 있었고, 기원전 480년에는 살라미스 전투 그리고 479년에는 모든 주민이 나가서 싸운 플러티어 전투가 있었다. 대부분의 전투는 바다에서 행해졌다. 그리하여 상업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아테네는 해양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 선박은 노를 젓는 남자들의 힘으로 움직였다. 그 결과, 노잡이들은 커다란 사회세력이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늘 그리스가 페르시아라는 강대한 적에 맞서서 자신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 덕분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에, 함대의 노잡이들은 민주주의의 첨병이 되었고, 그들은 민주주의가 밑바닥 계층까지 확대되도록 강제했다.
하층민과 피레우스
아테네의 항구는 지금도 그렇지만 피레우스였다. 거기서 대부분의 상선(商船)들의 선원과 해군과 많은 외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민회를 이끈 사람들은 때로는 급진적 귀족들, 나중에는 흔히 일반 장인들이었다. 그러나 피레우스의 하층민들이 민회의 주된 동력이었고, 그들은 종종 민주주의자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계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479년에 플러티어 전투가 일어났다. 사반세기 후, 또다른 혁명이 일어났고, 아직도 일부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귀족들로부터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에게로 권력이 명확히 넘어갔다. 5년 후, 아테네의 최하층민들이 권력을 획득하여 ‘아르콘’이라는 매우 높은 직위(아테네의 9명으로 구성된 집정관 ― 역주)에 선출되거나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민중이 정치활동에 참여하도록 돈을 지불하기 시작한 것은 페리클레스였다. 458년부터 급진적 민주주의가 계속되었고, 기원전 338년에 이르러 그것은 붕괴했다.
계급투쟁
투쟁은 계속적이었다. 오래된 귀족계급과 일부 부유층은 민주적 헌정체제를 파괴하고 특권층에 의한 지배를 제도화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궁극적으로는 번번이 패배를 당했다. 마지막에 민주주의가 패퇴한 것은 외국의 적에 의해서였지 내부로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민회가 전권(全權)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떠한 사회주의적인 교의(敎義)를 실행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자들은 부자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과하고 통제했으나, 동시에 그들은 주로 농민과 장인으로 된 아테네의 경제가 사회주의사회를 위한 경제적 기초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상주의자나 이론가 혹은 실험가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말짱한 정신을 가진 책임 있는 사람들이었고, 지금까지 정부를 실제적으로 운영하는 데 있어서 그들을 능가할 사람들이 없었다.
우리는 오늘의 노동자들에게 아테네의 위대한 민주주의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이 글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까?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 다 큰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선물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정열이라는 점을 현대사회에 상기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인들과 싸웠지만, 또한 그에 못지않은 결단력으로 도시국가 내부의 적들과도 싸웠다. 한번은 그들이 외국과 전쟁을 하느라고 열중해 있는 동안, 반민주주의자들이 특권계급 지배체제를 세우려고 기도했다.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은 두 적들, 즉 해외의 적과 국내의 적을 패퇴시켰다. 이 이중의 승리 이후에 민회는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아테네인의 맹서
만약 누구라도 아테네 민주주의를 전복하거나 민주주의가 무너진 뒤 여하한 관직을 차지하는 자는 아테네인들의 적이 될 것이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을 것이며, 그의 재산은 몰수되어 아테나(아테네를 수호하는 여신(女神) ― 역주)에게 바치는 십일조를 남겨놓고 모두 시민들의 공유재산이 될 것이다. 그와 그의 공모자들을 죽이는 사람은 성스러운 자, 신앙이 돈독한 자로 인정될 것이다. 모든 아테네인들은 각자 자신이 속한 부족과 공동체에서 잘 자란 짐승을 제물로 차려놓고 다음과 같이 그를 죽이겠다는 맹서를 해야 한다. “나는 가능하다면 내 손으로 직접, 아테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거나 민주주의가 무너진 뒤 여하한 관직을 차지하는 자, 혹은 스스로 독재자가 될 목적으로 무기를 드는 자와 그를 돕는 자를 죽일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를 죽인다면 나는 그 살해자를 성스러운 자로 인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테네인들의 적을 죽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한 그의 몰수된 재산을 매각하여 그 수익의 반분을 그를 살해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도록 말과 행동과 투표로써 지지할 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그를 살해하는 도중에 죽거나 혹은 독재자를 죽이려다가 실패한다면, 나는 그와 그의 아이들을 보살필 것입니다. 나는 아테네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모든 맹서는 지금부터 해체하고 말소시킬 것입니다.” 모든 아테네인들은 디오니소스 축제 직전에 살찐 제물을 차려놓고 이 맹서를 규칙적으로 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 맹서를 잘 지키는 자에게는 풍요로움이, 맹서를 깨뜨리는 자와 그의 가족에게는 파멸이 주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아테네 민주주의를 창조하고 옹호했던 사람들의 정신이었다. 민주주의와 평등을 진실로 신봉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아테네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연구함으로써 스스로를 보다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김종철 옮김)
이 글은 원래 그가 동료들과 함께 펴내던 잡지 Corres―pondence 1956년 6월호에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