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수 우선, 오늘 이야기할 밀양 송전선은 초고압송전선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시작하겠습니다. 765kV, 345kV 초고압송전선 외에 154kV, 66kV 같은 송전선도 있습니다. 참고로 765kV 송전선은 154kV 송전선보다 18배 많은 전기를 송전합니다. 그만큼 주변 피해도 클 수밖에 없죠. 이런 초고압송전선이 왜 필요한가. 바닷가에 세운 대규모 발전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내륙 소비지까지 전기를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전압을 올리면 올릴수록 한꺼번에 많은 전기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죠. 밀양 송전선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그 전에 건설된 초고압송전선 이야기를 좀 해보죠. 90년대 후반이죠? 석광훈 선생님이 강원도에서 송전선 반대운동에 참여하셨는데, 그때 경험을 들려주시죠.
석광훈 저는 처음부터 관여하진 않았어요. 제가 원래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던 분야는 원전 안전문제였어요. 당시 문제가 되었던 울진원전, 신규 원전 건설 문제와 관련해서 우연히 송전선로 분쟁 토론회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울진에서 수도권으로, 신태백 변전소를 통해서 신가평 변전소까지 200km가 넘는 장거리 송전선로 건설 계획을 들었어요. 울진원전 자체의 안전문제도 있지만 거대한 초고압송전선로가 강원도를 횡단하면서 또한 환경문제를 일으킨다는 인식을 그때 하게 되었죠. 이후에 신태백―신가평 초고압송전선 통과 지역인 가평, 횡성, 평창, 정선에 찾아가보았습니다. 1998년인 것 같은데, 당시 정선에는 이미 공사가 진행된 상황이었어요. 평균 높이 100m 이상의 철탑이 500m 간격으로 들어서며 수려한 땅 강원도의 수많은 마을을 횡단하게 되는데, 우선 그 엄청난 경관 훼손은 지역공동체의 중요한 가치를 야만적으로 파괴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자파 문제도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때라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채 주민들에 대한 아무런 보호책 없이 무단으로 건설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컸어요. 한전의 연구용역 전문가들을 신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또 공사 과정에서 이른바 ‘삭도’라고 하는 공사를 위한 길을 닦는데, 그 과정에 산림이 많이 훼손됩니다. 삭도를 낸다고 멀쩡한 산을 절벽으로 만들고, 넓은 면적의 숲이 유실됩니다. 또 벌채된 나무들이 방치되어 장마기에 홍수나 산사태를 일으키기도 하죠. 실제로 횡성에서 산사태가 많이 일어났어요. 또 중요한 문제는 선하지(고압전선이 통과하는 토지)에 대한 보상이라는 개념이 당시엔 아예 없었어요. 의식이 높은 적극적인 농민이 손해배상 소송을 해서 이긴 사례가 몇건 있을 뿐이었지요. 전국에서 보상을 받은 지역이 거의 없었어요. 일단 송전선로가 지나가면 그 아래 땅은 당연히 가격도 떨어지고, 이후에는 건축물을 건설할 때도 제약을 받고, 농사를 지어도 사실 큰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굉장히 높은 높이에서 빗방울이 몰려서 떨어지는 등의 문제도 있어요. 농민들의 재산권, 건강권 등을 무단으로 강탈한다는 인식에 이르게 됐죠.
하승수 당시에 반대운동을 어떻게 하셨나요?
석광훈 지역에서 대책위 만들어서 작은 마을 단위로 했어요. 많을 때는 200~300명, 적을 때는 40~50명이 모여서 반대집회도 하고, 한전 공사하는 데 가서 시위도 했는데 외부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죠.
하승수 그 반대운동이 어떻게 보면 수포로 돌아간 게 2000년대 초반입니까?
석광훈 정확하진 않은데 공사가 다 진행된 게 1999년쯤입니다. 서로 다른 마을의 주민들이 연대해서 공동으로 대응하기도 하고 단결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지만, 한전은 구간마다 별도의 인력을 갖고서 야금야금 압박해왔어요(횡성에선 지방검사까지 동원해서 공사 방해하면 구속한다고 위협을 했었죠). 주민들이 하나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면서, 저희가 마지막 보루로 삼았던 것은 신태백 변전소였어요. 이곳만 막으면 이 사업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죠. 우리나라 최초의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일 겁니다. 신태백 변전소 부지를 사들이기로 했어요. 일반시민들, 녹색연합 회원들에게 부지의 중요성(황지연못 수원(水原)이었어요)과 초고압송전선로 사업의 문제점 등을 알려서 대략 1만 2,000명의 참가로 모은 기금으로 주민들로부터 그 땅을 매입했어요. 사실 이게 어느 정도 여론화되면서 송전선 문제가 큰 사회적 이슈가 될 수도 있었는데, 〈동아일보〉가 특종 기사로 보도하면서 다른 매체에선 낙종해 여론화에 실패했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소송까지 갔는데 저희가 패소하고 부지는 강제수용 돼버렸어요. 최종 판결이 난 게 2000년대 초반입니다.
이계삼 지금 말씀하신 게 울진원전에서 출발해서 신태백 변전소를 거쳐 신가평 변전소까지 가는 초고압송전선인데, 765kV 송전선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건설된 건가요?
석광훈 아닙니다. 서해안 당진 석탄단지―신서산 변전소―신안성 변전소까지 가는 765kV 송전선로가 그 직전에 건설되었어요.
하승수 최근 밀양의 활동가들이 횡성을 방문해서 조사를 해봤는데, 그때도 역시 마지막에 용역들이 100명쯤 와서 반대하는 농민들을 강제로 들어내다시피 해서 주민들이 한 달씩 입원하고 했다더군요. 횡성이 반대운동을 제일 적극적으로 한 곳인데, 그렇게 싸움이 끝나고 아직도 상처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밀양은 그러니까 우리나라 세 번째 765kV 송전선이 되는데, 밀양 관련해선 이계삼 선생님이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는지 하며 그동안의 경과를 말씀해주시죠.
이계삼 신고리―북경남 765kV 송전선은 2005년도 환경영향평가 보고서 주민설명회를 통해 처음으로 주민들한테 알려졌어요. 부북면 농협 강당에서 강연회 겸 집회를 했어요. 밀양 구간을 지나가는 5개면 전체 인구가 2만 1,069명인데(송전선로 좌우 1km 이내에 들어가는 경과지 주민만 해도 3,700여 명) 주민설명회 참가 인원이 총 13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렇게 관심이 없었어요. 그즈음에 밀양대책위가 결성됐는데, 초창기에는 전교조 밀양지회, 민주노동당 등 당시 밀양의 진보적 시민단체들과 정당이 개입했어요.
그러다가 2006년에 지방선거가 있었고, 당시 열린우리당 엄용수 시장이 당선되면서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밀양 전체의 문제로 확장되었습니다. 신고리―북경남 765kV 송전선로가 밀양 동북부를 가로지르는데, 전체 162기 철탑 중에서 69개가 밀양을 지나가니까 밀양의 피해가 커요. 학교 아이들한테도 반대서명을 받고, 밀양 공설운동장에서 몇천 명이 모여 궐기대회도 했어요. 그 자리에서 시장은 “송전탑을 꽂으려면 나를 밟고 내 머리 위에 꽂고 지나가라”면서 기염을 토하고 했답니다. 그 몇 년간 밀양시장은 나름대로 역할을 해서 공사를 지연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국민권익위원회가 주관하는 갈등조정위원회가 열렸고, 거기서 결론이 나지 않자 경실련 주관의 보상제도개선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거기서도 합의를 보지 못했어요. 한편 한전은 125억 원의 지역기금으로 합의를 보려 했고, 2011년 여름부터 공사가 거세게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2012년 1월 16일, 이치우 할아버지가 산외면 보라마을에서 용역들과 부딪치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분신 자결하셨죠.
하승수 강원도에서의 765kV 송전선 반대운동도 그렇고, 밀양도 그렇고, 사실 주민들은 거의 고립되어 반대운동을 했습니다. 한전은 회유와 압박을 가하고, 마지막에 용역들을 동원해서 공사를 강행하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은 언어폭력과 물리적 폭력에 노출되고 이런 일이 되풀이되었지만 외부에선 사정을 잘 몰랐습니다. 가슴 아프지만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으로 밀양이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게 사실입니다.
이계삼 2011년 가을, 태고종 스님 한 분이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에게 음부를 주먹으로 구타당하는 끔찍한 성폭력 사고가 났어요. 당시 대책위엔 언론과 체계적인 연락망이 구축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보도자료를 만들어서 몇 군데에 보내봤지만 보도가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마음이 안 좋았지만 저도 그때까지는 그 이상의 역할은 하지 않았어요. 그해 12월 말쯤 밀양 《녹색평론》 독자모임에 부북면에 사시는 분이 나오셔서 지금 부북면 할머니들이 산에서 고통스럽게 싸우고 계신데 도와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셨어요. 모임에서 모금을 해서 지지방문을 갔는데, 산 위 컴컴한 움막에서 할머니들이 겪은 일들을 들었습니다. 사태가 심각하구나 싶었어요. 그래도 지도부는 이미 보상으로 기울었다는 소문이었고, 아무래도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저는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학교, 농업 관련 일을 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어요. 사직서를 내고 사흘 뒤에 분신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참혹한 기분은 아마 일생 잊지 못할 겁니다. 이치우 할아버지 장례 때 주민분들 얼굴이 떠올라요. 싸움은 만 7년이 되어가고 있었고, 무척 힘들어 보였어요. 사람이 죽어도 아무것도 해결이 안되는구나. 단식하고, 서울 가고, 의원실 찾아가고, 하루도 빠짐없이 이치우 할아버지 빈소도 지켰지만 결국 안되는구나. 더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대책위 대표였던 김준한 신부님과 제가 의기투합하여 치른 것이 ‘탈핵희망버스’예요. 장례 끝나고 열흘 뒤, 3월 17~18일 탈핵희망버스를 치르면서 반전의 계기를 잡았어요. 주민분들이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덩실덩실 춤추며 행복해하셨어요. 추모문화제 때는 1,300여 명이 모였고, 송전탑 벌목 현장 나무 심기 행사에는 외지에서만 300명 넘게 왔어요. 그때부터 이 싸움이 다시 불붙게 되었고, 한전 입장에선 ‘외부세력’이 개입하면서 판이 커진 거죠.
765kV 송전탑이 들어선 곳들을 다 다녀봤습니다. 송전 소음 때문에 밤엔 잠을 잘 수가 없고, 불꽃이 번쩍번쩍 튀기도 한대요. 전원개발촉진법에 의하면 주민이 토지수용을 거부해도 사업자인 한전이 보상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법원에 공탁하고, 그게 받아들여지는 순간 한국전력이 그 토지에 대한 사용권을 갖게 됩니다. 다만 재판을 통해 확인하는 절차가 남아있어서 수용당한 주민들에게 법원에서 통지서가 날아가는데, 그 통지서에는 채권자가 한국전력으로, 원래 토지 소유주인 주민이 채무자로 찍혀 나옵니다. 청천벽력이지요. 제가 밀양에서 활동하면서 땅에 대한 이야기 참 많이 들었어요. 학교도 못 다니고, 베잠방이에 황토물이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일하고, 한겨울엔 먹을 게 없어 종일 지게 지고 배추시래기 주우러 다니고, 밤낮없이 일해서 그렇게 농사지어 일군 땅인데, 송전탑 부지랑 선하지에 쥐꼬리만한 보상금 나오고 그 외엔 보상금 한푼 없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송전선에 의한 피해, 보상이 가능한가
하승수 보통 ‘송전탑’이라고 하지만 ‘송전선’이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송전선이 지나가며 중간 중간 몇백 미터 간격으로 거대한 철탑이 들어서는 거니까요. 주민들은 건강상의 피해, 경관상의 피해, 재산상의 피해 등을 호소하고 있고, 이미 송전선이 들어서 있는 지역에서도 고통을 호소하고 있고, 앞으로 들어설 지역도 걱정하는 것인데, 정부나 한전은 그런 우려와 피해를 호소하는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아무 문제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해온 듯합니다.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봤으면 합니다. 먼저 건강상 문제와 관련해서 전자파와 소음 문제를 들 수 있는데, 최근에 국회의원실을 통해서 공개된 자료를 보더라도 765kV 송전선로에서 80m 떨어진 지점에서 평균 3.6mG(밀리가우스: 전자파의 세기를 표시하는 단위) 전자파가 측정됐고, 345kV 송전선에서도 40m 떨어진 지점에서 평균 4.0mG가 측정됐다고 합니다. 3mG에 노출될 경우 백혈병 발생이 3.8배 높다는 연구가 있습니다(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 1992년). 초고압송전선이 통과하는 지역 주민들은 상당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해도 되겠죠.
석광훈 굉장히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네요. 전자장 ― 한전은 전자계라고 말합니다 ― 연구가 가장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곳은 스웨덴입니다. 스웨덴 왕립 카롤린스카 연구소가 스웨덴에서 송전선로 인근 300m 이내에 사는 인구와 그렇지 않은 인구에 대해 20~30년간 장기 추적조사를 했는데, 암 발생비율이 유의미하게 차이가 난다는 결과를 90년대 중반에 발표했습니다. 미국에선 주로 소송으로 전자장 문제가 여론화되었어요. 미국의 경우엔 정부기관이나 정부 출연의 보건의료기관이 주도하지 않고, 각 전기사업자들이 학자들한테 안전성을 검증하는 연구용역을 줍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체계적인 조사가 아니라, 양 같은 가축을 고압송전선로 밑에 6개월 정도 놔두고 어떤 변화가 있나 보는 식입니다. 이런 게 무수하게 많아요. 전자장 관련 분쟁이 워낙 많으니까 전기사업자들이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 급조한 허황한 조사들이죠. 스웨덴의 경우엔 보건의료 통계가 잘 구축되어 있어서 장기간 추적이 가능해요. 인권문제라 해야 할지…. 지금까지도 사실상 스웨덴 연구가 체계적인 장기 추적조사로 유일하지 않을까 싶어요.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잠재적 발암물질(2B)로 분류하고 있는 전자장 문제에 대해서 이처럼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는 이유는 체계적인 연구지원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국내에서도 생쥐를 이용한다든지 하는 소규모 연구가 몇 차례 있었지만 체계적인 연구는 없습니다. 국내 연구의 가장 큰 문제는 국가기관이나 독립적 기관이 아니라 이해 당사자인 한전과 한전 산하의 전력연구원이 이런 연구개발(R&D)의 대부분을 주도한다는 점입니다.
하승수 확실히 인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군요.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게 큰 문제이고요. 하지만 실제로 송전선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암 발생이 많다거나 여러가지 건강상 문제들을 호소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계삼 충남 당진(화력발전소)―신서산 변전소―신안성 변전소로 이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765kV 선로로 답사를 가보았어요. 당진시 석문면엔 정말 황당할 정도로 철탑이 많이 들어서 있어요. 154kV, 345kV, 765kV 송전선로가 동시에 지나가고 있습니다. 흐린 날 밤에는 선로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잠을 못 잔다고 해요. “신경을 갉아먹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철탑이 설치된 뒤에 마을에 광범위하게(종류는 특정할 수 없이) 암 환자가 늘었다는 이장님 말씀도 들었어요. 당진엔 워낙 송전탑이 많아서 765kV 송전선이 들어온다고 했을 때도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전봇대 하나 더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세워지고 보니 지금까지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송전탑이었다, 한마디로 속았다고 합니다.
하승수 소음피해도 심각하다고 하죠? 고압송전선에선 일상적으로 소음이 발생하고, 변전소는 특히 소음이 굉장하다고 들었습니다.
석광훈 소음 얘기는 저도 많이 들었지만 직접 확인하진 않아서 잘 모릅니다. 그보다 제가 제기하고 싶은 건 경관문제예요. 미국에선 송전선로 분쟁이 발생했을 때, 심리학자들이 경관 문제에 대해서 증언하는 등, 경관 훼손을 심각한 문제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철탑들과 송전선을 늘 마주하는 건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거라는 건 상식적으로도 생각할 수 있겠죠. 그뿐만 아니라 큰 산, 능선 이런 것들은 마을의 어떤 전통 같은 것들, 대대로 내려오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지주 같은 성격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지역문화의 중요한 자원이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100m, 약 40층 빌딩 높이 인공구조물이 500m 간격으로 촘촘하게 박힌 걸 볼 기회가 없기 때문에 해당 지역 주민들 말고는 문제를 실감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승수 그럼 재산적 피해 얘길 해볼까요. 재산 피해 얘기를 하면 흔히 보상받으려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받습니다만, 사실 이분들의 재산이라는 건 평생 못 먹고, 고생하며 농사지어 어렵게 마련한 농토와 집입니다. 혹은 도시생활 다 정리해서 시골에 내려와서 삶터로 삼고 살아보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어느 날 그런 땅과 집 주변에 송전선이 지나간다는 통보를 받고, 그 순간부터 땅도 집도 거래가 안되고, 금융기관에선 담보도 안 받아주고, 법원에선 통지서가 날아오는 그런 상황인 것입니다. 도시에서 생각하는 단순히 재산 가치가 하락하는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생존이자 생명의 기반인 삶의 터전과 삶 자체를 한순간에 빼앗기는 그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돈 얼마 주고 보상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 문제에 대해 주민들은 어떻게 느끼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이계삼 대책위원으로 앞장서서 싸우시는 분들은 그래서 ‘재산’이라고 하지 않고 ‘생존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일반 주민들은 “내 재산 지키려고 하는 일이다” 이렇게 말씀하셔요. 자기가 평생 일궈온 가치가 집약되어 있는 게 집과 땅이고, 그걸 표현할 다른 말을 못 찾아 ‘재산’이라고 표현하는 측면이 있어요. 이런 말씀들도 하셔요 ― 우리 자식들이 도시에서 계속 못 살 것 같다, 걔들이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와야 할 텐데, 내가 송전탑 못 막아내면 자식들한테 여기 들어와서 살라고 어떻게 말하겠느냐, 그래서 이 싸움을 한다. 우리가 거창한 수사를 써서 고향과 땅, 생명의 가치를 말하지만, 이분들은 당신의 실제 삶의 지평에서 자기자신과 후손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어요.
또 좀 다른 측면에서, 농민들은 도시 직장인들처럼 연금이나 금융소득이 따로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집과 농토를 담보로 해서 받는 대출 말고는 자식들 결혼시킨다든지 할 때 들어갈 목돈을 조달할 길도 없어요. 그리고 그 재산이 형성되는 과정은 한국 농민들의 수난사가 집약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애착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 겁니다. 재산권 침탈이 얼마나 심각한지 실례를 보자면, 돌아가신 이치우 할아버지의 경우 삼형제 논을 합치면 시가가 6억 9,000만원인데, 삼형제가 받게 되는 보상금은 합쳐서 8,700만원입니다. 말이 됩니까? 도시 아파트 단지에서 이런 상황이 일어난다면 폭동이 일어날 거예요.
하승수 사실 도시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거예요. 예를 들어서 자기가 사는 집 옆에 높은 건물이 들어서서 일조권·조망권 피해를 받았을 때 보상을 받는 그런 개념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우선 초고압송전선의 피해는 그런 수준도 아니거니와 주민들이 받는 충격도 그런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농민들 입장에서 보면 농사도 마음껏 지을 수 없으니 생업을 뺏기고 평생 일궈온 터와 재산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도, 팔 수조차 없는 상황에 내몰린 겁니다. 현재의 보상제도에선 송전선 양쪽 끝에서 좌우 3m까지만 보상이 되는데요, 전압 차이도 고려하지 않고 765kV든 345kV든 154kV든 무조건 똑같이 좌우 3m라는 보상 기준도 말이 안되는 것이죠.
석광훈 그마저도 보상이 안된 곳이 많을 겁니다. 절반도 보상되지 않았을 거예요. 선하지 보상이 시작된 게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예전엔 그것조차 없이 송전선을 세웠어요. 땅 소유주가 소송을 걸지 않는 이상, 그 정도로 정보와 의지를 갖고 싸우지 않으면 아예 보상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최근에야 범위를 약간 늘리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전원개발촉진법과 민주주의의 실종
하승수 그 연장선에서 주민들이 “보상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재산적 가치에 대해서 말하면서 왜 보상은 필요 없다고 하는지? 그때 말하는 재산적 피해라는 건 보상이 불가능한 피해가 아닐지? 특히 언론에서 재산상 피해가 있으면 보상받으면 되지 않나 이런 식으로 몰고 가는데, 실제로 전혀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계삼 선생님이 보충 설명을 좀 해주시죠.
이계삼 주민들이 보상을 반대하는 것은 어떤 보상으로도 주민들이 입을 피해를 보전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송·변전 시설 주변지역 지원법’이 국회 산업위를 통과하기 직전에 있습니다. 그 법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직접보상은 지금까지 송전선로 좌우 3m만 하던 것을 765kV 경우엔 좌우 30m씩, 총 94m가 보상 범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765kV 송전선로 좌우 180m 이내의 주택을 매수청구할 수 있도록 했어요. 또 간접보상의 경우엔 765kV 송전선로 좌우 1km 이내에 자연마을이 있으면 그 마을에 송전선로 송전설비가 존속하는 동안 매년 킬로미터당 3,000만원씩 지원합니다. 그러니까 765kV 송전선로가 마을을 가로질러 3km 정도 지나가면 매년 9,000만원이 마을 앞으로 나오게 되는 거죠. 아예 주지도 않다가 법으로 보장해준다는 것이니 진전된 걸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보상금도 주민들이 실제로 입는 물질적·정신적 피해, 송전선로를 끼고 살면서 입을 고통에 비하면 정말 껌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제대로 보상을 해주자면 송전선로를 아예 깔 수가 없어요.
또 한 가지는, 이 싸움 과정에서 주민들이 중요한 가치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지도부가 아무래도 남성 중심이었고, 보수적 색채를 가진 분들이 많았다면, 지금 이 싸움의 심리적 중심은 여성,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입니다. 이분들은 물질적인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돈 필요 없다, 그냥 이대로 살게만 해다오.”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주느냐, 국가는 뭐하는 놈들이냐.” 그래서 지금 정부가 개별 보상을 하겠다고 해요. 그런데 주민들이 또 반대합니다. 개별 보상을 받게 되면 이웃 간이 찢긴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한전의 마을보상금 때문에 서로 싸우는 모습들을 이미 보셨거든요. 푼돈 나눠먹으려고 서로 싸우고 싶지 않다, 그거 안 받겠다, 지금 이렇게 버티고 있습니다.
하승수 어떻게 해도 보상 자체가 엉터리일 수밖에 없다는 점, 실질적인 보상이라는 건 불가능하고, 워낙 피해 범위가 크며 정부는 그걸 보상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걸 오랜 반대운동 속에서 주민들이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또 한편 반대운동 과정에서 발견한 여러 가치들, 즉 마을, 이웃, 생명, 미래, 미래세대 이런 가치들 때문에 상당수 주민들이 보상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저도 느낍니다. 이분들은 정말 보상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송전선 끝에 있는 원전에 대해서, 우리나라 전력시스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 전체를 위해서 당신들이 송전선을 막아야 되겠다, 밀양에서 막아서 이 잘못된 구조를 바꿔야 되겠다, 그렇게 말씀들 하시니까 그게 외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 같아요. 또하나 밀양에서 많이 듣게 되는 말이 “공산주의보다 못하다”는 말입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 시골 주민들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실망스럽고….
석광훈 전원개발촉진법이 말 그대로 사회주의국가에서나 가능한 법이죠. 이른바 민주주의국가에서 그런 법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하승수 전원개발촉진법에 따르면 한전에서 결정하고 주민설명회 한번 하면 주민들이 뭐라고 하든 마음대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고, 거기에 아무런 제동장치가 없어요. 주민들이 반대하면 강제수용하면 그만이고, 그래도 반대하면 협박하고, 돈으로 회유하여 마을을 분열시키고. 그렇게 해도 된다는 법이 존재하고. 그런 법 치하에 살고 있으니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공산주의국가에서나 가능한 일 아니냐고, 밀양에서 평범한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걸 듣고 깜짝 놀랐어요. 전원개발촉진법의 대표적인 문제는 뭐라고 보십니까?
석광훈 강제수용이죠. 개인의 소유권을 박탈하고 국가가 강제수용하는 것은 한국정부가 북한이나 구소련체제를 비판할 때 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또한 사업타당성을 검토하고 인허가를 주는 과정이 전문성이 떨어지고 대단히 생략적이에요. 전기사업자의 판단이 사실상 관철되고 있습니다. 환경이나 안전 문제, 주민들의 재산권 등을 국가가 보호해줘야 하는데, 전원개발촉진법에 따르면 국가가 개입할 수 없게끔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있습니다.
하승수 전원개발촉진법에 따르면, 한전이 노선을 그어 가지고 산업통상자원부(예전의 지식경제부)에서 승인을 받으면 그걸로 모든 인허가 절차가 끝납니다. 환경을 파괴·개발할 때 필요한 각종 법률에 의거한 인허가 절차가 몽땅 생략되고 전부 승인받은 것으로 갈음됩니다. 의제조항이라고 합니다만, 이렇게 승인 하나로 다른 모든 절차(무려 13가지)가 생략, 합리화되는 문제도 지적되어왔습니다. 독재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법이에요. 1977년인가요? 박정희 때 만들어진 법이 아직까지 남아서 한전의 일방적인 사업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765kV 송전선, 정말 필요한가
하승수 송전선으로 인한 피해와 절차상의 문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문제의 핵심은 이 송전선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 타당한 사업인가 하는 것이겠죠. 밀양을 지나는 765kV 송전선뿐만 아니라 계획되어 있는 고압송전선들이 여럿입니다. 정부나 한전은 의심의 여지없이 무조건 필요하다, 다른 대안은 없고 송전선로를 새로 짓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걸 반대하는 건 지역이기주의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것인가요?
석광훈 밀양 송전선을 포함하는 이 사업은 원래 신고리원전에서 수도권까지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계획된 사업입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신고리 북경남으로부터 북쪽으로 신안성까지 가는 구간이 폐지가 됩니다. 애초에 신고리―북경남―신안성으로 계획된 송전선이므로 그 일부(북경남―신안성)가 폐지되었으면 나머지도 함께 폐지되었어야 합니다. 수도권에 송전하기 위한 목적인데 수도권으로 가는 구간이 폐지되었으니 사업 전체가 폐지되어야 마땅한 것이죠. 미국에 패스(PATH) 초고압송전선로 사례가 있어요. 오하이오엔 석탄 매장량이 많지만 전력 수요는 별로 없고, 동부 해안 쪽(메릴랜드나 뉴어크)에 상대적으로 수요가 많기 때문에, 오하이오주에 석탄화력발전소를 세워서, 동쪽으로 약 270마일 거리를 765kV 송전선로로 연결해 전력을 판매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여기선 하나의 패키지로서 송전선로와 발전소 건설사업이 함께 취소되었습니다. 우리 경우에도 북경남―신안성 구간이 폐지되는 순간 이 사업 전체의 명분이 없어진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대구에 전력을 공급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만들어졌습니다. 대구의 전력수요라는 건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요. 제주보다 약간 더 높은 정도의 수요인데, 인구가 감소 추세이기 때문에 그렇게 거대한 설비를 건설해서 대구의 전력수요를 충당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 정도는 가스복합발전 설비나 열병합발전 설비 3~4개 정도면 됩니다. 성서공단 같은 산업단지에 열병합시설을 조금 더 늘리는 정도로도 대구의 전력수요 증가분은 충족이 가능합니다. 전혀 설득력 없는 구실인 것이죠. 그래서 한전조차도 밀양 송전탑이 대구의 전력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거라는 주장은 적극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결국 수요야 어떻든 원전을 많이 건설하겠다는 한국수력원자력의 이해관계가 걸려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수도권에 전력을 공급한다는 구실이 없어진 상황에서도 원전을 짓고, 거기서 생산된 전기를 어딘가에 떨구자니, 자기 스스로 문제를 일으키는 셈입니다. 원전을 한곳에 집중해서 너무 많이 짓다 보니까 전기를 주체를 못해서 어디로든 보내지 않으면 안되는 식입니다. 사업 인허가권자, 즉 사실상 산업통상자원부가 이런 문제를 객관적·전문적으로 검토했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선 공무원들이 전문성이 없고 사실상 모든 정보를 한전에 의존하면서, 한전의 판단이 곧 국가적 판단이 된 것이죠.
하승수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나라는 공급 중심의 전력정책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해안에 원전이나 화력발전소를 몰아서 짓고, 거기서 생산된 전기를 전력수요지로 보내기 위해 송전선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즉 수요가 정말 필요한지 따져서 계획을 세우기보다 공급 중심으로 계획을 세워놓고, 송전선이 필요하다는 식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밀양은 특별히 더 문제가 많습니다. 애초에 수도권으로 보낼 계획이 폐지된 상태에서 황급히 대구로 보낸다는 새로운 계획에 따라서, 그러니까 서쪽으로 왔다가 다시 동쪽으로 가는 송전선로가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죠. 밀양 주민들은 설령 전기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초고압송전선 짓지 말고 전기가 필요한 곳에 발전소를 지으면 될 것 아니냐고 합니다. 서울에 전기가 필요하면 서울에 발전소를 짓고, 대구에 전기가 필요하면 대구에 지으라는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이계삼 지난 5월에 〈머니투데이〉 기자에게서 전화를 받았어요. 다짜고짜 이렇게 묻습디다. “밀양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전기 쓰면서 송전탑은 안된다는 건 문제 아닙니까?” 밀양 어르신들 전기요금 고지서를 보면, 태반이 한 달에 1만원도 안됩니다. 전력 수요가 제일 많은 지역에서는 그와 관련된 고통을 조금도 분담하지 않고, 전기를 제일 적게 쓰는 시골 노인들에게 고통을 전담하라는 야만적인 논리입니다.
한전과 밀양시, 보수언론들은 탈핵세력이 핵발전 반대투쟁 하다가 안되니까 밀양에 우르르 몰려있다, 이렇게 몰아붙입니다. 사실입니다. 밀양 송전탑 싸움으로 탈핵운동의 지평이 송전망까지 넓어진 측면이 있어요. 하지만 실상은 주민들의 각성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소수의 열성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탈핵에 대해 말하는 걸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탈핵희망버스 이후에 조금씩 달라진 것 같아요. 신고리 핵발전소 5~6호기 환경영향평가 공청회 때에도 버스 두 대나 가서 열심히 싸웠고, 탈핵희망버스 2차 때는 고리와 부산 정관, 3차 때는 강원도 삼척, 경북 영덕까지 원정 싸움을 갔어요. “핵발전 절대로 싸지 않다, 발전소에서 나오는 핵폐기물도 있지만, 송전탑 세운다고 이 많은 사람들 피눈물 쏟게 하고, 보상이다 뭐다 해서 이웃끼리 싸우게 만들고, 마을 갈가리 찢어서 얼마나 큰 손실을 입히냐.” “사람이 죽었지 않느냐, 앞으로도 사람이 얼마나 죽겠냐, 이러고도 어떻게 핵발전이 싸다고 하느냐”고 주민들은 말합니다. 돈이 아니라 생명의 계산법으로 핵발전 논리를 물리치는 겁니다. 고통을 통해서 주민들이 일구어낸 소중한 각성이고, 이런 것이 바로 어르신들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석광훈 순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용을 물리려면 ‘오염발생자 부담의 원칙’ 또는 ‘수혜자 부담의 원칙’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만약 대구의 전력수요를 위해서 전력을 공급한다면, 그럼 대구시민들이 이 부분을 부담하는 게 맞습니다. 지역별 송전요금 등을 통해서 전기요금을 차등화하면 됩니다. 또 전력수요지에선 송전망에 일종의 혼잡비용이 생기기 때문에 전기요금을 더 부과하면 됩니다. 이렇게 지역별로 전기요금이 달라지면, 당장엔 효과가 안 나타나더라도 장기적으로 전력수요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한편 발전의 측면에서, 현재 우리나라에선 발전소를 해안에 짓거나 수도권이나 도심지에 짓거나 사업자가 부담하는 비용이 똑같아요. 이것도 말이 안되는 일이죠. 경제성을 따져서, 수도권 같은 전력수요지 인근에 건설되는 발전소에 더 혜택이 주어지는 게 맞습니다. 수요가 없는 지역에 발전소를 지어서 장거리 송전하는 일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걸 해당 사업자(한수원)가 부담하지 않고, 그 비용을 n분의 1로 나누어 전국의 모든 발전(發電)사업자들이 똑같이 나누어 분담하고 있어요. 오염발생자 부담의 원칙이 실종된 것이죠. 밀양 주민들은 전기를 쓰지 않느냐고 공격을 하는데, 154kV 송전선 아니면 배전선로, 전봇대라면 논리나 맞죠. 그러나 765kV는 밀양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업입니다. 지역이기주의라니 어처구니없습니다.
하승수 일반시민은 물론이고 〈머니투데이〉 기자도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건데,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송전선엔 765kV도 있고, 345kV, 154kV, 66kV 등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765kV, 345kV 같은 초고압송전선은 송전선이 지나가는 지역의 전기수요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초고압송전선은 발전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대도시나 대공단에 전기를 보내기 위해 짓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많은 전문가들이 환경적 측면, 경제적 측면, 전력계통의 신뢰성 측면에서도 앞으로는 지역분산형 전원으로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즘에는 전기공학 하시는 분들도 이런 얘기를 많이 하시던데요. 지금처럼 석탄화력발전소나 원전을 바닷가에 지어서 초고압송전선으로 수도권이나 대도시, 대공장, 공단에 전기를 공급하는 구조는 앞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역분산형 전원, 즉 소비지 인근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사실을 감추고 마치 원전이나 석탄화력발전소를 지금처럼 짓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경제성 측면에서 석탄화력발전소나 원전을 지어서 고압송전선으로 송전하는 방식이 싸다고 주장하는데, 그건 원전의 경우엔 핵원료 채굴부터 사용후핵연료 처리 비용, 원전 폐로 비용, 사고위험 등의 숨은 비용, 석탄화력발전소도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의 다량 배출 등에 숨어있는 사회적 비용, 환경적 비용을 계산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코 싸지 않아요. 필요한 곳에서 전기를 생산하면 되지 않느냐는 주민들의 상식적인 주장은, 정책적으로 말하면 지역분산형 전원으로 가자는 건데, 타당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그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속가능하지 않고 낡은 체제를 한전이나 정부는 한사코 고수하려는 거고, 밀양 주민들은 새로운 체제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계삼 구체제에서 신체제로 넘어가는 결절점에 밀양이 있는 것이죠. 최근 윤상직 산업부장관이나 한진현 차관도 밀양 보면서 지역분산형 전원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어요. 조환익 한전 사장도 “밀양 겪으면서 765를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답니다. 밀양 싸움이 전력수급정책, 에너지시스템 전반에 대해 우리사회가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이 싸움이 잘못되었을 때, 졌을 때 새로운 체제를 바라는 변화의 힘이 다시 일종의 반혁명적 기운에 휩쓸려 더 큰 좌절을 낳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큽니다.
원전, 송전선, 원전, 송전선…, 악순환
하승수 밀양은 우리나라 전력시스템이 지역분산형 전원으로 가는 고비입니다. 정부나 한전은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고 왜곡되고 잘못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제공하고 있어요. 신고리―북경남 765kV 송전선이 타당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기서 밀리면 안된다”는 셈속에 고수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지금 쟁점 중 하나는, 정부나 한전이 앞으로 이 시스템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어쨌든 지금은 밀양 송전선이 필요하다, 신고리 3, 4호기 원전이 완공되면 전기를 생산해서 보내야 하는데 지금의 송전선으로는 보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부분입니다. 송전선을 안 지으면 신고리 3호기와 4호기를 다 지어도 가동하지 못한다는 것인데요, 바로 이 문제 때문에 국회 중재로 ‘전문가협의체’가 만들어졌던 것인데, 이 문제를 이야기해보죠.
석광훈 한전이 내세우는 명분이 이례적이에요. 무슨 얘기냐면, 과거 비슷한 분쟁에서는 이 사업 안하면 수도권에 정전이 일어난다, 어디 수요지에 정전이 일어난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지금은 그런 얘기가 전혀 안 나와요. 원전이 가동이 안될까 봐 송전선을 지어야 한다 ― 정부나 한전 스스로 이 사업이 신고리 원전을 위한 사업임을 인정하고 있어요. 이걸 분명하게 짚어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신고리원전을 가동하기 위해서 이 사업을 해야 하느냐를 따져봐야겠죠. 지금까지의 정부나 한전 쪽 논리는 이렇습니다 ― 신고리원전 3, 4호기에서 생산된 전력을 기존의 345kV 송전선로로 보낼 수 있지만(이 부분은 한전도 인정합니다) 용량이 포화되어 있다. 뭔가 문제가 생겨서 ‘탈락’(발전기와 송전선로가 분리되는 사고)이라도 생기면 다른 데까지 전체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광역 정전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밀양 765kV 송전선로를 지어서 밖으로 전력을 버려야 한다는 건데요,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10만 년에 한 번인지, 1만 년에 한 번인지, 10년에 한 번 일어나는 것인지 사업자(한전)가 과학적 데이터를 제시하고 거기에 따라 정책적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런 검토 결과가 없어요. 이렇게 기본적인 산술적 근거도 없는 게 이 사업의 가장 큰 맹점입니다.
하승수 정리하면, 평상시에는 전기를 보낼 수 있는데 송전선에서 사고가 나면 정전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래서 미리 여유를 두기 위해 765kV 송전선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사고가 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또 그게 정전으로 이어질 확률은 얼만지에 대해선 아무런 얘기를 못하면서 막연한 가능성을 가지고 혹시 모르니까 송전선 하나 더 만들어놔야 한다는 주장이군요. 그런데 지금 현재 고리에 4개 원전이 있고 신고리에 1, 2호기가 가동 중이고, 신고리 3, 4호기까지 들어서면 총 8개가 되니까 송전선이 더 필요하다는 주장인데, 하지만 고리원전들은 수명이 곧 끝나지 않습니까? 그런 점이 고려가 안되어 있죠?
이계삼 고리 1호기는 1977년 가동되기 시작해서 설계수명 30년이 끝난 2007년에 10년 연장해서 2017년에 끝납니다. 고리 4호기는 1985년에 상업 운전 시작해서 40년이 되는 해가 2025년입니다. 결국 앞으로 12년 안에 고리 1~4호기의 수명이 끝나게 됩니다. 12년 뒤부터는 신고리 1~4호기만 남습니다. 5, 6호기는 아직 착공도 안했고, 신규 증설이 안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2025년까지 12년 사이에 전체 8기 중에서 4기가 빠지는데 765kV 송전선로를 굳이 건설해야 되느냐. 이 부분에 대해서 한전은 제대로 답변해야 합니다.
정부는 2017년이 되면 고리 1호기 수명을 10년 더 연장해서 50년까지 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고리 2, 3, 4호기 설계수명이 40년인데, 20년씩 더 연장해서 60년까지 가동할 생각인 거예요. 이런 내부검토가 있다는 얘길 듣고 정말 모골이 송연했어요. 후쿠시마 생각이 딱 나는 거죠.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郞) 선생이 쓴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을 읽다가 쭈삣했어요. 2010년이 되면 후쿠시마에 가동된 지 40년 된 원전이 생겨나는데, 그렇게 되면 대사고가 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를 다카기 선생이 2000년에 하셨어요. 그리고 2011년에 그 예언이 현실이 되었단 말이죠. 고리 1~4호기를 후쿠시마와 똑같은 방식으로 수명연장하면, 거기다 내부 계획대로 진행이 된다면 신고리 7~8호기까지 포함해 고리 핵발전 단지에는 원전이 12기가 가동하게 되는 건데, 상상이나 됩니까? 반드시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밀양 765kV를 반드시 저지해야 하는 이유 중에는 노후한 고리 발전 단지를 계속 유지·확대하려는 핵마피아들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시도를 좌절시켜야 한다는 점도 있습니다. 밀양 싸움이 탈핵운동의 대의와 맞물리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석광훈 생각하기도 싫지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죠. 고리 2, 3, 4호기가 20년씩 수명연장이 되고, 신고리 5, 6, 7, 8호기가 계획대로 건설된다고 전제할 때 많은 사람들이 생각지 못하는 게 있는데, 그렇게 되면 추가로 765kV 송전선로가 또 필요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정치권이건 언론이든 정부든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서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건지…. 아주 객관적으로 중립적 입장에서, 밀양 주민들이 틀렸고 환경단체들도 잘못 판단해서 반대하는 거라고 치고 생각하더라도, 이 사업을 지금 이런 식으로 그대로 해나가면 필연적으로 제2의 밀양 사태를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지금 이 사업을 추진·지지하는 사람들은 거기까지 충분히 생각하고 있는 건가 심각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최소한 신고리 5, 6, 7, 8호기 같은 경우는 밀양과 상관없이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승수 당장 가장 낡았고 문제가 많은 고리 1호기 하나만 폐쇄하더라도 송전선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굳이 추가의 765kV 송전선이 필요 없다는 건 한전의 계산에 따라도 나옵니다. 지금 고리·신고리 원전들에서 나가는 345kV 송전선이 3개 선로가 있는데, 고리 1~4호기, 신고리 1~4호기가 100% 가동한다고 해도 정상상태에서 송전이 다 가능합니다. 정부나 한전이 의도하는 바대로 원전을 전부 다 수명연장하고, 또 새로 더 지어서 고리, 신고리에 최대 12개까지 원전이 늘어난다면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가장 밀집된 원자력 단지가 됩니다. 그때에는 12개 원전에서 나오는 송전선이 너무 불안정해져서 어쩔 수 없이 또하나의 765kV 송전선을 지을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밀양 송전선 문제에는 종합적인 토론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에 밀양 주민들이 사회적 공론화 기구도 요구하고, TV 공개토론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는 둘 다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이계삼 한전은 공사를 재개하려 하고 있지만 전문가협의체에서 한전이 입은 타격이 적지 않아서 공사를 강행하기에 부담이 크고 그래서 산업부가 뜯어말리고 있어요. 그러면서 보상협의체라고, 보상을 원하는 소수 주민들과 밀양 지역사회를 엮어서 반대 주민들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는 형국입니다. 행정조직과 관변 단체, 지역 기업인들이 거의 총동원되어 압박하고 있어요. 마음이 급합니다. 빨리 논의의 지평을 이동시켜야 합니다. TV 공개토론을 통해서라도 이런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데, 정부나 한전 쪽에선 손해 볼 일을 하지 않겠죠.
한전의 독점구조
하승수 밀양 문제는 우리나라 전체 발전·송전 시스템과 관련된 문제이고, 그걸 포괄해서 논의해야 하는데 정부나 한전은 신고리 3~4호기의 전기를 송전하는 데 밀양 송전선로가 필요한가로 좁혀서 논의하고 싶어 합니다. 전체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사회적 공론화 기구를 총리실에서 거부했죠. 이 부분과 관련해서 언론에 대해 좀 얘기해볼까요. 지금 밀양 주민들이 어려움을 느끼는 근본 원인에는 언론의 탓도 큰 것 같아요. 지역이기주의 때문에 반대한다, 보상 때문에 반대한다, 이런 식으로 보도해서 시민들에게 정확한 사실이 전달되는 않는 문제….
이계삼 오늘 언론중재위원회에 조·중·동, 〈한국경제〉, 〈머니투데이〉 다섯 언론사에 대해서 여섯 건의 반론보도 신청을 접수시키고 온 참입니다. 언론 이야기를 하자면, 제가 직접 겪어보니까 확실히 진보가 수적으로 엄청나게 열세예요. 어쨌든 주민들 편에서 문제를 다루는 데는 〈경향신문〉, 〈한겨레〉,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노컷뉴스〉 정돕니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경향신문〉에서 민주당 장하나 의원실이 한전 내부보고서를 받았는데 “한전 자체 조사로도 송전탑 전자파가 건강에 심각한 위해를 가한다”는 특종 보도를 했어요. 포털사이트에도 톱으로 떴어요. 그런데 좀 있으니까 전력관계 전문지에서 뜬금없이 일주일 전에 윤상직 장관이 밀양을 방문한 사진 기사를 계속해서 올려요. 이게 자꾸 올라오니까 경향 기사는 한참 뒤로 밀려나고, 검색에서 찾기가 어려워집니다. 사실 이런 측면도 있어요. 밀양 송전탑의 기술적 쟁점에 대해서 잘 모르는 기자들이 대부분이에요. 대다수 기자들이 이런 공부를 할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어요. 하루 단위 초치기로 살다 보니까 현상적인 기사를 쓰거나 한전이나 정부 쪽 주장을 받아서 쓰게 되는 것이죠. 심층취재를 기대하기 어려워요. 구조적인 문제에, 언론의 이념 지형은 편향되어 있는데다가, 이 문제에 대해 기자들이 별다른 관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
석광훈 지금 말씀하신 것 같은 에너지 관계 전문지들은 한전에 광고를 100% 의존하기 때문에 한전에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그런 역할들을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승수 여기서 전문가 얘기도 해볼까요. 한전과 정부는 전문가들도 송전선을 건설하는 방법밖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의 전문가들은 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발언을 못하는지요?
석광훈 구조적으로 전력 관련 전문가들은 대다수가 자신의 연구 프로젝트를 한전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고, 국내 전기사업도 한전에 독점되어 있기 때문에 한전 눈에 벗어나는 발언이나 활동을 하기는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사업에 대해 의혹을 갖고 있는 전문가들도 개인적으로는 이야기를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는 나서지 않아요. 전문가들이 독자적인 발언을 하기 어려운 구조가 근본적인 문제예요. 프로젝트에서 취직문제까지, 한전이 전력부문을 독점하고 있는 구조가 대단히 많은 폐단을 일으키고 있어요. 전자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같은 연구도 그래요. 그런 피해조사에 펀드를 주는 기관이 없습니다. 돈을 주는 곳은 한전 전력연구원 정도뿐이에요. 한전 용역을 받는 거 외에 대안이 없어요. 독립적인 검증이 구조적으로 어렵습니다.
하승수 언론이든 전문가든 돈에 포섭이 되어 독립적인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저도 국회 중재로 만들어진 전문가협의체에 참여하면서 한국의 전문가집단, 특히 전기 쪽에 정말 실망했습니다. 최소한의 성실성과 윤리의 문제라고 할까요. 주민들이 8년 동안 고통스럽게 반대운동을 해왔으면 최소한의 성실성은 보여줘야 하는 것인데, 한전의 자료를 그대로 베껴 와서, “한전 자료가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경악했습니다. 그 교수님들은 한전 주장이 본인들이 보기에 맞기 때문에 한전 자료를 그대로 자기들 의견인 것처럼 제출해도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분들은 A라는 학생이 자기는 B학생과 생각이 같아서 B의 것을 베껴서 리포트를 냈다고 하면 받아들이실까요? 논문 심사를 하는데 학생이 다른 누군가와 생각이 같아서 그 사람 논문을 베껴서 제출한다면 받아들일 겁니까? 어쨌든 교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그런 정도의 윤리의식이나 성실성밖에 없다는 건 한국사회의 비극입니다.
석광훈 사실 이번 전문가협의체의 한전 측 위원이나 위원장도 원래 한전과 정부가 선택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처음에 제안을 받은 분들은 따로 있고, 핵심적인 내용을 가장 잘 아는 분들도 따로 있지만 본인들이 거절했어요. 전력계통 계획에 실제로 참여했던 분은 아무도 안 왔어요. 전력공학을 했다고 해서 내용을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이 분야에서 경험이 거의 없고 잘 모르지만 한전에 충성도는 높은 그런 분들이 오셔서 내용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직접 보고서를 쓰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계삼 저는 주민 측 간사로서 전문가협의체 전 과정에 참여했는데, 베끼기 정도가 아니라 대필했다는 의혹이 어느 정도 검증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에게서 양심의 가책이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느낄 수 없었어요. 전문가집단이 한전 같은 스폰서를 끼고 호의호식하는 카르텔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문가집단이 한국에서 아주 부당하게 누리고 있는 특권적 지위와 그것이 주는 영혼의 마비 증세가 심각하다고 느꼈습니다. 어이없게도 한전 측 위원들이 낸 보도자료를 보면 주민 측 위원들이 전문성이 없어서 대화하기 힘들었다는 식으로 쓰여있습니다.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하승수 앞으로 밀양을 포함하여 송전선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당장 밀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인데요. 밀양 현지 주민들의 반대 의지는 확고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게 단지 밀양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오늘 충분히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밀양 주민이 아닌 사람들)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또 전력시스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 제도적인 측면을 포함해서 전체적인 국가정책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얘기해보죠.
이계삼 그 전에 정치문제를 짚고 싶어요. 한전이 유일하게 겁을 내고, 실지로 공사 중단을 권고할 수 있는 데는 국회뿐입니다. 행정부 내의 감사원이라든가, 검찰 혹은 사법부엔 기대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밀양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라고 해도 민주당 조경태 의원, 정의당 김제남 의원 정도밖에 없습니다. 대책위 대표단 네댓 명이 서울 올라와서 조를 짜서 30명 넘는 국회 산업위의 의원실을 찾아갑니다. 국회의원은커녕 보좌관도 만나기 힘들어요. 미리 약속을 잡아도 정책 담당 비서가 겨우 10분쯤 만나줍니다. 밀양에서 왔다고 하면, 이렇게 쌓여있는 데서 서류를 찾아서 훌훌 넘겨봅니다. 겨우 설명을 2~3분 하고 나오면 기분이 참담해요. 이 국회라는 중앙 정치무대의 병목을 통과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단식농성을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은 겁니까. 국회의원과 기자들, 좀 관심 가져달라는 거잖아요. 안철수 씨가 국회의원 정원을 300명에서 100명으로 줄여야 한다고 했지만, 웃음밖에 안 나옵니다. 300이 아니라 3,000명으로 늘려야 합니다. 최장집 교수 같은 분들은 정당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정당체제 개혁하자는 말도 하나 마나 한 소리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녹색당이 잘되어야 합니다.(웃음)
다행스럽지만 어르신들은 마을공동체 결속 같은 게 있어서 지금껏 잘 버티고 계십니다. 9~10월 한두 달 정도가 고비일 것 같아요. 밀양 문제를 단순히 신고리 3, 4호기와 연관된 송전선로의 문제가 아닌 고리 핵발전 단지의 문제, 전력시스템 전체의 문제로 끌어올려야 하는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광범위한 여론 형성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소수지만 뜻있는 시민들의 활동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밀양 싸움에 기존 탈핵운동 진영과 가톨릭 외에도 작은 뜻있는 그룹들이 큰 도움을 주셨어요. 어린이책시민연대, 수유너머, 용인 문탁 네트워크, 나눔문화, 하자작업장학교, 쌍용차 노조, 울산의 품앤페다고지. 밀양에도 자주 오고, 각 지역에서 뭔가 일들을 하고, 일이 있을 때는 주민들과 밀착되어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고, 받들어주셨어요. 이분들의 연대와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밀양 싸움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각자 자신이 속한 작은 단위, 지역 생협 조직도 좋고, 《녹색평론》 읽기모임 등에서 이 싸움을 위해 함께 움직여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다리품 팔아서 밀양에 방문해주시고, 저희들이 나름대로 구축해놓은 학습자료를 내려받아서 공부해주시면 좋겠어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한 사람들, 자기 일처럼 여기는 그룹이 더욱 두껍게 형성된다면 향후 벌어질 일들을 힘있게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석광훈 국회 말씀 하셨는데, 사실 국회의 역할엔 한계가 있어요. 계속 얘기해왔지만, 제도가 갖춰져야 합니다. 미국에는 주정부별 공공사업규제위원회(Public Utility/Service Commission)가 있어서 전문적으로 전력설비의 타당성 여부를 정부 부처와 별도로 독립적으로 판단합니다. 또한 전력설비 건설과 관련된 분쟁이 생겼을 때 그 분쟁을 공정하게 다룰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전력설비 인허가 독립 규제기관이라고 하면 낯설게 느끼실 거예요. 그만큼 전력문제와 관련된 여러가지 다툼에 대해서 우리 민주주의의 수준이 아직 부족합니다. 정부에서 독립된 규제기관이 필요합니다. 지금 산업부가 갈등심의위원회를 만들어서 단순히 주민들의 민원을 받는 창구를 만들려고 하고 있지만, 절대로 그런 방향은 안됩니다. 준(準)사법기관 성격의 완전히 새로운 기구가 필요합니다.
여러 번 얘기되었지만, 대용량 발전소를 해안가에 지어서 대도시에 장거리 송전하는 시스템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규모의 경제는 어느 순간부터 규모의 불경제를 만드는 상황에 옵니다. 우리가 그 경계선에 와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765kV 송전선로도 자체적인 문제로 정전을 일으킬 수 있어요. 울진원전에서 수도권으로 오는 765kV 송전선로와 당진 석탄발전소에서 오는 765kV 선로 하나가 무너지면 수도권 전체가 정전이 될 수 있어요. 규모의 불경제 상황에 와 있는 거죠. 전력수급 안정을 위해서라도 기존 시스템이 더이상 확대재생산되어선 안되고 분산형 전원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체제에선 분산형 전원으로 가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연료 가격이라든가 전기요금이라든가 국내 전력시장이 분산형 전원이 들어오기에 적합한 생태계가 아니에요. 여러가지 개선책이 필요한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전기요금이 정상화되어야 해요. 우리 전력수요는 정상적인 경제성장에 따른 수요가 아닙니다. 가격이 잘못 설정되어 있어서 자기 살 파먹기 식으로 전력수요가 늘어났어요. 전기요금이 개선되면 분산형 전원을 자발적으로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자연적으로 생겨날 겁니다. 정부도 장기적으로는 전력공급망, 송전망의 안전성을 위해서라도 분산형 전원을 추진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당장 밀양은 어떻게 할 거냐. 후손은 덕을 보겠지만 지금 이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도로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주민들은 고립되고, 모든 권력구조가 한전에 유리한 상황인데, 뭐랄까요, 전향적이고 완전히 이례적인 일로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력시스템도 그렇고 민주주의도 그렇고, 한 단계를 넘어서는 이 특수한 상황에서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역시 지금 상황에선 국회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하승수 밀양 주민들의 고통의 뿌리에는 잘못된 전력정책이 있습니다. 원가 이하로 산업용 전기를 공급하여 전기소비가 무분별하게 증가하도록 방치하고, 공급 확대 중심으로만 정책을 수립해온 정부가 밀양 주민들의 고통을 낳은 것입니다. 가정에서 쓰는 전기는 원전이나 석탄화력발전 안해도 해결 가능합니다. 결국 전기를 엄청나게 쓰는 대공장들이 문제이고, 이것을 위해서 대규모 발전소를 짓고, 초고압송전선을 세우는 겁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말이 있지만, 삼성, 현대, 이런 대기업들이 공장에서 쓰는 전기가 ‘블러드 일렉트리시티(electricity)’가 아닌가 합니다.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고, 시골 주민들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렇게 생산한 전기를 대공장에서 쓰고, 거기서 나온 이익을 누리는 세력들이 있고…. 이 탐욕스러운 구조가 근본원인입니다. 이 시스템을 변화시킬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을 어디서 어떻게 모을 거냐, 제 고민은 그겁니다.
얼마 전에 ‘전국 송전탑 반대 네트워크’가 발족했습니다. 전국에서 송전탑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지역들이 연대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고통받는 당사자들의 힘도 모아야 하고, 바깥에서 지원하는 단체나 개인들의 힘도 모으고 그런 힘들을 최대한 모아서 이 시스템에 계속해서 돌을 던지고,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밀양이 그 한가운데 있고요. 밀양 어르신들은 “밀양이 무너지면 전국이 무너진다”고 하시는데, 저도 그렇다고 봐요. 8년 동안 원인을 찾다 보니까 그 끝에 원전이 있었고, 전기 싸게 사서 무분별하게 쓰는 대기업들이 있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잘못된 정치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전국송전탑반대네트워크 결성 선언문을 보면, “우리는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원한다, 시골의 힘없는 주민들에게 눈물을 강요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정도까지 왔어요. 사실 녹색당의 미약함을 이 싸움을 통해서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녹색당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되었어요.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대안을 찾아나가는 집단이 없다면, 이 거대한 시스템의 문제가 절대로 저절로 해결될 리 없기 때문이죠. 우리에게 힘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힘을 모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장시간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정혜진 녹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