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즈 미츠루 지음, 김경인·김형수 옮김
《삶을 위한 학교》(녹색평론사, 2014년)
늘 꿈꾸었던 것은 다른 나라, 다른 세계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달리 갈 데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시절, 혁명기 소비에트나 ‘김 주석’이 통치하는 북한을 동경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에는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가 소개되었지만, 의문이 남았다. 어마어마한 식민지를 거느렸고 거대한 수탈과 살육의 바탕 위에 이룩된 높은 수준의 문화가 대체 무얼까, 똘레랑스는 결국 ‘강자의 도덕’ 아닌가. 그리고 프랑스가 세계 2위의 원전대국임을 알고 나서부터 그 나라에 대한 동경은 싹 사라졌다. 근대세계 속에 우리의 푯대가 되어줄 다른 체제, 모델은 없는 것 같았다. 근대 이전의 풀뿌리 민중세계를 되살리는 것 말고 우리가 선택할 길은 없어 보이는데, 이미 후기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어떻게 그런 세계를 되살릴 수 있을지는 막연했다.
그리고 덴마크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가슴이 뛰었다.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를 어떻게 맞았느냐는 것은 그 나라 민중의 현재적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는 사실을 덴마크를 보면서 깨달았다. 이를테면 우리는 강제로 근대세계로 편입당했고, 거의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수탈과 살육을 겪고, 그 반작용으로 적자생존과 힘의 논리를 강요당한 채 지난 100여 년의 시간을 지내야 했다. 우리의 근대 100년은 부국강병과 힘의 논리가 지배했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극심한 경제성장으로 내달려 오면서, 오직 적자생존과 힘의 논리에 마음의 자리를 다 빼앗겼다. 그런데 덴마크는 전혀 달랐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대만이 원전 중단을 결정해서 칭송을 받고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아예 원전을 짓지 않는 것이다. 덴마크가 바로 그런 나라이다. 원전은 중앙집권주의, 지역차별, 민중 배제의 상징이며, 거대자본과 권력의 유착관계로써 유지된다. 그 어마어마한 위험과 미래세대에까지 전가되는 부담을 고려하면 그 자체로 반민주주의의 상징이다. 1970년대 초반 오일쇼크를 겪고, 세계가 너도나도 원전으로 몰려갈 때 덴마크는 전혀 다른 사회적 과정을 거쳤다. 덴마크에는 ‘시민합의회의’라는 전통이 있어서 수준 높은 토론들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에너지를 풍족하게 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주제로까지 이어진 심도 깊은 토론들을 거쳤고, 곳곳에서 반원전운동이 불붙었다. 그중 특기할 움직임으로 ‘트빈스쿨’이라는 폴케호이스콜레(‘국민고등학교’라고 번역할 수 있으나 그런 표현으로는 의미를 담아낼 수 없어 이 책에서도 그대로 쓰고 있다 ― 필자 주)에서 추진한 에너지 자립운동의 일환인 풍차 제작 프로젝트가 있다. 몇몇 전문가들이 거들기는 했으나 거의 비전문가들이 함께 연구하며 자신들이 갖고 있는 기술을 응용하고 중고 부품을 이용해서 제작했다. “정부가 60만kW 원전 1기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3만 대의 풍차를 만들어서 민중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정신으로 출발해, 연인원 10만 명이 참여한 대중운동이었다. 결국 덴마크정부는 1985년 원전 건설을 인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
덴마크의 공식 종교는 루터파 복음교회인데, 그 기원이 되는 종교개혁 지도자 마틴 루터는 유대인을 배신 민족이라고 비난하며 “그들의 집을 파괴하고 시너고그(유대인 회당)를 불질러 파괴하라”고 선동한 사람이다. 그런데 덴마크의 유대인은 다른 유럽에서와 달리 박해를 일절 받지 않았고, 19세기 초부터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2차대전 당시 5년간 덴마크를 점령했던 독일은 덴마크정부에 유대인(7,000명가량)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덴마크정부는 즉시 시너고그에서 신년예배를 드리던 유대인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서, 이들이 중립국 스웨덴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했다. 시너고그에 남겨진 유대교 성전은 코펜하겐의 복음교회에 감추어졌고, 이들의 집과 직장도 그대로 보존되었고, 심지어 뜰의 잔디도 이웃들이 깎아주었다고 한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도 덴마크에는 이슬람계 이민자 학교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소수자 학교가 있다. 종교기관, 노동조합, NGO들은 자신의 이념에 따라 얼마든지 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고 있다. 신나치주의자들의 학교 설립도 제한하지 않는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똘레랑스’는 덴마크 민주주의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다른 근대, 높은 수준의 시민적 교양과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체제를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인가? 일본그룬트비협회 간사로 주민운동가, 교육철학자인 시미즈 미츠루(清水滿)의 책 《삶을 위한 학교》는 한마디로 그룬트비의 사상과, 이를 구현한 폴케호이스콜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룬트비의 사상
니콜라이 프레데릭 세베린 그룬트비(1783―1872)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적 배경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유년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고향 우드뷔의 아름다운 자연과 어머니와 교회에서 부양하는 의지가지없는 노인들이었다. 어머니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대지의 언어’ 그리고 노인들이 들려주는 전설과 옛이야기의 세계에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또한 당시 관행에 따라 라틴어학교에서 수학했지만, ‘모든 사람을 쓸모없게 하고 나태하게 하고 썩게 만드는’ 라틴어학교의 권위주의와 지식 중심의 일방적 학교문화에 격렬하게 분노했다. 젊은 시절 연상의 기혼 부인을 사랑하고 비련의 고통을 겪으며 그는 ‘인간’의 감정에 눈뜨게 되었고, 계몽주의의 차가운 이성보다 사랑으로 대변되는 인간적 감정의 우위를 설파하는 문예사조에 감화되었다.
그는 신학자이자 목사였지만 기성 교회에 순응하지 못했고, 형식과 강제에 의존하는 지식인 성직자를 혐오했다. 유년기의 영감을 좇아 북유럽 설화와 민중적 고전을 탐구하여 많은 책들을 번역·편찬했고, 그 깨달음의 기쁨을 시로 노래했다. 그는 급진적 인민주의의 길에 다가섰고, 끝내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말’에서 최종의 답을 찾았다. “진리는 성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모여든 회중에 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었던 것은 사도들, 원시 기독교 교단,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성서는 종이 위의 죽은 문자에 불과하며, 그 말씀이 되살아나는 것은 교회에 모여든 경건한, 가난한 ‘신도들 사이에서’라는 것이다. ‘민중들의 살아있는 말’, 그것이 바로 덴마크의 ‘다른 근대’의 출발점이었다.
우리 국민 모두는 죽음의 학교를 알고 있다. … 설령 (성스러운 문헌처럼) 천사의 손이나 별의 펜으로 쓰여졌다 하더라도 모든 문자는 죽어있다. 모든 책의 지식도 죽어있다. 그것은 독자의 삶과 결코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이나 문법만큼 마음을 파괴하고 죽이는 것은 없다.
― 그룬트비, 〈삶을 위한 학교〉(1838)
그러므로 그는 “가난하지만 신으로부터 받은 녹색의 대지를 보살피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친구”를 참된 덴마크인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의 생각은 기존 교단으로부터 배격당했지만, 그를 지지하는 농민과 개혁파 목사들이 타락한 국교회와 교회를 개혁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은 뒤 가난한 노인들을 부양하는 구빈원 겸 병원에서 목사로 종신토록 근무했다.
그룬트비 사상의 핵심 개념은 폴케오프뤼스닝(folkeoplysning: 민중의 자기계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교육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고 기피했다. 그룬트비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선거제와 의회는 부자와 엘리트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허구의 기제라고 보았다. 그는 민중과 엘리트,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의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고, 그 위에서 상호작용하며 포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폴케오프뤼스닝을 자신이 주창한 시민대학인 폴케호이스콜레의 목적으로 삼았다. 라틴어를 폐지하고, 배울 의지를 가진 누구라도 모여서 배울 수 있는, ‘살아있는 말’로 상호작용하며 삶의 신비를 깨닫고 ‘나 자신에게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학교를 제안했다. 관료, 상인, 수공업자, 농민의 자제들이 칸막이 없이 교류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폴케호이스콜레를 제안한 것이다. 그룬트비는 시험을 배격했다. 시험은 “젊은이가 자신의 경험의 범위에서가 아니라 타인의 말을 반복함으로써만 답할 수 있는 질문으로써 연장자가 젊은이를 괴롭히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오직 끊임없는 자기계발이 교육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보았다.
그룬트비는 그 자신 시인이었고, 이야기를 사랑했다. 그는 산문적인 세계의 거대함 앞에서 스스로를 자각하고, 차이를 통합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시의 정신임을 믿었다. 그는 이야기의 구체적인 풍토성과 너그러운 개방성을 사랑했다. 그는 시와 이야기가 ‘살아있는 말’을 되살려낼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그룬트비의 이상은 폴케호이스콜레운동 속에서 실제로 구현되었다.
크리스텐 콜
그룬트비는 영국 체류 당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보았던 모습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교사와 학생이 침식을 같이하고 친구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는 칼리지 형식의 학교를 제안했다. 그러나 그룬트비는 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제안은 크리스텐 콜(1816―1870)에게서 심화된 모습으로 실현되었다. 그룬트비는 국민대학을 꿈꾸었지만 콜 이후부터 실제로 창립된 폴케호이스콜레는 오히려 지방의 소규모 학교로 민중 스스로의 힘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폴케호이스콜레의 농민적 성격을 강화시켰고, 학교마다 특색을 갖춘 다원성을 구현할 수 있게 했다. 그것은 농민에 의한 사회개혁과 사회의 재조직화를 가능케 했으며, 결과적으로 덴마크의 근대를 농본사회로 이끌 수 있었다.
크리스텐 콜은 가난한 구둣방 집에서 태어나 사범학교에 다니던 청년기부터 깊은 신앙적 고민에 빠져들었다. 유럽을 도보로 횡단하는 고행도 마다하지 않은 구도자였던 콜은 그룬트비의 사상을 접하면서 해답을 찾았다. 그는 무명의 민중의 교사였지만 그룬트비의 격려와 후원에 힘입어 폴케호이스콜레를 창립하고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며 헌신적으로 가르쳐 곳곳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는 “아이들은 부모의 것이지 국가의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국가로부터 되찾자”고 주장하며, 초등 대안학교인 프리스콜레의 기원이 되는 학교를 만들었다. 현재 프리스콜레는 덴마크 전역에 200여 개교가 존재하며, 공교육에 깊은 자극을 주어 덴마크의 초등교육을 사실상 견인하고 있다. 콜은 또한 오늘날 덴마크 교육제도에서 중요한 한 축이 되는 애프터스콜레의 간접적인 창설자이다. 14세부터 18세의 학생을 별도로 받아들여 나름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애프터스콜레의 기원이 되었다. 오늘날 덴마크의 애프터스콜레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동안 공교육 트랙에서 빠져나와 음악, 스포츠, 미술, 목공을 프로젝트 활동을 통해 거의 전문가 수준까지 배우게 되는 학교이다. 기숙생활을 통해 스스로 삶을 꾸려가는 법을 배우고, 풍부한 대화와 상호작용을 통해 예민한 청소년기의 자아 형성에 대단히 소중한 역할을 한다. 콜이 첫 번째 전형을 만들어낸 이래 150년 동안 애프터스콜레는 덴마크 교육에서 독특한 역할을 해왔고, 현재는 전국에 226개 학교가 있으며, 덴마크 청소년 셋 중 한 명은 이 학교를 거쳐 간다고 한다.
농민과 협동조합
프로이센과 1, 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 끝난 1864년, 덴마크는 유틀란트 반도의 3분의 1을 상실했다. 나라 전체가 열패감에 빠져 있었고, 국수적인 민족주의가 발호할 때였다. 그러나 그룬트비의 사상과 폴케호이스콜레의 민중적 교육의 저력은 전혀 다른 방식의 대안을 찾았다. 유럽 문화를 무시하여 전쟁에서 졌고, 산업혁명이 지체되어 기술력과 경제력이 떨어진 탓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항해서, 뜻있는 그룬트비의 사상적 제자들은 폴케호이스콜레를 창립하여 농민을 위한 민중교육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뛰어난 시인, 신학자, 과학자가 몰려들어 민중교육의 일선에서 활동했다. 달가스(1828―1894)의 “칼로써 잃어버린 것을 보습으로 되찾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힘을 키워 무력으로 적국에 대해서 복수를 계획하지 않고, 쟁기와 보습을 갖고 남은 영토와 싸워 그것을 전원으로 바꿈으로써 적이 뺏어간 것을 벌충하자는 것이다. 달가스는 히스 황야에 농민들과 함께 방풍림을 조성하고 용수로를 건설했으며, 토지개량, 도로망과 간이 철도를 정비하는 등 농업진흥사업을 도왔다. 끝내 덴마크 농민들은 100만ha의 황무지를 70만ha의 경지로 바꾸었고, 19만ha를 숲으로 만들었다.
1840년대부터 1900년경까지 오늘날 덴마크의 기틀을 닦은 세력은 농민이었다. 폴케호이스콜레와 그 자매학교에 해당하는 농업학교에 다니며 인간해방과 평등의식에 눈을 뜬 농민 그리고 그들의 교사들이 농민계몽 지도자가 되었고, 정부에 농촌위원회 구성과 자작농 창설, 소작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근대화를 겪은 국가들의 일반적인 경로와 달리 농민들이 도시 프롤레타리아로 편입되지 않게 되었고, 자신의 자리에서 뿌리내린 농민들의 공동체인 협동조합 조직이 활발하게 형성되었다. 농민들은 낙농, 도축, 원예 협동조합들을 만들어 생산과 유통 과정을 스스로 관장했다. 우리나라에는 1990년대 이후에야 대중적으로 알려진 소비자생협이 덴마크에서는 1866년에 만들어졌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주식회사로의 전환이 끊임없이 요구되었지만, 대자본가가 지배하게 될 것을 예견한 농민들은 이에 반대했다. 협동조합의 농민들은 높은 생산성과 협동력으로 세계 제일의 농민국가를 건설했다.
농민들은 정치개혁을 주도했다. 농민세력은 처음에는 도시의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자들과 연대하였으나 연대는 깨지고 1870년 ‘좌익당’을 결성하여 ‘우익당’과 맞서게 되었다. 좌익당 지도자들은 모두 폴케호이스콜레 졸업생들이었다. 자작농과 소농이 중심이 된 농민정당은 늘 혁신세력이었다. 보수당은 농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1891년 세계 최초로 연금법을 만들었고, 이로써 덴마크 사회복지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1901년에는 좌익당이 집권당과 타협하자 다시 ‘좌익개혁당’이 만들어져 도시노동자 중심의 사민당과 함께 노농정권을 수립했다. 농민이 하원 총수의 114석 중 76석을 차지할 정도로 다수당이고, 사민당은 14석에 불과했다. 이 좌익 개혁당이 정권 장악 후 우경화하자 다시 ‘급진개혁당’이 분리되어 1913년 정권을 장악하고 여성 참정권, 8시간 노동제, 소작농을 위한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1921년에 이미 건강보험제에 해당하는 ‘질병보험법’이 제정되었고, 이듬해에는 ‘노령연금법’이 제정되었다. 덴마크 현대 정치의 기본방향을 결정한 것은 폴케호이스콜레로 대표되는 농민 중심의 민중운동이었다.
덴마크의 다른 근대와 오늘날 우리
덴마크도 2차대전 이후 서서히 산업사회로 재편되면서 농업국가를 고수할 수는 없게 되었다. 덴마크 경제 또한 글로벌 경제의 격랑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덴마크 농민의 비율은 5.8%로 급감하게 된다. 사회복지제도에서 여전히 이상적인 나라로 거론되지만, ‘노동의욕 감퇴 사회’로의 재편은 피할 수 없었다. 오늘날 폴케호이스콜레는 농촌 청년들이 아닌 도시의 젊은이들을 주로 받아들이게 되고, 문화센터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고, 사회변혁적 정체성은 흐려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세계 제1의 도서관 장서 대출을 자랑하는 나라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 덴마크의 높은 시민적 교양은 유지되고 있고, 복지‘국가’가 아닌 복지‘사회’의 기반은 건재하며,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적 전통은 굳건하다. 덴마크의 다른 근대는 그룬트비와 폴케호이스콜레, 곧 사상과 교육의 힘으로 가능했다. 한편 프로이센과의 전쟁 이후 독일 침공(5년) 정도를 제외한 150여 년의 시간대에 별다른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았던 유럽의 변방에다 매력적인 자원의 산지가 아니었던 지정학적 행운도 덴마크의 다른 근대의 한 요인이리라 추측해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과거를 생각했다. 그룬트비의 자리에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크리스텐 콜의 자리에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과 《성서조선》의 김교신을, 그리고 폴케호이스콜레의 자리에 구한말과 식민지시대에 이 나라 곳곳에 존재했던 수많은 야학들을 대입시켜보았다. 이를테면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대륙으로 건너가기 이전의 윤봉길, 열일곱 나이에 농민을 위한 야학을 열고 계모임과 독서회, 농민생산자협동조합을 조직하면서 농민들을 위한 교과서 《농민독본》을 저술했던 윤봉길 같은 이들이 또한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의 근대 이행기에서 최제우와 최시형과 안창호와 이승훈과 김교신 그리고 수많은 윤봉길들은 좌절했고, 수많은 이광수들이 우리의 근대를 이끌었다.
지금 우리는 또다른 이행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이미 ‘교육 불가능’이라는 언술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그것은 학교교육이 지금껏 그 어이없는 파행과 모순 속에서도 그나마 학생들에게 부여해왔던 교육을 통한 물질적 유익이 이제 그 시효를 다한 것에서 일차적으로 유래한다. 그것은, 석유가 생산 정점을 지나고 금융경제가 황혼기에 접어든 세계적 상황에, 부동산 거품이 언제 꺼질 줄 모르고 빈부격차가 갈수록 극심해지며, 비정규직 산업예비군이 창궐하는 국내적 상황에, 그리고 땀 흘려 일하는 실체적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즉자적인 욕망의 해소에만 골몰하며 각기 인생의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정확히 조응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바라볼 한 푯대로서 덴마크를 설정할 것을 제안한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언어’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땀 흘려 노동하는 삶,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생존방식, 인생의 의미를 궁구하는 대화와 공동체생활을 복원하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주적인 농민으로, 시민으로 일어설 수 있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그 출발은 덴마크의 폴케호이스콜레와 같은 작은 교육기관이 지금 이 나라 곳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우선, 나부터 그 길을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