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체제는 합리적 농업과는 역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고, 합리적 농업은 자본주의체제와는 양립 불가능(설령 자본주의체제가 농업에 있어서 기술발전을 촉진시켰다고 해도)하다. 합리적인 농업에 필요한 것은 자기자신을 위해 밭을 경작하는 소규모 농민 또는 연합한 생산자들을 관리해가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세계공화국으로》에서 ‘합리적인 농업’은 소농들의 협동과 연대의 길이라 가리키고 있다. 맑스의 《자본론》을 인용했다.
오늘날 우리 농민에게 ‘합리적 농업’은 가당치도 않다. 꿈이다.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체제와 전혀 양립 불가능해 보인다. 사사로운 상업농과 돈만 좇는 기업농이 논과 밭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합리적인 농업’은 자본과 공권력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농업이 국가기간산업 대접을 받고, 농민은 공익농민 대우를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공익농민 기본소득’ 수준의 혁신 정책을 꺼내놓는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농민이 처해 있는 농정 현실은 야생의 정글이다. 경쟁 상대는 이웃 마을 부농 정도가 아니다. 5대 곡물메이저를 앞세운 초국적 자본과 세계열강이다. 체급이 다르다. 무지막지하다. 농가당 평균 농지 1.5ha, 농업소득 800만원의 우리 농민들의 승산은 전무하다. 식량안보·식량주권은 고사하고 처자식의 생존권조차 지켜낼 수 없다.
그렇다고 농사를 그냥 포기할 수 없다. 농업을 대체할 다른 미래산업도 없다. 어느 국가든 농업은 국가주권을 지키는 기간산업이고 국민생명을 살리는 생명산업이기 때문이다. 설사 휴대전화와 자동차를 많이 내다 팔아 돈을 긁어모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기계나 돈을 조리해서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곡물메이저가, 초국적 자본이, 세계열강이 식량을 순순히 내주지 않는다면 모두 굶어 죽어야 한다.
그래서 농업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마땅히 ‘국가기간산업’으로 대접받아야 한다. 국가기간산업이란 ‘국가경제의 사활, 국민의 생존권 보호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산업’을 일컫는다. 교통, 에너지, 보건의료, 교육, 주택 등이 그렇다. 농업도 물론 그렇다. 따라서 농지, 생산기반시설, 농기업 등 농업 인프라를 국유화·공유화할 명분은 충분하다. 이유 또한 타당하다. 무한경쟁의 민간시장에 국가기간산업인 농업의 운명을 떠맡기는 건 무책임하다. 위험하다.
농업의 국가기간산업화 작업은 정부의 책무다. 농민단체와 진보 정당에서는 식량주권을 지키는 농업과 농민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농업을 국가기간산업의 지위로 법제화할 것을 단호히 요청하고 있다. 가령 “국가기간산업인 농업에 복무하며 식량주권을 지키는 농민에 대해 준공무원 대우를 해야 한다”며, “농민들에게 정부에서 월 급여를 지급하는 일종의 ‘국가책임 공익농민제도’를 도입하자”고 제안한다. 국회에 기약 없이 법안이 계류 중인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 ‘국민 기초식량보장제’ 입법투쟁도 같은 취지이자 맥락이다.
농민에게 국가에서 월급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농가의 소득안정은 물론, 농업과 농민의 사회적 지위도 향상된다는 주장이다. 또 신규 농업인력도 유입되고 지역공동체 삶의 질도 높아진다고 기대한다. 그 전에, 농업의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인 다원적 가치 자체가 사회공익 행위로서 얼마든지 존중되고 대접받는 게 옳다는 논리다.
기본소득제란 먼 미래의 구상이나 소망이 아니다. 현재진행형으로 집행 가능한 정책이다. 지난해 스위스에서는 모든 성인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자는 기본소득제 국민 발의 법안이 의회에 제출됐다. 취업 여부나 소득 수준 등에 관계없이 전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기본소득을 국가가 지급하자는 것이다. 브라질은 일찍이 2004년 시민기본소득제를 입법화했다. 미국, 독일 등에서도 기본소득 제도화 운동이 활발하다. 베네수엘라는 주요 농업기업을 국유화하면서 농업의 국가기간산업화 기반부터 다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기본소득 한국 네트워크’가 기본소득제 연구와 개발을 견인하고 있다. 이제 농업의 국가기간산업화, ‘공익농민 기본소득제’는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공론의 광장에서 토론하고 검토할 적기가 이 땅에도 도래한 것이다.
한 나라의 기반인 농업이 지속가능하려면
우리 농민은 농사만 지어 먹고살 수 없다. 농업을 직업으로 삼는 건 불안하고 불행한 선택이다. 통계청의 농가경제 조사 결과는 그 사실을 증언한다. 농가 소득 중 농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31.4%에서 2013년 29.1%까지 매년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이로써 도시근로자 소득의 약 95% 수준이었던 농가 소득은 2012년 57.5%까지 낮아졌다. 농가 소득원의 구조 자체가 몹시 불량하고 부실하다. 농가 소득은 경상소득(농업소득, 농외소득, 이전소득)과 비경상소득으로 구분한다. 최근 농가 소득은 농외소득으로 주로 구성된다. 급여수입, 농업임금수입 등 근로수입 증가폭이 커지고 있는 추세다. 본업인 농사 외에 부업이나 품을 팔아야 겨우 먹고살 수 있다. 농업소득은 주는데 농가 부채는 크게 늘고 있다. 1995년 916만 3,000원이던 것이 2013년 2,736만 3,000원으로 늘어났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소농과 영세농 문제는 더 심각하다. 미곡 수입은 정체되고, 채소 수입은 감소하고 있다. 관행적 농사밖에 모르는 소농의 소득 수준은 최저생계선을 위협하는 수준이다. 활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런 악화일로의 농가 경제는 시장개방과 농정 실패가 원인이다. 근본적으로 농정의 철학과 패러다임부터 바꾸어야 한다. 농가 소득 안정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농업·농촌을 앞세워야 한다. ‘돈 버는 농업’이 아닌 ‘사람 사는 농촌’이 좌표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농민에게는 불안정한 농업소득 말고 안정된 소득원이 따로 필요하다. ‘공익농민 기본소득’ 같은 소득원이다.
우리나라도 농업직불금이라는 현금지원 제도가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요식적이다. 실효성과 진정성이 부족하다. 정부는 2004년 ‘농업·농촌 종합대책’에서 농림부 예산 대비 직불사업 예산 비중은 23%까지, 농가 소득 대비 직불금 비중은 10%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하지만 공수표였다. 2013년 직불사업 예산 비중은 18%, 농가 소득 대비 직불금 비중은 4.3%에 그치고 있다. 농가 소득 대비 직불금 비중은 미국 12.2%, 영국 19.5%, 일본 7.9% 등이다. 오히려 선진국의 대규모 기업농에 대한 직불금 지급률이 한국보다 더 높다(강마야, 〈농업직불금의 문제와 제도 개선 방안〉, (사)농정연구센터 제254회 월례세미나 발표문(2014.9.) 참조).
당초 농업직불금제도는 시장개방에 따른 농가 소득 감소분 보전을 위한 대책으로 도입되었다. 태생적·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요즘 제도 개선의 논의와 연구가 활발한 듯한데 한계가 있을 것으로 염려된다.
심지어 국회예산정책처 변재연 예산분석관은 그나마 책정된 직불금 예산의 집행 실효성의 허점까지 지적하고 있다. “2013년에 순 직불성(쌀소득보전, 친환경, 밭농업, 조건불리, 피해보전 등) 예산은 대부분 집행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직불제에서 무조건 증액을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며, “우리나라 농업예산 중 직불금 비중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은데 농가 소득 중 직불금 비중은 아주 낮은 상황”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 충남발전연구원 강마야 연구위원은 “일본, 스위스, 유럽연합(EU) 등 주요 선진국의 농정 성격은 이미 산업정책에서 지역정책으로 변화하고 있다”면서, “농업직불금제도 운영 방향을 소득 보조에서 농업·농촌을 공공재로서 바라본다는 관점을 유지한다는 차원의, 다원적·공익적 기능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잡아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국도 그런 방향으로 전환, 개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예 농가 소득 지원효과가 떨어지는 직불금제를 ‘공익농민 기본소득제’로 대체하는 식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의 농정은 대동소이하다. 핵심 화두는 공히 ‘기업화’와 ‘산업화’로 집약된다. 한마디로 “대기업 중심의 규모화로 농업을 공업화·산업화하겠다”는 방침이다. ‘농업 선진화’, ‘첨단 융복합 6차 산업화’ 같은 현란한 신조어를 동원해 기업농 우선의 ‘살농정책’을 초지일관 고수하고 있다. 오로지 물리적 성과와 계량적 효율성을 농정의 지상과제로 삼겠다는 불순한 저의다.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는 국가기간산업으로서의 ‘농업’의 공익적 가치와 진실에 대해 몰상식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로 보인다. 대기업 중심 성장 및 개발 기조의 농정은 결코 우리 농업의 해법이 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상업적 기업은 농업과 어울리지 않는다. 기업은 수익성에 집착하나 농업은 공익성에 헌신하는 ‘기간산업’이기 때문이다. 농업은 돈 놓고 돈 먹는 투전판이 될 수 없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국가기간산업 농업, 국가책임 농정’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경쟁력과 효율성이라는 잣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신자유주의 농정을 끝장낼 것이다. 국가기간산업으로서 농업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지는 국가책임 농정으로 대전환할 것”을 선언했다. ‘국민기초식량보장법’, ‘식량자급률 50%’, ‘농지 공개념 강화’, ‘농가 소득 도시 가구 대비 평균 95%까지 보장’, ‘농촌공동체 리더 30만 명 육성’ 등의 핵심 공약을 통해 농업의 국가기간산업화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보다 먼저 제1공화국 헌법에 이미 중요 산업의 국유화 조항이 명시된 적도 있다. 1948년 7월 17일에 제정된 제1공화국 헌법 제85조와 제87조에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하에 둔다”고 새겨져 있다. 농업이 여기서 빠질 수 없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진보정권은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차근차근 실천했다. 국유화 범위를 중요 산업의 30%로 한정, 자칫 반대세력과의 정면충돌을 불러올 무상몰수 방식을 피해 유상구매 방식을 취하고, 또 국제법에 근거해 적절한 보상절차를 밟기도 했다.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이 국유화를 빌미로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를 합리화할 수 있는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우리 농업의 국가기간산업화도 이렇게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공익농민 기본소득’ 실행안
지난 2007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은 농업을 공공산업으로 법제화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공익농민 제도도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17대 대통령 선거 핵심 농업정책 요구안’을 통해 식량주권과 다원적 기능을 제공하는 농업·농민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공익농민제’는 ‘국가기간산업인 농업에 복무하며 식량주권을 지키는 농민에 대해 준공무원 대우를 하고, 월 급여를 지급하는 일종의 국가책임 농민제도’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 전농은 구체적인 실행방법으로 3년간 30만 명의 공익농민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목표를 정했다. 단계적으로 100만 명까지 늘린다는 계획이었다. 현재 농민 3명 중 1명은 공익농민 월급쟁이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당시 보수적인 정치권은 농민들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여론도 움직이지 않았다. 국민들은 제도의 취지와 진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교감하거나 공감할 수 없었다. 그나마 귀를 열어놓은 진보세력에게는 집권하기 전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무겁고 어려운 숙제였다.
요즘 나라 안팎으로 기본소득제 논의가 뜨겁다. 이쯤에서 ‘공익농민 기본소득제’를 본격적으로 꺼내 든다. 이름하여 ‘공익농민 월급형 기본소득제’의 실행모델이다. 우리나라 형편에 기본소득제를 단기에, 일시에, 혁명적으로 단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회적 합의를 통한 제도의 발효와 숙성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일단 1단계에서는 1안으로 18~50세의 청장년 10만 명에게 5년 이상 150만원씩 월급을 지급하는 ‘청년 공익영농요원제’를 제안한다. 기본소득제 도입의 단초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농식품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후계농업인 육성정책’을 확대·강화하는 방식이다. ‘병역특례 후계농업인 산업기능요원제도’까지 연계한다면 일종의 병역 대체복무제도로 기능할 수도 있다.
표1. 공익농민 기본소득제 추진 단계별 실행모델 설계안
설계안 | 대상 | 범위 | 월 급여 | 연간 계산 | 특징 | ||
1단계 | 1-1안 | 청년 공익영농요원제 | 18~50세 공익영농요원 | 청장년 10만 명 (5년 이상) |
150만원 | 1조 8,000억원 | 병역특례 대체복무 연계 ‘공익영농요원법’ 제정 |
1-2안 | 지역 단위 공익농민 기본소득제 | 특정 지역 농민 |
지역 농민 2만 명 |
50만원 | 1,200억원 | ‘지역농민 기본소득 지원 조례’ 제정 | |
2단계 | 2-1안 | 영세농 기초생활연금제 | 소득인정액* 하위 30% 농민 |
영세농 90만 명 |
50만원 | 5조 4,000억원 | ‘농민 기초생활보장법’ 제정(고령농 약 35%) |
2-2안 | 고령농 기초생활연금제 | 65세 이상 고령농 |
고령 농민 90만 명 |
50만원 | 5조 4,000억원 | ||
3단계 | 국가 단위 공익농민 기본소득제 | 모든 농민 | 농민 300만 명 |
50만원 | 18조원 | ‘농민 기본소득법’ 제정 |
*‘소득인정액’은 월 소득 평가액과 재산의 월 소득 환산액을 합산한 금액
1단계의 2안으로 특정 지역 단위(광역 또는 기초지자체)에서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시도할 필요가 있다. 이때 소요 예산, 농민 수 등의 지역 단위 특정 요건을 감안, 지역의 농민 전부를 대상으로 할지 농가 소득, 낙후도 등을 기준으로 일부 하위계층에 대해 우선 시행할지 여부는 지역의 합리적 합의를 구해야 할 것이다. 가령 충남 홍성군의 경우, 2010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 8만 9,603명 가운데 31.5%인 2만 8,274명이 농민(농가 인구)이다. 이들에게 50만원씩 월급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연간 약 1,414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이는 홍성군의 2012년도 세입예산 총액 5,180억원의 27.3%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2단계에서는 1안으로 ‘영세농 기초생활연금제’, 2안으로 ‘고령농 기초생활연금제’를 시행하는 게 어떨까. ‘영세농 기초생활연금제’는 소득인정액 하위 30%의 영세농에게, ‘고령농 기초생활연금제’는 65세 이상 고령농 약 90만 명의 농민에게 월 50만원씩 지급하는 방식이다. 연간 예산은 각각 5조 4,000억원이 소요될 전망이다. 현행 기초연금제도가 일종의 노인연금제라면, ‘영세농 또는 고령농 기초생활연금제’란 일종의 농민연금제라 할 수 있다. 가계가 절대 빈곤하거나 고령으로 노동력과 사회적 보호막이 극히 취약한 영세농, 고령농의 기초생활을 보장하겠다는 뜻이다.
본격적인 개념과 차원의 ‘공익농민 기본소득제’는 3단계에서 도입하기로 한다. ‘공익농민 기본소득제’ 궁극의 원형이다. 국가 단위로 확장해 모든 농민을 수혜 대상으로 한다. 2013년 말 기준으로 약 300만 명의 농민에게 월 50만원씩 무조건, 무기한 지급한다. 소요되는 연간 예산은 18조원 정도로 농림·수산·식품 분야 연간 총지출 예산액(19조 2,924억원)과 근사한 규모다. 기본소득 지급 대상자인 ‘공익농민’을 선정하고 선별하는 데 고민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현행 ‘농민(농업인)’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할 것인지, ‘공익농민(또는 공익농업경영체)’의 정의와 기준을 따로, 엄격하게 신설할 것인지, 심지어 위장농, 취미농 등 일부 농민들의 ‘도덕적 해이’는 어떻게 조치해야 할지, 추후 이해관계자 사이에 별도의 논의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이른바 ‘공익농민 기본소득제 특별법’ 법제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은 5년마다 전국 소비자물가 상승률 등을 고려하여 기본소득 금액 적정성을 평가하고, 농민 빈곤 실태 조사 및 장기적인 재정 소요에 대한 전망을 하도록 하며, 기본소득액의 적정성 평가 결과를 반영하여 기본소득 금액을 조정”하는 게 골자다.
농민기본소득의 의의와 가능성
무엇보다 ‘공익농민 기본소득제’ 같은 특단의 정책 지원제도의 성패는 재원의 조달에 달려 있다. 우선 연간 13조원 이상이 쓰여지는 기존 농업·농촌분야 예산의 재정지출 구조부터 혁신해야 한다. 토건 중심 농촌지역 개발사업, 기만적 해외농업 개발사업, 허구적 직불금사업 등 불요불급한 용처가 적지 않을 것이다. 농어촌특별세 전용 및 증세, 농민 사회복지세 신설, 자유무역협정(FTA) 무역이득 공유제 또는 농업파괴무역 부당이득금 환수제(전희식, 2014년) 도입 등도 고려해야 한다.
농어촌특별세는 1994년 3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의 타결에 따른 후속대책의 일환이다. ‘농어업의 경쟁력 강화와 농어촌산업기반시설의 확충 및 농어촌지역개발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법 제1조)하기 위한 목적세로 신설된 것이다. 이후 미국, EU와의 FTA 발효 등 지속적 시장개방에 따른 농업·농촌분야의 투자 재원 마련을 위해 2024년까지 추가 연장된 상태다. 농어촌특별세의 주요 세원은 소득세 등의 조세 감면을 받는 자, 과세표준 금액이 5억원을 초과하는 법인, 증권거래세·취득세·종합부동산세 및 레저세의 납세의무자 등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농특세가 농림어업분야 총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10년 23.7%(4조 1,000억원), 2012년 30.4%(5조 5,000억원)로 점차 커지고 있다.
그런데 농특세 도입 목적이 농식품재정사업 전반의 내용을 포함하지만 세출 측면에서 모호한 지출 내역이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농식품재정의 정책사업을 ‘농업경쟁력 제고’, ‘농업인 복지 증진’, ‘농촌개발’ 등으로 구분하고, 농특세 목적에 맞는 정책에 집중하라는 주문이다. 즉, 일반회계 재원사업은 농업경쟁력 사업에 집중하고, 농특세는 농업·농촌의 복지 증진과 농촌 주민의 행복도를 높일 수 있는 사업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공익농민 기본소득’의 유력한 재원이 될 수 있다.
‘농민 사회복지세’도 타당성이 충분하다. 지난해 정의당 박원석 의원은 조세정의·복지확대를 위한 ‘사회복지세법’을 발의했다. “조세 형평성 제고와 사회복지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및 증여세, 종합부동산세에 대하여 사회복지세를 부가한다”는 게 골자다. “소득세, 법인세, 상속·증여세, 종합부동산세 납세의무자로 하여금 해당 납세액의 15~30%를 가산하는 방식(surtax)의 사회복지 목적세를 신설하고, 연간 15조원 규모의 세수가 예상되는 사회복지세 재원은 오로지 복지 확충을 위한 재원으로만 사용하도록 한다”는 입법 목적이다.
이 같은 기존 사회복지세 조성 및 사용 구조를 참조,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대표적인 저소득 복지소외 집단인 ‘농민’들로 특정하는 이른바 ‘농민 사회복지세’를 제안할 수 있다. 역시 ‘공익농민 기본소득’의 유력한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관련해 최근의 무역이득공유제 도입 움직임도 주목된다. 한미FTA, 한중FTA 등 FTA 확대에 따른 국내 농업피해 보전을 위하는 목적으로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른 농어업인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 개정 논의가 활발하다.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한 농어업분야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제조업, 서비스업 등 타 산업분야에서 발생하는 순이익의 일정부분을 환수하여 농어업분야에 지원하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전희식 녹색당 농업먹거리특위 위원장은 좀더 공격적이다. ‘무역이득금 공유제’는 표현이 흐리멍텅하다는 것이다. ‘농업파괴무역 부당이득금 환수제’로 부르자고 한다. “현재 주로 국민세금을 원천으로 조성하게 되어 있는 ‘기금의 조성’ 책임주체에 ‘농업파괴 무역 이득 산업’을 직접적으로 포함하자”는 주장이다. 한 농민단체는 무역이득공유제와 관련해 “FTA 무역이득 공유를 위한 농어촌부흥기금 마련과 농업인단체―수출기업 간 상생 프로그램 마련 및 관세수입의 농어가 소득안정화기금 전환 방안”도 제안하고 있다. 어쨌든 무역이득공유제로 조성된 기금은 농민기본소득의 재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재원은 기획재정부가 조율하는 전체 예산 범위에서 제외시켜 농림축산식품부가 집행하는 기금 형태로 관리하는 방안도 제기되고 있다.
‘공익농민 기본소득제’ 얘기를 꺼내면 국민들은 당장 조세부담, 국가재정부터 걱정하고 핑계 댈지 모른다. 비현실적이고 편향적인 발상이라며 이해와 공감보다는 비판과 반론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농업과 농촌을 잘 모르면 그럴 수 있다. 기본소득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럴 수 있다. 어차피 이 세상의 모든 새로운 제도는 실현되기 전에는 다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기본소득제의 실행모델을 설계하는 일보다, 농정의 진실과 기본소득제의 가치를 국민 속으로 널리 전파하고 공유하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해 보인다. 본디 기본소득의 정신은 ‘게으른 베짱이’마저 당당한 국민으로서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베짱이가 기본소득을 받으면 능동성과 이타성이 늘어나 부지런하고 창의적인 개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개미 중의 개미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하는 이유를 더 설명해야 하나. ‘공익농민 기본소득’은 혁명 같은 기적을 보여줄 것이다. 농사로 돈을 벌어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이기적이고 천박한 상업농의 굴레에서 농민을 해방시킬 것이다. 사람과 자연과 공동체를 살리는 이타적이고 사회적인 공익농민으로 농투성이를 거듭나게 할 것이다.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