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지음 《풍운아 채현국》(피플파워, 2015년)
정운현 지음 《쓴맛이 사는 맛》(비아북, 2015년)
말년의 양식 ― 꼰대인가 꽃대인가
우리사회에 어른이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사회에 노년의 문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통한다. 노년의 문화를 생각하면 이른바 ‘꼰대’ 이미지가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왜 그럴까. 우리사회에서 꼰대문화는 일종의 견고한 문화적 문법을 이루었다고 간주해도 좋을 법하다. 노년의 문화는 생물학적으로 노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대가연(大家然)하며 이 시대의 핵심적 모순을 외면한 채 소위 ‘조화사회’ 운운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지식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예술가들의 노년의 양식을 검토하며 최후 순간까지 자신은 물론이요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멋진 노년의 예술을 구현하는 삶의 양식을 ‘말년의 양식’(late style)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E. 사이드가 규정하는 말년의 양식 내지는 멋진 노년의 문화를 보여주는 예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노년의 멋진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예도 희박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저항하려는 감정의 구조가 형성되지 않은 것도 한 이유가 된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은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과 독재시절을 거치며 오로지 지금 당장 나와 내 가족의 끼니를 해결하며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해야 했던 가난한 현대사의 사정과 무관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개인의 진실이 그대로 역사의 진실이 되는가. 한 개인의 인생과 내력에 대해서는 누구도 함부로 말할 권리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개인의 진실을 절대화하는 것 또한 온당한 처사는 아니다. 소위 꼰대문화의 본질은 개인의 진실을 강변하고 강요하려는 마음의 태도와 습관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런 견고한 마음의 습관에서 후속 세대와의 대화와 소통이 과연 가능할까. 최근 70대를 전후로 한 아버지 세대의 삶과 시대를 소재로 한 영화 〈국제시장〉과 〈허삼관〉 같은 영화를 보며 내 마음이 불편해진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국제시장〉의 ‘덕수’(황정민 분)가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라고 말하는 대사는 개인의 진실 차원에서는 맞는 말일 수 있겠지만, 일종의 노년 세대의 자기합리화를 위한 알리바이로서의 독백(獨白)과 얼마나 먼 것인지 우리는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람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점에서 신영복 선생이 〈허난설헌의 무덤에서 띄우는 엽서〉(1995. 12. 5.)에서 언급한 말은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을 법하다. “자기의 시대를 고뇌했던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가 청산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위 문장에 등장하는 ‘자기의 시대를 고뇌했던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개인의 진실과 역사의 진실을 하나로 일치시키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삶의 양식을 나는 보게 된다. 그런 삶의 양식이란 E. 사이드가 역설한 말년의 양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법하다. 비유적으로 말해 그런 노년의 삶의 양식은 ‘꼰대’로서가 아니라 ‘꽃대’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인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경남 양산에 소재한 효암학원 이사장인 채현국 선생의 삶과 철학이야말로 ‘꽃대’라는 말에 값하는 우리시대의 어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시민주주가 창간한 〈경남도민일보〉 기자인 김주완이 선생과의 대담을 정리한 인터뷰집 《풍운아 채현국》과 기자 출신인 정운현이 쓴 《쓴맛이 사는 맛》을 보며 이런 나의 생각은 더 분명해졌다.
어른 없는 사회의 ‘진짜 어른’
채현국 선생의 팔십 평생은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자 했고, 배워야 할 것을 배우고자 했으며, 습득해야 할 것을 습득하고자 했으며, 남한테 해줘야 할 일을 하고자 한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선생 자신의 표현을 따르자면 스스로 ‘자기 껍질’을 깨고자 한 인생 자체였다. 이 점에서 사실 기술(記述) 위주의 인터뷰 모음집인 《풍운아 채현국》과 《쓴맛이 사는 맛》에서 선생의 파격적이고 감동적인 생생한 육성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파격(破格)이란 격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궤도를 이탈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마도 이 점에 관한 한, 채현국 선생을 따라잡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만 같다.
선생의 팔십 평생은 파격 인생 그 자체였다. 선생을 수식하는 단어와 표현이 무수한 것을 보라. 오척단구 거한, 당대의 기인, 인사동 낭인들의 활빈당주, 가두의 철학자, 발은 시려도 가슴은 뜨거웠던 맨발의 철학도,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 열 손가락에 들었던 거부,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한 채씩 사준 파격의 인간,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후원자, 이 시대의 어른 같은 기나긴 목록이 한 사람의 인간을 수식하는 표현인 경우를 나는 보지 못했다. 이것은 채현국 선생 스스로 나이 들수록 새로운 전투지는 나의 몸이자 나의 태도에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자신의 습속에 ‘저항’하고자 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프랑스 과학자 조엘 드 로스네는 《노인으로 산다는 것》에서 노년의 단계에서는 바이오노미(bionomy)가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집의 경영을 의미하는 이코노미라는 표현에 빗대어 ‘젊게’ 늙기 위한 삶의 경영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영미권에서 쓰이는 ‘성공적인 나이 들기’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이 말의 핵심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을 잘 다스리는 법을 배우자는 것이다.
그러나 채현국 선생은 자신에 대한 이런 수사들조차 분식(粉飾)의 일종으로 생각한다. 스스로 지은 묘비명의 문구를 “쓴맛이 사는 맛이다,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라고 짓겠다는 말에서 인생을 대하는 선생의 인생철학과 특유의 넉넉한 유머감각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삶과 인생을 위대한 것 내지는 거룩한 것으로 규정하려는 일체의 경향에 맞서 ‘시시한 삶’을 예찬하고 권유하려는 선생 특유의 인생철학에서 우러나온다.
나는 《풍운아 채현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시시한 삶’을 적극 권장하고 예찬하는 대목이었다. 개인 세금 고액 납부자 전국 2위에 오른 적이 있는 선생이 재벌 경영자를 비롯한 사회 주류들이 세금 포탈을 얼마나 하는지 알겠더라고 한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선생의 이러한 자세와 태도는 2014년 4·16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생명보다 이윤을 더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된 우리사회에서 큰 울림이 있다. 나와 우리는 아직 그런 개안(開眼)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가치가 함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회,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는 계산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풍운아 채현국》, 156쪽)라든가 “적게 쓰고 가난하게 살고 발전이란 소리에 속지 말고, 훨씬 더 소박하게 살라”(《쓴맛이 사는 맛》, 69쪽)는 선생의 말은 생명보다 돈을 숭배하는 우리 안의 척도와 표준을 바꾸어야 한다는 간명하지만 분명한 선언이 아니던가. 한마디로 말해 장기 저성장 시대에 돌입한 우리사회에 ‘탈성장사회’의 삶과 비전을 제시한 셈이다.
정운현이 채현국 선생의 인생 내력을 추적하며 ‘부유함의 위험’을 역설하며 스스로 농부가 된 스콧 니어링을 떠올린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으리라. 실제 채현국 선생이 인생의 롤모델로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와 베트남의 호찌민을 꼽는가 하면, 우리나라 인물로는 임락경 목사, 권정생 작가, 박완서 작가, 김수영 시인 같은 분을 꼽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들은 “덜 유명해야 한다, 유명하면 자유롭게 살 수 없다”는 점을 자각하고 멋있는 삶을 산 ‘반골(反骨)’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다시 말해 채현국 선생은 반골의 삶을 예찬하고 스스로 그런 삶을 살고자 노력한 것이리라. 누군가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던가.
나는, 2014년 3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채현국 선생이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라고 일갈한 말에 적잖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이번에 나온 두 권의 책을 보며 선생의 말투에서, 지식인 특유의 이른바 ‘먹물’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점에 또다시 놀랐다. 초등학생조차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젊은 후배들과 대화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유혹하고 사로잡을 줄 아는 매혹의 능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실존주의가 득세하던 1950년대 전중(戰中) 시절에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철학도가 아니던가. 그러나 선생은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거리에서 ‘철학하는 삶’ 자체를 살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채현국 선생에게서 저잣거리에 숨은 은자(市隱)의 풍모가 물씬 느껴진다. 두 인터뷰집을 보며 감동(感動)이라는 한자말에 왜 마음(心)과 힘(力)을 의미하는 한자어가 포함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으로 느끼게 되면 무엇인가 힘을 쓰기 위해 움직인다는 의미가 ‘감동’이라는 한자말에 포함된 이유가 아닌가.
그들의 삶은 하나같이 홀가분했다
채현국 선생과 대담한 두 권의 책을 보며 안상학 시인이 권정생 선생의 행장을 기록한 〈쌀 석 섬〉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이 시에 나오는 ‘권정생 선생’이라는 표현 대신에 ‘채현국 선생’으로 고쳐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권정생 선생은 평소 자신의 몸 상태를
멀쩡한 사람이 쌀 석 섬 지고 있는 것 같다 했다개구리 짐 받듯 살면서도
북녘에서 전쟁터에서 아프리카에서
굶주리는 아이들 짐 덜어주려 했다 그리했다짐 진 사람 형상인 어질 仁
대웅보전 지고 있는 불영사 거북이
짐 진 자 불러 모은 예수세상에는 짐을 대신 져주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은 하나같이 홀가분했다― 안상학, 〈쌀 석 섬〉(밑줄 인용자)
소위 백세시대를 운운하는 시대에 노년의, 노년을 위한, 노년에 의한 새로운 문화적 양식(樣式)이 필요하다. 생물학적으로 노년이 되었다는 이유로는 더이상 젊은 세대와 대화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다. 노년의 삶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가 “내가 왕년에” 하는 식의 소위 ‘꼰대질’이라는 점은 말할 나위 없다. 한 사람의 인격과 인품에는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느냐가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현재의 순간’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누구와 만나느냐일 것이다. 위 시에 등장하는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은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에 대해 저항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 하며, 멋진 말년의 양식을 보여준 드문 경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선생이 죽기 직전까지 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탐독하며 스피노자 같은 삶을 살고자 한 이야기는 퍽 감동적이다. 권정생 선생의 경우처럼 채현국 선생 또한 그런 삶을 살고자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긴 것이리라.
누군가가 노년은 철학적이고 영적인 물음을 던지는 시기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다시 말해 삶을 위한 철학수업으로서 자유로운 삶을 위한 필로―비오스(philo―bios)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때의 공부가 지식을 쌓는 공부 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점에서 채현국 선생이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고 한 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신만의 아상(我相)을 고집하는 한, 젊은 세대를 비롯한 타자와의 만남과 차이의 철학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내공’을 쌓는 진짜 공부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공부가 진정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주완과 정운현이 정리한 책들은 채현국 선생을 통해 “다시, 노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묻고 있는 일종의 ‘노년학 개론’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이 책들에서 채현국 선생은 젊게 사는 노년의 비법은 결국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함께―함에 있다고 말한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누어야 해.”(《쓴맛이 사는 맛》, 42쪽) 이 두 권의 책이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노년 세대들이 읽어야 마땅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두 권의 책을 보며 노년을 바라보는 우리 안의 척도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실감하였다. 노화와 죽음 자체를 긍정하고, 노동과 정의가 제자리를 찾는 품위 있는 사회와 문화의 토대를 형성하는 일이 중요해진 것이다. 개인의 자존과 자아실현을 위한 사회적 프로그램 개발에도 더 신경을 써야 함은 물론이다. 그렇지 않는 한, 압축된 죽음, 노화 지연, 노화 중지처럼 노화(老化)에 맞서는 안티에이징을 권장하는 것이야말로 마치 노년문화의 미덕인 것처럼 유포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 그런 징후가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채현국 선생의 경우처럼 언제나 항상 호기심을 갖고, 항상 행동하며 살아가려는 ‘삶의 전환’이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노년에 중요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도전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사이드가 역설한 ‘말년의 양식’을 위한 우리식의 노년의 ‘멋론’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태초에 멋이 있었다”고 주장한 조지훈의 멋론 같은 새로운 논의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멋론의 부활은 세대 간 문화적 공유지대 형성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채현국 선생의 인생철학을 보며 어느 시인이 “그가 살았으므로 그 땅은 아름다웠다”(권경인)라고 한 표현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채현국 선생은 그런 분이시다. 선생의 육성을 직접 더 많이 듣고자 한다면 김주완의 책을 권하고 싶고, 일종의 평전(評傳)식 구성을 선호하는 독자라면 정운현의 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