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영혼의 결혼
1982년, 한 조촐한 결혼식이 옥외에서 거행되었다. 몇 안되는 증인, 친구 그리고 하객들이 모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신랑도 신부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든 결혼식은 진행되었고, 식이 끝나자 노래가 조용히 불려졌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이 결혼은 흐리고 차가운 1982년 2월 20일, 한국의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거행된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을 달래는 ‘영혼결혼식’이었다. 두 사람의 운명이 연결되었을 때는 죽음조차도 그들을 떼어놓지 못한다는 게 한국의 전통이다. 만약 그들이 불의한 상황에서 죽는다면 그들의 영혼은 방황하며, 결합이 이루어질 때까지 저승으로 가지 못한다. 이런 경우 무당이 와서 그들의 넋을 불러내어 그 두 영혼을 맺어주는 ‘영혼결혼’을 거행한다. “우리는 이 노래를 신랑과 신부에게 바칩니다. 두 사람은 지금 이 가장 아름답고 엄숙한 식장에 보이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하고 사회자는 말했다. 결혼선물과 비단옷, 수(繡)가 놓인 이불이 엄숙하게 불태워졌다. 이 노래는 그들의 결혼을 위해서 특별히 지어졌다.
들불
1978년, 윤상원은 수도 서울의 큰 금융기관에 근무하는 화이트칼라 샐러리맨이었다. 벼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가에 태어난 그로서는 대단한 출세였다. 그는 한국의 교육시스템의 특징인 야만적인 입시지옥을 뚫고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일류대학을 나와 엘리트 금융기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동생과 함께 슬럼의 사글셋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웃 슬럼 주민들의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 - 일상적인 빈곤, 누추함, 비참을 보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그의 가슴을 찢었다.
그는 자주 부모와 언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화이트칼라 신분에 가책을 느꼈으나, 자식의 ‘성공’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왔던 부모는 그가 현실에 적응하여 좋은 일자리를 지키고, 동생들을 부양하며 안정된 삶을 꾸려나갈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 저는 이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라고 그는 편지에서 썼다. “고향으로 돌아가 이 억압적인 현실과 싸우고 싶습니다.”
“내 아들은 억눌린 사람, 착취당하는 사람들 생각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말한다. “그래서 얘기했지요. 돈을 많이 벌어 그 사람들을 도우면 된다고요.” 아들은 대답했다. “제 돈으로 얼마나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어요? 세상을 바꿔야지요.” 1)
취직한 지 여섯 달이 채 안되어 아들은 은행을 그만두고, 스티로폼장의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병들어 누웠다. 아들이 보러 가자 호되게 꾸짖었다. “내가 너를 대학 보내려고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모르냐. 네가 (육체)노동자가 되라고 그랬겠냐.” 그는 대답했다. “어머니, 너무 상심 마세요. 언젠가는 제가 어머니를 보살펴드릴게요. 지금은 많은 사람을 돌보려고 그러는 겁니다. 이게 다 나중에 어머니를 돌보려는 거예요.”2)
윤상원은 공장노동자들을 위해 비합법적인 야학(夜學)의 ‘강학’(교사)이 되었다. 그 학교는 읽기와 산수를 가르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치고 정치교육을 제공했다. 그는 또한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전국민주학생연맹’의 지역조직자가 되었다. 이들 그림자 조직은 경찰에 의해서 ‘학림’이라고 호칭된 운동세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의 목표는 부패하고 야만적인 박정희 군사독재에 저항하고, 그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들불’이라는 야학의 명칭 자체에도 그들의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 야학에서 그는 박기순을 만났다. 열렬한 활동가인 박기순은 그 야학의 창립 멤버였다.
박기순은 1978년 6월 전남대학교 3학년 역사학도였다. 그녀는 정부의 교육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박정희 독재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던 국민교육헌장의 국가주의 사상을 비판하고 교육의 자율성을 주장한 전남대 교수들에 의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역주) 11명의 교수에 대한 체포·고문에 항의하는 캠퍼스 시위에 참여했다가 연행되어 신문을 당했다. 그녀는 교수들의 중재로 풀려났으나 대학으로부터 쫓겨났다. 그녀는 야학을 세워 낮에는 야학의 운영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거리의 행상으로 일하고, 밤에는 공장노동자들을 가르치는 데 자신의 에너지를 쏟았다. “그녀는 거리에서 수박과 과일을 손수레에 싣고 끌고 다녔습니다”라고 한 교수는 회상한다. 그녀의 헌신은 끝이 없었다.
대여섯 명의 이상주의적인 학생들과 함께 박기순이 들불야학을 세운 것은 “노동운동의 씨앗을 심기 위해서” 그리고 “자본의 논리만을 가르치고 … 노예를 훈련시키는” 정규학교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박기순은 광천산업단지로 들어가서 한 제조회사의 조립노동자가 되었다. 이는 노동자들을 규합, 조직하기 위해서 공장으로 들어간 최초의 학생활동가들 물결의 하나였다. 자신이 속한 서클에서 그녀는 같은 이유로 공장으로 들어와 있던 윤상원을 만났고, 그 인연으로 윤상원도 야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박기순의 엄청난 열정과 진실성에 감동을 받은 윤상원은 그녀를 연모하게 되었다. 그들은 투쟁의 동지였고, 생활상의 동료였다. 그들은 한국의 경제적 ‘기적’의 추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던 저 사악하고, 야만적이며 무도한 착취에 맞서서 그것을 뿌리 뽑기 위해서 싸웠다.
그들의 뜨거운 정열은 한국의 겨울 추위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국의 겨울은 한국의 정치처럼 매섭고, 야만적이고, 잔인했다. 시베리아로부터 불어오는 혹독한 바람은 어떤 때는 몇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대부분의 도시빈민은 값싼 연탄으로 방을 덥혔다. 이 연탄은 불이 붙여져 진흙이나 콘크리트로 된 방바닥 밑을 통해서 일산화탄소와 독성물질 그리고 뜨거운 공기를 밖으로 내뿜는다. 많은 한국인들에게 겨울의 잠은 목숨을 앗아가는 위험을 동반하였다. 잠을 자다가 연탄가스로 죽거나 아니면 얼어 죽어야 하는 끊임없는 위험 속에서 살고 있었다. 박기순도 그러한 생활을 하던 중, 한번은 몹시 지친 상태에서 자다가 일산화탄소중독으로 신체의 균형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하여 그녀는, 뼈를 갉는 가난과 무관심으로 인한 희생, 즉 또하나의 프롤레타리아적 죽음의 희생자가 되어, 크리스마스 이튿날 비참하게 사망하고 말았다. 21세의 나이였다.
윤상원은 엄청난 상실감을 느꼈다. 그는 일기에 썼다. “불꽃처럼 살다 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 …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 우리의 가슴속에서 피어난다.”
그녀는 ‘모든 노동자의 누이’라는 문구가 적힌 관(棺)에 담겨 매장되었다. 윤상원은 투쟁을 계속했다.
‘짐승’을 죽이다
1979년 8월, ‘학림’과 제휴한 도시산업선교회의 지원하에 일단의 젊은 여성들이 YH무역(한미 합작 가발공장)에서 항의시위를 했다. 그 공장은 방금 파산을 선언하고 공장을 폐쇄했고, 사업주는 모든 자본을 갖고 도주해버렸다. 수천 명의 공장노동자들은 갑자기 일자리도 잃고, 퇴직금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항의시위를 시작했다. 170명의 여성들은 공장폐쇄에 항의하기 위해서 서울의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그들은 공장을 자신들이 협동으로 운영하겠다는 - 매우 합리적인 - 제의를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1,000명에 이르는 폭동진압경찰을 투입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완전무장한 경찰대는 곤봉으로 농성을 진압하였다. 수십 명의 시위자가 중상을 입었고 - “개처럼 얻어맞고 끌려갔다” - 한 여성이 건물 옥상에서 추락하거나 밀쳐진 결과로 사망했다.
중도노선의 ‘야당’ 신민당은 일종의 ‘성역’인 자신들의 당사 안에서 이처럼 엄청난 폭력사태가 무차별적으로 행해진 것에 경악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부를 비난하는 항의농성을 시작했다. 정부의 반응은 신속했다. 신민당 당수 김영삼을 국회로부터 제명해버린 것이다. 이에 항의하여 모든 야당 의원들은 의원직에서 사퇴했다. 남쪽지역 부산과 마산에서 자발적으로 대중적인 항의시위가 일어났고, 그것은 다른 도시들로 번졌다.
한국의 비밀경찰 중앙정보부는 항의시위들을 예의 관찰하였고, 정보부장 김재규는 이 소요사태가 전례 없는 규모라는 것을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즉, 이것은 수십만의 일반시민들이 참여한 완전한 형태의 반란이며, 이대로 간다면 한국의 남부는 통치 불능 상태가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은 시위자들을 대량 학살하면 사태는 진정될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통령 박정희는 그 의견에 동조했다. 그는 이란의 팔레비 왕이 축출된 것은 그가 국민들을 죽일 배짱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시위자들을 진압하는 데는 1만 5,000 내지 3만 정도의 인명을 희생시키면 충분할 것임을 시사했다. 도덕적 감수성을 아직 지니고 있던 김재규는 차지철과 박정희의 말에 경악하였고, 그들을 총으로 쏘았다. “나는 독재의 심장, 그 짐승의 심장을 쏘았다”라고 그는 말했다.
피의 강물
암살은 나라를 뒤흔들었고, 상층부는 혼돈과 무질서에 빠졌다. 그리고 박정희의 측근 전두환 장군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전두환은 휴전선으로부터 정예부대를 끌어내 왔고, 탱크와 장갑차들이 수도의 거리를 질주하고, 궁중 쿠데타가 발발했다. 그리고 내부의 전투와 숙청 끝에 마침내 전두환이 승리했다. 전두환은 잠깐 동안 개방적인 제스처를 취했으나 곧 익숙한 파시스트 독재자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18년간의 박정희 독재에 지친 나머지 - 그리고 그의 사후 희미한 희망의 불빛이 펄럭거리다 꺼지려 하자 - 1980년 5월, 전두환과 계엄령 및 야당 정치가들의 체포와 군사독재의 연장에 반대하는 항의가 분출했다.
윤상원이 야학교사로 일하고 있던 남쪽 도시 광주에서 수백 명, 수천 명이 궐기를 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1만 8,000의 경찰특공대와 완전무장한 3,000명의 공수부대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 부대의 이동은, 확립된 지휘구조에 의거하여, 미국정부 고위층에 의해 논의되고 승인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도시의 중심으로 진격하여, 평화적인 비무장 시위대와 시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베고, 강간하고, 총으로 쏘았다. 경악할 만행이었다.
한 증인은 자기가 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두 명의 군인이 젊은 여성을 붙잡았다. 공수부대원들은 그녀의 옷을 벗긴 다음 배를 걷어차고, 가슴을 걷어찼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를 벽에 기대 세우고는 머리를 벽에 대고 두들겨 패고 또 팼다. 그들의 손은 피로 범벅이 되었다. 그들은 그 손을 군복에 쓱 닦고는 히죽 웃었다. 이 짓이 끝나자 그들은 의식을 잃은 여성을 트럭 위로 들어 올려 마치 낡은 부대처럼 뒷칸으로 던졌다.3)
한 떼의 군인들이 학생 한 명씩을 공격했다. 그들은 학생의 머리를 박살을 내고, 등을 짓밟고, 얼굴을 걷어찼다. 군인들의 공격이 끝났을 때, 학생의 모습은 마치 짓이겨진 고깃덩어리에 옷이 걸쳐진 꼴이었다.4)
보수신문 〈동아일보〉의 기자 김중근은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떠올랐다. 백주대낮의 강간, 천인공노할 폭행, 사디스트적 공격, 무장탄압 등등. 그러나 이런 표현 중 어느 것으로도 광주의 상황을 적절히 묘사할 수는 없었다.”5)
그날 거리에서 수백 명이 짐승처럼 살육을 당했다. 구타당하고, 곤봉질을 당하고, 대검에 찔리고, 짓밟히고, 근접거리에서 총을 맞았다. 학살 장면에 낯설지 않은 어떤 제대군인은 격렬히 분노했다. “나는 베트남에서 베트콩들을 죽여봤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처럼 야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일제치하와 한국전쟁 때를 경험한 어떤 노(老)시민은 이렇게 탄식했다. “이런 잔인무도한 살육 장면은 난생 처음입니다.”6) “거리는 피의 강물이 되고,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라고 또다른 증인은 썼다. 이 학살작전의 명칭은 ‘화려한 휴가’였다.
격분의 바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충격을 받은 광주시민들 수만 명은 항의를 하고, 학생들을 보호하고, 폭력의 종식을 요구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군인들의 반응은 무차별로 군중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시위대는 돌멩이와 파이프와 막대기로 2만 1,000명의 군인들을 상대로 싸웠다. 화염방사기들이 시위대를 향하여 방사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화염병으로 맞섰고, 200대의 택시와 트럭과 버스가 자연발생적으로 이 싸움에 동참했다. 도시 전역에 걸쳐 최루가스 안개와 대검의 숲과 탄막(彈幕) 속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밤하늘이 화염으로 명멸하는 동안 수백 명의 시민들은 도시의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싸웠다. 그들은 불타는 차량들을 군인들 쪽으로 밀어붙이고, 돌과 화염병들을 던졌다. 대학 근처에서는 군인들의 기관총이 군중을 향해 발사되었다. 시민들은 시체를 넘어서 싸움을 계속했다. 당시 광주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 진 언더우드는 5월 20일 밤 내내 자신이 “폭풍 치는 바다의 노호, 수십만의 인간이 내뿜는 격노의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7)
동틀 무렵, 원시적 무기로 무장한 시민군이 조직되었다. 그들은 무리를 이뤄 수백 대의 차량을 징발하고, 경찰서를 습격하여 보다 많은 무기를 확보하고, 다급히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지휘자들을 정하고, 매복조를 배치하고, 전술적 투쟁을 전개하여 군인들의 작전을 위협하고 교란시켰다.
소식을 전파하고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여러 개의 작은 그룹들이 16개의 다른 지역과 도시들로 파송되었다. 4만 명은 군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대학을 습격했다. 공수부대는 무차별 사격을 개시하고, 수류탄들을 던졌지만, 그럼에도 서둘러 퇴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무장 헬리콥터를 불러들여 거리와 차량들을 향하여 기총소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적어도 한 명의 군인이 시민군의 총에 맞았다. 강경파 시민군은 공수부대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옮겨 가며 싸웠다. 오후가 되자 노획된 기관총이 도청에 설치되고, 공수부대는 어쩔 수 없이 중앙광장을 비우고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21일 저녁 8시가 되었을 때, 군대는 완전히 철수하고, 도시는 해방되었다.
절대공동체
7일 동안, 시민들은 도시를 해방공간으로 장악했다. 그것은 1871년 파리코뮌 이후 세계 최대의 자율적 공동체였다. 정부 측 언론과 미국대사관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불순분자들과 고정간첩들’에 의해 주도된 ‘폭동, 약탈, 즉결처형, 혼돈상태’가 도시를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광주를 에워싼 전면적 봉쇄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환희와 탈진 사이에서 흥분의 도가니에 있던 도시 내부의 사람들에게는 그곳은 전면적 공동체, 절대적 ‘사랑’의 장소였다. 거기에는 어떠한 범죄도, 무질서도 없었다. 거기에는 깊은 민주주의와 진정한 대화 그리고 사랑과 연대와 동지애가 비상히 자발적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시민들이 박수를 치고 우리를 응원할 때마다 우리의 심장은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 응원은 우리에게 큰 힘을 주었죠. 우리가 가는 곳마다 부인들이 김밥과 주먹밥을 우리의 차에 올려다 주었습니다. 용감하게 싸우라면서요. 때로는 부인들이 최루가스 연기로 더럽혀진 우리의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기도 했습니다. 부인들은 동네마다 음식을 차려놓고 우리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가게 주인들은 마실 것과 과자를 던져 주었습니다. … 우리가 가는 데마다 시민들의 격려와 보살핌이 넘쳐났습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 저는 가슴이 더워지고, 눈시울이 젖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8)
(광주)에서는 사유재산 개념이 완전히 사라지고, 공동체가 창조되었죠. 모든 사람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눴으니까요. … 소유물의 공유는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왜냐면 적과 싸우기 위해 사람들이 모두 소중한 생명을 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나눔의 행위는 개인적 삶과 공동체의 삶이 일치될 때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9)
계엄당국과의 협상을 위해서 시민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또 민원처리, 캠페인, 의료문제, 공공질서에 대응하기 위해 학생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윤상원은 침착하게, 조용한 태도로, 이 모든 투쟁의 버팀목으로 헌신했다. 초기에 그와 야학의 동지들은 잠도 자지 않고 작업을 했다. 그리하여 촛불 밑에서 손으로 민 등사작업을 통해 〈투사회보〉라는 전단지 수만 장을 만들어냈다. 광주학살에 대한 최초의 정확한 정보원(情報源)이었던 이 회보는 봉기의 눈과 귀가 되어 사람들이 행동으로 나서게 만들었다. “공수부대 군인들은 총을 가진 시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이다. 우리의 무기는 진실이다”라고, 그는 등사작업을 그만두고 무기를 들자고 하는 동료에게 말했다. 그는 나중에 ‘시민군 선언’을 기초(起草)하고, 무기창고에 대한 습격을 지휘하고, 장갑차를 징발하기 위한 공격을 조직한다. 그는 외부세계에 광주봉기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최초이자 유일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시민군의 지도자였고, 시민수습위원회의 진보파로서 일방적 투항을 주장하는 보수파에 맞섰다.
사람들은 ‘절대적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도시를 장악했다. 부상자들은 치료를 받고 - 수천 명의 사람들이 헌혈하기 위해 몰려왔다 - 사체는 매장되었다. ‘공동체 부엌’이 모두를 먹여주고, 대규모 시민총회가 비전과 전략과 전술을 논의했다. 그런가 하면 사기를 높이고, 조화로운 관계를 창조하고, 비판적 대화를 자극하기 위해서 도시 전역에서 온갖 행사, 공연이 이루어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치란 무엇이며, 활동가가 갖추어야 할 의식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진실한 인간의 모습을 보면 충분한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성의 회복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 공통한 운명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 … 민주주의 실현 … ”10)
전략을 둘러싸고 위원회 내부의 의견이 갈렸음에도, 정부와의 협상을 위한 시도도 이루어졌다. 대량의 무기들이 신뢰의 표시로 당국에 넘겨졌다. 공수부대 투입과정에서 미국이 행한 역할 - 새장 속에 야생 고양이를 집어넣고는 눈을 돌려버린 - 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윤상원은 미국대사에게 이 교착상태의 수습을 위한 중재역할을 요청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윤상원의 요청을 즉각 거절했다. 나중에 글라이스틴은 광주봉기에 대한 냉소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자기변호로 일관된 회고록에서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얽힘’에 연루되었음을 강조하면서) 윤상원에게서 그러한 요청을 받았음을 시인하고, 그러나 그것을 무시해버렸다고 말했다. 윤상원은 경직되고, 교조적이며 협상을 달가워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 요청을 한 사람은 타협에 반대하는 … 경직된 … 열렬한 반정부 활동가이자 이론가였다.”11)
5월 27일 새벽, 미국 항공모함(USS Coral Sea)이 옆구리를 지켜주는 상황에서 - 이 배의 도착을 위해 공격이 미루어졌다 - 한국군 제20사단, 제31사단, 제7, 제11 그리고 제3 특수전투연대가 - 미국의 완전한 인지와 승인 아래 - 북, 북서, 서, 남서, 남, 남동, 동, 북동 방향으로부터 탱크와 APC전차, 헬리콥터를 가지고 도시로 진입했다. 그리고 최후의 저항자들을 학살하고, 90분이라는 끔찍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시간이 지난 후 항쟁을 종식시켰다.
최후의 부르짖음
도청에서의 마지막 저항의 순간은 이렇게 묘사되었다.
밤의 고요가 돌연히 한 여성의 목소리(확성기에 의한)로 깨졌다. … 그것은 젊은 여성의 비명 섞인 부르짖음이었다. 그녀가 외치자 - 그 목소리는 캄캄한 도시 위로 메아리쳤다 - 그녀의 말들은 하나의 연속적인 울림의 덩어리를 만들었다. 그 울부짖음은 아마 10분은 계속되었다. … 뭉크의 저 유명한 그림 〈절규〉를 상상해보라. 신비로운 얼굴, 텅 빈 입 … 그 그림이 칠흑같이 캄캄한 방에서 엄청난 볼륨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연결되었다고 상상해보라. … 그러면 그 목소리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리라. … 셰익스피어의 연극 어디에서도 그런 엄청난 절규가 필요한 역할은 없다. … 그녀의 목소리는 평범한 부르짖음이 아니었다.”12)
그것은 도와달라는 외침, 자유를 위한 부르짖음,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는 절규였다.
도청 청사 2층 민원실에서 총에 맞은 신체 하나가 발견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의 얼굴은 불에 타 있었습니다. 그의 몸이 불길에 휩싸였던 게 분명했습니다. 그의 머리칼 일부는 완전히 불타고 없었습니다. 내 기억으로, 그의 눈은 아직 반쯤 떠 있었는데, 그게 무서운 느낌을 주었습니다. 나는 다가가서 두 눈을 감겨주었습니다.
그것은 수습위원회 대변인이자 시민군 조직자 윤상원의 시체였다. 그는 비극적인 최후까지 버티며 싸웠다.
〈볼티모어선〉의 기자 브래들리 마틴은 이렇게 썼다.
“내 마음속에 생생히 기억하는 광주의 희생자는 26일의 기자회견을 열었던 그 대변인이었다. … 그의 눈은 … 나를 사로잡았다. 틀림없이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두 눈은 부드럽고 친절한 빛을 띠고 있었다.”13)
그 기자회견 불과 몇 시간 후 도시에 대한 최후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 윤상원은 시민군에 합류하고 있던 중학생, 고등학생, 여학생들을 모두 집결시킨 다음, 각자 집으로 돌아가도록 촉구했다.
너희들은 모든 것을 다 보았다.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어떻게 피를 흘렸는지를.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이 항쟁을 잊지 말고,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 패배를 당할 것이지만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어줄 것이다.
* * *
7년 후, 부패한 전두환 독재정권은 수백만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참여한 거대한 항의시위에 직면하여 자신들이 가지고 놀던 카드를 접었다. 박기순과 윤상원의 결혼식에서 불려졌고, 여러 해 동안 금지되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수백만 명의 입으로 거리에서 소리 높이 불려졌다.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에 동의하고, 우여곡절 끝에 장군들은 옆으로 밀려났다. 1993년, 한국은 마침내 첫 민간 대통령으로 김영삼을 선출했다. 1997년, 광주학살의 날은 공식적인 애도의 날로 지정되고, 최초의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봉기를 기리는 공식적인 노래가 되었다.
역사로부터 죽은 자를 구원하자면
역사의 파괴와 함께 동시대의 사건들은 먼, 전설적인 영역으로 퇴각한다. 거기서 그것들은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 검증할 수 없는 통계, 얼토당토않은 설명, 불합리한 논리의 대상이 된다.
-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지나간 일을 설명한다는 것은 … 기억을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죽은 자라 할지라도 승리한 적으로부터는 안전하지 않다.
-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의 말에는 강한 예언적 울림이 있다. 광주의 의미를 찾는 노력은 지금 논란 속에 있지만, 지금 그 경과를 연대기적으로 대략적으로 그려보는 것은 가능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국 역사에 대한 기억과 정치의 미래를 위한 보다 큰 전쟁 속의 싸움의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5월 18일을 공식적 추도일로 지정한 이래, 잇따른 우파 정부들 - 이명박 정부와 현재의 박근혜 정부-은 광주봉기의 기억을 희석화 내지 약화시키거나 혹은 뒤집거나 제거하기 위한 시도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왔다. “목표는 사회의 온갖 부분의 상이한 견해들을 뒤섞어서, 이것을 국민적 통합과 행복을 (위한) … 토대로 이용하는 겁니다.” 특히, 저 학살을 자행하거나 지지하고 혹은 은폐했던 자들과 연계되거나 그들을 계승한 현재의 정부는 광주봉기를 조명하고, 그것을 제도화하는 것에 대해서 냉소적이다. 그 결과, 그들은 ‘광주’를 새로운 틀에 넣거나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고자 기도해왔다. 핵심적인 것은 이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추방 혹은 공격하거나 혹은 노래로부터 ‘이빨’을 제거하려는 것이다.14)
그리하여 최근의 추도식에서는 - 2009년 이후 - 이 노래는 다른 노래로 대체되고, 참가자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저지되어왔다.
그래서 핵심 단체들 - 오월어머니회, 유가족협회, 5·18기념재단 그리고 야당들 - 과 많은 시민들은 지난 몇해 동안 계속해서 공식적인 추도행사를 거부해왔다. 지금 한국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친북’적인 노래라면서 추도식을 위해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한국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발전의 역사를 하나의 슬라이드로 비춰볼 수 있을 만큼 압축된 역사이다. 그 경제발전은 봉건적 토지점유와 원시적 축적 위에 6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초자본주의적 기술-산업국가를 출현시켰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한국의 억압통치의 역사도 경제발전의 궤도를 따라왔다. 즉 직접적인 독재적 탄압과 통제로부터 보다 세련된 설득과 프로파간다 그리고 탈-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신비화를 통한 지배로 방향을 전환해왔다. 미디어와 홍보에 기반을 둔 마취와 마비, 순응을 유도하는 기술이 주먹과 총, 대검을 대신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내면에 가해지는 상징적 폭력이 이전의 세뇌와 프로파간다를 대행하게 되었다. 주의를 분산시키는 오락, 엔터테인먼트, 소비주의가 신자유주의국가의 소외와 파편화에 따른 고통들을 완화시키는 마약이 되고 있다. 살아있는 인간관계의 풍요로움은 전자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환상과 초개인화된 사이버공간의 거짓언어로 매개되고 있다. 혹시 이 모든 것이 작동 불능이 된다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항상 사법적·물리적 폭력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검과 총탄은 풍부하다.
이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사람들 사이에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저항의 노래에서 부르주아적 행사의 구성요소로 바뀌게 된 변화의 배경이다. 이제 사람들은 듣되 말하지는 말고, 예절을 지키되 행동하지는 말고, 가만히 앉아 입을 닫고, 수동적인 자세가 되어야 한다. 광주의 순교자들은 지금 무덤 속에서 몸을 뒤척거리고 있다.
무장한 천사
사랑은 하나의 천사이다. 그러나 무장한 천사이다.
- 마이클 하트·안토니오 네그리, 《코먼웰스》
1979년 11월 24일, 한 대규모 결혼식이 서울의 YWCA 강당에서 열렸다.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신부는 보이지 않고, 신랑은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식은 진행되었다. 신랑의 이름이 호명되자, 바로 그때, 커다란 노래가 터져 나오며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그것은 군사독재의 즉각적인 종식, 민주적 개혁 그리고 대표성도 없고 굴종적이며 아첨꾼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해 대통령을 뽑는 희극적 선거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선언이었다.
몇분 내에 이 집회는 야만적 폭력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리고 참가자들 - 한국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활동가들이 포함된 - 은 구타를 당하고, 체포되고,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백기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1년 후, 신문과 고문을 받으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백기완은 차가운 감방에서 홀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감방의 천장에 매달린 15촉 전등, 그 전깃줄을 노려보고 있던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백기완은 마지막 힘을 불러 모아 한편의 노래 혹은 기도문을 지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자 자기가 죽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샤먼적 주술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광주항쟁 이후, 한국의 저항운동이 바닥을 헤맬 때, 이 시는 은밀히 퍼져서 가사로 변환되고, 음악이 되었다. 그것은 결혼의 노래가 되었다. 그리하여 죽은 자 혹은 죽어가는 자들이 살아있는 자들에게 계속 투쟁하도록 고취하는 메시지가 되었다.한국에서는 모든 시위와 항의집회, 모든 노동쟁의 현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집회 개시 때 참가자들이 모두 주먹을 치켜들고 부르는 노래이다. 그것은 7개 아시아 국가에서도 대중운동 현장에 종종 등장하는 범(汎)아시아적 저항의 노래가 되었다. 한국인들에게 이 노래는 〈우리 승리하리라〉 혹은 〈라마르세예즈〉 혹은 〈인터내셔널〉과 같은 아이콘이다. 그러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다른 어떤 노래보다도 훨씬 간명하고, 소박하며 복합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그것은 연가(戀歌)이자 비가(悲歌)이며, 샤먼적 메시지, 슬픔과 저항과 희망과 사랑의 혁명가이다.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가사 그 자체는 연약하고 덧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함께 영창(詠唱)할 때, 그것은 억압에 맞서는 투쟁의 견고한 힘이 된다. 그 흘러나오는 힘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뼈와 골수 속에서 진동을 일으킨다. 1987년, 수백만의 시위대가 전두환의 독재정권을 해체시켰을 때 그들은 거리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치켜든 주먹과 목소리 속에서 사람들은 용기를 북돋우는 힘의 떨림, 진실에의 신비로운 외경을 느꼈다. 미얀마와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일본, 타이완에서도 이 노랫말은 공포를 이겨내는 진정제, 압제자에 맞서는 무기가 되어 ‘깡패군인’들에게 용기 있게 대항할 수 있는 행동과 운동을 고취해왔다. 이 에너지 - 광주의 정신, 혁명의 정신 - 가 사람들을 흔들고, 사람들을 통해 파도처럼 흐를 때, 그것은 단순하고 깊고 우아하게 사람들 사이의 겸허한 연대, 상호성과 휴머니티와 사랑의 사슬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서 죽음을 넘어 함께 투쟁을 계속하는 세대들을 묶어준다. 이 노래를 통해 들리는 심장의 박동, 숨결, 민중의 에너지에 귀를 기울여보라. 사슬에서 풀린, 깨어난, 살아있는 민중의 에너지. 살아있는 죽은 자, 이미 죽은 살아있는 자들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함께 손을 잡고 행진하며, 그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자 역사를 만드는 주체임을 선언하고, 더이상 움츠러들지 않는다. 이것이 이 노래의 메시지이다. 이것은 광주의 메시지, 우리가 성취해야 할 해방, 승리해야 할 세상을 위한 메시지이다.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김종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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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radely Martin, “Yun Sang-won: The Knowledge in Those Eyes”.
2) 같은 곳.
3) The Kwangju Uprising: Eyewitness Press Accounts of Korea’s Tiananmen, Henry Scott-Stokes, Lee Jai Eui eds., Armonk, NY: M.E. Sharpe, 2000, p. 33.
4) 이재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 Seol Kap Su, Nick Mamatas trans., Los Angeles, UCLA Pacific Monograph Series, 1999, p. 41).
5) Choi Jung-woon, “The Formation of an ‘Absolute Community’”, Gi-Wook Shin and Kyung Moon Hwang eds., Contentious Kwangju: The May 18 Uprising in Korea’s Past Present, Lanham, MD,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03, p.4.
6) Kwangju Diary, p. 48.
7) Jean Underwood, “An American Missionary’s View”, Contentious Kwangju, p. 30.
8) Choi Jung-woon, “The Formation of an ‘Absolute Community’”, Contentious Kwangju.
9) Choi Jung-woon, The Gwangju Uprising: The Pivotal Democratic Movement That Changed the History of Modern Korea, Yu Young-nan trans., Paramus, NJ: Homa & Sekey Books, 2006, p. 125.
10) Choi Jung-woon, The Gwangju Uprising, p. 123.
11) William Gleysteen, 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 Carter and Korea in Crisis, Washington DC: Brookings Institution Press, 1999, p. 140.
12) Henry Scott-Stokes, Shim Jae-hoon and Phillippe Pons, “A Scream for Freedom,” The Kwangju Uprising: Eyewitness Press Accounts of Korea’s Tiananmen, p. 111.
13) Bradely Martin, “Yun Sang-won: The Knowledge in Those Eyes”.
14) 우파 논객들은 이 노래의 ‘임’은 북한의 김일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기타 ‘광주’를 둘러싼 논쟁적 이슈들에는 미국의 공모, 북한과의 연계, 사망자 수효(광주시의 통계기록에 의하면 그해 5월에 적어도 2,000명의 추가적 사망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봉기 그 자체의 의미에 관한 논란이 있다.
이 글의 출처는 CounterPunch 2015년 5월 29~ 31일자이다. 필자에 의하면, 이 글은 기본적으로 서양의 독자들을 위해서 집필된 것이다. 그러나 〈임을 위한 행진곡〉에 얽힌 사연을 중심으로 한국의 ‘저항운동’이 걸어온 역사의 핵심을 간략히, 핍진하게 정리한 이 글은 한국 독자들에게도 매우 유익한 자료가 된다고 판단하여 여기에 번역,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