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년 전쯤의 일로 기억한다. 주한미국대사관 초청으로 미국에서 온 저명한 민주주의 전문가와의 비공개 간담회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전문가는 “이제 미국이 도와줄 것이 거의 없을 만큼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 ‘덕담’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이 미국 덕분인지도 의문이지만, 미국이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는 질문에 나는 “미국이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하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미 간의 적대관계를 비롯한 한반도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한국 민주주의는 언제든 후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그 전문가는 이런 취지로 말했다. “저도 미국 내에선 좌파에 속하지만, 핵무기를 개발하고 인권 탄압을 일삼는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하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몇 마디 논쟁이 더 오고 갔지만,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낙담 어린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좌파를 자처하고 이라크 침공에도 반대했다는 전문가가 북한에 대해서는 대단히 적대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이 다소 놀라웠던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날 북핵과 한국 민주주의를 떠올려보면 짙은 한숨이 나온다. 10여 년 전에 다시 뚜껑이 열린 북핵은 오늘날 다시 비핵화의 병 속에 넣기에는 너무 커져버렸다. 한국 민주주의도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가 맞나”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역주행을 거듭하고 있다. 더욱 주목할 점은 북핵을 비롯한 북한문제는 한국 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하고 탄압하는 데 ‘전가의 보도’처럼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선거가 실시되고 정권이 수세에 몰릴 때마다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종북 프레임’과 ‘안보 프레임’을 보면 이러한 진단이 결코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국내 민주주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북핵 등 안보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이유로 한미관계의 비민주성도 더욱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도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전시작전권 환수를 연기했다. 군사주권의 핵심이 여전히 미국 손에 있는 것이다. 한·미·일 삼자가 군사정보를 공유하자며 약정을 체결했는데, 이러한 국가안보상의 중대 사유가 국회에서 비준은 고사하고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의 한국 외교권에 대한 간섭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올해 들어서 나온 발언들만 열거해도 이렇다.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가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박근혜 대통령이 러시아의 전승 70주년 기념식에 안 갔으면 한다”, “한국은 일본과의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달라”, “한국은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달라” 등등. 또한 2015년 5월에는 미국이 오산 미군기지에 한국정부에 사전 통보도 없이 맹독성 탄저균을 비밀리에 반입한 사실이 발각되기도 했다. 한국의 검역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한의 세균전에 대비한 방어적 목적”이었다며 슬쩍 넘어가려고 한다. 이쯤 되면 주권재민(主權在民)이 아니라 주권재미(主權在美)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올 법하다.
북핵과 한국 민주주의 사이에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사이에 정략이 개입되면서 기묘한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북핵이 남한 내 종북몰이와 안보 프레임에 단골 메뉴가 되면서 보수세력의 기득권 및 정권 안보, 장기집권 플랜의 토대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한 남한 내 기득권세력이 이에 안주할수록 북핵 해결이 더욱 요원해진다는 점도 자명하다. 남한의 보수세력이 북핵 해결을 통한 안보문제 해결보다 북핵 이용을 통한 안보정국 조성에 더 몰두할수록 북한 강경파의 입지도 강화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별다른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북한 핵문제와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가 어떻게 맞물려 진행되어왔는지 진단해보고자 한다. 이에 앞서 원폭투하 70년을 맞이해 북핵을 포함한 한반도 핵문제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한반도 핵문제 70년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한 광복은 핵무기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교육체계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대개 이런 서술들이 많다. “노르망디상륙작전을 계기로 이탈리아와 독일이 항복하고 일본도 원자폭탄 투하를 계기로 항복함으로써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태평양전쟁의 주범인 일본 또한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원자탄 투하로 무조건항복을 해 왔다.” “일본이 항복 권유를 무시하자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일본의 항복을 받았다. 이로써 인류역사상 가장 큰 희생을 치른 2차 세계대전은 전체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났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미국의 원폭투하와 일본의 항복을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어떤 교과서도 미국의 원폭투하의 의도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 이는 학생들로 하여금 “일본이 당할 짓을 했다”거나 “원폭투하가 한반도의 해방을 가져왔다”는 인식을 갖게 할 여지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 교과서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미국의 원폭투하를 기술한 교과서도 있다. 독일·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는 미국이 꼭 원자탄을 떨어뜨릴 필요가 있었는지, 미국의 의도가 혹시 핵무기의 위력을 시험하고 소련을 압박하기 위하는 데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책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원자탄이 아니었다면 연합군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없었을까? 어쩌면 미국은 이 값비싼 신무기의 파괴력을 시험해보는 동시에, 자국의 우월성을 소련에 과시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많은 역사 자료들은 일본의 항복선언이 미국의 원폭투하보다는 소련의 참전에 따른 결과라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원폭투하 강행은 소련의 참전 이전에 전쟁을 끝내려는, 경쟁자로 부상하던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짙었다. 쉽게 말해 미국의 원폭투하는 결코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핵무기를 ‘해방의 무기’로 간주하는 그릇된 역사인식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잘못된 역사인식 속에선 강제징용-피폭-외면을 당해온 조선인 피폭자 7만 명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자라날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한반도 핵문제의 기원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에 원폭투하를 강행한 미국은 이후 핵무기를 강압외교의 핵심으로 삼게 된다. 이를 자신에 대한 무력시위로 간주한 소련의 스탈린도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 와중에 한국전쟁이 터지게 된다. 전쟁의 발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트루먼과 스탈린의 핵에 대한 맹신이었다. 핵 독점을 자신했던 미국은 공산진영이 절대로 한국을 침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봤다. 공산진영이 핵 보복을 감수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주한미군 대폭 감축과 ‘애치슨 선언’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1949년 8월에 최초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도 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더더욱 확신했다. 미국이 핵전쟁을 감수하지 못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트루먼과 스탈린의 핵의 위력에 대한 맹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했다.
미국의 원폭투하가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핵 공격 계획의 발목을 잡게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중국이 절대로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 미국은 삼팔선을 넘어 북진을 감행했다. 그러나 중국의 반격으로 패퇴를 거듭하자, 미국은 핵 사용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미국이 이런 의도를 공개적으로 내비치자 세계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의 인종차별주의를 집중적으로 문제삼았다. “왜 미국은 아시아인들에게만 핵 공격을 하려고 하느냐”면서 말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인종차별주의에 부담을 느낀 미국은 결국 한국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핵의 세계사에서 중대 분수령이 된 사건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핵군비경쟁에 본격 나섰다. 영국, 프랑스, 중국이 핵무장을 선택한 데에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독자적인 핵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은 한국전쟁 휴전 직후 대량보복전략을 공식화했다. 공산진영의 재래식 공격을 억제하고 억제 실패 시 핵 보복을 가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중동, 유럽에 전술핵을 대거 배치했다. 대량보복전략에 따라 미국이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면서 훗날 쿠바 미사일 위기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말았다. 북한은 오늘날까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핵 위협과 전술핵 배치를 자신의 핵무장을 정당화하려는 프로파간다로 활용하고 있다.
북핵과 한국 민주주의 후퇴의 길항작용
북핵과 한국 민주주의 후퇴 사이의 악연은 1992년 대선 국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1년에 미국이 한국에 배치한 전술핵을 철수키로 하고, 남북한 사이에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면서 한반도도 탈냉전과 탈핵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특히 1992년 1월에 한미 양국이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키로 발표하고, 북한이 이에 호응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기로 했다. 이에 따라 발단 초기에 있었던 북핵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북핵문제를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한미 양국의 강경파들의 우려를 자극했다. 훗날 부통령이 된 딕 체니 당시 국방장관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주한미군의 대폭 감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 군부와 안기부(오늘날 국정원)의 일부 세력도 체니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이 와중에 김영삼 대선캠프의 정치적 의도가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민자당의 김영삼 대선 후보는 남북관계 개선이 야당의 김대중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중단키로 한 팀스피릿 훈련 재개가 바로 그것이다. 1992년 10월 한미 국방장관은 남북관계 악화를 이유로 1993년에 이 훈련을 재개할 방침을 밝혔다. 그런데 당시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당사자는 한국의 공안기관들이었다. 9월에 있었던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안기부 특보로 있었던 이동복 남측 대표단 대변인이 노태우 대통령의 훈령을 조작한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10월 초에는 안기부가 느닷없이 ‘남한 조선노동당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남한 내 강경파 스스로가 남북관계 개선을 훼방놓고는 이를 이유로 팀스피릿 훈련 재개를 밀어붙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미 강경파들의 의도는 충족되고 말았다. 남한 내 강경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북한은 팀스피릿 재개 방침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남북대화를 중단시켜버렸다. 그리고 김영삼 후보는 북풍을 타고 대선에서 압승했다. 대규모의 주한미군을 유지하길 원했던 펜타곤의 의도도 충족됐다. 이렇듯 북핵문제의 발단은 미국 내 군사주의자와 한국 내 선거주의자들의 결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급기야 북한은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이른바 1차 한반도 핵위기가 본격화된 것이다. 심각한 전쟁위기까지 겪고서 북미 제네바 합의가 어렵게 타결돼 북핵도 해결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북한 종말론’에 기대어 제네바 합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또한 딕 체니와 폴 월포위츠, 루이스 리비 등 아버지 부시 때의 펜타곤 인사들이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도 대거 기용되면서 제네바 합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10년 후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문제가 불거지면서 북핵은 한국 보수파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공격하는 데 더없이 좋은 소재로 이용돼왔다. “우리가 퍼준 돈과 쌀이 핵무기로 돌아왔다”는 정치공세가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한 것이다. 특히 북한의 기근과 핵 개발이 교차되면서 “주민들은 굶어 죽는데 김씨 왕조는 핵무기 개발에만 여념이 없다”는 인식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보수 정권과 언론은 북한에 대한 공포심과 혐오감을 확대재생산하면서 한편으로는 대북 강경책을 정당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의 비판세력을 탄압하고 있다. ‘종북 공세’와 ‘안보 프레임’을 두 날개로 달고선 말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 문제도 이러한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다. 미국은 미사일방어체제(MD)의 핵심 무기체계인 사드 배치를 타진하고 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커졌다는 이유를 들면서 말이다. 그러자 국내 보수파는 이를 정치공세의 소재로 이용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유승민 원내대표가 2015년 4월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게 “사드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라”고 요구한 게 대표적이다. 미국이 아직 개발 완료한 무기도 아니고 공식적으로 한국에게 요청한 것도 아닌데 야당 대표에게 입장을 밝히라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내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보수세력은 안보 프레임 짜기에 북핵 및 사드를 적극 활용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안보 이슈가 표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북핵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리고 사드 논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안보 이슈는 다른 이슈를 집어삼키는 블랙홀과 같은 사안이다. 야권의 분열을 유도하는 성격도 지닌다.
글을 맺으며
정리하자면 북핵과 한국 민주주의는 한미동맹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네 가지 측면에서 부정적인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과 같은 군사행위가 한국 내 다른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현상’을 유발하곤 한다. 북한의 도발적 언행은 국내 보수언론과 정부의 과잉 대응과 맞물리면서 이러한 현상을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슈의 안보화는 우리사회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문제의 공론화를 차단·은폐하면서 민주주의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 보수적 정치세력과 언론 그리고 전문가 집단이 북핵문제를 종북몰이와 안보 프레임에 이용하는 경향이다. 특히 보수정권의 집권 이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은 실종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셋째, 예산의 군사화이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덕목 가운데 하나는 한정된 예산을, 국민의 필요와 요구를 민주적으로 반영해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북핵문제가 정책적인 방치 속에 계속 커지면서 군비부담이 늘어나고 있다. 북핵 사용 징후 포착 시 선제 타격을 통해 북핵을 제거하겠다는 ‘킬체인’과 억제 및 선제 타격 실패 시 날아오는 북한의 핵미사일을 요격하겠다는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이 대표적이다. 이들 무기체계를 구비하는 데에만 2020년까지 20조원 안팎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결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도 핵전력 증강에 박차를 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반도 군비경쟁이 격화되면 사회복지와 교육 등 국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예산은 갈수록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어렵게 한다.
끝으로, 반북 정서에 기반을 둔 한국 권위주의의 성장은 북핵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북핵이라는 ‘존재’는 상당부분 ‘관계’의 산물이다. 북미 간의 적대관계가 근본 배경이고, 남북관계 역시 작용한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세력은 북핵에 대해 문제해결 지향적인 자세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경향을 보여왔다. 북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이 커질수록 한국 정치의 안보화와 북핵은 동반성장하고 만다. 이 둘 사이의 악순환 고리를 끊는 것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 한반도 평화의 중대한 과제가 되고 있는 셈이다.
기실 바로 이 지점에서 북핵과 한국 정치 사이의 역설이 형성된다. 보수정권은 북핵 해결을 포함한 한반도문제 해결에 훨씬 유리한 정치적 조건과 환경을 갖고 있다. 보수정권이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하더라도 이에 대한 국내적 반발이 개혁진보정권 때보다는 훨씬 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수정권은 북한문제를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반해 개혁진보정권은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할 때마다 국내 보수세력으로부터 정치적 공격을 당하곤 했다. 요컨대 보수정권은 한반도문제 해결에 정치적 조건과 환경이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반면 개혁진보정권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는 강하지만, 국내 정치적 조건과 환경은 불리하다.
이러한 현상은 북한 지도부의 전략적 선택에도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북미관계의 청사진을 담은 2000년 북미공동코뮈니케는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조지 W. 부시 행정부로 정권교체가 일어나면서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의 결과인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사실상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이를 경험한 북한에게 핵 포기와 같은 전략적 선택을 기대하기란 더욱 난망해진다. 북한은 현재의 한미 정권과 합의한 내용이 다음 정권에서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는 불신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북핵’과 ‘자유민주주의’는 보수 정치인과 언론이 가장 즐겨 쓰는 단어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8년간 북핵은 눈덩이처럼 커졌고, 자유민주주의도 역주행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보수세력은 끊임없이 이들 단어 사용을 통해 국민들의 착시 현상을 유발하려고 한다. 하여 북핵과 한국 민주주의의 역행 사이의 악연을 끊는 길은 자명해진다. 우리 국민이 문제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