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70년을 맞이하여 오다 마코토(小田實) 선생을 기념하는 이 모임에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사실 매우 상식적인 것입니다. ‘해방 70년, 전후 70년에 한국에서 생각하는 일본문제’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만, 이 타이틀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해방’이라는 것은 1945년 8월에 한반도가 식민지 상태로부터 해방된 사실을 가리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공식적으로 ‘광복’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만, 저는 ‘해방’이라는 말을 고집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의 공동체가 식민지라는 노예적 삶을 강요받는 (인간으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상황에서 풀려났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경우 ‘해방’은 세계적으로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후(戰後) 70년’이라는 것은 물론 일본 쪽의 사정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굳이 ‘일본문제’라고 명기한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해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즉,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오늘날 한국과 일본, 북한, 중국, 대만, 오키나와(沖繩) 등, 동아시아 국가 혹은 지역들 사이의 불안하고 불편한 관계는 근원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이제 와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지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태평양전쟁이 종식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가 계속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일본의 지배층이 이 명백한 역사적 과오에 대한 진실한 반성과 그에 입각한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몇 차례 형식적인 반성이나 사죄의 변이 있었으나,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일본정부나 지배층 인사 누군가에 의해서 그 반성이나 사죄의 변을 무효화하는 ‘망언’이 튀어나오는 어이없는 사태가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지배층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이라는 것은 그 진정성이 근본적으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돼온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아베(安倍) 정권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옛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갈수록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드디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안보법안 통과를 밀어붙이면서 헌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일본을 ‘전쟁국가’로 만들기 위해 광분하고 있습니다. 이 사태는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심각한 현실적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제국 일본의 부활’이라는 것은 광기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망상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그런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아베 정권의 행태를 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이러고서는 동아시아에서의 평화로운 선린관계의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는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문제적인’ 존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일본문제’라고 표기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다 마코토에 대한 기억, 그의 인간관과 세계관
그러면 이제 제가 오다 마코토 선생을 어떻게 만나서 교류를 했는지, 개인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오다 선생을 처음 뵌 것은 2002년 겨울이라고 기억합니다. 그 무렵 오다 선생께서 한일 지식인 간의 연대를 위해 발간하시던 잡지 《식견교류(識見交流)》에 제가 원고를 기고했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니시노미야(西宮)의 댁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몇달 후 2003년 5월에 미국의 부시 정권이 온 세계의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이라크 침략전쟁을 개시했을 때, 저는 제가 재직하고 있던 대학에서 몇몇 동료와 함께 그 침략전쟁을 규탄하기 위해서 ‘세계평화와 미국’이라는 이름으로 국제평화심포지엄을 개최했습니다.
그래서 오다 선생을 초청연사로 모셨는데, 그 심포지엄에서 오다 선생은 자신의 평화사상과 평화운동의 원점에 대해서 인상적인 설명을 하셨습니다. 즉, 태평양전쟁 종결 막바지, 중학생 때 미군 폭격기에 의한 공습으로 오사카(大阪)라는 도시가 아비규환의 지옥이 되고 있던 현장에서 겪었던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그때부터 자신은 폭탄을 투하하는 자, 살해하는 자, 공격하는 자가 아니라, 폭탄세례를 당하는 자, 살해당하는 자, 공격을 당하는 희생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다 선생은 모름지기 하늘을 나는 새의 눈(鳥瞰)이 아니라 땅을 기는 벌레의 눈(蟲瞰)이야말로 평화를 지키고, 대다수 평범한 인간의 삶의 진실을 옹호·대변하는 데 불가결한 시각임을 강조했습니다.
그 이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수년간 오다 선생께서 한국을 방문하실 때마다 만나서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군사정권 시절 이후 보행자는 오랫동안 지하도를 통해서만 다닐 수 있었던 서울의 광화문 네거리에 지상의 횡단보도가 재개된 것을 보시고는, 그것을 한국의 민주화와 남북한 사이의 관계 개선의 한 증표로 해석하시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동안 광화문 네거리에서 횡단보도가 사라졌던 것은 그 넓은 네거리를 유사시 전투기 활주로로 사용할 복안이 한국정부나 군사당국에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지상의 보행로가 열리지 않았겠느냐는 게 오다 선생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생각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그냥 무심하게 지내는 저 같은 인간과는 달리 늘 그런 점을 눈여겨보시는 오다 선생의 평소의 자세가 놀라웠습니다.
하여튼 그런 식으로 뵙는 도중에 저는 오다 선생의 책들을 조금씩 읽어나갔고, 제가 관여하고 있는 출판사에서 선생의 저서 《전쟁인가 평화인가》를 번역, 발간도 했습니다.
오다 선생은 거의 유례가 없을 만큼 다면적으로 작가, 지식인, 평화운동가로서 매우 활동적인 생애를 보낸 분이지만, 그 삶과 사상을 일관하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뛰어난 ‘국제주의자’의 면모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종이나 민족, 성별, 계급 등에 관련해서 어떠한 편견도 없이 모든 인간을 그냥 인간으로서 대하고 바라보는 자세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오다 선생이 세계와 현실을 보는 기본시각도 늘 이 벌거벗은 보통의 인간의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양식을 지닌 지식인이라면 당연한 자세일 것 같지만, 누구나 예외 없이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국지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여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상황에서는 아무리 깨어 있는 지식인일지라도 늘 이런 인간관, 세계관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다 선생에게는 이런 시각은 거의 체질화된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다 선생은 말 그대로 철저한 민주주의자(radical democrat)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이름 붙이기는 좋은 게 아닙니다만, 굳이 말한다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결국 같은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오다 선생께서 궁극적으로 지향한 나라는 부강하고 번영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다운 최소한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그날그날 소박한 생활을 안심하고 영위할 수 있는 ‘인간의 나라’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오다 선생이 작가, 지식인으로서 매우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단지 서재에서 사색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거리로 나와서 직접 행동하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처럼 학문, 문화, 예술이 극도로 분화, 전문화된 현실에서 이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 점 때문에 2011년 3월에 일본 동북지방을 휩쓴 지진, 쓰나미 피해와 더불어 발생한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라는 엄청난 재앙을 겪으며 많은 사람들이 오다 선생의 부재를 아쉬워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레이크가 없는 세계에서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오다 선생의 에세이 한 편을 지니고 왔습니다. 〈이 패도의 세계에서〉라는 이 글은 《녹색평론》 2003년 9-10월호(통권 72호)에 게재된 것인데, 당시 미발표 원고를 선생으로부터 얻어서 제가 번역하여 게재한 것입니다. 이 글을 이번에 주의 깊게 다시 읽어보았는데, 놀랍게도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하고 싶은 핵심적 주제가 이미 그 에세이 속에 훌륭하게 이야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서 제가 하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선생의 그 에세이에 군소리를 덧붙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좋은 사회를 만들자면,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오다 선생은 2003년의 이 글에서 세계 현실을 바라보는 자신의 상황진단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래 자본주의는 “돈벌이가 무엇이 나쁜가”라는 논리, 힘은 정의, 정의는 힘이라는 경제논리이다. 그 제멋대로의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형태로 존재하는 사회주의경제, 그 이론을 실천하는 사회주의국가가 사라진 지도 오래되었다. 이제 브레이크는 어디에도 없다. 세계경제는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패도’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그 방향은 어디가 될지 불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힘없는 사람은 그 진행에 의해 튕겨져 날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다 선생은 글로벌 자본주의경제를 기본적으로 ‘패도’를 향해 돌진하는 난폭한 시스템이라고 정의(定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스템 속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회적 약자들의 운명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동아시아 기류와 ‘아베(安倍)문제’
이제부터는 조금 구체적으로 지금 당면한 현실문제로 들어가겠습니다. 그것을 저는 “현재 동아시아 기류와 ‘아베문제’”라는 소제목 밑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아베 정권은 시대 역행적인 방향으로 계속 가면서 일본 국내와 동아시아 지역에서 쓸데없는 갈등, 대립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아베 정권의 이런 행태로 말미암아 ‘반동적 수구세력’의 힘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외적인 ‘적(敵)’의 상정은 언제나 국내 기득권층을 이롭게 하는 데 기여하는 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본질적으로 지배와 피지배, 권력과 민중 간의 대립과 갈등에서 비롯된 문제인데도, 중요한 사회적 이슈들이 엉뚱하게 ‘민족’문제로 치환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불가피하게 ‘민주주의’는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그 전형적인 경우는 남북분단 상황하에서의 남북한 지배층 간 ‘적대적 공생’관계일 것입니다. 그 점에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남이든 북이든 온전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저해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불완전한 형태의 민주주의나마 어느 정도 민주주의적인 제도와 관행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즉 기득권세력의 수구적 자세에 대항할 수 있는 민중적 역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남북 간의 교류, 화해, 협력, 그리고 나아가서 통일을 향한 가능성도 열리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남북한 수구세력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깨는 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제한된 한계 안에서일망정 최대한 민주적 공간을 넓히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지난 8월 14일 전후(戰後) 70년을 기념하여 아베가 내놓은 담화를 살펴봅시다. 무엇보다 이 담화에는 피해자, 희생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죄의 마음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아베는 국제여론의 압력 때문에 겉으로만 사죄를 하는 척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사죄를 하는 문장이 아니라, 1993년의 고노(河野)담화와 1995년의 무라야마(村山) 총리의 담화 내용을 ‘인용’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아베담화 중에서 한국인의 입장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혹은 유감스러운) 대목은 러일전쟁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거둔 일본의 승리가 세계의 약소민족들에게 위안을 주고 용기를 주었다는 아베의 발언은 러일전쟁의 결과로 나라를 잃었던 한국인들에게는 심히 모욕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실제로 아베담화는 한국,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주요 언론에 의해서도 진실성이 결여된 껍데기뿐인 사과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유일하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미국정부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아베가 계산한 대로일지도 모릅니다. 아베는 한국,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이웃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생각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염두에 두는 것은 오직 미국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어떻게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을 이용하려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역사적 과오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만 않는다면, 그리하여 미국의 전쟁 개입의 정당성을 부정하지만 않는다면, 더이상 추궁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게는 현재의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거나 포위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서 큰 쓸모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여튼 아베 정권은 지금 옛 일본제국의 ‘영광’을 부활하고자 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베의 이런 망상이 아베 개인이나 그의 측근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본사회 저변에 두텁게 깔려 있는 어떤 집단적 억압심리 혹은 원망(願望)에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지금 일본의 거리에서 난무하는 민족차별적 언사들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대도시의 가두에서 큰소리로 반한(反韓), 혐한(嫌韓), 심지어는 매한을 외치고, 반중(反中)을 외치는 국수주의자 무리들의 심리와 언동에는 오래된 역사적 퇴적물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탈아입구’의 논리가 가져온 재앙
되돌아보면, 아시아 이웃나라들에 대한 일본의 적대적 태도는 역사가 매우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계속된 동아시아의 위계적인 화이질서(華夷秩序) 속에서 일본은 바다 건너 변방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동시에 고립감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고립감이 반감과 적개심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적대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근대 이후입니다. 한일관계에 국한해서 본다면, 일본의 ‘근대’는 메이지(明治)유신의 주역들에 의한 정한론(征韓論)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정한론이 일본에서 거론되기 시작했을 때는 장차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계획된 방침 같은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때 아시아 제(諸) 민족에 대한 편견과 멸시의 사상이 널리 유포되고 있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대표적인 논객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였습니다. 유명한 그의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논리는, 간단히 말하면, 아시아 혐오, 서양 숭배의 사상이었습니다. 후쿠자와는 실제로 중국인이나 조선인 등을 개나 돼지 같은 짐승과 다름없는 미개한 인종이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명저(名著)라고 알려진 후쿠자와의 《학문의 권장》은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근본적 평등사상을 아시아의 이웃 민족, 인간들에게는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가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선각자, 계몽사상가, 교육자로서 아무리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은 일본이라는 한 나라의 국지적인 이익을 위한 매우 제한된 ‘평등사상’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후쿠자와는 조선이나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재앙과 비극과 불행의 사상적 씨앗을 뿌린 장본인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탈아입구론이 초래한 비극은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탈아입구론의 근저에 있는 사고구조가 여전히 일본사회 속에 만만치 않게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판단컨대, 극우 성향의 집단이나 개인들뿐만 아니라, 상당히 양식이 있는 ‘합리적인’ 지식인들에게까지 그러한 경향이 엿보이는 것 같습니다.
일본 지식인들의 ‘편견’
그러한 지식인들 중 몇몇 인물들만 여기서 잠깐 거론해볼까 합니다. 먼저 고쿠라 기조(小倉紀藏)라는 교토(京都)대학 철학교수의 경우입니다. 이분은 다년간 한국유학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연구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입니다. 제가 이 학자를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국의 현실과 문화를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는 이른바 지한파(知韓派) 지식인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금년 봄에 〈‘땅콩회항’ 사건으로 본 한국사회의 본질〉이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中央公論》, 2015년 3월호). ‘땅콩회항’ 사건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의 항공재벌이 자사 소속 항공기의 승무원에게 횡포를 부린 사건입니다. 즉, 대한항공 최고경영자의 딸(부사장)이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오기 위해서 활주로를 향해 막 출발하던 비행기에서 승무원이 제공한 ‘땅콩’ 서비스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소동을 벌이고, 끝내는 비행기를 되돌려 사무장을 강제로 내리게 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고 대다수 시민의 분노를 샀습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약자들의 인권이 갈수록 유린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사건은 일반시민들의 감정을 크게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건은 법정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1심에서 피고(부사장)에게 실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 법적 근거는 운항 중인 비행기의 진로를 강제로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항공안전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의 원래 취지는, 예컨대 테러범에 의한 비행기 납치를 방지하려는 목적일 것입니다. 그리고 미처 활주로에 진입하기 전 램프에서 발생한 소동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이 과연 항공법의 저촉 대상인지도 불확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1심 법원은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제가 보건대, 무엇보다 재벌가의 횡포에 대하여 시민들의 여론이 너무나 나빴기 때문입니다. 그 압도적인 여론 때문에 법원은 조금 무리한 법 적용을 한 측면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이후 2심에서 피고는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습니다).
고쿠라 교수는 이러한 판결이 나온 배경을 설명하고, 아직 한국사회는 근대적 합리성이 아니라 국민감정이 지배하는 ‘전근대적’ 사회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과민하게 반응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런 말을 하는 그의 어조에는 다분히 한국인과 한국사회에 대한 경멸적인 뉘앙스가 내포돼 있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비교적 한국사정을 잘 아는 일본 지식인임에도 이런 식으로밖에 이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뿌리 깊은 편견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엄격한 법리 이외에 여론이나 국민적 정서가 다소간 재판에 영향을 주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사회라면 근대, 전근대를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서든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굳이 한 사회의 ‘후진성’의 증표로 해석해버리는 게 진정으로 ‘합리적인’ 자세인지는 큰 의문입니다.
제가 또 거론하고자 하는 인물은 한국에서도 꽤 잘 알려진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입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우익 성향의 지식인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저는 그가 나름대로 합리성을 지닌 저술가라고 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가 2006년에 쓴 책 《멸망하는 국가, 일본은 어디로 가는가》를 읽다가 놀란 경험이 있습니다. 그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군국주의자들의 어리석음을 개탄하면서, 만약에 일본이 태평양전쟁만 하지 않았다면 미국에 참패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 영토(한반도와 만주)를 상실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참으로 황당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발언을 그는 공개된 저술 속에서 버젓이 하고 있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전후 일본의 학계와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큰 권위를 누리고 존경을 받아왔던 분의 경우를 한번 볼까요. 다름 아닌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경우입니다. 전후 최고의 민주주의 사상가로 평가받는 이 지적(知的) 거인에게서도 제가 보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마루야마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도쿄(東京)대학의 조수로 연구생활을 하다가 징집되어 조선에서 이등병으로 복무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평양에 있는 일본군 부대에서, 나중에는 짧은 기간이지만 경성(서울)의 조선군사령부(현재의 용산 미군기지)에서도 근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마루야마가 전후에 학계로 복귀한 뒤에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논하면서도 식민지지배에 대한 책임론은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엄연히 조선이라는 식민지 현장에서 군대생활을 했으면서도 그 조선이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시 후쿠자와 유키치의 근대적 사상과 계몽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그의 기본적 입장과 이 문제가 내면적으로 연결돼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늘 그게 궁금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에 대해서도 조금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표작 《언덕 위의 구름》을 비롯하여 그의 수많은 작품과 에세이, 대담, 강연을 통해서 시바 료타로가 중심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메이지 이후 러일전쟁 시기까지가 일본 근대의 가장 진취적이고 성공적인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시기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로 빠져들면서 파탄의 길로 갔다는 것을 시바는 못내 안타까워하고 개탄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사관(史觀)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합병으로 이어지는 시대가 조선의 대다수 민중에게는 학살을 당하고 피눈물을 흘리는 시간이었다는 사실이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그러한 사관에는 일본의 가난한 민중이 겪은 고난의 시간도 고려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바사관이 갖고 있는 명백한 한계, 결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관이 일본의 광범한 독자들 사이에 별 저항 없이 유통되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대미 의존, 아시아 멸시가 계속된 전후(戰後)
이제 여기서 참고자료 하나를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 책을 읽어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마쓰다 다케시(松田武)라는 정치학자가 쓴 《대미 의존의 기원-아메리카의 소프트파워 전략》이라는 금년에 출판된 책입니다. 이 책 저자에 의하면, 태평양전쟁 직후 미국의 외교관이자 나중에 국무장관이 된 존 포스터 덜레스는 전후 일본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방침으로 일본인의 아시아 민족에 대한 편견을 이용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즉, “일본인은 유럽과 미국에 대해서는 콤플렉스를 느끼면서 동시에 아시아에서는 자신들만이 근대인이 되었다는 감정을 갖고 있다. 이 차별감정을 이용하면, 일본인은 우리(미국)에게 종속되어 있는 한편에, 아시아에서는 계속해서 고립되어 있을 것이다.” 덜레스는 의식, 무의식적으로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심리의 저변을 정확히 포착했다고 할까요?
되돌아보면, 이러한 흐름, 즉 탈아입구론적 의식과 사고의 역사적 배경에는 서양세력으로부터의 위협과 압력 속에서 일본이 어떻게든 생존을 하고, 나아가 서양식 근대화를 신속히 성취해야 한다는 절박한 시대적 요구가 있었습니다. 도쿠가와(德川)막부 말기 갑작스런 흑선(黑船)의 출현으로 큰 충격을 받은 데 이어 일본은 서양제국의 요구에 따라 ‘불평등조약’들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일본 전체에 긴박한 위기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메이지변혁이 일어났고, 그 주역들은 근대식 군사제도와 병력과 기술을 확보하는 데 매진하면서, 그 연장선에서 아시아 이웃나라,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의 병탄을 통해서 상황 타개를 추구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방향은 강요된 측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전기(轉機)는 청일전쟁 후 전리품으로 획득한 요동반도를 ‘삼국간섭’에 의해서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태였습니다. 그것은 일본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사태였음이 분명했고, 그 때문에 많은 일본인이 분노하고, 원한의 감정을 품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잠복되어 있다가 10년 후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준 힘의 원천이 되었을 개연성이 큽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승리로 인한 과도한 도취감과 비이성적인 자신감은 오히려 일본이 이후 패망의 길로 빠져들어가는 근본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태평양전쟁》을 쓴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교수의 견해처럼, 일본이 아시아 타민족에 대한 침략이 아니라 이들과의 연대와 협력의 노선을 지향했더라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게 분명합니다. 오다 선생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그것은 ‘패도’가 아니라 ‘왕도’의 길이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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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5년 8월 29일 일본 효고(兵庫)현 아시야(芦屋)시 소재 ‘야마무라(山村)살롱’에서 열린 ‘오다 마코토(小田實)를 읽는 시민모임’에서 행한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