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녹색평론》은 삶의 나침반이요, 등대입니다. 적어도 공생공락의 세상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녹색평론》이 함께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모두 힘들지만 함께하기에 즐겁습니다.

―김대원(충남 청양 독자)

 

《녹색평론》을 만난 지, 저는 딱 10년이 되었습니다. 저한테 10년 전보다 나아진 점이 있다면, 많은 부분이 《녹색평론》 덕입니다. 희망을 찾다가 절망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하는 세월이었지만 《녹색평론》과 《녹색평론》에 소개된 여러 책, 그리고 독자모임에 의지해서 방향을 잡아왔습니다. 하루하루 이런저런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녹색평론》의 30년 세월도 쉽지 않았으리라 감히 짐작해봅니다. 저의 10년도 뿌듯하게 느끼면서, 《녹색평론》 창간 30년을 열렬히 경축합니다.

―김보영(경남 김해 독자)

 

2019년 6월 12일, 나는 26년 두 달 11일 동안 일했던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책방 ‘풀무질’을 떠나서 제주도로 내려왔다. 그리고 2019년 7월 25일,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책방 ‘제주풀무질’을 열었다. 한 달 13일을 쉬고 다시 책방 문을 연 것이다. 그러나 2년을 못 채우고 같은 세화리의 다른 장소로 옮겼다. 2021년 7월 1일이다. 집주인이 달세를 두 배 올리려 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도 달마다 100만 원 넘게 달세를 내다가 망했는데 제주도에서도 그러다가는 또 문을 닫지 싶었다. 지금의 자리로 책방을 옮기면서 은행에서 돈을 많이 빌렸다. 앞으로 15년을 갚아야 한다. 책방을 계속하고 싶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28살에 책방 일을 시작해서 28년이 지난 56살까지 쭉 책방 일만 했다. 세상을 새롭게 바꾸려는 의지로 인문사회과학 책방을 꾸려왔고, 돈에 눈이 먼 세상을 바꾸기 위한 작은 진지를 계속해서 지키고 싶었다. 땅을 사고, 집을 지었다. 1972년에 지어진 돌집은 책방으로 꾸몄고, 살림집은 나무로 지었다. 이제 28년 만에 내 집에서 책방 일을 하게 되었지만 마음은 무겁다. 새 집을 목재로 지으면서 집을 짓는 목수에게 물었다, 이 많은 나무들이 어디서 왔냐고. 캐나다에서 온 나무라고 했다. 마음이 아팠다. 캐나다 숲을 없애서 제주도에 집을 지었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자연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살고 싶은데 살아갈수록 그것이 어렵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쓰러져가는 집에서 책을 팔고, 어디 비만 피할 수 있는 집에서 살아도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순 없다.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자연을 더럽힐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제주도에 내려와 책방을 열고 처음 시작한 일은 ‘제주풀무질 녹색평론 읽기 모임’이었다. 그것 말고도 세 가지 모임을 더 하고 있다. 내가 제주도에 내려와서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제주도 조천읍 선흘2리였는데, 그곳 주민들과 꾸린 모임이 ‘선흘 녹색평론 읽기 모임’이다. 선흘에서 1년을 살고 세화로 집을 옮겼고, 그때부터는 제주도 농사꾼들과 모임을 시작했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책을 읽는다 해서 ‘주경야독 모임’이다. 또 책방 가까이 있는 세화고등학교 선생님, 숙박업을 하는 사람, 동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과 고전 읽기 모임도 꾸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인 《녹색평론》을 함께 읽고 싶은 마음에서 녹색평론 모임은 두 개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제주도 시골에서도 책읽기 모임이 될까 싶었다. 그러나 《녹색평론》 읽기 모임을 하겠다고 알렸더니 동네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왔다. 지금껏 한 달도 빠지지 않고 꾸려가고 있다. 보통 다섯 명 안팎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다. 서울에서 모임을 했을 때에는 대학생들도 왔지만 학교를 졸업하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동네사람들이 오고, 제주도를 떠나지 않는 이상 죽 함께할 것이다. 또 대개는 농사일을 하는 분들이어서 자연스럽게 땅을 살리고 자연을 더럽히지 않는 일에 마음을 모은다. 책읽기와 실천이 함께 가는 것이다.
책읽기 모임에 나오는 분들은 땅은 트랙터로 갈지만 농약(농촌 독약)을 쓰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그분들 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새로 옮긴 책방 터 옆에는 당근과 무 밭이 많다. 어느 날 당근 농사를 짓는 분이 농약을 뿌리면서 내게 말했다. “이 약은 사람에겐 안 좋은데 작물엔 좋아요.” 그러면서 창문을 닫으라고 했다. 어떻게 사람 몸에 안 좋은 농약이 작물엔 좋을 수 있을까. 아마 당근을 잘 자라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제주도 가을 들판은 참 아름답다. 당근이 파릇파릇 잎을 돋운다. 하지만 그 땅에는 지렁이 한 마리 살지 않는다. 내가 사는 세화는 제주도 구좌읍에 있는데, 이곳 당근은 우리나라 당근 농사의 70% 가까이 차지한다. 물론 당근도 다른 나라에서 수입을 많이 한다. 국내산은 44%에 불과하다. 주로 중국과 베트남에서 수입한다. 제주도 당근 밭도 트랙터로 땅을 짓이기고 풀과 벌레를 죽이는 독약을 치지 않곤 일굴 수 없다.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농산물 값은 다른 나라와의 가격경쟁으로 점점 낮아지기 때문이다. 1960년대 뒤로 우리나라 농촌도 근대화 물결을 타면서 우리는 이제 쌀과 보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쌀과 보리를 만든다.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농작물을 만든다. 공산품을 생산하는 일을 공업이라고 하듯이 농사도 농업이 되었다.
2021년 지금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대도시 건물에서 전기와 온갖 화학비료를 써서 먹을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 일을 나라에서 나서서 하며 ‘스마트팜’이라고 부른다. 지금 우리는 질소, 인, 칼륨으로 범벅인 된 화학제품을 먹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스스로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비율이 30%가 채 안된다. 유럽에 있는 여러 나라들은 100%가 넘는다. 토종씨앗으로 먹을거리를 일구는 일도 점점 멀어진다. 《녹색평론》 읽기 모임을 하면서 더욱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녹색평론》 덕분에 이런 사실을 알게 돼 고맙기도 하지만, 어쩌지 못하는 농촌 현실을 보면 가슴이 터질 듯 아프다. 그래서 모임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조금씩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짓도록 도와준다. 농사를 지으러 온 젊은 사람들에겐 농사일을 알려주고 잘 살도록 도와준다.
앞뒤 문맥 없이 글을 어지럽게 썼는데, 요즘 내 마음이 그렇다. 제주도에 와서 좋은 환경 속에서 몸은 편한데 마음이 어지럽다. 선흘에 처음 집터를 잡았을 때에는, 그곳에 동물원이 들어선다 해서 반대대책위원회 활동을 했다. 지금은 사업이 멈췄지만 언제 다시 돈 귀신에 빠진 건설업자들이 달려들지 모른다. 책방은 세화에 열었는데, 차를 타고 20분만 가면 성산인 그곳은 제주 제2공항이 생기면 비행기가 지나가게 될 터였다. 나는 제2공항 건설의 문제점을 정리한 작은 책자를 책방에 오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나눠 주었다. 성산에 공항을 짓는 것은 막았지만, 돈과 개발에 눈이 먼 사람들은 제주도의 다른 곳에 공항을 세우려고 잔머리를 쓰고 있다. 선흘에서 세화로 오는 길에 송당이 있다. 그곳에는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인 비자림로가 있다. 삼나무가 수만 그루 있다.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인 긴꼬리딱새와 팔색조도 산다. 그런데 길을 넓히려고 6년 동안 삼나무 2,500여 그루를 죽였다. 환경영향평가에 걸려 잠시 공사가 멈췄지만, 야생 생물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공사를 계속하려고 한다. 어떻게 숲에 사는 새와 동물들을 사람 마음대로 옮길 수 있나. 숲이 무슨 영화 세트장인가. 기가 막히다. 서울에 있을 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숲을 지키는 단체에 돈을 내거나 연대서명을 하고 마음 편히 지냈다. 지금은 아니다. 제주도에 살고 있으니 나 자신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싶다. 이반 일리치는 세상에 이것 세 가지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했다. 자전거와 도서관과 시다.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가서 시를 읽고 쓰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세상은 평화롭다고 했다. 나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다. 바로 먹을거리를 일구는 일이다. 땅을 더럽히지 않고 먹을거리를 일구는 일이야말로 가장 신성한 일이 아닐까. 자연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농사를 짓고 산다면 코로나19 바이러스도 퍼지지 않는다. 멋있고 아름답고 편한 것만 찾다 보면 숲은 파괴되고, 그 숲에 사는 새와 나비와 꽃들과 지렁이는 목숨을 잃는다. 숲이 없으면 사람도 살 수 없다.

―은종복(제주 독자, 제주풀무질 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