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이끌려 읽은 책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에 이끌려 정기구독한 ‘《녹색평론》’에 이끌려 농촌으로 이끌린 지 벌써 4년이 되었습니다. 첫 직장 선배의 증언에 따르면 제가 입사한 순간부터 공공연히 ‘난 나중에 농사짓겠다’고 했다 하니, 저의 ‘바람난’ 이유를 오롯이 《녹색평론》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겠지만, 저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놈의 책들’ 때문으로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그놈의 책들’은 《녹색평론》과 그로 인하여 읽게 된 여러 책들입니다. 그중에는 《녹색평론》 이번 호(164호)에도 짧게 소개된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도 포함됩니다. 이 책 또한 제목이 좋았는데,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는 그 모습은 고 신영복 선생이 지남철에 비유한 다음의 글을 떠올리게 합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만약 그 바늘 끝이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를 휘청이게 한 책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의 불복종》입니다. 《시민의 불복종》에서 다음 구절을 읽으면서, 저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약을 먹었을 때처럼, 주위의 허상들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가 다른 사업이나 계획에 전념하고 있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앉아 그를 괴롭히면서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먼저 그 사람의 어깨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책을 덮으며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화려한 대리석, 타일, 벽지가 사라지고,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못나고 거칠고 지저분한 실체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앉아 있는 저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당장 내려올 수는 없었습니다. 직장과 주변을 정리하고, 부모님을 반쯤 설득하고, 식구들과 함께 이 곳 함양으로 내려온 지 4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저는 완전히 내려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구마 농사를 지었는데 순수하게 적자가 났습니다. 저는 이제 저의 어깨가, 더불어 아내와 아이들의 어깨가 다른 사람에게 밟히는 것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김남주 시인의 말처럼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똥 누는 폼으로 새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가 되어, 이제는 주중에는 도시에서 돈을 벌고, 주말에만 농사짓는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홀수 달이 되면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녹색평론》을 기다립니다. 농촌과 농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기를 기대하며 노란 봉투를 뜯습니다. 제 바람대로 이번 호는 주로 농사와 생명조작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 〈뿌리를 잃은 삶, 농사를 망각한 정치〉에서 소개한 시몬 베이유와 그녀의 책 《뿌리내리기》에 많이 공감하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베이유는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고도 시골 중학교 교사를 자청하여 가난한 농민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직접 포도밭 일꾼으로, 공장노동자로 육체노동을 하는 삶에 뛰어들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나치독일에 점령되었을 때도 부유한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영국에 있는 임시정부에서 일하며, 프랑스 난민들에게 배급되던 열악한 음식을 같이 먹었습니다. 폐결핵에 걸려서도 충분한 영양 섭취를 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거부하고, 프랑스 동포들에게 주어지는 배급식량분 이상으로는 먹을 수 없다고 고집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결국 서른셋 이른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습니다. 그녀는 가장 인간적인 문명은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문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그녀의 사상을 함부로 비판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녀가 천재적인 철학자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땅에 뿌리를 내린 그녀의 사상은 고정되고 편협한 것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삶의 방향을 향해 쉴 새 없이 떨리는 지남철 바늘 끝이 아닐까요?
이 밖에도 이번 호에서는 웬델 베리의 〈흙, 이야기, 공동체〉, 데이비드 몽고메리의 〈건강한 흙과 소농〉을 읽으며 좋은 삶과 소중한 것에 대한 생각을 되새겨볼 수 있었습니다. 한상봉의 〈영혼의 망명정부를 찾아서〉에서는 좋은 삶을 찾아 나선 한 사람의 고민과 방랑에 동병상련하면서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책을 덮는 순간 매번 현실의 파도가 밀려옵니다. 나를 바꾸기 위해, 혹은 바꾸지 않기 위해 책을 읽지만 현실의 파도는 질기고 때로는 거칩니다. 내가 바꾸지는 못할 것 같아서 누군가가 좀 바꿔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녹색평론》이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모든 농부가 《녹색평론》을 읽는다면 우리 농촌은 너무 살기 좋은 곳이 되겠지요. 그러면 자연히 도시 문제도 해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농부가 《녹색평론》을 읽는 것은 불가능한 상상일까요? 촛불의 빛은 소멸하지 않고 우주 어딘가 빛으로 떠돌아다닌다고 믿습니다. 《녹색평론》이 말해온 소중한 이야기들 역시 책갈피 속 글자로만 잠들어 있지 않고, 글과 말로, 전자신호로 누군가를 찾아다닐 것을 믿습니다. 저 역시 오래된 《녹색평론》 서문집에 이끌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