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창간 20주년, 《녹색평론》 독자 20년.
20년이라는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그래요, 감회가 남다르네요. 내가 지금부터 누구를 만나서 무슨 일을 시작한들 20년의 세월과 기억들을 공유할 수 있겠어요.
《녹색평론》이 처음 나오기 시작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첨부파일 이용이 일반화되기 전이었나 봐요. 원고를 팩스로 편집실로 보내곤 했어요. 김종철 선생은 전화로 이를 꼭 다시 확인했고요. 지금도 생생합니다, 전화선을 타고 전해지던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대한 무서운 지적들. 나는 전선을 타고 교류되던 그 질문과 대답의 순간들을 긴장하면서 즐겼어요. 스릴까지 느꼈어요. 물론 그 이후 번거롭지만 그 소중한 과정은 사라졌어요. 그러나 《녹색평론》의 날카로운 현실진단 그리고 대안 탐구의식은 여전히, 그리고 더욱 치열해지는 듯합니다. 내가 다음호를 기다리고, 목차부터 독자모임난까지 빼놓지 않고 읽게 만듭니다.
《녹색평론》의 수수하고 화장기 없는 표지가 처음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리고 나도 정말 몰랐습니다, 이 작고 단정한 책이 20년 동안 한번도 쉬지 않고 꼬박꼬박 내 책상에 나타날 줄을. 그래요, 정말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자, 그러니 이 말을 꼭 전하고 싶군요.
“고맙습니다. 건재하십시오.”
서숙(이화여대 명예교수)
《녹색평론》이 창간된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인생의 근원을 돌아보게 하는 경험에서 미처 놓여나지 못한 채 마흔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좌파 지식인이었던 아버지가 훌쩍 떠난 그 공백기에 만난 《녹색평론》은 저에게 한 깨달음처럼 다가왔습니다.
진화의 최정점에 위치한 인간의 절대 우월성에 티끌만큼의 의심도 없었던 젊은 시절의 나는, 《녹색평론》이 전해주는 중중연기(重重緣起)라는 우주의 작동 원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인간인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저 벌레와 풀의 은덕임을 가슴 치며 절감했고,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한 인간이야말로 이 우주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임을 통곡처럼 깨달았습니다.
김종철 선생님, 그리고 20년 동안 《녹색평론》을 펴내주신 실무진 여러분, 깊이 감사드립니다. 부디, 앞으로도 인간이란 목숨붙이의 영혼에 맑은 물을 부어주시길 축원드립니다.
유소림(시인, 주간 〈미즈내일〉 편집위원)
생물다양성 세계에서 세포는 현장(現場)의 카오스 속에서 살길을 찾아 서로 어울리며 ‘동적평형(動的平衡)’을 추구한다. 사람의 공생 또한 이질적 가치를 서로 인정해야 성립되는 것이다.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인간은 강한 권력을 가진 ‘큰 사람’이 만든 상황에 여하튼 휘말려 산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민주주의는 가난한 자를 위한 정치이다.” 조선시대에 사랑받던 말 ‘민암(民岩)’도 바로 ‘작은 사람의 힘’, 곧 데모스·크라토스이다. 지금 NY 금융 본거지에서 퍼져간 “우리는 99 대 1의 99이다”, 또 아랍세계를 휩쓴 ‘작은 사람’의 목소리들은, “근대국가는 시민에 의해서 형성된다, 시민의 위기는 국가의 위기다”라고 암시한다.
각성된 착한 시민을 만드는 것은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임을 노래하는 잡지 《녹색평론》의 20주년을 축하한다.
현순혜(화가, 재일(在日) 독자)
잃어버린 ‘시간’입니다. ‘세대’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반딧불의 날갯짓, 개구리 울음, 마른풀 타는 연기, 물 빠진 갯벌…. 뭘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고 일상을 꾸려갑니다, 물신만 추앙할 뿐.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가치는 더이상 이 땅의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존엄과 지혜는 찾을 길 없습니다. 세상 어느 곳이건 99퍼센트가 1퍼센트에 의해 전복되고, 공동의 것은 소유권의 절대성 앞에 무릎 꿇습니다. 사람들에게 내일이란 없습니다. 우리란 없습니다.
명백한 예외주의입니다. 그랬지요. 《녹색평론》의 길은 늘 외로웠지요. 마치 무언극 같았지요. 애타게 얘기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안타까운 목소리였지요. 그래도 바람찬 광야에서 20년을 버텨왔네요. 함께할 수 있었음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존경합니다.
최재천(변호사, 전 국회의원)
내달이 《녹색평론》 20주년이라니…. 이번호 표지를 다시 확인했다. 거기 ‘120’이란 숫자는 스무해라는 세월의 간격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매호 기다려 읽던 책을 어느새 무심히 받아들고, 때로는 실린 내용을 채 파악도 않고 지나쳐버린 기억이 나 부끄럽다.
그 사이 《녹색평론》이 대처해온 각종 현안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바로 내가 산 지난 하루하루를 비춘다. 우리사회나 국제사회나 할 것이 없이 어디서나 자행되고 있는 반(反)문명적 태도들, 수치심을 모르는 천박한 교양에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들이 끝없이 이어져왔지만, 그런 시류에 맞서 인간적인 가치의 옹호를 위해 한호도 거름 없이 절실한 심경이 담긴 표현들을 내놓는 《녹색평론》의 노력에 깊은 존경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진실에 공감하는 것이 고통이지만, 그러면서 감동받고 식었던 정열이 격해지고 또는 분별없이 일었던 감정을 서늘하게 추스르도록 해준 경험들이 생각하니 모두 새롭다. 《녹색평론》은 내게 선물이자 잣대다.
김영동(미술평론가)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으로 통칭되는 그들이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을 학살하고 멸망의 나락으로 내몬 유럽인들보다 더 고등한 생명체일 수 있다는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어준 것은 《녹색평론》이었다. 번쩍거리는 유럽인들의 삶보다 조촐했던 인디언들의 삶이 더 복된 것일 수도 있다고 《녹색평론》은 얘기했다.
게르만이 로마를 정복하고, 북방 유목민이 중원을 휩쓸고, 바다 건너 왜가 조선을 유린한 건 결코 그들이 더 앞서가고 우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흔적도 없이 스러져간, 그 기억조차 우리에겐 남은 게 없는 숱한 마을과 부족과 문명들이야말로, 그들을 집어삼키고 번성한 자들보다 고등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주입받아온 역사니 전통이니 가치니 하는 것들은 어쩌면 점잖은 고등생물들을 죽이고 살아남은 영악한 자들이 자기합리화를 위해 조작한 알리바이일지도 모른다.
우리세대는 날마다 거대한 뭔가가 새로 건설되고, 총생산과 수출액이 몇퍼센트 올라가고, 세계 여러 가난한 나라들에 비해 얼마만큼 더 잘살게 되었는지 확인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도록 훈련받으며 자랐다. 그건 주술이고 주문이었으며, 우리는 성장의 광신도로 자랐다. 성장 없는 삶은 공허하고 불안했다. 그렇게 느끼도록 두뇌 회로가 세팅된 로보트였다. 그리하여 오로지 성장을 위해, 지구를 망가뜨리고 마침내 성장해야 할 이유와 목표 자체마저 파괴해버렸다.
그때 《녹색평론》이 나타났다. 그리고 피안을 향한 화두처럼 물었다. 도대체 사는 게 뭐고 왜 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승동(〈한겨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