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6주년이라니⋯ 책장 구석 깊숙이 들어앉은 창간호를 꺼내봅니다. 2,500원에서 4,200원으로 올라버린 책값만큼이나 세월도 흘러, 그럴듯하다 싶어 밑줄 쳐둔 노란 형광펜 자국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로 시작되는 창간사의 첫마디처럼, 녹색평론은 희망을 지키기 위하여 애써왔다고 생각합니다. 장삿속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녹색평론을 지키는 일에서도 녹색평론은 희망을 지켜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가슴 조이도록 조마조마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글읽기가 부족한 사람인지라 포스트모던이니 패러다임이니 하는 말들은 잘 모릅니다. 그래도 녹색평론은 기다려집니다. 게으른 성질인지라 읽기에 힘든 부분은 넘겨버리지만, 그러고도 읽고 나면 뒷맛이 개운한 글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잡지의 서평에 “녹색평론이 있는 시대에 내가 태어난 것을 참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썼습니다.
녹색평론에 글 쓰시는 분들은 삶의 본질 또는 문명의 핵심을 파악하는데 뛰어난 분들이라 생각됩니다. 쉽게 읽혀도 긴 울림을 남기는 글들은 참으로 내가 녹색평론과 함께 있음을 기쁘게 합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가 엔진이 고장난 차보다 더 위험하다는데, 우리의 문명에 브레이크를 달기 위하여 애쓰시는 녹색평론의 제작진과 독자가족 모두에게 상큼한 가을바람 한 움큼 보내드립니다.
양운진 (마산 · 창원환경운동연합 의장, 경남대 교수)
창간 여섯돌을 맞는 녹색평론에 축하드린다. 환경과 생태계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도록 일깨워주는 시대적 과업을 충실히 감당하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되어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애독해왔다.
그러나 지나치게 학술적이거나 논문형식의 글들이 편중되는 경향이 있어 평범한 사람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평들이 많다. 특정한 계층(지식인층)을 위한 잡지가 아니라면 누구나 읽고 공감하는 현장감있고 진솔한 내용을 다양하게 다루었으면 한다. 요즘은 습관처럼 구독은 하지만 대부분 한두페이지 읽고 나면 책꽂이에 꽂아두기만 해서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어렵사리 원고를 써서 보내면 내용이 수록하기가 곤란한 것일지라도 간단히나마 싣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거나 다시 반송해주는 미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음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아무튼 녹색평론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책이 되어 녹색세상을 향한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강문필 (농민, 경북 울진)
녹색평론이 창간 6주년을 맞았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사물의 가치는 그 존재가 없을 때를 가정하면 잘 나타난다고 합니다. 당연히 여기던 햇빛과 나무, 가족의 존재, 정신문화 모두가 그렇지요. 작은 시골학교 교사로서 녹색평론 없는 학교의 공허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창간 이래 매호 받아보는 녹색평론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바른 관계에 대한 깊이있는 논의로 많은 생각거리 읽을거리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녹색평론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정신에 학교도 공감대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믿습니다. 학생들이 운영하는 도서조합에는 녹색평론에서 낸 책이 언제나 가지런히 꽂혀 있습니다. 또 교사와 학생이 녹색평론과 출판물을 읽고 가끔 토론발표도 합니다. 가까운 지역에서도 학교를 이해하지 못할 때, 녹색평론이 학교 소개 기사를 내셔서 따뜻한 격려를 주신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교육이 한사람 한사람을 키우는 것을 잊어버린 능력획일주의나 지식서열화, 생활이나 지역현실과 유리된 교육, 교육공공성이 지나쳐 단위학교의 창의가 숨죽은 중앙집중적인 처방으로 인간성과 사회가 난맥이 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치를 실현하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실현하고 평민이 존중되며 교육이 지역의 교육력을 활용하고 환경친화적이고 자치적인 지역건설에 대오를 함께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만난 사람이 녹색평론의 독자라는 것만으로도 오래 사귄 사이처럼 친밀감을 느낀 일이 여러번 있습니다. 우정의 형성은 오래 사귄 것보다 생각의 방향이 같고 같은 정신을 공유할 때 이뤄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렵게 시작하여 이제는 진지한 독자들이 확보되어 계속 발행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반갑고 모든 독자는 서로 인사가 없어도 잠재적인 친구들로 생각합니다. 다 아시는 프로스트의 시에 숲속에 두갈래 길이 있는데 사람이 안 다니던 길을 선택하여 가니까 새로운 세계가 열리더라는 것이 있습니다. 독자를 포함해 모든 진지한 이들이 우리 생태를 걱정하고 자연과 사람이 통합하며 작은 것이 아름다운 사회로 나가는 길을 넓혀야 하겠습니다.
매호 재생지를 이용한 녹색평론을 받아보는 기쁨을 위해 애쓰시는 여러분의 수고를 빕니다.
녹색평론 없는 우리 사회는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홍순명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
농약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밥상, 숨쉬기조차 어려워진 공기, 마시는 용도와는 거리가 멀어져버린 수돗물, 그리고 광란적인 소비문화와 물신주의, 무한경쟁의 살벌함만이 주위를 감싸도는 현실.
이 슬프고도 안타까운 현실에 막연한 반감만 가지고 있을 때에 한 선배에게서 녹색평론을 권유받았습니다. 거대한 산업체계로는 예정된 파국을 향할 수밖에 없다는 절망적인 인식과 함께 그 절망적인 구조를 딛고 일어나기 위해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자기반성이 필요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겉은 번듯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곪아들어간 요란함이 홍수를 이루는 시대에, 나즈막한 목소리로 외치는 생명과 공동체문화에 대한 절실한 목소리는 주위에 있는 친구들에게도 새로운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아직까지 생명에 대한 담론이 대학에서 활성화되고 있지는 못하지만, 대학구성원들이 현대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근원적인 문제해결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된다면 머지않아 봄날의 녹음처럼 푸르름으로 캠퍼스를 뒤덮을 날이 오리라 확신합니다.
창간 6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다시한번 되새겨 볼만한 좋은 글을 주시는 여러 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임진성 (동국대학교 한의대 본과 1학년)
시방 인도를 헤매고 있는 송기원형은 창간 3주년 메시지 때였던가, 녹색평론이 세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는다는 말과 함께 이 책을 소금에 비유했다. 나 역시 엄청나게 쌓이는 우편물의 홍수속에서 녹색평론을 받을 때는 그래도 신부처럼 설레곤 한다.
녹색평론이 이미 발행인의 생각과 관계없이 ‘우리 시대의 것’이므로,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김종철 선생님을 떠올려도 되리라 생각된다. 몇해 전, 쓰레기 문제에 깊이 빠져있을 때, 대구 편집실에 갔었다. 통화만 했었는데, 김선생님은 날더러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셨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으나, 이윽고 차를 몰고 왔다고 대답하면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기차나 버스로 다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떠오르는 일은 그가〈한살림〉의 무슨 잔치에 초대받아서 한 말, “한살림 이거 잘되는 거, 정말 축하할 일일까요?”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김성동형께 들은 이야기지만,《오래된 미래》가〈시사저널〉에 쓴 김성동형의 서평 이후 막 팔리기 시작할 때에도 그는 혀를 찼다고 한다. 잘 팔리니 좋은 일이긴 하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일이냐고. 그 이야기는 몇십만부 발행의 대중매체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면서 바로 그런 위력이 가능한 사회구조를 염려하던 탄식으로 들렸다.
녹색평론의 탄식과 우려, 녹색평론의 생태학적 이성과 지향을 나는 믿는다.
최성각 (소설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생명 · 환경분과장)
일본에서 잠깐 살 때였습니다. 고베 지진은 대도시란 얼마나 위험한 곳인가를 똑똑히 보여주었습니다. 뒤따라 터진 옴진리교 사건은 소위 선진문명국이란 또 얼마나 끔찍한 곳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옴진리교가 보여준 선진문명국 사람들의 정신착란과 그 정신착란이 만들어내는 첨단기술 숭배는 정말 소름끼쳤습니다. 그러고도 일본 텔레비젼에선 갖가지 살인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보도되었습니다. 방화살인, 영아살인, 토막살인⋯. 텔레비젼에서 또다시 살인사건을 듣고 정말 견딜 수 없던 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우체통에서 꺼내들고 온 녹색평론은 눈물나도록 반가웠습니다. 우리집 베란다에 날아와주는 멧비둘기만큼이나 고마웠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와 보니 그 사이 한국은 엄청나게 소비수준이 높아져 있었습니다. 정말 우리 사회의 변화속도를 실감하였습니다. 일본에서 처음 보았던 여러 상표란 상표들이 다 들어와 있었고 어떤 부분에선 일본보다 훨씬 더 방만하게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요사이는 지자체마다 툭하면 온갖 ‘개발계획’을 발표합니다. 베어낼 나무 한그루 없어질 때까지 ‘개발’하고 ‘소비’하겠다는 기세입니다.
이 스산한 시대, 녹색평론이 우리들 마음속 굳센 제어장치가 되어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유소림 (시인, 내일신문 편집위원)
벌써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지 9년째다. 늘 쫓기듯이 바쁘게만 살면서도 난 열심히 산 줄만 알았다. 어느날 글쓰기회보에 실린 헬렌 니어링의 글을 읽었다. 녹색평론에 실린 글을 다시 옮겨실었다는 설명을 통해 녹색평론이라는 책이 있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
그 후에《오래된 미래》가 겨울연수 숙제가 되었고 권정생 선생님의《우리들의 하느님》이 계속 보내어져 왔다. 그 글들을 읽으며 나는 내 삶들이 부끄럽고 생각들이 삐뚤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명색이 학교선생이면 적어도 다른 직업에 있는 사람보다는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결국은 나도 속물이었다는 게 부끄러웠다.
솔직히 서른이 넘도록 누가 ‘지속가능한 미래’니 ‘공생적 문화’니 ‘평화’니 하는 말들을 가르쳐주기나 했나? 심지어 종교조차도 내가 이 사회에서 직업에서 유능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될 것을 부추겨주었다. 모두가 바라는 유능함과 존경이 결국엔 경제적 부유를 통한 넉넉한 소비와 적당한 자선이고, 그것은 미덕이고 평생을 내가 그러하길 바라며 살았다.
우리 교실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글이 걸려있다. 나처럼 아니 우리 대부분이 교육의 목표가 대학진학이고 대학진학이 취업으로, 다시 결혼으로, 집, 차로 이어지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녹색평론은 가만히 삶의 진리들을 가르쳐준다.
《녹색평론선집》에서〈쇠고기를 넘어서〉와〈작은 행성을 위한 식사〉를 읽고는 눈이 번쩍 떠졌다. 5학년 체육시간부터 나오는 기초식품군과 영양을 나도 침튀기며 가르치고 엄마선생으로서 “우유를 많이 마셔라” 어쩌구 했는데⋯.
또 학교급식이 아이들의 건강과 균형잡힌 식사에 한몫을 하는양 긍정적인 면만 믿고 그 넘쳐나는 쓰레기엔 그냥 모른 척만 해왔다.
지금껏 왜 우린 이런 걸 안 배웠을까?
녹색평론은 내 삶을 바꾸어주었고 또 내가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도 알게 해줬다. 책 한권이 나를 다시 만들어준 셈이다.
나는 기회가 닿는대로 녹색평론과 단행본들을 선물하고 이야기한다. 듣는 사람도 있고 관심없는 사람도 있지만 나 같은 사람이 계속 늘어나야 하고 또 그러하리라 믿는다.
노미경 (포항남성초등학교 교사)
녹색평론은 처음 1쪽부터 마지막까지 다 읽습니다. 재생지를 쓰고 앞 뒤 치장을 생략하며 상업주의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견지해온 편집은 책의 겉모습부터가 강렬한 메시지가 되어 마음을 두드립니다.
그런 안과 밖의 한결같음은, 나무와 숲을 사랑한다고 외치는 글들을 담고 있으면서도 (무지해서인지 아니면 기회주의에서인지) 두껍고 화려한 종이를 쓰는 어떤 책들처럼 결과적으로 자연 생산물의 낭비에 가담하는 온갖 출판물들이 홍수를 이루는 이 시대에 놀라운 모범으로 있습니다. 그 양심의 일깨움이 녹색평론을 손에 받는 순간부터 지난 두달 동안 보통의 독자이자 시민으로서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우리 주변의 환경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노약자와 아이들이 바깥출입을 삼가기를 권하는 얼마 전의 오존오염 경고방송은 바야흐로 거대한 환경재앙이 눈 앞에 와 있다는 끔찍한 현실을 증거하는 듯합니다.
동시에 이와 같은 무차별한 생태계의 균형상실은 현재의 상황이 이미 아무리 노력해도 그 파괴적인 가속화를 피할 수 없는 상태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런 우울한 예감이 녹색평론 창간 여섯돌을 더 절실한 느낌으로 맞이하게 합니다.
이석태 (변호사, 덕수합동법률사무소)
이런 식으로 자연이 오염되고 파괴된다면 언젠가는 참새마저 천연기념물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휘발유 1리터를 가지고 자동차를 몇킬로미터 더 달리게 할 수 있느냐는 식의 기술적인 개선만으로는 우리를 파멸로 몰고가는 이 문명의 진행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이 점점더 명백해지고 있다. 기술적인 노력에 의해 환경이 개선되는 속도보다는 이 문명과 인간의 무한한 탐욕이 빚어내는 파괴의 속도가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빠르기 때문이다. 속도와 시간의 싸움에서 우리는 계속 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에서 절망적이다.
이제 우리는 이 병든 문명 자체를 문제삼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오늘의 문명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묻고 다시 대답하지 않으면 안될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삶의 양식을 바꾸고 이 문명의 진로를 바꾸어놓지 않으면 파멸을 면키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녹색평론은 이러한 명제를 가지고 괴물과도 같은 거대한 문명의 골리앗을 향해 돌팔매를 하는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했다. 환경을 감시한다는 언론이 매일매일 거대한 숲을 잡아먹으면서 또다른 공해를 양산하는 이 자기모순의 시대에 녹색평론은 몇 안되는 ‘순결한 언론’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의 병든 영혼을 정화시키고 우리의 몽매한 눈을 떠주게 하였다. 앞으로도 타협없이 같은 길을 가주길 바란다.
신홍범 (언론인, 도서출판 두레 대표)
너 죽고 나 살기식의 사고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인간중심 자기중심의 이기적 욕구의 논리가 지구촌을 불사르고 있다. 경쟁의 논리에 의하여 반생명, 비인간적인 삶의 방식이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한다. 자연이 파괴됨으로 인하여 인간이 죽고 너를 짓밟음으로 인하여 나의 삶이 무너지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자연과 인간, 너와 내가 동반자살하는 무지한 짓을 되풀이 하는 꼴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구석에도 더불어 함께할 생명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지 못하다. 오로지 경쟁해서 물리쳐야 할 남남이 있을 뿐 고락을 함께할 생의 반려자로 어울려 ‘우리’가 될 곳은 없다.
이런 현실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이해 타산을 떠나 생명의 반려자로 함께 어울릴 장이 필요하다. 생명이라는 무대에서 함께어울려 자연과 너를 존중함으로써 인간과 내가 사는 옛길을 되찾을 때 동반자살의 비극은 끝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은 시공을 뛰어넘는 절대가치의 존재인만큼 우리 모두가 흔연히 어울릴 수 있는 무대가 아닌가 한다.
그런 의미에서 녹색평론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생명의 반려자로 기쁘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무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독자들이 열정을 쏟아야 할 일은 우리 이웃들을 녹색평론의 장으로 안내하는 작업이라고 믿는다. 우리 모두의 동반자살을 막고 우리 모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
이 자리를 빌어 녹색평론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도법 (스님, 실상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