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지음
녹색평론사, 2011년
송기원은 나의 대학 선배이다. 이번에 재미있는 소설 형식으로 풀어 쓴 그의 《못난이 노자》를 읽었다. 노자는 한사람이며, 도덕경도 한권이되 풀어 쓴 책들은 이루 셀 수가 없다. 그 가운데 한권을 더 얹는 것이 얼핏 부질없음에 덧없음을 더하는 것이니 ‘무위(無爲)’의 뜻을 되뇌게도 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송기원표 도덕경’에 대한 관심은 자못 컸으니, 책을 펴기 전에 우선 지은이부터 펼쳐보기로 한다.
사람은 왜 선하고, 성실하여야 하는가
전생에 쌓은 연이 허박하지 않음인지, 재주라곤 반성문 쓰는 것밖에 없던 처지에 뭉툭한 연필 한자루 집어 들고 들어선 문예창작학과에 송기원이 적을 두고 있었다. 월남에 파병되었다가 돌아와서 엿장사로 등록금을 모은다던 선배가 신춘문예에 소설과 시가 겹으로 당선이 되어 대학으로 돌아온 해였다. 원고지 쓰는 법이나 가르치는 강의실보다는 봉당에 묻어놓은 독에서 시큼하니 쉰 막걸리를 ‘쉬어 죽나, 취해 죽나’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찌그러진 주전자에 퍼담아 팔던 ‘할머니집’을 서당으로 삼던 시절이었다. ‘할머니집’에서 만난 송기원 선배의 첫인상은 무협지에 나오는 무림 사파의 서역승(西域僧)을 연상시켰다. 고르지 않은 잇새로 흘려내는 온갖 비속한 이야기들은 사교의 경전처럼 이제 막 대학에 들어선 새내기들을 감화시켰다.
말하자면 그는 나의 문학적인 전범(典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송기원이 문학에 대해서 그럴듯한 말이라도 흘려주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입학 면접 때 김동리 선생의 “좋아하는 작품이 무어냐”는 물음에 “김동리의 〈감자〉”라고 답했다는 그에게서 그 어떤 문학적 용어가 나오겠는가. 그저 노가리 댓마리를 구워놓고 돌아가며 철 지난 유행가나 부르다가 강가로 몰려가 떼를 지어 울거나, 학교 연못에 뛰어드는 게 별일이라면 별일이었다. 그래도 뭔가 한 일을 대라고 강박한다면, 어떻게 하면 성실하지 않게 살까를 고심했다고나 할까.
그것은 요즘 아이들 말로 번역하자면 갈 데 없는 ‘찌질이’ 궁상이었다. 송기원으로 치자면 찌질이 중의 왕 두목인 셈이었다. 살짝 머리털이 귀를 덮어도 “남에게 혐오감을 준다”며 붙잡아다가 콩밥을 강제로 먹이던 시절에 당시 그의 몰골로 말하자면 무기징역감이 되고도 남을만했다. 무릎이 불거져 나오고, 주름이 겹겹이 접힌 바지를 헐렁하니 걸치고, 도수 높은 안경 속에서 어디를 바라보는지 모를 눈을 시종 번득이며, 꾸역꾸역 입에 넣은 안주와 술이 성근 잇새로 질금질금 비어져 나오는 모습이야말로 ‘발본색원(拔本塞源)’해야 할 혐오감의 원흉감이었다.
혐오감이 몰골에만 그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겠는가. 조신한 하숙집도 있으련만 하필이면 색주가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연못시장 한구석에 거처를 마련하여, ‘은정’이라는 작부에게 밤을 낮으로 삼아 우화등선(羽化登仙)에 음양일체의 묘법을 ‘몸으로’ 가르치고 설파하던 중이었으니 ‘어느 불행한 군인 출신의 지도자’가 보기에는 심신이 공히 혐오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만히 돌아보자면 그때는 모두가 혐오스러워지려고 ‘총화단결’하여 애쓰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무엇일까. 그의 지극히 혐오스러운 육체를 헤집어, 바람이 그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꺼내는 것들은. 육체 중의 어느 하나도 허용되지 않는 시간에 차라리 무섭고 죄스러운 육체를 바람 속에 내던졌을 때, 그때 바람이 그의 육체에서 꺼낸”1) “거미줄 같기도 하고 붉은 혹은 푸른 색실 같기도 한”2) 시편들은 숨이 막히도록 경이롭고 황홀하기만 했다.
그야말로 송기원은 얼굴이 누런 보들레르였다. 고백하자면, 나는 당시 송기원 선배처럼 ‘지저분하고 못되고 비속하지’ 못한 것에 대해 심한 열등감에 빠졌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람은 “왜 선하고, 성실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인 셈이었다.
선악의 경계에서 피는 꽃
송기원 선배가 들으면 서운해할지 모를 일이 있다. 어디에선가 그에 대해 주고받는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들은 적이 있다. “송기원 소설가는 악마적이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이가 이의를 제기했다. “악마적이 아니라 악마야.”
악마든 천사든 일단 송기원이 향불 피우고 경(經) 외우는 언저리를 맴돈 것이 과연 꽤 오래 묵은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그의 문학이나 삶이 향냄새 그윽한 사원 비스름한 곳이 아니라 술 냄새가 코를 찌르는 선술집이거나 싸구려 분 냄새가 낭자한 유곽의 골방일지언정 그곳에서 접하는 악하고 천하고 속된 이야기들을 ‘언 살이 터져 빛나는’3) 시와 소설들로 풀어내는 술법은 신묘하기 그지없다. 경전을 펼치되 그는 천국을 말하는 대신에 지상의 그늘진 어둠과 폭력과 전쟁 그리고 외롭고 쓸쓸하고 비루먹은 ‘찌질이’들의 울음과 상처에 대한 ‘경외성서(經外聖書)’4)를 써나갔으니, 그이야말로 선악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꽃이요, 저잣거리로 나선 활불이 아니겠는가. 옴마니밧메훔.
선하고, 고상하며, 아름다운 것들만이 큰소리치는 세상에서, 그는 못난이들이 상처를 딛고 일어서 자신의 삶을 오롯이 찾아나가는 방편으로 문학을 삼았으니, 그것은 단순한 서사나 음유를 넘어 ‘도(道)’와 ‘덕(德)’의 경서에 가깝게 된 연유가 될 것이다.
“문학을 하는 데 재주가 가장 많은 사람이란 자기 안에 콤플렉스가 가장 많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5)
그의 육성으로 전하는 문학에 대한 생각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평생 그의 삶을 관통하던 출생의 콤플렉스는 유달리 상처 많은 이들의 삶에 각별한 관심과 교감을 나누게 한다. 상처로 상처를 쓰다듬고, 눈물로 눈물을 씻는 이에게 이름이 있다면, “버려진 땅, 시든 풀잎, 오,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어루만지며, 어디론가 날려가는 것”6)에게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비록 그것이 악하고 천하고 속된 모습으로 현현할지라도 나는 그에게 ‘성스럽다’는 말을 전하는 데에 주저하고 싶지 않다.
“가령 저도 젊은 시절에는 주위로부터 문학적인 재주가 있다는 말을 가끔 듣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재주란 것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부모님들이 물려주신 것도 아니고 내게 처음부터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적잖은 시간의 대가를 치른 다음에야 제 스스로 깨달은 것은, “아! 내 자신에게 콤플렉스가 많았는데, 그것들이 싹을 틔우고 자라서 나의 문학적 재능이 되어주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7)
그의 문학은 그렇게 악취와 썩어가는 수렁에서 밀어올리는 한송이의 순연한 수련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문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주저 없이 말하기를 “그대의 콤플렉스에서 배우라”고 한다.
이 말에서 방점을 찍고 싶은 말이 있다. ‘그대의 콤플렉스’라는 말이다. 문청 시절에 나는 송기원을 전범으로 삼아 문학공부에 정진했다. 그의 빛나는 어록과 일탈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려 애썼다. 그러나 사람이 착하고 바르게 살기도 힘들지만, 비뚜로 살기도 힘들었다. 나는 그처럼 “악마적이지도 못하고, 비(非)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에 절망했다. 나의 성실함과 양순함이 콤플렉스가 되었다.
이제 와 송기원의 《못난이 노자》를 읽자니 일부러 비뚜로 사는 것도 무위연(無爲然)하는 것이니 ‘꾸밈이 없이 저절로 그러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요, ‘남의 콤플렉스’를 흉내 내어 사는 것도 ‘생긴 대로 사는 것’과는 어긋난 셈이다. 이시백이 송기원처럼 살려고 무위연하다가 자신도 잃고 중도 속한도 아닌 처지가 된 꼴이다. “그대의 콤플렉스에서 배우라”는 말이나 “생긴 대로 살라”는 ‘못난이 노자’의 말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던 임제선사(臨濟禪師)의 계와 상통한다. 이제 《못난이 노자》를 읽고서 내가 할 일은 가다가 송기원을 만나면 송기원을 죽이자는 결심뿐이다. 선배시여, 조심하시라.
어쨌든 송기원은 내 문학적 스승이었고, 그가 ‘할머니집’에서 내어놓은 ‘노가리’8)들이 나에게는 문학의 교과서가 된 셈이었다. 그렇게 문학과 삶의 푯대로 삼아 무작정 앞만 보고 따라가면서도 늘 다다를 수 없는 간극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 《못난이 노자》를 접하며 그 실체를 가늠하게 되었다. 내 자신을 살피자니 ‘천국에 쌓인 보화’보다 ‘주머니 속의 신사임당 지폐 한장’을 더 중히 여기는 ‘좌뇌’적 존재로서, 송 선배가 말하는 ‘46억년의 우뇌정보 안에 깃들어 있는 신비한 방향성’9)이야말로, 내게는 ‘묘한 것들이 들고나는 문’10)처럼 결코 막막하기만 한 것이었다.
송기원 선배가 인도를 다녀오고, 도(道)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놓을 때, 무작정 그 족적을 따라 살아온 이로서는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인은 성자가 아니다”라는 김남주 시인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무림 사파의 당주격이던 선배가 성자들 주변을 어른거린다는 사실은 ‘좌뇌’만으로는 해독 불가한 일이었다. 돌아오라는 예수께 “뛰쳐나가야 돌아오지 않겠느냐”고 대드는 탕자격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허망한 꿈이라는 석가의 말씀에 “이왕이면 아름다운 꿈을 꾸고 싶다”고 들이대는 ‘좌뇌’의 처지에서 보자면,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만져지지도 않는 도와 덕의 세계란 것이야말로 ‘헛되고 헛되고 헛되’11)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터에 이제 《못난이 노자》를 접하자니, 선배가 발견한 도와 덕의 경지란 것이 바로 내 안에 숨겨진 상처가 피워낸 붉은 꽃이며, 나의 콤플렉스라는 돌멩이가 고통의 연단으로 구워져 생성된 보석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그것은 백합 향기 그윽한 천상의 나팔소리가 아니라, 시장판에서 벌어지는 악다구니이며, 야바위와 비속어와 땀에 젖은 ‘사람들이 풍기는 향기’12)임을 알게 되었으니 그런 도와 덕이라면 내게도 그리 멀지 않다는 안도감을 얻게 되었다. 야비하고, 비속하며, 친구 마누라의 속옷마저 훔쳐다 팔아먹을 인간들에게서 그가 건져올린 ‘사람의 향기’야말로, 곰삭은 젓갈들이 부패와 발효의 과정을 통해 얻어내는 향미가 아니겠는가.
못난이가 힘이다
이제 그의 책을 펼쳐보자. 원전에 앞세워 붙인 ‘못난이’라는 말은 그가 말하는 ‘콤플렉스’나 ‘언 살’ 같은 것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대체로 산수 간의 물외인(物外人)이 되어 삶의 이치를 찾는 성인들이 더듬던 《도덕경》을, 그는 비뚤어진 세상이 멀쩡한 사람을 윽박지르고, 손가락질하여 만들어낸 ‘못난이’들에게서 길을 찾는다.
연예인이든, 문인이든 조금 유명하다 싶은 인물들이 안 보인다 싶으면 교회나 절에 가보라는 말이 있다. 박정희 멱을 따러 왔다던 무장공비 중 한분도 목사가 되어 돌아다니며 경서의 구절들을 무논의 개구리처럼 외어대고, 싫다는 이들에게 전기마사지를 시키는 기술로 명성을 떨치던 고문기술자도 요즘 들어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다닌다는 시절이다.
이 책은 절도 교회도 아닌 저잣거리에서 ‘못난이’로 지칭되는 열아홉살의 젊은이와 그의 여자친구 ‘은정’을 등장시킨다.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며 네가 죽어야 내가 살며, 나만 아니면 되는 ‘초울트라 슈퍼 복불복 서바이벌 왕국’의 맥없는 국민으로서 첫발을 내디뎌야 하는 열아홉살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은 그들이 지겹도록 겪고, 더 겪어야 할 상처와 패배와 열등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못난 짓 그만두고 ‘스펙’이나 쌓으라고 윽박지르는 이들에게 이 책은 그 못난 짓이야말로 그들의 존재가치이며, 숨겨진 보석이라고 말한다.
못나기로는 어디 열아홉살의 젊은이들만 그러하겠는가. 삼십팔년 동안 죽도록 공부하여 겨우 들어간 대기업에서 한창 일할만하니 집에서 쉬라 하여 쫓겨난 마흔다섯살의 김 부장이며, 퇴직금 탈탈 털어 시작한 슈퍼마켓이 느닷없이 들어선 대형할인점에 거덜이 나 거리로 나앉은 김씨며, 평생 경비로 아파트 지키던 일마저 나이 많아졌다고 쫓겨나 도로변에 풀이나 뜯으러 다니는 희망근로 양 노인에게도 이 책은 경전이 될 것이다.
아홉냥 가진 자가 한냥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열냥을 채우려는 나라, 한명의 잘난 놈을 위해 아홉명이 못난 놈이 되어야 하는 사회, 온갖 시험으로 줄을 세워 멀쩡한 아이들을 바보로 만들어놓는 학교, ‘신의 자식’들이 외국 유학 가서 ‘스펙’ 쌓고 있을 동안 나라 잘 지키라고 ‘어둠의 자식’들에게 총 들려 번을 세우는 군대는, 오늘도 무수한 ‘못난이’들을 쏟아내기 바쁘다.
막상 이 나라의 비극은 못난이가 못난이가 아닌 척하는 데에 있다. 땅바닥에 엎드린 노숙자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노숙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비운의 ‘맥도날드 할머니’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제가 들어갈 집마저 투기꾼들에게 빼앗기고도 분노하기보다는 한푼이라도 모아 저도 투기꾼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개털들의 모습은 처절하기만 하다. 못난 놈들이 힘을 똘똘 뭉쳐 멀쩡한 자신을 못난이 취급하는 것들에 대해 분노하기보다는, 어떻게든 힘센 편에 들러붙으려고 기를 쓰며, 저와 같은 못난이들이 겪는 수모와 상처를 저만 아니면 된다고 안도하며, 그리하여 힘센 자가 되었을 때 그동안 자신이 겪은 못난이의 설움을 몇곱으로 되갚아주는 서바이벌 왕국에서 ‘천하무적’이 되는 길은 무엇일까.
《못난이 노자》는 우선 자신이 못난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뒷전으로 밀려나고, 버려졌던 못난이의 존재 속에 감추어진 보석을 찾아 ‘천하무적’이 되기를 권한다. “잘난 사람이 아니라 나처럼 못난이가, 어른보다는 어린이가, 돈과 권력을 잡고 남들 위에 올라선 사람보다는 짓밟혀 진흙탕 속에 쓰러진 사람이 바로 그런 밑바닥에서 자신의 참다운 힘을 찾아 천하무적이 되는 한판 뒤집기”13)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이 빌어먹을 나라에서, 천하무적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강해지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아야 하는 ‘승자독식’의 주인공이라면 차라리 그냥 ‘못난이’로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송기원표 도덕경’은 이르기를, 남을 짓누르기 위한 천하무적이 아니라, 아무리 짓눌러도 스스로 일어서서 세상의 어떤 적도 그를 짓누를 수 없는 ‘천하무적’이 되라고 이르고 있다. 그리고 잘난 놈이 못난 놈을 짓누르는 세상이 아니라, 못난 놈이 못난 놈을 쓰다듬고 일으키는 대동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울어본 놈이 남의 아픔을 알고,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14)지 않는가.
“천하무적이란 바로 이 세상에 어떠한 적도 있을 수 없는 가장 강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난세란 전쟁이며 굶주림이며 갖은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어지러운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러고 보면 노자할아버지의 사상은 무슨 평화로운 시절이 아니라 한껏 어지러운 시대를 이겨내는 가장 강한 사람을 만드는 철학인 셈입니다.”15)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의 길을 묻는 열아홉살의 젊은이들과 개떡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팔자에 없는 못난이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 조금 나이 많은 ‘열아홉살’들에게 이 책은 “못생겨서 미안해요”라는 말 대신에 이렇게 외치라고 말한다.
“생긴 대로 살자.”
“못난이가 힘이다.”
주)————————————————————
1) 송기원 시 〈회복기의 노래〉 중 일부 변조.
2) 송기원 시 〈회복기의 노래〉(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3) 송기원 시집 《그대 언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실천문학, 1983년)
4) 송기원 단편소설 〈경외성서〉(197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5) 송기원 문학 강연록 〈자신의 콤플렉스를 솔직하게 들여다보라〉 중에서
6) 송기원 시 〈회복기의 노래〉 중에서
7) 5)와 같은 곳
8) 도인의 설법을 지칭하는 속된 말. 일명 ‘썰’이라고도 함.
9) 《못난이 노자》 224쪽
10)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덕경》
11) 전도서 1장 1~2절
12) 송기원 소설집 《사람의 향기》(창비, 2003년)
13) 《못난이 노자》 23쪽
14) 신경림 시 〈파장(罷場)〉 중에서
15) 《못난이 노자》 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