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기 진자부로 지음
녹색평론사, 2006년
자신의 시대를 ‘핵의 시대’로 규정한 이래, 치열하게 반핵의 삶을 살다 간 다카기 진자부로 선생은 녹색평론사의 소개에 의하여 ‘시민과학자’로 우리한테 먼저 알려진 이다. 시민과학자라는 말은 본래 프랭크 폰 힛펠(프린스턴 대학교수)이 자신의 책《시민과학자》(1991년)에서 처음 쓴 말이라고 한다. 다카기 선생의 친구였던 그 또한 ‘시민으로서의 과학자’를 자임했던 학자인데, 다카기 선생이 병상에서《시민과학자로 살다》(1999년, 한국어판 2000년)의 원고를 다 쓴 뒤 제목을 고민하던 즈음, “상아탑이 아니라 삶 자체를 실험실로 삼아 민중들과 같이 싸워온 ‘얼터너티브(대안) 과학자’로서” 자신의 후반기 삶을 돌이켜보건대 비록 남이 먼저 쓴 말이지만 그렇게 붙여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책명으로 삼으면서 우리한테 익숙해진 말이다. 그후에 다카기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책은《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2000년, 한국어판 2001년)이다.
앞의 두권의 책들처럼 이번에도 같은 출판사와 같은 번역자에 의해 새해 초 출간된 다카기 선생의 책《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본래 1985년에 간행된 것을 저자의 말년인 1998년에 증보신판으로 다시 펴낸 책이다.
다카기 선생의 이 세권의 책은 모두, 사회주의자로 살다가 다카기 선생을 통해 예순이 넘어 핵문제에 뛰어들고, 나중에 스스로 아나키스트라 본인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계신 김원식 선생에 의해 번역되었다. 다카기 선생을 만난 이래 그가 사망할 때까지 두 사람이 나눈 우정은 여간 감동적이지 않다. 다카기 선생이 생전에 써냈던 책을 그의 사후에 우리말로 옮기면서 김원식 선생의 심중에 차올랐을 감회가 아마 각별했으리라는 것이 잘 짐작된다.
증보신판의 후기에서 다카기 선생은 “초판에서 12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체르노빌 사고, 냉전의 종식, 지구환경문제의 심각화와 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등 자연과 인간, 지구와 인간에 관해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이런 것은 초판에서 기본적으로 예견한 것이었지만 예견 이상으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또 사실이다”고 밝히고 있다. 1986년 4월 29일, 모내기를 하고 있다가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소식을 들은 다카기 선생은 이후 에콜로지 담론이 마치 우리사회를 휩쓴 웰빙 소동처럼 하나의 유행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며 “어디 두고 보자”고 하던 다소 방관자적인 태도에서 다시금 핵과의 숙명적인 싸움의 전의를 불태우게 된다.
대장암이 처음 발견된 것이 1998년 7월이니까 그가 이 책의 증보판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결장(結腸)에서는 조용히 암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장암, 간암으로 이어진 그의 암투병은 나중에 대동맥 옆의 임파절에 다시 암이 생기면서 급박해진다. 그래서《시민과학자로 살다》와《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은 흔히 ‘유언적 저서’라 불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려는 간절한 메시지의 절박함과 그 진정성으로 인해 우리는 그 책들을 숙연하게 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몸 속에 암이 자라고 있는 줄도 모른 채 1998년 증보판 작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던 다카기 선생을 생각하면, 한 정직한 인간이 스스로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절박한 주제를 설정하고 거기 매달리는 과정의 비장감 같은 게 엄습해 오는 것도 사실이다.
인류가 채택한 두개의 교활한 자연관
책은 ‘지금 왜 자연인가’라는 서장이 있지만,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인간은 자연을 어떻게 보아 왔는가’라는 질문으로 채워져 있고, 제2부는 ‘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그리고 ‘증보’와 다카기 선생의 후기, 그리고 역자의 후기가 이어진다. 핵테크놀로지에 대한 저항이 삶의 주제였던 이가 왜 갑자기 자연관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선생도 밝히고 있듯이, 두말할 것도 없이 ‘현대적 위기의 근원’이 일그러진 자연관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자연에 대한 태도에 의해 자연이 이렇듯 능욕을 당하고 있고, 그 역습에서 인류의 존폐가 가늠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인식은 바람직한 삶을 고민한 제정신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맞닥뜨리게 되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다카기 선생은 주로 서양의 그것이지만, 인류가 교활하게도 두개의 자연관 사이를 줄타기해 왔음을 밝혀낸다. 하나는 해명의 대상이고 분석의 대상이고 지배와 착취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위안과 즐거움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다. 즉 정복자와 과학자의 자연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시인의 자연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원론은 다카기 선생의 말처럼 당혹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래서 선생은 우리가 직면한 자연과 사회의 심각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원적으로 분열된 자연관을 좀더 새로운 관점에서 통일적으로 재검토하는 근원적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책의 주제다.
다카기 선생은 서장에서, 핵문제를 고민한 이답게 핵테크놀로지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핵테크놀로지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더 강력하고 더 거대한 힘을 얻어내려고 한 극한에서 태어난 기술”이라는 게 선생의 견해다. 자연에서 추출된 “제2의 자연”이 “제1의 자연”을 우리 내부에서 지배하고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다. 틀림없는 말이다. 지난해 연말 성과주의에 미친 대다수 한국인을 정신적 공황상태에 몰아넣은 ‘황우석 사기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생명공학(바이오테크놀로지)도 그는 신성모독으로서의 제2의 자연으로 간주하면서 이야기를 펼친다.
프로메테우스 숭배가 가져온 필연적인 재앙
그래서 제1부 ‘인간은 자연을 어떻게 보아 왔는가’는 ‘자연관’이라는 일관된 관점이 있지만 마치 ‘이야기 과학사’로 여겨질 만큼 다카기 선생이 정성껏 모은 귀한 자료들로 채워져 있다. 이야기가 그리스 신화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모든 원인에는 이유가 있다”(셰익스피어,《실수 연발》2막 2장)는 말처럼 근대적 자연관의 뿌리가 바로 거기서부터 연유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프로메테우스부터”였다고 간파한 것은 다카기 선생이 처음은 아니지만, 원자력을 ‘프로메테우스의 불’이라 부르는 것을 상기할 때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플라톤의《프로타고라스》에 담겨져 있는데, 모두가 얼추 한번쯤 듣거나 봐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이지만, 이 책이 다룬 특별한 시각 때문에 다시 정독할 만한 신화라고 생각된다.
옛날, 신들이 처음으로 동물(죽어야 하는 종족)을 창조했을 때 티탄족의 거신(巨神)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에게 그 능력의 배분을 할당한다. 프로메테우스는 ‘먼저 생각하는 이’라는 뜻을 갖고 있고,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생각하는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신화가 때로 현실보다 더 현실을 잘 반영하고 미래를 앞당겨 해석하는 능력을 내장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참 절묘하게 많은 부분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름난 지자(智者)였지만 다소 게으른 프로메테우스는 임무를 아우 에피메테우스에게 미룬다. 고지식한 에피메테우스는 동물들에게 능력을 배분하면서 어떤 종족에게는 속도 대신 강한 힘을, 힘이 약한 측들에게는 속도의 능력을 주었다. 어떤 것들에게는 이빨이나 발톱처럼 무기를 주었고, 또 다른 것들에게는 무기 대신 나면서부터 신체를 보존할 다른 능력을 주었다. 작은 것들에게는 날개를 주기도 했고 어떤 것들에게는 땅속에 서식처를 주거나 큰 몸을 주었다. 모두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능력을 배분하되 그가 배려한 것은 “어떤 종족도 멸종하여 자취를 감추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뿐인가. 어떤 녀석에게는 털이나 가죽을 입혔다. 모두 제우스가 만든 사계에 잘 적응하고 살라는 배려였다. 살기 위해 동물들이 몸에 마련한 것이 바로 ‘자연의 본성’이었다. 서양에도 ‘가지 않은 길’이긴 하지만, 일찍부터 공생의 사상이라 할 만한 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에피메테우스가 능력 배분의 권능에 심취해 맨 나중에 줄을 선 인간에게는 아무 능력도 줄 게 없었던 게다. 결국 “인간은 벌거벗은 채 신발도 없고, 깔개도 없이, 무기도 갖지 못한 채”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바로 그때 ‘인간이라는 동물’을 가엽게 여긴 프로메테우스가 헤파이토스(쇠를 다루는 신)와 아테네로부터 “기술적인 지혜를 불과 함께 훔쳐” 인간에게 준다.
다소 회색적인 인간의 내면을 잘 그려 2003년 노벨상까지 받은 남아공 출신의 소설가 J.M. 쿳시의 장편소설 중에《철의 시대》라는 소설이 있는데, 쿳시도 쇠를 다루는 신 헤파이토스로 이어진 문명(남아공 백인들의 폭력)을 의식하고 붙인 제목이 아닌가 여겨진다.
어쨌거나 여기서부터 사단이 일어났다. 신화로 봐도 그렇고, 실제 그 후에 일어난 일을 더듬어봐도 그렇다. 그 이후의 세상은 개판보다 더 심각한 ‘꼴난 인간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은 ‘자기 밖’에 있는 자연계에서 자신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자연과 대항해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후 프로메테우스는 플라톤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 갈릴레오나 뉴턴, 괴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기술적 지성을 긍정하고 자연에 대한 정복자로 인간을 긍정하는 원조로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인간의 문명이 불과 기술을 하늘에서 ‘훔친 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프로메테우스에 대해 줄기차게 바쳐진 열렬한 찬사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인간이 걸어온 길의 비극성을 일찍부터 암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등골이 서늘해진다.
다카기 선생이 꼼꼼하게 짚어본 서양의 자연관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진행된 바로 그 끔찍한 자연관이었다. 자연은 장애물이었고, 인간은 잘나도 끔찍하게 잘난 존재인 것이다.
원자력을 ‘프로메테우스의 불’이라 명명하고 있는 근대적 인간의 오만이나 근래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고 펼쳐지는 생명공학에 대한 광신이, 신화에 그려진 생명 가진 것들의 필멸(必滅)의 숙명을 부정하려는 의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화의 예지력에 경탄하기에 앞서 왠지 모골이 송연해지는 감도 없지 않다. 이라크에서 예상을 넘는 희생자를 낸 미국방성이 어느 부처보다 생명공학에 더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국방성의 그 지대한 관심은 공격목표가 어느 곳이 될지 모를 ‘다음 침략전쟁’ 때에는 복제인간을 사용하겠다는 계획 때문인데, 어쩌면 생명공학이 난치병 환자를 고치는 윤리적(?) 목적보다 인간복제술로 더 활기차게 활용되리라는 것은 불보듯 쉽게 예측되는 일이다.
이 책의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제1부는 바로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예찬하고 그가 훔쳐준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온 서양의 과학사로 채워져 있다. 때로 자연이 기계로 파악되기도 했으며, 혁명의 원리가 되기도 했으나 한결같은 태도는 자연을 이용과 조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었다. 간혹 자연을 유기체로 이해했던 브루노 같은 과학사가가 있었지만, 코페르니쿠스를 거쳐 근대로 접어들면서 합리주의적․과학적 자연관은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자리잡는다.
그 대목과 관련해 다카기 선생의 말을 직접 살펴본다.
근대과학은 진리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점에서, 극히 배타적인―혁명(내지는 반혁명)이 승리하는 과정들은 모름지기 반대하는 사상을 쓰러뜨리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것과 같이―시스템, 또는 문화적인 강제력이 강한 시스템이다. 일단 그러한 틀이 사회에 큰 힘을 차지하게 되면, ‘비과학’은 악으로 배제되고 자연관은 ‘과학’으로 평준화된다.(94쪽)
얼마 전 ‘황우석의 생명공학’을 의심하거나 행여 조금이라도 비판하면〈조선일보〉김대중 씨에 의해 한국에서는 확고한 악의 표지로 통용되는 ‘좌파’로 몰리고 말던 일을 상기하면 이 대목에 대한 이해가 아주 쉬워질 것이다.
서구적 자연관의 핵심은 인간중심주의
서구의 자연관을 프로메테우스적 자연관으로 요약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또다른 특성은 인간중심주의다. 기계로서의 자연관이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기독교였다. 그래서 중국의 자연관과 대비해 조셉 니담은 “기독교는 세계에서 가장 인간중심주의적인 종교이다”라고 탄식했는지 모른다. 니담은 말하기를, 중국에서는 “인간 이외의 피조물에 대해서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95쪽)는 예를 든다. ‘세계의 공장’을 자처하고 있는 오늘의 중국을 생각하면 그런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어졌지만, 최소한 동양의 자연관은 전통적으로 이원론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베이컨이라는 작자가 한 말을 인용해 본다.
“자연의 비밀은, 사람의 손에 의해서 가혹하게 다루어져야 그 정체를 밝혀내기 쉽다.” 이어서 그가 덧붙였다. “자연을 정복하려면 자연의 법칙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98-99쪽)
조지 부시만 악의 원천이 아닌 것이다. 교과서에 불멸의 존재로 등재된 위인들 중에도 이렇듯 방자하고 무례한 자연관을 지닌 인간들이 수두룩한 것이다. 예외적인 인물이 준 충격도 있다. 마크 트웨인이라면 비교적 괜찮은 작가가 아니겠는가. 그가 1900년대 초 필리핀 전쟁에 즈음하여 미국의 대외팽창주의를 가혹하게 비판하던 어조와 역할은 마치 드레퓌스 사건 때의 에밀 졸라에 버금갈 만했고, 특히 지금 읽어도 눈물 나는 그의《전쟁을 위한 기도》(돌베개, 2003년)는 오늘날 미국의 널리 알려진 대표적 반전주의자 촘스키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할 만한 작가이자 양심의 대명사라 말할 수 있는 마크 트웨인이 엉터리 수치를 동원해 인간의 위대성에 도취한 글을 남긴 것을 접하노라면, 프로메테우스 예찬을 기반으로 한 서구의 인간중심주의가 얼마나 구제불능의 강고한 편견인지 느낄 수 있다.
인간은 3만2천년이나 존재해오고 있다. 지구가 인간을 위해 준비하는 데 대략 1억년이 걸렸다는 사실은 인간이 그만큼 중요했음을 가리킨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게 보인다. 이제 에펠탑으로 지구의 나이를 재현한다고 가정한다면, 제일 꼭대기의 뾰족한 곳에 있는 색깔 층이 역사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부분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온 탑 전체가 이 얇은 층을 위해서 세워졌다는 것은 누구나 알아차릴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미다스 데커스《시간의 이빨》(오윤희 외 옮김, 영림카디널, 2005년, 236쪽)
뛰어난(?) 문학인들의 예기치 못할 무지와 폭력적 발언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지난해 황우석이라는 세기적 도박사가 국민영웅으로 잠시 부상했을 때 소설 쓰는 예술원 회원 한분은 그의 ‘젓가락론’에 속아 침을 튀기며 그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고, 귀족주의적인 분위기의 시인 한분은 아예 내놓고 화려하고 현란한 한 지면을 통해 “황우석을 예찬한다”는 제목 아래 그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경멸에 찬 어조로 매도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지난 세밑, 황우석의 진실이 밝혀졌을 때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을까.
쇠약해지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생명
이 책의 제2부는 앞서 말했듯이 ‘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채워져 있다. “자연을 엄청나게 포악한 것으로 보고 이것과 싸워 종속시킴으로써 자연을 융화시키려는 유럽적 자연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민중의 자연’, ‘자연과 노동’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회복하고, 우리도 그 일부라는 자각에서 비롯된 탈근대적 자연관을 그는 “해방의 자연관”이라 부르고 있는데, 다카기 선생 못지않게 “근대를 뚫어버리는 힘을 가지고 행동”에 나선 이들은 우리 한국사회에도 적지 않기 때문에 2부의 설득력은 공감과 새로운 확인의 기회가 된다.
“책을 쓴다는 것은 결국 선행하는 실천적인 작업의 뒤를 쫓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다카기 선생은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자연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라는 질문은 결국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옳은 것인가, 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과연 ‘다른 길’로 접어들 수 있을까. 다카기 선생은 “그렇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선생이 거는 기대는 역시 풀뿌리 시민운동뿐이었다. 국가권력에 의해서 세계가 달라지리라는 기대처럼 허망한 기대는 없다는 반(反)권력의 사상은 책 곳곳에 스며 있다. 그래서 아마 번역자 김원식 선생이 토다 기요시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카기 선생 또한 아나키스트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사상적 성향의 분류보다 중요한 일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상황이 지나치게 절망적”이라 “자연은 망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이라는 다카기 선생의 충고다. 그는 우리가 이제라도 정신을 차린다면, “미래를 확실한 것으로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 믿음은 “자연이 그렇게 간단하게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한편의 진실이다(236-237쪽)”는 낙관론으로 표현된다. 낙관론은 대개 그 어조와 달리 쓸쓸하기 십상인데, 다카기 선생의 낙관론에는 힘이 있다. 거기에 말과 글이 일치했던 생이 묻어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용한 아오노 사토시(靑野聰)의 다음과 같은 말은 곧 다카기 선생의 생각으로도 읽힌다.
생명은 일개 목숨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쇠약해지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쇠약이라는 것은 되돌아가게 해주지요.(193쪽)
이때 ‘생명’이라는 말을 ‘지구’라 바꿔 읽어도 좋고, ‘자연’으로 고쳐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의 말처럼 그것은 쇠약이라기보다 “참다 참다 폭발한 분노”로 이해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도 높게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자연의 역습들이 그렇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출간으로 이제 다카기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3년(1998-2000년)에 걸쳐 펴낸 세권의 ‘유언적 저서’가 모두 우리말로 출간된 셈이다. ‘밀란 쿤데라’도 아니고, ‘움베르토 에코’도 아니건만 같은 출판사, 같은 번역자에 의해 이렇게 한 에콜로지스트의 책이 시간을 두고 잇따라 출간된 예는 많지 않을 것이다. 많이 팔리지 않을 게 뻔할 텐데도 말이다.
다카기 선생에게는 “에콜로지즘 자연론의 시도”라는 이 책의 주제가 매우 힘겨웠을지 모르지만, 책을 읽는 우리에게는 반갑고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