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하인즈 지음
녹색평론사, 2011년
거짓된 것, 알맹이가 없는 것, 그래서 생명이 없는 행위들은 곧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런 행위가 강요되는 집단일수록 단순하고 편협하고 짧은 잣대가 사람들을 함부로 분류하고 잘라낸다. 대부분의 학교는 그런 집단의 표상이다. 도깨비가 피묻은 빗자루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학교는 다양함, 개성, 반대의사, 모든 부적응, 불규칙, 새로운 것의 시도, 낯선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예를 들면 교무회의를 시작할 때, 주번교사가 일어나 “차렷, 경례” 하는 대신 모두가 마주보고 그냥 “안녕하세요?” 하자는 의견이 분쟁을 일으키고, ‘국어과 교수학습지도안’이라 하지 않고 ‘토의학습을 위한 문학수업지도안’이라는 제목을 썼다 하여 장학사의 지적을 받는 곳이 학교이다. 추위를 심하게 타는 학생도 학생과의 발표가 있기 전엔 춘추복 위에 재킷 하나 덧입는 동복 차림을 해서는 안되며 자연농장에 밤줍는 소풍을 가더라도 교복 스커트 차림을 고집하는 교장이 수두룩하다. 같은 모양, 익숙한 모양으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학교는 불안하다.
《케스 ― 매와 소년》을 읽으면서 교사의 입장에서 쓴 교육운동분야의 소설보다 한 소년의 하루를 그려낸 이 소설이 더 가슴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것은, 어떤 교사보다도 학생들의 위치가 더욱 암담하고 힘이 없으며 감당해야 할 짐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학생들은 학교의 필요조건이지만 주인공은 아니다. 그들은 입은 있지만 의견을 말할 수 없고, 학교행정에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일이 없으므로 말할 필요도 없다. 성적이 좋거나 학급의 임원이어서 주목받는 몇명을 뺀 나머지 학생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영화〈여고괴담〉의 학생귀신 재희의 대사처럼 빈의자같이 그냥 교실 한구석을 채워주면 되는 것이다.
어둠이 내린 숲속을 걸어가면서 부드럽고 떨리는 소리로 갈색부엉이와 교신할 수 있는 이 책의 주인공 소년 빌리도 학교에 가면 ‘아무것도 아닌’ 학생 중의 하나이다. 그는 열등생 4C반에 속해 있다. 빌리의 하루는 아버지가 다른 형, 쥬드와의 싸움으로 시작된다.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탄광으로 일하러 가는 쥬드는 거칠고 사납고 심술궂다. 쥬드는 빌리 몫의 우유를 마셔버리고, 학교에 가기 전에 신문을 배달해야 하는 빌리의 자전거를 타고 가버린다. 그래서 빌리는 아침부터 신문가방을 들고 숨가쁘게 뛰면서 초콜릿, 오렌지쥬스 따위를 슬쩍슬쩍하여 끼니를 때운다. 아무도 빌리를 보호하거나 챙겨주지 않는다. 밤마다 남자를 끌어들여 즐기고, 아침에 일어나 속치마 바람으로 립스틱을 바르면서 빌리에게 “담배 가진 것 있니?” 하고 묻는 엄마는 아들들 앞에서 권리도 의무도 없다. 가난한 공영주택지에 사는 그들은 가족이기보다는 어쩌다 얽힌 동거인이다. 빌리가 사랑을 느끼는 유일한 대상은 폐허가 된 높다란 성벽 새둥지에서 꺼내다 키우는 야생매 케스이다. 케스에 대한 빌리의 이해와 교감은 4C반의 빌리, 이를테면 교실의 나무의자처럼 존재없는 아이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주목받지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아이들의 삶은 생명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꿈꾸고 즐거워하고 어딘가에 집중한다. 느티나무의 딱딱한 껍질속에 작은 벌레들의 고물거리는 몸짓이 숨어있는 것처럼, 뽑아서 멀찌감치 던져버린 잡풀이 끈질기게 뿌리를 내리고 뜻밖의 작은 꽃을 피워내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게 새 삶을 이끌어간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우리반엔 미순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애는 평소엔 그냥 7번 진미순이었다. 그러나 선생님들이 가사실에서 닭을 잡아먹을 땐 단연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었다. 작달막하고 빵빵한 그 애가 오동통한 팔을 걷어붙이고 나가 닭모가지를 간단히 비틀어서 끓는 물에 던졌다가 털을 쑥쑥 뽑는 모습은 얼마나 자신감 있고 멋져 보였는지 모른다. 미순이는 수업중에도 때때로 불려나가 닭을 잡곤 했다. 졸업을 하고 얼마 뒤, 우리가 스무살을 갓 넘긴 어느날 장터에서 제법 큰 아기를 업고 경운기 뒷자리에서 뛰어내리는 그 애를 만났다. 조카냐고 물었더니 아들이라고 했다. 예방주사 맞히러 나왔다면서 아기를 씩씩하게 돌려 안더니 “이모, 해봐” 하고 인사를 시키는 것이었다. 장터에서 동네 아줌마들과 수박농사 걱정을 하며 어른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그 옛날 닭잡던 때의 중학생 미순이와 똑같이 당당하고 시원시원했다. 그 애는 이미 마을의 한 구성원으로서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빌리의 매력도 바로 그런 생명력이다. 엄마에겐 외상담배 심부름을 강요당하고, 학교에 가면 예배시간에 졸다 불려가 매를 맞고, 온갖 천대를 다 당해도 기죽지 않는다. 숱한 벌과 조롱과 무관심과 구박이 힘없는 빌리를 늘 쫓아다니고 공포에 떨게 하지만 그는 한번도 비굴한 웃음을 짓지 않으며 그러한 폭력에 순순히 길들여지지도 않는다. 최선을 다해 피해나가면서 제가 할 말은 눈물을 섞어서라도 방울방울 떨어뜨릴 줄 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엔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집중하고 그 세계를 탐구한다. 빌리만의 세계속엔 새매 케스가 있다. 케스에 관하여 누군가가 함부로 말하는 것을 빌리는 용납하지 않는다. 4C반 천덕꾸러기 빌리는 뚜렷이 빛나는 한 존재인 것이다.
파아딩 선생의 ‘사실과 허구’를 주제로 한 수업시간에 빌리가 한 이야기 ― 야생매 케스를 훈련시킨 과정에 대한 이야기 ― 는 얼마나 훌륭한가. 빌리는 자기가 사랑하는 매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성장단계에 따라 체계적으로 훈련시켰다. 빌리의 말대로 그것은 오랜 기다림과 끈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매는 신경이 예민하고 눈이 굉장히 좋아서 사람들보다 열배나 더 자극을 받기 때문에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땐 걷는 동안 내내 아이처럼 부드럽게 말을 걸어야 한다고 빌리는 설명한다. 그렇게 말할 때의 빌리는 얼마나 섬세한가. 마침내 묶었던 줄을 풀고 날리는 훈련을 시작할 때 빌리는 케스가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를 낸다. 그러나 결국 그는 케스를 믿었고 케스는 줄을 묶었을 때보다 두배는 빠른 속도로 그에게 돌아온다. 케스를 묶었던 줄은 풀 따위에 걸리면서 오히려 빠른 비행을 방해했던 것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풀이든, 모든 생명에 깃든 자연성을 읽는다는 것, 그것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빌리가 운동장에 뛰어 들어온 떠돌이 개를, 석덴 선생처럼 막대기를 휘두르지 않고도 잘 달래어 끌고나갈 수 있었던 것도 상대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며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의 수많은 빌리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참으로 부끄럽기만 하다. 빌리가 케스에게 한 것처럼 아이들을 믿고 발목에 묶인 끈을 풀어줄 수 있는지, 갖가지 규칙으로 그들을 단단히 얽어매고 감시하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행로를 잡아나갈 거라는 확신을 우리는 가질 수 있는지 ⋯.
빌리와 겹쳐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국어시간에 만나는 중학생 수봉이와 동원이. 수봉이는 아직 한글을 깨치지 못했고 동원이의 시험답안지는 자세히 뜯어보며 ‘해독’을 해야 한다. 두 아이는 마음이 여려서 친구들이 조금만 뭐라 해도 눈물부터 글썽거린다. 어느 수업시간에 우리는 ‘위대한 평민’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우리들 모두에겐 뭔가 세상에 필요한 재능이나 품성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위대한 평민으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홍순명 교장선생님께 들은 풀무학교 이야기와 유기농과 오리농법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는데, 가장 눈을 반짝거리는 아이가 동원이었다.
“우리 교회 목사님도 유기농을 하는데요. 논에 우렁 넣고요. 저는 교회에서 계란 걷고 포장하는 일을 해요.”
그 일로 내가 동원이를 다시 보았다는 것은 그동안 내가 동원이를 소중한 한 존재로서 인식하지 못했었다는 뜻일 게다. 동원이 때문에 인연이 되어 며칠 전 동원이가 다닌다는 단비교회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게 되었다. 나무와 마른 풀이 우거진 교회 입구를 들어서자 축사를 개조하여 만든 아담한 건물과 함께 창고가 보였다. 흰 고무신을 신은 목사님 부부와 전도사님은 젊지만 조용하고 따뜻했으며 영성이 있는 가난한 삶, 생명농업, 마을공동체를 요란스럽지 않게 꿈꾸는 이들이었다. 우리는 마당에서 화덕에 장작불을 붙이고 전도사님이 돌판에 구워주시는 삼겹살을 맛있는 배추와 상추에 싸먹었다. 동원이 할머니께선 장작이 타고난 불씨에 속이 노란 고구마를 구워주셨다. 밥을 다 먹고나서 창고에 들어가 달걀을 수세미로 털어내어 열개씩 포장하는 동원이는, 학교에서 약간 주눅들고 자신감 없는 그 모습이 아니었다. 활발하고 환했다. 목사님의 다섯살 난 아들 정다우리는 수봉이 형처럼 되는 게 꿈이라고 한다. 와서 합기도 시범도 보여주고 잘못 따라하면 벌도 야무지게 세운다고 한다. 거기에 포크레인도 끌지, 트랙터 운전도 하지, 다우리에겐 수봉이가 우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진심으로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이렇게 생동하는 아이들이 학교에만 오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무능한 아이들로 변해버리지 않는가. 목사님과 전도사님은 두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경우를 놓고 고민하시는 것 같았다.
돌아오면서 나는 교사로서의 내 삶을 다시 정돈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교회의 창고에는 호미는 호미대로, 낫은 낫대로, 쇠스랑은 쇠스랑대로 가지런히 정돈되어 걸려 있었다. 다음날이 밝으면 그것들은 일터로 나갈 것이다. 수수는 줄에 매달려 탈곡을 기다리고 있고 제때가 되어 나온 자연란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모두 쓰임새가 분명한 것들, 억지로 쥐어짜낸 게 아니라 때를 기다린 자연스런 것들이었고, 모양으로 매달려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알맹이 없는 겉치레, 실제가 아닌 거짓행위들엔 넌더리가 난다.
지난 여름 내내 학교에서는 ‘황소개구리 포획의 날’마다 몇마리의 개구리를 잡아 없앴는지 보고해야 했다. 그 일을 담당한 교사가 몇학년 몇반은 모두 몇마리나 잡았느냐고 물으면 담임들이 짜증스럽게 대답하곤 했다. “아유, 이번엔 열다섯마리라고 해두세요.” 농사일이 너무 바빠서 일요일이 무섭다는 아이들이 한가롭게 황소개구리 잡으러 갈 틈이 어디 있겠는가. 보고받는 곳에서도 그런 합계치가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인성교육의 날’엔 교무일지와 학급일지에 ‘인성교육의 날’이라고 썼는지를 확인한다. 학생상담은 모두 기록하여 결재를 받아야 하는데 상담을 안했더라도 창작실력을 발휘하여 결재에 대비해야 하며, 심지어 서로 빌려다가 모방일지를 쓰기도 한다. 모두가 아는 거짓말을 문서로 만들어 올리거나 받아서 쌓아두는 일들에 동동거리며 하루 해가 간다. 우리 학교 가정선생님은 수업이 한 시간밖에 없는 날도 교재연구를 제대로 못하고 종이 울리면 서류더미속에서 황급히 책을 끄집어 내가지고 교실로 뛰어간다고 한다. 보람없는 일에 바쁜 동안 수많은 아이들이 버려진다. 우리는 아이들을 읽을 틈이 없다. 이 현실이 실제상황인지 허구인지 분간이 안가는 날들이다.
빌리는 영어시간에 황당한 허구,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쓰라는 지시를 받고 이렇게 쓴다.
하루는 내가 께어나니까 엄마가 자 빌리야 침대에서 아침을 머그려무나 그래서 보니까 배이콘과 달걀과 버터 바른 빵과 커다란 주전자에 차가 한 주전자 있었구 아침을 먹는데 바께는 해가 빗나고 있고 그래서 나는 옷을 입고 아래층에 내려갔다. ⋯ 내가 쥬드는 어딧어요 하니까 군대에 갔다 하고 엄마가 말했고 인제 안 돌아온다. 그 대신 너의 아빠가 돌아온다 그랬다. 방에는 불이 훨훨 타고 있었고 아빠가 갈 때 가주갔든 가방을 가주고 들어왔는데 나는 아빠를 한참 동안 못 봤지만 갈 때하고 똑 가탓다. 나는 아빠가 와서 기뻤고 쥬드가 가버려서 조았다. 학교에 갔을 때 선생님들은 나한테 친절하고 얘 빌리 잘 지내니 하고 말하고 모두들 머리를 쓰다드머주고 미소를 짓고 우리는 하루종일 재미있는 걸 했다. 집에 오니까 엄마가 인재 나는 일하로 안 간다 하고 우리는 모두 점심에 칩스하고 콩을 먹고 준비를 해가지고 모두 영하를 보러 가서 이층에 올라가서 마깐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모두 집에 와서 저녁에 생선하고 칩스를 먹고 그리고 잣다.
우리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터무니없게 써보라면 어떤 글이 나올까 궁금하다.
아침자습시간에 모두 빽빽이를 하고 있는데 교장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이 맑은 날씨에 교실에서만 앉아있지 말고 운동장에 나가 맑은 공기도 좀 들이마시고 해야지, 공부만 하면 도깨비가 된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운동장에 나가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들어오니 담임선생님께서 앞으로는 머리가 귀밑 1센티미터가 넘어도 학생과에서 단속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하시면서 깨끗이 감고 단정하게 빗고 다니면 된다고 하셨다. 우리는 기분이 좋아서 큰소리로 핑클과 엄정화의 노래를 불렀지만 아무도 교실에서 떠든다고 야단치지 않았다. 1교시에 국어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번 국어시험은 들꽃답사를 다녀와서 꽃관찰일기를 쓰는 것이라고 내일은 모두 학교에 오는 대신 간편한 옷을 입고 사진기나 스케치북을 들고 학교앞 공터로 모여주길 바란다, 교육청에서 버스를 한대 마련해주기로 했다고 하셨다.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이어서 눈물겨운 허구를 우리는 꿈꾼다. 우리는 혁명이 아니라 상식을 소망한다. 우리들속에 억눌려 있는 다양한 기질과 야생의 생명력이 제 빛을 찾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만이 마련되기를. 대부분 4C반에 속해 있는 우리 아이들의 삶을 비천하게 만드는 온갖 가시덤불만 치워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