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지음
녹색평론사, 2008년
설을 맞아 고향에 다녀오며 나는 다시 한번 ‘발전’이란 것을 꼼꼼히 따져보았다. 어릴 적 내가 연을 날리고 나무를 하던 마을 뒤로 고속도로가 놓여 더이상 올라갈 수 없도록 한 일이며, 이제는 마을 앞으로 기찻길을 낼 거라며 빨간 측량말뚝을 박아놓았는데 그게 발전이라면 나는 기꺼이 발전 아닌 때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향 마을뿐이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곳마다 새로 길을 만들고 논을 돋우어 집을 짓고 있었는데, 모르긴 해도 좁은 이 땅 모두를 자동차길과 시멘트 건물터로 내놓고서도 마음 편히 가질 수 있는 배짱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 걱정없이 걷던 길을 없애고 자동차를 타고 다니라 부추기는 시대에서 이제 나 같은 사람은 헌 고무신짝처럼 어딘가에 버려져야 하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권정생 선생님이 녹색평론사에서 새로이《우리들의 하느님》이라는 산문집을 내셨다. 아픈 몸으로 한 글자 한 글자씩 써내려 이만큼한 책을 묶어내셨다니, 몸 성한 나는 선생님 앞에서 감히 “시간이 없다”느니 어쩌느니 하며 무슨 일을 뒤로 미루었거나 못 이룬 일에 대한 변명을 거두어들여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올해로 선생님은 회갑을 맞으시는데도 한 순간이나마 놀지 않고 계시구나 싶은 게 선생님께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겉만 빙빙 도는 것은, 사실 이 책은 우리가 곁에 두고 한줄한줄 읽어가야 할 것이지, 이렇다 저렇다고 토를 달 그런 책이 아닌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첫장에서 따다가 뒷 겉장에 써놓은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 질리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 대목을 읽고 “그래서 선생님이〈강아지똥〉이라는 동화를 쓰셨구나!” 하고 감탄을 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선생님의 서른살 때 이야기라는 데 기가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 젊은 나이에 선생님이 이런 삶을 누리며 이런 생각을 해나갈 때,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그때가 아닌 쉰 앞을 바라보는 나이를 먹어서도 나는 늘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무얼 먹을까, 무얼 가질까, 무얼 하고 놀까만 생각해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나는 선생님이 아픔 때문에 늘 한곳에 붙어만 살고 있다 생각하니 더러 답답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생각도 지워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뜻하지 않게 1박 2일 동안 ‘유기농 실천 대회’에 다녀온 이야기에는 ‘불영 골짜기’를 둘러본 소감이 쓰여있다. 나도 가본 적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왜 똑같은 곳을 두고, 선생님은 다른 나라 풍경을 보고 부러워했던 걸 씻을 수 있는 감동을 받으시고, 나는 그저 그런 곳으로만 볼 수밖에 없었단 말인가! 그랬다. 나는 그동안 너무 누리고 살아만 왔다. 언제라도 맘만 먹으면 차를 타고 나갈 수가 있었고, 아무 때라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을 수가 있었다. 그러기에 좋은 것을 보아도 좋다는 것을,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있는 줄조차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 대목을 곰곰 생각해보니 큰물이 나야 조금 물 흐르는 시늉을 하는 조그만 도랑과, 풀과 참나무, 소나무 몇그루 자라는 ‘빌뱅이’ 언덕 곁 손바닥만한 집에서 ‘뺑덕이’와 살고 있지만, 선생님이야말로 늘 가장 좋은 것을 만나고, 가장 좋은 것을 보며, 가장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우리는 꼭 어디 가서 누구누구를 만나봐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언제 내가 내 곁에 있는 강아지똥이며, 풀쐐기, 개미, 민들레, 흙속 지렁이며 밤나무잎 같은 거 하나라도 눈여겨 본 적이 있었던가. 바로 가까이 있는 것조차 만나지 못하고서 다시 무엇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
선생님은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를 끊임없이 만나신다. 먼발치로 만나기도 하고 찾아가거나 찾아오시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만난다. 그러다가 언제부턴지 누가 당신에게 큰일을 했다고 주는 상을 부끄럽다고 여기게 되었다. 어느 책이, 또 어느 학자라 일컫는 분이 선생님께 이런 생각을 갖도록 해주었단 말인가. 모두 글도 제대로 모르고, 남 앞에 나설 줄도 모르는 그야말로 당신들은 이 세상에 쓸모도 없고, 가진 거 배운 거 없는 무지렁이라 여기는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한테서다. 열아홉 나이부터 처녀과부로 시집살이를 해오신 영천댁이 만주댁 뒷방에 숨어 군에서 주는 효부상을 한사코 마다며, “나는 상 받을락고 이적제 고상하며 산 게 아이시더. 뱃제 가만 있는 사람 찔벅거려 마음상케 하니껴. 나는 상 긑은 거 안받을라니더”라 한 말을 어찌 남의 얘기로 돌려버리실 수 있단 말인가. 늘 그이들의 동무로 살았고, 끝까지 그이들의 동무가 되겠다 다짐하신 선생님이 어찌 당신만 잘났다고 상을 받으며 기뻐하실 수 있단 말인가! 자식한테조차 버림받은 그 동무들이 어느날 갑자기 농약을 먹거나 목매달아 숨을 거두는 걸 보고, 혼자 소리치다가 목이 메고 밤잠을 설쳐야 하는 선생님이 아니던가!
아들이 아들이 아니고, 논밭이 농사지을 땅이기보다 돈으로 보이며, 사람조차 등급이 매겨져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으로 가려지는 이 세상에서 선생님은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와 그 교회속 사람들에게 외치신다. “이 땅의 진짜 우상과 마귀는 제국주의와 전쟁과 핵무기와 분단과 독재와 폭력이다”라고. 농촌속에서 그 농촌이 스러져가는 걸 가장 안타까이 바라보고 사는 선생님이 내린 이 말은, 한마디로 우리 농촌공동체를 뿌리째 흔들어 시들도록 만들어버린 ‘우상’들과 죽는 날까지 싸우시겠다는 선언이기도 한다. 이른 아침 정갈한 샘물을 길어다 비손을 했던 우리네 할머니들 삶을 ‘미신’이라 몰아부친 제국주의 종교와 힘 앞에서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발가벗겨져 부끄러움을 사고 말았던가.
선생님 바람은 오직, 그 누구라도 작은 우리네 삶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말고, 간섭하러 드는 당신이나 잘 살아달라 부탁하신다. 자동차를 타고 싶지 않은데 편하다며 함께 타자고 우기려 드는 일도 이제 그만 해달라 하신다. 편안히 죽어가는 사람을 억지로 병원으로 끌고 가지도 말라 당부하는 것은, 죽어가는 것도 아름답거늘 모두들 있는 그 자리에 두었으면 하시는 간절한 마음에서다. 그래서 사람뿐 아니라 ‘태기네 암소’도 눈물 흘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세상이 왔으면 하고 바라고 또 바라신다. 세상을 ‘잿빛’으로밖엔 볼 수 없는 삶을 살아와 거칠 건 없지만, 그래도 살아있다는 게 ‘두렵고 오싹하게 느껴지는’ 소심한 선생님한테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하나 있다고 하셨다. 이런 교회를 하나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었단다.
⋯⋯ 뾰족탑에 십자가도 없애고 우리 정서에 맞는 오두막 같은 집을 짓겠다. 물론 집안 넓이는 사람이 쉰명에서 백명쯤 앉을 수 있는 크기는 되어야겠지. 정면에 보이는 강단 같은 거추장스런 것도 없이 그냥 맨마루바닥이면 되고, 여럿이 둘러앉아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는 예배면 된다. ○○교회라는 간판도 안붙이고 꼭 무슨 이름이 필요하다면 ‘까치네 집’이라든가 ‘심청이네 집’이라든가 ‘망이네 집’같은 걸로 하면 되겠지. 함께 모여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성경책 얘기도 하고, 가끔씩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훈장님 같은 분께 공자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오날이나 풋굿 같은 날에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궂은 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갖고 싶다.
선생님은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혼자 가슴설레어 하느님께 기도도 했지만 그냥 생각만으로 그쳐버리고 말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내가《우리들의 하느님》을 읽고 느낀 바로는 그렇지가 않다. 생각대로 선생님은 그런 교회를 한개가 아니라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세워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어느 해 선생님은 내 마음속에조차 그런 교회를 떡 하니 세워 놓으셨다. 딱히 내가 허락해드린 것 같지 않은데도 말이다. 언제 선생님을 뵈면 나는 허가없이 집을 지은 벌금을 내라 떼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언제쯤 선생님한테, “오래오래 사셔야 돼요” 하고 부탁 한번 드려볼 수 있을까? 그러면 또 화를 내실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