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무엇보다도 제가 작가이기 때문에 환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작가 최성각이 ‘환경운동’에 관계하게 된 것은 상계동 쓰레기소각장 건설 저지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리고 그 경험의 역사적·사회적·문명사적 의미를 치열하게 성찰한 작가의 이후 문학활동은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주류문화의 ‘상식’에 용기 있게 맞서서, 생명과 인간적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자유로운 산문들은 작가로서의 그의 중심적인 업적이며, 진정한 문학적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목차
책머리에
1장. 내 등판은 거위 놀이터다
내 등판은 거위 놀이터다 / 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 아주 작은 마을까지 엄습한 종자전쟁 / 시드는 풀을 바라보며 배운다 / 흰둥이의 짧고도 고독했던 일생 / 실패로 돌아간 나의 자동차 이혼기
2장. 코스모스를 노래함
풀잎 위의 청개구리 눈알 / 돌밭에서 줄기세포를 생각하다 / 버려진 것들의 생명력 / 길을 잃은 토건국가 /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를 / 히말라야의 산적들 / 인간이 곧 자연의 재앙이다 / 코스모스를 노래함 / 달밤에 말벌집을 떼내다 / 무위당(无爲堂)이 그립다 / 생명의 신비를 회복하자 / 들녘을 달리는 신(神)들의 소리 / 봄이 오면 접시꽃을 심어야 한다 / 오백년 동안 참았던 목소리 / 에루아 에루얼싸, 새만금 / 달려라 냇물아
3장. 새나 돌멩이에게 상을 드리는 사람들
새나 돌에게 상을 드리는 사람들 / 할아버지 지고 가는 지게에 활짝 핀 진달래가 / 지렁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존경심 / 자유독립공화국 ‘풀꽃나라’ 탄생의 역사 / ‘자전거 나라’를 위하여
4장. 히말라야에서 배운다
히말라야 산사람들에게 배운다 / 소 한 마리 잡지 못하는 히말라야 사람들 / ‘오래된 미래’는 라다크에도 없었다 / 네팔 여성 찬드라에게 사죄해야 하지 않겠는가 / “히말라야 같은 마음으로 용서해주십시오”
5장. 산에 손가락질을 하지 말라
인디언은 ‘인디언’이 아니다 / 산에 손가락질을 하지 말라 / 헬레나 한국방문의 의미 / 사상강좌는 우리 시대의 구명보트였다 / 달라이 라마 방한거부로 얻을 국익은 사양하련다 / 끝없는 경제성장, 가능하지 않다
6장. 길 위에서 깊어지는 수밖에 없다
‘핵’ 깡패들 / 부안에 다녀와서 / 황사와 공약(公約) / 장마가 변했다 / 투발루의 비극 / 슬픈 우리 시대, ‘우리’는 누구인가 / 이제는 ‘생명평화’다 / 환경운동은 범죄자들과의 싸움이다 / 정말 시간이 없다 / 길 위에서 깊어지는 수밖에 없다 / 소각정책, 망국으로 가는 길
7장. 피 묻은 국익
신부님을 울리지 말라 / 피 묻은 국익 / 지금이 곧 철군할 때다 / 점령당한 자의 의무를 다하기를
추천의 말
이 산문집은 작가 최성각이 그의 본업인 소설을 쓰는 틈틈이, 한가로운 시간에 쓴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가 본업을 제쳐두고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쓴 글들이다. 지난 15년 넘게 ‘환경판’의 뛰어난 글쟁이로서 새로운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온 최성각에게 있어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형식이 아니라 이 책에 실린 자유로운 산문이야말로 작가로서의 그의 가장 중심적인 업적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이 사회에서 문학적 행위가 갖는 의미는 확실히 많이 달라졌다. 냉전체제의 해소가 사실상 야만적인 시장원리주의의 전세계적 지배를 의미한다는 것이 점차로 분명해져 가는 상황 속에서 문학 역시 일개 소비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대의 압력이 아무리 크고, 전통적인 의미의 문학과 인문정신이 쇠퇴일로에 있다고 하더라도, 살아있는 인간정신이 완전히 꺾일 수는 없는 법이다.
원래 최성각이 ‘환경운동’에 관계하게 된 것은 상계동 쓰레기 소각장 건설 저지운동에 가담하는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진정성은 이 사건을 단순히 한때의 고통스러웠던 개인적 경험으로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경험의 역사적·사회적·문명사적 의미를 치열하게 성찰했다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갈수록 어리석고 탐욕스러워지는 이 시대 주류문화의 ‘상식’에 용기 있게 맞서서 ‘생명’과 인간적인 가치를 옹호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환경’과 ‘생명’을 걱정하고, 인류문명의 장래를 염려하는 지식인, 작가는 어느 때보다도 많아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관심과 염려를 이 시대의 삶과 사상의 근본적인 방향전환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치열한 인식과 실천 위에 씌어진 최성각의 글들은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그러나 아직도 찾아보기 어려운, 진정한 문학적 발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본문 중에서
[머리말 중에서]
오랜만에 책을 묶습니다. 명색이 ‘작가’라는 사람이 소설집이 아니라 산문집을 펴냅니다. 이런 종류의 책이, 간디가 말했듯이 우리가 먹는 곡식보다 더 나은 결과물일지 제가 묶어놓고도 알 수 없어 겸연쩍은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다른 감회가 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저는 장르와 상관없이 한 작가로서 절박하다고 느낀 우리 현실에 대한 제 방식의 대응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제가 작가이기 때문에 환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문학이 찬탄의 대상이던 시절, 그런 시절의 문학이 제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떤 경우라도 작가는 당하는 자의 편에 서야 하고, 진실을 묵살하고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의 폭력에 저항하고 그들이 감추려는 진실을 드러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세계지배 속에서 또하나의 식민지 주민으로 전락한 민중도 여전히 사회적 약자이지만 오늘 말없이 능욕을 당하는 대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이고, 자연에 폭력을 일삼는 힘은 지금보다 더 풍요롭게 살아야 한다고 부추기는 주류상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해 그 자기파멸적인 상식에 편승해 탐욕을 채우는 정치 권력자들과 자본 권력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환경운동은 그런 거칠고 조악한 힘들에 의해 비천해지고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일과 다른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그나마 이 정도 사람으로 만들어준 문학에 진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개인적인 강박관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졸고를 묶으면서 위기에 대한 감수성과 다른 삶을 고민하고 모색하는 ‘녹색가치’를 외면하는 세상의 휘황찬란한 가치들의 허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문학이나 환경운동이 권력이라기보다 근원적으로 반(反)권력적 행위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두들 일상어처럼 지구온난화를 얘기하고 있지만, 어쩌면 재앙은 서서히 진행되는 게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급작스럽게 닥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을 떨치기 힘듭니다. 기후체계를 지탱하던 해류의 이동이 녹은 빙하에서 흘러내린 엄청난 담수(淡水)로 인해 이미 둔화되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인간의 힘으로는 그치게 하거나 지연시킬 재간이 없다는 사실 앞에 전율하게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엄혹한 현실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작은 책이 지금이라도 다시 냇물이 푸른 들판을 시원스레 달릴 수 있도록 우리가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애쓰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다짐과 소망을 담은 책으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2007년 8월
최성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