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전문가가 원자력을 반대하는 이유’라는 부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연구자로서의 불이익을 감수해가며 반핵(反核)운동의 최전선에 일생을 바쳐온 양심적인 과학자, 고이데 히로아키 선생의 육성을 통해 듣는 원자력발전의 실체.

목차

책머리에

  1. 피폭의 영향과 공포
  2. 핵의 본질은 환경파괴와 생명에 대한 위협
  3. 원자력과 플루토늄에 건 꿈
  4. 일본이 추진하는 핵개발
  5. 원자력발전 그 자체가 위험하다
  6. 원자력에 악용된 이산화탄소 지구온난화설
  7. 죽음의 재를 계속 만들어내는 원전
  8. 지구온난화와 이산화탄소의 인과관계
  9. 원자력을 그만두는 일은 어렵지 않다
  10. 핵을 둘러싼 불공정한 세계
  11. 재처리공장이 안고 있는 엄청난 위험
  12. 에너지와 불평등사회

후기
영문약어 일람
주석

추천의 말

흥미로운 것은 그가 반핵운동을 하는 첫 번째 이유가 안전 문제가 아니라 인간 차별 문제라는 점이다. 원자로라는 극도의 방사능 피폭 위험 환경에 놓여있는 최하층 노동자의 존재, 늘 가난한 변두리 지역이 핵발전소 부지로 선정되는 현실, 현세대의 이익 때문에 미래세대가 위험에 처하는 문제…. 이런 다중적 차별구조가 없다면 핵발전 시스템은 처음부터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이데 선생은 강조한다. 그러니까 고이데 선생에 의하면, 과학의 양심이란 기본적으로 타자에의 관심, 즉 근원적인 의미의 상상력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발행인)

저자 소개

고이데 히로아키(小出裕章)

1949년 도쿄 출생
현재 교토대학 원자로실험소 조교, 방사능 계측·원자력 안전 전공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꿈꾸며 1968년 도호쿠(東北)대학 공학부 원자핵공학과에 입학, 그러나 원자력에 대해 배우면서 그 위험성을 깨달아 아카타(伊方)원전재판, 닝교(人形)고개 우라늄 잔토 문제, JCO 임계사고 등에서 방사선 피해를 입은 주민 측에 서서 활동했다. 원자력 전문가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그 위험성을 호소하고 있다.
저서로 《原発のウソ》 등이 있다.

역자 소개

김원식(金源植, 1923-2013)

1923년 충북 괴산 출생. 1948년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제명. 1980년을 전후해서 환경문제, 핵문제를 공부하면서 사회에 진출. 1990년대 반핵운동에 참여. 다카기 진자부로 박사와 교류하며 한일 반핵운동 연대활동에 헌신. 아나키즘에 기반한 반전․평화운동 등 여러 활동에 참여.
2013년 1년여 위암 투병 후 영면.
역서로 《환경학과 평화학》, 《환경정의를 위하여》, 《위험한 이야기》, 《지구를 파괴하는 범죄자들》, 《암과 전자파》 등이 있다.

고노 다이스케(功能大輔)

1970년 도쿄 출생. 도호쿠(東北)대학 졸업, 경제학 전공.
역서로 《원자력의 거짓말》, 《후쿠시마 사고 Q&A》 등이 있다.

소개의 말

원자력은 어떤 의미에서도, 최악의 선택이다

원자력발전이란 우라늄을 태워서 그 에너지로 물을 끓여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라늄을 연소시키면 에너지뿐만 아니라 ‘핵분열생성물’, 즉 생물의 서식환경에서 완전히 격리시켜야 하는 ‘죽음의 재’가 반드시 발생한다. 지금까지 일본 원자력발전으로부터 불가피하게 생산된 죽음의 재의 총량은 얼마나 될까? 히로시마 핵폭탄으로 환산해서 약 120만개, 방사능의 감쇠를 고려해도 80만개에 이른다. 즉 히로시마를 궤멸시킨 양의 80만배나 되는 ‘죽음의 재’가 현재 일본 국토에 쌓여있는 것이다(2010년 10월 기준 일본 원자력발전소 54기 가동으로 매년 히로시마원폭 5만발분의 죽음의 재를 생산). 후쿠시마원전 사고로 방출된 것은 그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원자력발전 그 자체가 몹시 위험하여, 그 위험성은 어마어마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는 불필요한 언설일 것이다. 실감하기 위해 비교해보면, 1945년 히로시마 거리를 괴멸시키며 단기간에 약 14만명의 목숨을 빼앗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도 여생을 고통 속에 살게 한 히로시마 핵폭탄의 우라늄의 양은 800그램이다. 오늘날 표준인 100만킬로와트급 원자력발전소 하나가 해마다 약 100만그램, 히로시마 원자탄의 1,000배가 넘는 양의 우라늄을 연소시킨다. 그리고 당연히, 그만큼의 죽음의 재를 발생시킨다. 바로 이러한 방사성물질들이 사고 때와 시간적·양적 차이만 있을 뿐 사실상 원자력발전 과정에서 일상적(혹은 계획적)으로 환경으로 유출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원자력

‘핵무기’, ‘원자력발전’으로 표현을 달리하며 핵개발은 ‘평화적’이라고 원자력 추진론자들은 선전한다. 그러나 애초에 과학·기술에 군사용과 평화용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있다면 오직 전시의 이용과 평상시의 이용이라는 차이밖에 없을 것이다. 전세계 원자력개발을 위해 봉사하는 IAEA(국제원자력기구), 핵무기 보유국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NPT(핵확산금지조약)는 핵무기의 폐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핵의 폐기에 최대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진단은 양심적인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지역 핵무기금지 조약(토라테로르코조약 1968년), 남태평양 비핵지대 조약(라로통가조약 1986년), 동남아시아 비핵지대 조약(방콕조약 1987년) 등 스스로 핵을 포기함으로써 공존과 평화를 꾀하는 움직임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핵발전도 대량의 이산화탄소를 방출한다

이산화탄소 때문에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원자력만이 인류가 취할 길이라는 선전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그 가공할 위험성을 안고서라도 핵발전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원자력은 과연 실제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것일까?
2008년, 일본정부와 전력회사들의 원자력이 ‘깨끗하다’, ‘친환경적’이라는 선전에 위화감을 느낀 한 청년이 JARO(일본광고심사기구)에 이러한 광고의 타당성(부당성)에 대한 심사를 의뢰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꾸려져 검토한 결과는, 원자력발전 혹은 방사성강하물 등 지구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안전성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또한 오직 발전(ꠛ= ?할 때에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것만을 가지고 청정에너지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선 연료(우라늄)의 채굴 단계에서부터 핵발전은 화석연료를 사용하면서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만들어내며, 연료 운송, 원자로 건설, 사용후핵연료의 저장(보관)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로지 발전(ꠛ= ?, 즉 핵분열 반응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지 않을 뿐이다.

핵의 본질은 한마디로 생물·환경에 대한 위협

고이데 선생은 자신의 은사의 표현을 빌려 ‘원자력발전소는 바다 데우기 장치’일 뿐이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표준 원자력발전소의 발전량은 100만킬로와트인데 실은 원자로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는 300만킬로와트라고 한다. 생산 에너지의 2/3가 냉각수에 의해 바다로 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1초 동안 바닷물 70톤이 섭씨 7도 온도가 상승하여 버려진다(54기 일본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출되는 온배수의 총량은 연간 1,000억톤). 이러한 단적인 사실 한가지만으로도 원전이 생물환경에 미치는 어마어마한 파괴적 영향을 독자들은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인류에게 허락되는 ‘대안’은 우선 원자력발전을 멈추는 것 ― 단지 이것뿐이다. 반핵을 말하면 그럼 전기를 쓰지 마라, 대안 없이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침몰하고 있는 배에 타고서 대안 없이는 도망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전기’가, 풍요로운 생활이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말인가. 원자력발전은 전기가 부족하든 부족하지 않든 즉각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일본 전기의 약 30퍼센트가 원자력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령 화력발전소만 해도 현재 절반 이상을 가동중단하고 놀리고 있기 때문에 원자력을 멈추어도 전력량 공급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보여진다.)
“편리한 생활을 유지하고 싶다”는 안이한 생각에 사로잡혀 원자력발전이라는, 인간의 능력으로 처리할 수 없는 기술을 추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서운 짓인지를 후쿠시마 사고는 또한번 인류에게 똑똑하게 보여주었다. 전기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지구 한편의 사람들이나 먼 미래의 후손들에게, 또 다른 생물종, 지구에게 이른바 선진국들에 살고 있는 현세대가 부당하게 부과하고 있는 ‘부(ꠚ)의 유산’에 대해, 지금이 우리 하나하나가 책임을 질 마지막 기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