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명의 장구한 역사에 견주어서는 짧은 기간에 불과하지만, 지상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뿌리째 흔들어 놓고, 마침내 기후위기라는 실존적 위협을 현실로 가져온 ‘근대’라는 이상하고 해괴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지속가능성’이 최대의 화두가 된 오늘날, 인류가 천지자연 속에서 뭇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 우네 유타카는 ‘농본주의’를 그 답으로 제시하고 있다. 농사(農)를 사회의 중심적 가치로 삼는다는 것은 비단 경제의 중심에 농업이 배치된다는 차원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근대화(자본주의화) 이후 통용되어온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과 삶의 원리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농본주의는 농사를 ‘농업’이 아니라 ‘농사’로 보는 관점을 되찾는 것입니다. 분명히 농업은 농사라는 배의 일부인데, 그것을 농사의 전부로 만들려고 하는 근대화주의자들의 책략은 실패했습니다. 근대화란 ‘농사의 농업화(산업화)였구나’라는 것을 현대의 농민은 느끼고 있습니다. 농사의 ‘자본주의화’였다고 바꾸어 말하면 근대화의 본질이 더욱 확실해집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입니다. 아무리 농사를 돈으로 바꾸려 해도, 아무리 근대화하려 해도,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게 되지 않는 세계가 보이게 되니 말입니다. 농사에는 근대화할 수 없는, 즉 시장경제로 평가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아니 그런 세계야말로 농사의 본질이라는 깨달음은 결코 황당무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농사라는 배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산업으로서의 농업만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농본주의자는 이렇게 좁아진 우리의 시야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주장하는 것입니다.” (본문 249~251쪽)

 

‘중요한 것은 경제가 아니라 천지자연이다’(2021년 3-4월호(통권 177호))

목차

책머리에

서장

삶의 유린 ― 농민이 보는 현대사회의 이상함

  1. 농민이 백년 동안 느낀 위화감
  2. 농업과 농사의 다른 점
  3. 농사를 꼭 자본주의에 맞춰야 했는가
  4. 농사에 성장을 요구하지 말라

제1장

농본주의의 탄생과 재생 ―‘농사의 본질’을 찾는 모험

  1. 다치바나 고자부로가 생각한 것
  2. 곤도 세이쿄의 독자성
  3. 마츠다 기이치의 삶
  4. 농본주의의 이론화
  5. 농본주의의 3대 원칙
  6. 농본주의의 재생

제2장

자본주의의 한계 ― 반(反)경제의 사상

  1. 자본주의에 대한 위화감
  2. 왜 농사는 자본주의와 맞지 않는가
  3. 사람은 경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4. 자본주의가 끝나도 걱정할 것 없다

제3장

농촌에서 살아가다 ― 국가도 지방도 아닌 ‘마을’의 논리

  1. 마을과 국가
  2.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3. 인간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4.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삶의 방식
  5. 마을의 사상

제4장

농사의 정신성 ― 생명의 본질을 응시하다

  1.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농업관
  2. 생명체들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느끼는가
  3. 과학적·합리적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
  4. 농민의 미의식
  5. 농사가 종교에 미친 영향

제5장

농민이 그리는 미래상 ― 반(反)근대의 시점

  1. 미래를 구상하다
  2. 반근대의 사상적 근거
  3. 앞으로의 ‘풍요’와 ‘가난’에 대한 인식
  4. 농사의 본질을 계속 지켜나가다

종장

새로운 농본주의 ― 새로운 상식

  1. 새로운 ‘천지자연관’과 ‘농업관’
  2. 보잘것없는 인생이 사회적 가치를 갖는 이유
  3. 새로운 농본주의가 고요히 존재하다
  4. 농사는 천지에 떠 있는 커다란 배이다

마치며

추천의 말

농본이란 무엇인가

서장에서는 현대사회와 농사(철학) 사이의 괴리를 짚고 있다. ‘농본주의’의 본질은 쇼와 초기 일본의 농본주의자인 다치바나 고자부로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잘 포착하고 있다. “인간은 농사(農)를 기본으로 천지자연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으며, 미래에도 영구히 그럴 것이다.”(『농본건국론』, 1935) 그러나 이러한 감각은 지난 100여 년 동안 ‘농사’가 근대화(자본주의화)를 통해 ‘농업’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조차 상실하게 된 감수성이다.

저자는 ‘해충’, ‘풍경’, ‘분업’, ‘전문화’, ‘경영’, ‘성장’ 등을 키워드로 삼아 ‘농사’와 ‘농업’의 차이를 설명하고, “경제적 가치가 없어서 (오히려) 좋은” 천지자연의 은혜, “우리 인생을 조용하게 지탱해주고 있는” 농사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농본주의의 3대 원리

1장에서는 일본의 대표적인 농본주의자라 할 수 있는 다치바나 고자부로, 곤도 세이쿄, 마츠다 기이치의 사상과 활동을 소개하고, 이들이 공통적으로 발견한 농사의 본질(원리)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농사(와 인간의 삶)는 본질적으로 산업화, 자본주의화, 경제성장과 화합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 원리는 ‘지역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만한데, 시골(지방)이 중심이 된 자립·자치를 지향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농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답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효율과 생산성만이 요구되는 오늘날 거의 모든 현대인이 일상에서 겪고 있는 소외감에 대응하는, 농사일에서의 ‘망아의 경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몰입, 천지의 품에 안겨서” 살아가는 인생의 태도이다.

 

자본주의의 한계

농민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위화감을 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농사라는 것은, 경제적 가치로 잴 수 없는 것이 그 토대에 있다”는 것을 농민이라면 누구나 체감하기 때문이다. 값싸기만 하다면 좋은 것인지, 경쟁이 최고선인지, 편리를 가져다주었다는 산업화는 무조건 긍정해야 하는 것인지, 돈이 되지 않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인지, 세계화는 정말로 좋은 것인지, 또한 모든 논의와 결정이 경제성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지는 오늘날의 풍조가 올바른 것인지, 그리하여 끝없는 ‘성장’과 ‘효율’을 추구해온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가져온 결과가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있다.

 

인간중심주의의 극복

3장에서는 농촌생활의 토대가 되는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공동체란 ‘천지유정의 공동체’로서 농민이 천지 속에서 일하면서 온갖 ‘은혜’를 받아 살아가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천지유정의 공동체는 농작물 외에도 사람과 뭇 생명에게 온갖 것들을 ‘무상으로’ 공급해왔다. 천지자연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 순간 인간중심주의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근대라는 세계는 무엇에 관해서든 인간 중심의 관점을 권장”하고 “좋은 욕망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긍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끝없이 비대해지기만 하는 욕망이다. 편리함이나 물질적인 풍족함이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느끼고 있다. 저자는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욕망만을 부추기는 근대적 가치관에 우리가 대항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변함없이 이어지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의식하는 깨어 있는 삶, 천지유정의 공동체를 지켜나가는 삶이라고 말한다.

 

농본주의가 그리는 미래상

저자는 “2000년 이상 계속된 ‘농사’의 본질과 근대국가가 채용한 ‘근대화·자본주의화’는 서로 양립하지 않기 때문에” 농본주의는 언제나 ‘반체제 사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한 뒤에, 자기파멸의 길을 향해 폭주하는 자본주의가 마침내 종식된 이후의 세계를 대비하는 농본주의의 비전을 설명한다. 농본주의에 토대를 둔 미래 사회에서 우리는 삶에 효율을 요구하지 않고, 순간순간을 온전한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시간’을 되찾고), ‘일’을 되찾고, ‘먹을거리’를 되찾을 것이다. 그리하여 천지자연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면서 진정한 풍요로움과 자유를 누릴 것이다.

 

기심(機心)에 반대한다

미래의 사회에서 ‘새로운 상식’이 될 농본주의적 관점이란 어떤 것인가.

오늘날에 ‘농업가치의 대부분’으로 여겨지는 소득이란 농사를 평가하는 하나의 척도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갖고, ‘농업생산’은 유용성이라는 기준에서 본 천지의 은혜에 불과하다는 본래의 관점을 되찾고, 적게 들일수록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노동시간’이나 ‘생산비용’이라는 것도 천지자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는 감수성을 되찾고, ‘생산성’이나 ‘효율’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의 위험한 발상이라는 점을 깨닫고, ‘이윤’(잉여분)이 생긴다면 자기 소유로 취할 게 아니라 천지자연으로 되돌려 순환하도록 하고, ‘수확량’은 농업기술의 성과가 아니라 천지자연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양이라는 감각을 갖는 것이다.

 

“이 배(농사)에는 근대적인 엔진이라는 것이 장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싣고 있던 보트(농업)에 자본주의라는 엔진을 달아서, 농사라는 배의 앞에서 로프로 끌어당겨 속도(효율)를 올려 다른 산업들과 경쟁시키려고 한 것이 ‘근대화·산업화·자본주의화’였습니다. (중략) 짧은 순간이었지만 ‘근대’라고 하는 이상하고 해괴한 시대가 끝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략) 농본주의자란 ‘모두 농사라고 하는 이 배에 타고 있다’고 조용히 단언하는 사람입니다. 이 책을 읽는 분들이 ‘그렇구나, 이 배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농본주의자가 되는 것이구나’라고 깨닫게 된다면, 이 책은 역할을 다한 것일 터입니다.”(본문 250~251쪽)

저자 소개

우네 유타카(宇根豊)

1950년 나가사키현 출생. 농(農)사상가·저술가. 농학 박사. 현역 농부. 농림수산성생물다양성전략검토회 위원. 후쿠오카현경관심의회 위원. 농업보급학회 이사. 도쿄농업대학 객원교수.

1973년부터 후쿠오카현 농업개량보급원으로 근무하면서 농가에 농업기술을 지도하다가 1978년부터 ‘농약 사용 줄이기’ 운동을 전개하고, 1989년부터 직접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2000년 후쿠오카현 공직에서 퇴직한 뒤 2001년 NPO법인 ‘농사와 자연의 연구소’를 설립하여 대표이사를 지냈다(이 단체는 2010년 해산하여 현재는 임의단체로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저농약 벼 만들기》, 《농사일이 자연을 만든다》, 《천지유정의 농학》, 《농사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다》, 《농민학 선언》, 《논의 생물과 농업의 마음》, 《풍경의 사상》, 《일본인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역자 소개

김형수

1974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일본 도호쿠(東北)대학 국제문화연구과 대학원 박사과정(일본 근대 사상사) 수료.

역서로 《삶을 위한 학교》(공역), 《자급을 다시 생각한다》(공역)가 있다.

본문 중에서

책머리에

 

논에서 김을 매던 손을 멈추고 허리를 펴니 고추잠자리 무리가 저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농부가 되기를 잘했다고 느낍니다.

여기에서 농사의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만, 현대사회에서는 농사의 표면에만 주목합니다. 게다가 어떻게 하면 농사를 진보, 발전시킬 수 있을까에 관심이 집중되고, 농사의 경제적 가치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다른 산업 분야의 종사자와 비슷한 수준의 소득만 얻을 수 있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애당초 농사를 진보, 발전시킨다는 발상 자체가 틀렸습니다. 농사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 계속 의문을 가졌습니다. 규모를 확대하고, 생산 효율을 높이는 것이 농사를 위해서 정말로 좋은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농사의 근대화로 인해서 생명체들이 줄어들고, 농민 특유의 정애(情愛)가 옅어져 가는 것은 무언가 이상한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농사란 대체 무엇인가’, ‘농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생각하는 일도 없고, 또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농사에서 중요한 것’을 몸으로 체득한 것은 서른아홉 살에 농부가 되고 나서였습니다. 체득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농부는 가만히 품속에 안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것이 표현되지 않은 것도 그럴 만합니다. 게다가 이것은 외부로부터는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농학(農學)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다가 저는 문득 “농사란 사람이 천지와 일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농민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들은 ‘농사에서 중요한 것’을 “농사의 본질(원리)”이라고 부르면서 필사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었구나, 하고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농본주의자라고 불렸습니다. 쇼와 초기(1920년대 후반)의 일입니다. 특히 ‘농사(의 본질)은 자본주의와 맞지 않는다’라는 그들의 발견은, 지금 보아도 다시 놀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나 농본주의는 이미 농민들에게조차도 잊혀 있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나도 그들을 따라서 농사의 본질을, 농민 내부로부터의 관점으로 체득해서 언젠가 글로 써보자는 마음을 갖고 농사짓기를 계속했습니다. 이 책은 저의 농부로서의 체험과 젊은 시절의 농업개량보급원이라는 외부로부터의 관점, 그리고 농사를 지으며 열심히 해온 ‘농사와 자연의 연구소’의 활동 성과를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이나 표현은 틀림없이 지금까지의 농업론의 상식을 뿌리로부터 뒤흔들게 될 것입니다. 농사의 가치는 식량생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천지자연 아래에서, 농민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농민의 삶이 사회의 모체가 되는 것입니다. 표현을 바꾸자면 ‘농사란 천지에 떠 있는 커다란 배’인 것입니다. 이 배에는 농민도, 농민이 아닌 사람도, 생명체나 풍경, 농산물도, 축제나 국가 그리고 신(神)도 타고 있습니다.

 

‘농본주의’라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라든가 이슬람원리주의 등의 ‘주의’는 자주 듣습니다. 지금까지는 사상이나 주의라고 하면 외래의 것으로, 지식인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농본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농민이 스스로 발견한 농사의 본질(원리)을, 이것만은 버릴 수 없겠다 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과연 농민에게서 태어난 농본주의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줄 것인가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도 “농본주의는 의외로 재미있는 관점이네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단카이세대보다 위 세대의 사람들은 농본주의라고 들으면 파시스트, 초국가주의라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후(戰後)에 붙여진 딱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입견을 버리고, 농본주의자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들의 육체와 머리로 짜낸 표현의 매력을 직접 접해보기를 권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들 농본주의자들을 인용할 때, 저의 표현으로 바꾼 경우가 많습니다. 어디까지가 과거 농본주의자들의 생각이고 어디부터 저의 사상인지 경계를 알 수 없게 된 것은, 시공을 초월한 농본주의의 대변자가 되기 위한 장치입니다.

모내기를 하고 45일이 지나면 마을 전체가 엄청난 수의 고추잠자리로 뒤덮입니다. 논두렁에 앉아 담배 한 모금 피우며 매년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천지는 정말로 유정(생명)으로 가득하다고 느낍니다. 이런 한순간들을 저는 이어왔고, 앞으로도 이어가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심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농본주의의 세계로 이제부터 안내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