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재개 여부를 두고 행해진 ‘공론조사’ 결과가 마침내 발표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공사 재개 쪽으로 결론이 났고, 정부는 이 결론을 존중한다는 의사를 즉각 공표했다.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탈핵국가로 거듭나기를 염원하며 온갖 불리한 조건 속에서 고투해온 탈핵운동 단체와 활동가들, 그리고 그들을 음으로 양으로 지지해온 많은 시민들과 함께 《녹색평론》을 펴내는 우리도 지금 심한 좌절감을 떨쳐버리기가 힘들다.
좌절감이 이토록 큰 것은 무엇보다도 이번 결정이 종전과 같이 정부 당국과 몇몇 유관 기관, 소수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폐쇄적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또한 심히 불합리한 선거제도 때문에 정당한 대표성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따라서 민주적 정당성을 현저히 결여하고 있는―현재의 국회에서 내린 결정도 아닌,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평범한 동료 시민들에 의한 ‘숙의’의 결과라는 점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까지 ‘원전 마피아’들과 그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정부 당국자 그리고 언론들에 대항해서 싸우는 동안, 일반시민들은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받고, 평소보다 좀더 집중해서 관련 사항들을 들여다보기면 한다면 매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결론―기존 원전의 조기 폐쇄, 계획된 원전의 건설 중단 등등―에 당연히 이르게 될 것이라고 부지불식간에 생각해왔는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온 것은, 평생 원전 반대운동에 치열하게 헌신했던 세계적인 탈핵사상가 고(故)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郞) 선생이 간명하게 말했듯이, 원전이란 한마디로 ‘화장실 없는 맨션아파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다른 문제는 접어두고 ‘핵폐기물’을 처리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원전은 만물의 지속적 생존의 토대인 생태계 내에서는 절대로 용납돼서는 안되는 ‘괴물’이라는 것을, 사심 없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수긍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왔다.
그럼에도, 어떤 정보, 어떤 설명을 듣고, 어떻게 토의·숙고했는지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공론조사에 참여한 우리의 동료 시민들 다수는 3개월 동안 중단되었던 신규 원전 2기의 공사를 재개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에 대해 이런저런 사족을 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 공론조사의 결과에 대해 아쉽다는 말을 하고 지나가려니 너무도 마음이 쓰린 것이 사실이다. 1970년대 말, 오일쇼크 직후 각국이 원전의 확대를 심각히 고려하고 있던 때였음에도, 오스트리아 국민은 100% 완공된 원전마저 국민투표로 폐쇄하기로 결정(나중에 박물관으로 개조)하였고, 대만에서는 극히 최근에 완공 직전의 원전을 중단한다는 대담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낸 바 있다. 그런데 한국인들에게는 지금 그러한 합의에 이르는 것이 왜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한 합의를 가로막는 장벽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가 이번의 공론조사 결론을 보면서 던져야 할 가장 무거운 질문일지도 모른다.
성급한 판단일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장벽은 역시 오랫동안 이 사회를 지배해온 경제성장 이데올로기 혹은 경제중심주의적 사고의 끈질긴 영향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탈원전을 원하면서도, 당면 현안인 2기의 원전 건설의 중단은 원치 않는다는, 공론조사의 일견 모순적인 결론 때문이다. 공론조사에 참여한 시민들 중 일부의 사후 소감을 들어보면,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역시 최종적인 판단기준은 경제논리였던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이 경제논리의 안쪽에 있는 심리, 즉 원전을 포기하면 현재의 ‘안락한’ 생활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암암리에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은 경제논리와 안전논리의 경쟁에서 경제논리가 승리했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다수 시민참여단에게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참사를 보고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게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하기는 절대다수의 시민이 일방적인 선전과 프로파간다에 오랫동안 노출돼온 사회에서 핵에 대한 시민적 상식이 선진적 탈핵국가들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다. 더욱이 척박한 여건에서 자기희생적으로 활동해온 소수의 탈핵운동가들의 노력만으로 사회 전체의 해묵은 사고습관을 깨트리는 것은 애당초 그 한계가 명백했다. 또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사회의 핵에 관한 상식이 아직도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왜곡된 교육과 사이비 언론 때문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끊임없이 인간의 이기심과 물질적 욕망을 자극하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압력 밑에서 우리 자신이 보다 지혜로운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박탈당해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결론과는 상관없이,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숙의과정’을 거쳐 국가의 중요한 이슈에 대한 결정을 내린, 이번의 공론조사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큰 획을 긋는 사건임이 틀림없다. 그동안 《녹색평론》은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강하여 보다 질 높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으로 ‘숙의민주주의’의 필요성을 되풀이해서 말해왔다. 따라서 우리는, 무작위로 뽑힌 평범한 시민대표단이 숙의를 통해 내린 결정은 마땅히 존중돼야 한다는 의견은 옳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원전문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고 민주주의를 시급히 강화하지 않으면 안될 때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 틀로는 오늘날 나라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대미문의 온갖 위기적 상황에 대처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숙의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틀은 어쩌면 오늘의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숙의민주주의의 정신으로 지금 북핵 문제로 촉발된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북핵 문제의 위기는 기본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북한은 물론, 미국도 일본도 더이상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라는 데서 오늘의 위기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처럼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는 시기에, 상대적이긴 하나 그래도 민주주의국가를 꼽는다면, 이제 한국이 제외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실제로 새로운 차원의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데까지 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물론, 이 모든 것은 ‘촛불혁명’ 덕분이다. 따라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현 정부는 쓸데없이 눈치를 보며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중대사를 평범한 시민들의 결정에 맡기는 그 지혜와 용기는 결국 촛불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힘으로 정부는 사회 곳곳에 서려 있는 사악하고 부패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한 행동에 과감히 나설 뿐만 아니라, 나아가 북핵 문제도 그 힘에서 해법을 구해야 할 게 아닌가? 그리하여 미국, 북한, 일본, 혹은 그 누구를 향해서든 민주주의의 가치를 역설하며, 당당하게 설득하고, 열린 자세로 접근한다면, 무기장사꾼들의 노리개가 된 한반도의 운명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출구가 열리지 않을까? 물론 쉽지 않을 테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그런 자신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우리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