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4일, 이날 새벽 전국 농촌에서 버스를 타고 상경한 3만 5,000명은 가톨릭농민회,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등 주요 4개 농민단체가 연대한 ‘농민의 길’ 소속 농민들입니다. 고된 농사일로 손과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농민들은 한여름 가뭄과 늦가을 장마로 여느 때보다 힘겨운 농사를 마치고 고단한 노구를 이끌고 남대문에 모여 한목소리로 ‘4대 목표와 10대 요구안’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밥쌀 수입 중단, 쌀값 공약 21만원 이행’입니다. 농민·농업·농촌이 이미 벼랑 끝에 있는 상황에서 쌀농사마저 무너지면 농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민중과 시민들이 모두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낯선 도시의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구호를 외친 겁니다.
채소도 기르고, 과일도 기르고, 소도, 닭도 키우는 농민들이 왜 한목소리로 쌀문제를 첫 번째로 외쳤던 것일까요?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과 WTO(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 지난 20년 동안 해마다 늘어나는 의무 수입쌀로 인해 쌀값은 꾸준히 떨어졌습니다. 논에 돈이 된다는 사과, 복숭아, 블루베리, 아로니아 과수원이 들어섰고, 딸기 하우스, 쌈채소 비닐하우스가 들어섰습니다. 쌀농사를 포기하고 인삼업자에게 논을 빌려주었습니다. 갖가지 개발사업으로 공장과 도로용으로 농지가 수용되었습니다.
쌀 재배 면적과 농가 수가 급격히 줄긴 했지만 여전히 쌀농사는 우리 농사의 기둥입니다. 자급률이 80%대로 떨어졌어도 쌀은 우리의 주식입니다. 논은 전체 경지면적의 60%, 쌀 재배 농가는 전체 농가의 75%에 이릅니다. 김영삼 정권이 1995년 외국에 문을 연 쌀시장은 20년 만인 2014년 9월 30일 박근혜 정권이 쌀 관세화를 선언하며 전면 개방되었습니다. 예상대로 2015년 쌀값은 폭락했습니다. 산지 가격이 가마당 13만원대로 추락하며 우리 농업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5만 평 쌀농사를 지어도 손에 쥐는 건 1,600만원이 고작입니다(앞으로는 그마저도 없다). 쌀 한 가마(80kg)당 13만원은 밥 한 그릇 쌀값이 300원이라는 뜻입니다. 쌀농사 그만 지으라는 이야기지요. 쌀농사를 포기하고 다른 작물을 심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로또복권처럼 변해버린 투기성 농사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고, 우리 농민들은 공멸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3만 5,000명 농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남대문에서 농민대회를 마치고 농업·농촌·농민의 죽음을 상징하는 상여를 메고 행진했습니다. 이날은 농민뿐만 아니라 노동자, 교사, 학생, 대학생, 청년, 빈민, 장애우, 세월호 가족 등 ‘이명박근혜’ 정권의 8년 폭정을 견디다 못한 모든 민중과 시민이 함께하는 날이었습니다. 경찰은 물대포를 쏘아 상여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그리고 광화문으로 통하는 모든 대로를 ‘차벽’으로 둘러친 후 차벽에 다가가는 사람들에게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쏘아댔습니다. 농민과 노동자, 시민들은 광화문 진입을 가로막는 차벽에 밧줄을 걸어 당겼습니다. 경찰은 밧줄을 당기는 사람들에게 고압물대포를 끊임없이 쏘았습니다. 건장한 청년도 맞았다가는 고꾸라지거나 나가떨어질 정도의 강력한 물살이었습니다.
저녁 일곱 시 어둠이 내리던 시각, 백남기 선생은 일행과 떨어져 종로구청 입구 사거리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는 차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민 수십 명이 매달려 줄다리기를 하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뚜벅뚜벅 나섰습니다. 맨 앞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차벽에 연결된 밧줄을 당겼습니다. 그때 저 높이 솟아 있던 물대포 세 대 중 충남 홍성 경찰이 조종하는 물대포 한 대가 하늘색 조끼를 입은 백남기 농민을 향했습니다. 고압직사물대포의 세찬 물줄기가 머리에 떨어졌습니다. 선생은 즉각 주저앉으며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칠순을 바라보는 늙은 농민의 몸 위로 물대포는 20초 이상 쉼 없이 쏘아졌습니다. 그를 구하려고 다가오는 시민들에게도 물대포는 계속 분사되었습니다.
아, 저는 스마트폰으로 이 장면을 보고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생각도 멎고, 말도 잃어버렸습니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연배의 농민이 나섰는데 젊은 농민인 내가 저 자리에 있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정부와 새누리당 인사들은 인간이라면 입에 담을 수 없는 망발을 쏟아냈습니다. 구은수 서울경찰청장은 “사용수칙을 어긴 것이 없으며, 살수차 운용에 전반적으로 문제가 없었다”고 했고, 김현웅 법무부장관은 “국격 훼손, 불법 필벌”을 외치며 핏대를 올렸고, 새누리당 원내대변인 김용남 의원은 “백남기 씨의 경우에는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이 확인됐다”고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완영 의원은 “(선진국에선) 폴리스라인을 넘으면 경찰이 그냥 패버린다. 최근에 미국 경찰들이 총을 쏴서 시민들이 죽는데 10건 중 80~90%는 정당하다고 한다”며 경찰의 시위진압이 오히려 약했다고 성토했습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공권력이 이런 불법 무도한 세력들에게 유린되는 나약한 모습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시위대를 ‘전문시위꾼’으로 매도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시위 참가자들을 IS(이슬람국가) 테러범에 비유했습니다.
지상파방송, 조·중·동 수구 언론, 종합편성채널은 농민들과 민중총궐기대회에 나섰던 노동자, 교사, 학생, 시민, 청년, 빈민, 세월호 가족을 싸잡아 폭도로, 테러범으로 낙인찍었습니다. 정작 민주주의국가에서 보장된 집회와 시위의 권리 행사를 방해하고, 불법 차벽과 불법 ‘살인물대포’와 캡사이신으로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폭도는 경찰인데 말입니다. 학생운동·민주화운동·농민운동 이력이 알려지면서 불법 차벽에 맞서 밧줄 두 번 당긴 백남기 농민이 ‘폭도’, ‘전문시위꾼’으로 매도되었습니다(마이나 키아이 유엔 ‘평화적 집회 및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은 1월 29일, 방한 결과 보고서를 통해 평화로운 집회와 시위를 차벽으로 막는 건 국제법이 인정하는 ‘기본적인 인권’ 침해라고 했다. 또 시위대를 물대포로 공격하는 것은 ‘공격이 공격을 부르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이번 사태에 대해 정부와 경찰의 책임을 물었다).
농민 백남기의 삶
집을 떠나 있었던 저는 며칠 뒤 집으로 황망히 돌아와서 쌀, 마늘, 고춧가루, 참깨, 들깨 등으로 한 해 농사지어 마련한 100만원을 봉투에 담아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우선은 서울대병원에 차려진 농성장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저는 불의가 저질러지는 현장을 보면 고작해야 후원금 보내고 격려 방문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서명하고, 후원금 내고, 미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이 정도로 자위했습니다. “그래도 난 실천하는 민주시민이야.” 그러나 2005년 전국농민대회에서 ‘살인방패’를 사용한 경찰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으로 전용철, 홍덕표 등 젊은 농민 두 명이 목숨을 잃고, 꼭 10년 만에 백남기 농민이 ‘살인물대포’를 맞고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화학농약과 화학비료 쓰지 않고, 하우스농사 대신 계절에 맞는 순환의 유기농사를 지으며 지난 9년을 보낸 농사꾼의 입장에서,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사건은 전혀 다르게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더구나 백남기 선생이 살아온 삶을 알게 되면서 더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지난 수십 년 농업이 타살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모든 농민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선생의 삶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숙연함과 함께 감동과 존경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났습니다. 백남기 선생은 어느 신부께서 말씀하셨듯이 ‘수도사 농부’, ‘성자 농부’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그는 (당시까지) 보성군 웅치면이 배출한 유일한 대학생으로서 가족과 마을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서울로 유학을 왔으나, 학생운동에 참여해 제적을 반복했고, 수도원 도피생활, 광주민주화운동에 연루된 감옥살이로 15년을 보내고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세 아이 이름을 ‘도라지’, ‘두산이’, ‘민주화’라고 지었습니다. 민주화 세상이 되면 백두산에 올라 〈도라지타령〉을 부르겠다는 뜻으로 민주화운동·통일운동·농민운동의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선생은 1986년 보성군 가톨릭농민회(가농) 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 보성·고흥군 가톨릭농민회 회장을 맡으며 농민운동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이후 농민운동, 우리밀살리기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다 1994년 우리밀살리기 광주전남운동본부 의장을 마지막으로 홀연 모든 직책을 내려놓았습니다. 살아남은 자가 무슨 면목이 있냐며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선정도, 도지사·국회의원 출마 권유도 거절하고 20여 년을 변함없이 흙을 지키며 농사꾼으로 살았습니다. 농사짓고, 막걸리 마시고, 노래 부르며 이웃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농민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끊임없이 교류하고 대안을 찾았습니다.
저는 후원금을 전달하고 돌아가서 제가 소속된 단양친환경농업인연합회 도연합회에 농성 참여 계획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계획이 없다는 실망스러운 답변을 받고 개인 자격으로 농성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11월 21일 농성장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면서 지리산 농사꾼 K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이는 저보다 나이가 열 살 많고 함평이 고향입니다.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고, 고등학생 때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었습니다. 당시 대학에 진학한 전라도 출신 청년들이 대개 그렇듯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갖고 학생운동에 투신한 전형적인 386세대입니다. K형은 대학 졸업 후 잡지사 기자생활과 자영업을 거쳐 17년 전 농사꾼이 되었습니다. 가농 회원이며 백남기 농민과는 형 아우 하는 사이입니다. 밤늦도록 K형과 백남기 농민의 살아온 내력,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역사, 생명평화운동의 역사, 가농과 전농 및 전여농의 역사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K형이 386세대의 전형이라면 저는 X세대로 지칭되던 한 세대의 전형입니다. 백남기 선생의 특집 기사가 실린 《나누는사람들》(2016년 1―2월호)에 X세대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강한 개인성과 문화감성을 뭐라 규정할 수 없어 붙여진 이름 ‘X세대’. … 이들은 내 집 마련에 집착하지 않고, 좌우 이념보다 합리와 상식을 우선하는 세대, 결혼과 출산을 ‘선택의 문제’로 생각하며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 첫 세대이자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동시에 경험함 마지막 세대, 그리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소비하는 ‘역사상 가장 젊은 40대’입니다. … 세계여행과 인터넷을 통해 디지털과 글로벌, 소비문화를 열어낸 한편, IMF 경제위기와 함께 사회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거리를 뒤덮은 최루탄을 맞으며 사회운동을 경험했던 마지막 세대이기에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해 민감해, 2008년 촛불·SNS운동 등 새로운 정치문화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념으로 경직된 이전 세대와 개인으로 고립된 이후 세대를 잇는 다리가 되고 있는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창출할 주역이 될 수 있을지 주목해봅니다.
저는 1992년에 대학에 입학한 후 WTO 조문을 달달 외고 농업개방 반대 시위도 했지만 유럽 배낭여행도 다니며 발랄한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IMF 외환위기의 후폭풍이 거세던 1999년에 졸업, 사무직 회사원으로 취직하여 5년간 수출 역군이라 자부하며 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회사생활을 그만두고는 여행과 독서로 4년을 보냈습니다. 농사를 평생의 일로 정하고 8년이 지나, 20대 청춘을 보냈던 혜화동으로 다시 돌아와 있습니다.
386세대와 X세대는 하루 만에 오랜 지기처럼 의기투합을 했습니다. 백남기 선생이 평생 지향했던 삶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젊은 농민(농촌에서는 40~50대는 청년으로 분류된다)인 우리가 농성장을 지키자고 다짐했습니다. 또한 저는 K형의 권유를 받아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고, K형은 저의 권유를 받아들여 녹색당에 가입했습니다. 가톨릭농민회원으로서, 녹색당 농민당원으로서 올겨울 ‘아스팔트 농사’ 한번 후회 없이 지어보자고 결의했습니다.
나는 왜 녹색당에 가입했는가
농성장의 하루 일과는 바쁜 듯하면서 한가하고 같은 듯하면서 다릅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흘러갑니다. 아침에 일어나 손님맞이를 위해 청소를 하고, 종이학 상자와 서명부, 모금함을 거리에 내어놓습니다. 즉석라면과 김밥 또는 시민들이 건네준 음식으로 아침식사를 합니다. 가톨릭 수도사나 스님들이 탁발할 때처럼 주는 대로, 있는 대로 먹습니다. 오늘은 어떤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올까 하며 기다립니다. 그동안 수많은 농민들, 농민운동·시민사회운동 지도자들이 다녀갔습니다. 수녀, 가톨릭 신자, 스님, 목사, 대학교수, 교사,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빈민, 노점상, 국회의원들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농성에 참여한 지 두 달 넘어 석 달이 되어갑니다. 저희 두 사람은 처음 다짐대로 흔들림 없이 농성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K형은 가톨릭농민회 농성장의 전체적 운영을 맡고, 저는 농성장 활동을 외부에 알리는 일을 합니다. K형은 농성장에서 시민들과 소통하는 ‘백남기 종이학’ 접기를 맡고 있습니다. K형은 종이학을 접으면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백남기 농민의 삶, 우리밀 이야기, 생명평화농사 이야기를 농성장을 방문한 사람들이 지루할 사이 없이 풀어 놓습니다. 시민들은 책이나 신문·방송에서 접할 수 없는 생생히 살아 있는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됩니다. K형은 가농의 든든한 허리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백남기 선생을 사표(師表)로 삼아 직책을 내려놓고 평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농성장에서는 가농 회원들과 사제와 수녀들, 우리농촌살리기 실무자들, 한살림을 비롯한 생협 실무자와 회원들이 방문하면 맞이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미사를 챙깁니다. 청소부터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합니다.
저는 ‘유기농민’이라는 필명으로 페이스북을 통해 농성장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합니다. 각종 언론의 백남기 농민 관련 기사에 논평을 답니다. 수구 언론의 왜곡 보도와 싸우고, 진보 매체의 무관심을 일깨우고, 오보에 반박합니다. 제가 속해 있는 녹색당 당원들에게 농성장 상황을 알리고 참여를 독려합니다. 또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대학생들, 기아자동차 농성장, 세월호 농성장, 설악산 케이블카 농성장 상황을 페이스북을 통해 공유하고 알립니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보자는 의지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기사를 송고합니다. 낫과 호미를 쥐고 있어야 할 농사꾼의 두 손에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 말한 것처럼 ‘녹색 SNS 전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조용히 농사짓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 올라가서 농성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동창이 이런 말을 합니다. “너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 정치하려고 그러냐?” 그저 불의를 묵과할 수 없어 행동하는 사람을, 운동 경력을 훈장 삼아 시의원, 군의원, 시장, 군수, 국회의원을 하려는 것으로 보는 인식은, 그동안 우리 정치의 실패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지난 11월 30일,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한미FTA보다 국내 농업의 피해 규모가 두 배도 넘으리라 예측되는 한중FTA를 양당 합의로 비준했습니다. 정현찬 가톨릭농민회 회장과 김영호 전농 의장, 강다복 전여농 의장이 국회 마당에서 비준 반대를 외치고, 국회 안에서는 더민주당 신정훈 의원(전남 나주, 농업위원장)이 백남기 국가폭력사건 해결과 한중FTA 비준 반대를 소리 높여 외쳤지만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습니다.
백남기 선생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한중FTA를 비준하는 거대 양당의 후안무치한 횡포 앞에서, 저는 대안 정당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농민의 문제는 ‘정치’로 해결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녹색당에 가입하고, 농업위원회 위원을 맡았습니다.
그동안 농민단체들 사이에서는 정치적 결사체로서 ‘농민당’ 창당이라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어왔습니다.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은 〈한겨레〉 지면(2016년 2월 11일자)에서 스웨덴과 대만의 사례를 들며 농민당 창당의 현실적 타당성을 주장했습니다. 각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들에 의한 정당정치라는 틀에서는 타당한 논리입니다. 하지만 계급적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농업문제의 다양한 결을 살펴야 합니다. ‘농민의 이익’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어떤 농업을 지향하는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화학농약, 화학비료와 석유로 움직이는 대형 농기계에 의지한 농업으로는 안됩니다. 소농 중심의 자급농업, 순환농업에 기반한 생명평화의 농업으로 전환하지 않고서는 다가오는 석유시대의 종말을 대비할 수 없습니다. 겨울에 딸기를 먹고 쌈채소를 먹으려는 욕망을 채우는 비닐하우스 농사를 버려야 합니다. 동물을 돈벌이를 위한 ‘물건’으로 여기는 공장식 축산도 거부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의 삶터인 지구를 근본부터 파괴하는 산업문명과 그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합니다. 핵발전과 핵무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국가 사이에 경쟁이 아닌 연대를 해야 합니다. 이런 다양한 결을 포괄하는 정당은 제가 아는 한 녹색당뿐입니다. K형은 녹색당에 가입하며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두려움·무지·무관심을 떨치고 실천의 자리로
백남기 선생의 가족과 대책위의 요구는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사과, 강신명 경찰청장 파면 및 책임자 처벌, 국가폭력 재발 방지 대책 등 딱 세 가지입니다. 사건 발생 90일째, 이 사태의 올바른 해결을 염원·촉구하는 도보순례를 시작하며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요구가 하나 늘었습니다. 대통령이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를 모르쇠 하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백남기 농민 사건과 관련하여 사과는커녕 경찰 책임자들을 대거 승진시켰습니다. 한편 1,500명이 넘는 시민, 농민, 노동자 들을 수사, 소환, 구속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현장에 없었던 사람들에게까지 소환장을 발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11일, 저는 ‘민중총궐기 국가폭력조사단’의 요청으로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피해자 증언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저 자신은 1차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여하지 못했는데도, 경찰들이 찾아와 채증 사진이 있다며 집회 참여를 추궁하고, 뒤를 캐고 다닌 사실을 기자들 앞에서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직접피해자 증언자는 저 하나였습니다. 사경을 헤매는 백남기 농민이나 다른 많은 구속자들에 비해 저의 물리적 피해는 미미하지만 그럼에도 나선 이유는, 수사를 받고 있는 1,500여 명에 이르는 피해자 중 아무도 공개적으로 증언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인 피해자는 두려움에 골방으로 숨고, 절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과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면 그 결과는 어찌 될까요? 이대로 이 나라는 세월호처럼 침몰하고 마는 건 아닐까요? 두려움, 무지, 무관심의 올가미에 갇힌 사람들이 다가오는 총선에서 박근혜 정권의 브레이크 없는 폭정의 질주를 심판할 수 있을까요?
농성장에서는 날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시소 타기를 합니다.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 폭언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 꽁꽁 얼어가며 밤을 맞이할 때, 아침에 일어나 텅 빈 농성장을 사람들이 채워줄까 의문이 들 때면 절망으로 가라앉습니다. 시민들이 찾아와서 종이학을 접고, 쾌유 기원문을 남겨줄 때, 페이스북에 응원의 메시지가 올라올 때면 희망이 솟습니다. 세월호 참사 가족들처럼,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콜트콜텍 노동자들처럼, 기아차 노동자들처럼,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 비박 농성장처럼, 백남기 농성장 농민들도 이 싸움이 오래 지속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사건 발생 90일째인 2월 11일, 백남기 농민의 보성 자택에서부터 17일에 걸쳐 도보순례가 시작되었습니다. 도보순례가 끝나는 2월 27일에는 서울에서 민중과 시민이 다시 모여 제4차 민중총궐기대회를 엽니다. 대회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K형은 한 해 농사를 시작하기 위해 2월 말이면 농장으로 되돌아가지만 저는 농성장에 남으려고 합니다. 4월 총선 결과를 농성장에서 보고 싶습니다. 이번 총선이 우리사회에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은 건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 이 절박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아야 하고, 저는 그 실천의 자리로 이 농성장을 선택했습니다.
설날 백남기 선생의 부인 박경숙 여사께서 떡국을 같이 먹자며 농성장에 오셨습니다. “저이가 무슨 기도를 저리도 오래 하고 있을까요? 지켜보고 있기 너무 괴로워요. 이 정권은 어떻게,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코빼기도 비치지 않으니 어째야 좋으요?”
우리, 어째야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