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1월, 《녹색평론》이 탄생했다. 지금 돌아볼 때 그것은 분명 하나의 사건이었지만, 당시 이 잡지를 주목한 언론매체는 많지 않았다. 중앙의 일간지로는 〈동아일보〉(12월 9일자)와 〈경향신문〉(12월 10일)만이 창간 소식을 전했는데, 한 달여가 지난 뒤였으며, 그조차 모두 단신으로 처리했다. 〈동아일보〉는 《녹색평론》을 격월간 환경잡지라고 전한 반면, 〈경향신문〉은 환경문제를 다룬 생태주의 잡지라고 한 문장으로 소개했다.
그 뒤 1년이 다 되도록 《녹색평론》이라는 잡지의 성격, 지향을 본격적으로 알린 매체는 거의 없었다. 어쩌다 보도를 하는 매체도 ‘지방(대구)에서 펴낸 환경잡지’,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에 충격받아 나온 잡지’, ‘문학평론을 하는 대학교수가 창간한 1인 잡지’ 등으로 소개했을 뿐이다.
《녹색평론》 창간이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지방에서 발간된 데다 재정 상태가 열악해 판매, 홍보 등에 여력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시대적 상황도 무시할 수 없다. 《녹색평론》이 선보인 1990년대 초반에는 6월항쟁 이후의 민주화 바람을 타고 신문과 잡지의 창간이 잇따랐다. 한국잡지협회에 따르면 1987년에서 1993년 사이 국내 일간지는 30종에서 112종으로 4배, 주간지는 226종에서 2,236종으로 10배, 월간지는 1,298종에서 3,146종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잡지의 홍수 속에서 독자들이 《녹색평론》을 눈여겨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녹색’ 가치에 대한 이해부족을 꼽아야 할 듯하다. 당시 독자들은 성장과 개발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기세를 떨치는 속에서 《녹색평론》의 생태주의와 탈성장 주장을 생경하게 받아들였다. 《녹색평론》은 환경문제를 뛰어넘어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잡지였다. 이에 대해 김종철 발행인은 “환경문제에 대한 또다른 형태의 인문적인 노력”이라고 말했는데, 그 인문적인 노력에는 환경뿐 아니라 교육, 언론, 과학기술, 금융체계, 대의민주주의 등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삶의 전환 모색이라는 근본주의적인 태도가 들어 있었다.
자본에 맞서 생태문명을 상상하다
《녹색평론》의 성격, 지향과 관련해 자주 거론되는 게 1991년 11―12월호에 실린 창간사이다. 에콜로지에 대해 쉽게 풀어쓴 이 글은 서울대 신입생을 위한 교양국어에 전문이 실릴 정도로 독자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한 독자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글이 어찌 그렇게 아름답고 견고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창간사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만이 아니었다. 창간사를 읽은 누구는 《녹색평론》의 정기구독자가 됐으며, 누구는 도시의 삶을 접고 귀농을 결심하기도 했다.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창간사는 “파국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산업문명”에 대한 묵시록적 경고를 담아내면서 “자연과 생명의 질서에 순응하는 새로운 삶”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녹색평론》이 창간사를 통해 맑스주의를 비판한 사실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맑스주의가 지나치게 인간 중심으로 흘러 자연와의 공생 노력이 크게 미흡하다는 점을 비판한 것인데, 당시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보담론으로 중시되던 맑스주의를 대놓고 비판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처럼 《녹색평론》은 다른 지식인 잡지들과도 분명한 차별점을 갖고 있었다.
잡지 발간 초기 《녹색평론》은 외국의 ‘녹색사상’을 전파하는 데 주력하였다. 생태주의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던 당시 사회풍토에서 외국의 대안적인 삶과 사유를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에 대한 전망을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탈학교 사회》의 저자 이반 일리치, 진보적 미술평론가로 말년에 알프스에서 농사와 글쓰기를 병행한 존 버거, 체코의 시인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 문명비평가이자 시인인 웬델 베리, 인류학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경제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제러미 리프킨, 기계문명 비평가 루이스 멈퍼드, 공생공빈의 삶을 주창한 쓰치다 다카시() 등의 글을 번역, 소개했다. 이들 생태주의 작가들은 《녹색평론》이 처음 발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뒷날 국내 출판사들에서 이들의 저서를 소개하면서 꽤 알려지게 됐다. 특히 녹색평론사가 펴낸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는 근대문명 이후의 대안적 삶의 한 사례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녹색평론》은 또 기존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국내 작가나 학자들의 글을 소개하며 독자들과의 접점을 넓혀갔다. 초기의 주요 필자로는 권정생, 장일순, 전우익, 천규석, 이현주, 박경리, 박완서, 윤정모, 김성동, 장회익, 김우창 등을 꼽을 수 있다. 다른 매체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이들이 나지막이 들려주던 생명의 소리는 무한경쟁, 무한소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흔들어 깨웠다. 이들은 《녹색평론》의 단골 필자이면서 잡지를 대중에게 널리 확산시킨 ‘홍보대사’들이었다.
녹색 민주주의의 밑그림을 그리다
《녹색평론》의 시작은 미미했다. 재정이 빈약한 ‘1인 미디어’로 출발한 데다 상업광고조차 싣지 않아 운영에 어려움이 컸다. 창간호의 경우 3,000부를 발행했고, 제작비는 90만 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눈 밝은 독자들이 하나둘 잡지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구독자가 빠르게 증가했다. 다른 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생태주의에 대한 흥미 있는 글들, 현대문명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판 등이 독자를 사로잡았다. 창간 1주년이 됐을 때 《녹색평론》의 발행부수는 5,000부에 달했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통권 100호(2008년 5―6월호) 때에는 1만여 부를 발행했다.
독자가 늘고 잡지가 안정 궤도에 접어들자 《녹색평론》은 한국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수돗물불소화사업 반대와 한미FTA 반대투쟁이었다. 1990년대 불소화사업은 정부, 지자체는 물론 일부 환경단체까지 지지를 표시하며 날로 확산되고 있었다. 이른바 ‘보건 공공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 《녹색평론》이 전면 반기를 들었다. 불소화사업이 구강 건강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인체에 유해할 수 있으며, 수돗물 이용자 모두에게 불소를 강제로 주입시키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근본주의적인 문제제기였다. 형세로만 본다면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의 몸부림이었지만, 《녹색평론》은 불소의 유해성을 알리고 유럽 국가들의 불소화 중단 사례 등을 소개하며 10년 넘게 반대운동을 이어갔다. 결과는 《녹색평론》의 승리였다. 한때 들불처럼 번져가던 불소화사업은 2018년에 이르러 완전 중단되었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한미FTA에 적극 개입한 것도 주목할 일이다. 《녹색평론》은 한미 간 FTA 협상이 본격화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거의 매호 FTA 특집기사를 싣고, 전국의 독자모임을 개최하며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FTA 협정이 사회를 양극화시키고 농촌공동체를 해체시키며, 한국사회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긴급 발언이었다. 비록 FTA 타결을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농촌과 농업이 인간과 환경을 함께 지키는 ‘오래된 미래’라는 점을 일깨웠다. 이명박 정부 시절 추진됐던 4대강사업, 경주 방폐장 및 밀양 송전탑 건설 등 대규모 토건사업에 대한 비판도 빠뜨릴 수 없다. 미디어의 측면에서 본다면 《녹색평론》은 환경저널리즘을 실천하는 진정한 언론이었다.
2008년은 《녹색평론》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해이다. 그해 《녹색평론》은 통권 100호를 발간했다. 또 대구의 사무실을 서울로 옮기며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국내적으로는 한미 간 FTA 협상 속에서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가 절정에 달했으며 세계적으로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지구촌을 덮친 때이기도 했다. 그즈음 《녹색평론》의 관심은 환경생태주의에서 정치민주주의로 향했다. 계속된 발언과 투쟁 속에서 생태·환경 등 모든 문제의 해결 방법은 민주주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기본소득 도입과 은행의 공공화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시민 참여가 보장되는 직접민주주의를 확대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넓혀갔다. 이후 잡지 지면에는 기본소득, 숙의제, 추첨민주주의와 같은 서양의 새로운 생각, 개념, 제도들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금융위기, 민주주의, 기본소득’, ‘민주주의와 시민의회’, ‘시민주권시대를 향하여’와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사례를 소개하는 특집이 자주 실리기도 했다.
세월호, 촛불시위, 대통령 탄핵 정국을 거치며 독자들은 《녹색평론》을 다시 보게 됐다. 여기에 도농 격차, 사회 양극화, 기후위기, 환경파괴가 극심해지면서 정부, 지자체 등 제도권에서까지 《녹색평론》이 내건 의제들을 검토, 수용하기 시작했다. 《녹색평론》은 더이상 ‘광야의 외침’이 아니었다. 현재 농민기본소득은 시범 실시를 거쳐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국민기본소득제는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검토될 정도로 중요한 정책의제로 떠올랐다. 지역통화, 숙의민주주의 역시 이미 실험 단계를 넘어섰다. 《녹색평론》의 꿈과 상상력이 생태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의 밑그림을 그려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동체 실험으로서의 녹색평론, 그리고 ‘읽기 모임’
《녹색평론》은 국내 수천 개의 잡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 잡지에는 다른 곳에 없는 게 있다. 바로 잡지를 함께 읽는 ‘녹색평론 읽기 모임’이다. 이 모임이 언제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녹색평론》 1996년 3―4월호에 대구·경북지역 독자모임 광고가 처음 실린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즈음해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독자모임은 전국으로 확대돼 한때 60여 곳에 이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40여 곳으로 조금 줄어들었다. 하나의 잡지를 읽는 모임이 도시·농촌 가릴 것 없이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것은 《녹색평론》이 유일하다. 매호마다 《녹색평론》 뒤쪽에 실리는 지역 독자모임 안내 광고가 이를 증명한다.
독자들은 왜 《녹색평론》을 함께 읽을까. 먼저 《녹색평론》이 근대문명 비판, 지속가능한 사회의 생성 원리, 대안적 삶 등 묵직한 주제들을 소개하다 보니 혼자서는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점을 들 수 있다. 문명과 생태 등 우리 삶의 근본에 대한 질문에 혼자 답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함께 머리를 맞대어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또하나는 지역운동 차원에서 《녹색평론》을 읽는 것이다. 《녹색평론》을 읽으며 수돗물불소화 반대운동을 논의하고, 지역화폐 유통을 토론하며, 농촌기본소득의 실천방안을 찾아가는 식이다. 읽기 모임 참가자 상당수가 환경, 건강, 교육 분야의 지역 활동가이거나 녹색당 회원이라는 사실은 이를 말해준다.
주목할 점은 읽기 모임이 《녹색평론》이 추구하는 공동체의 가치를 구현하는 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읽기 모임에 참여하는 주민들은 잡지를 읽고, 토론하고, 음식을 나눈다. 이 과정에서 참가자들은 우정, 환대, 협동, 약자 보호와 같은 공동체의 윤리와 가치를 배운다. 또 공동체 활동을 통해 현대인의 소비적·자연파괴적 삶이 아닌 인간성을 회복하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활동은 《녹색평론》이 근대 산업문명의 대안으로 꼽고 있는 ‘소농 공동체의 삶’에 다가가려는 작은 실천으로 해석할 수 있다. 최근 인문학 모임이 늘어나면서 지역주민이 중심이 된 공동체운동이 일고 있는데, 《녹색평론》은 읽기 모임을 통해 한발 앞서 이를 실험했다.
《녹색평론》·김종철 읽기에서 출발해야
처음 《녹색평론》이 생태주의를 내걸고, 크고 작은 의제들을 제시하자 모두들 ‘무모한 실험’, ‘근본주의적 발상’이라며 비웃었다. 그러나 광야에서 외치던 《녹색평론》의 예언은 터무니없는 꿈이 아니었다. 불소화는 중단됐고, 기본소득과 지역통화는 실험 중이다. 《녹색평론》이 끊임없이 주장했던 탈성장·반개발의 담론은 기후위기 속에서 점점 호소력을 높여가고 있다. 30년을 돌아보니, 《녹색평론》이 옳았다.
그럼에도 개발과 성장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들은 지속적으로 지구환경, 자연 생태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성장의 덫에 걸린 그들은 ‘녹색성장’, ‘녹색뉴딜’, ‘지속가능한 성장’ 등 희한한 구호를 내걸며 생태주의에 물타기를 하고 있다. 탄소중립이라는 전지구적 명제에 딴죽을 거는 재계, 기업인, 정치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30년을 맞은 《녹색평론》이 신발 끈을 조여 녹색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할 때이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다. 미디어의 주력이 디지털로 옮아가면서 전통적인 매체는 생존을 고민해야 할 처지이다. 지금껏 종이 잡지만을 고집해온 《녹색평론》은 미디어 환경 변화에 더욱 애를 먹고 있다. 구독자 수의 감소가 그것을 말해준다.
무엇보다 가장 큰 어려움은 30년 가까이 이 잡지를 이끌어온 김종철 선생의 부재이다. 지난해 6월 선생의 갑작스런 타계는 《녹색평론》의 앞길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기획, 번역, 집필 등 잡지의 거의 모든 일을 맡아왔던 터라, 당장 그 빈자리를 채워가는 일이 시급하다.
생태주의와 민주주의를 얘기해온 《녹색평론》의 30주년 기념호 발간은 축하하고 또 축하할 일이다. 분명 경사스러운 때이지만 다른 한편 내우외환을 헤쳐 나가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럴 때일수록 창간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30년 전, 《녹색평론》은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라는 우울한 전망 속에서 생명의 문화를 찾아 나섰다. 지금도 나아진 것은 없고, 오히려 더 암울하기만 하다. 그래서 다시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창간 때와는 달리 반생명의 시대를 헤쳐갈 ‘희망의 무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180권에 달하는 《녹색평론》, 그리고 김종철 선생이 남긴 《간디의 물레》, 《땅의 옹호》, 《대지의 상상력》,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같은 저작들이다. 30주년 이후는 김종철 저작 읽기, 지난 《녹색평론》 다시 읽기에서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