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회담 결렬되는 것 보고 다들 걱정 많이 하셨지요? 이렇게 될 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평범한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소위 전문가들까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트럼프가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점이에요. 오바마까지는 예상이 가능한 대통령들이었죠. 그런데 트럼프는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전문가들이 예측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정부도 대응방법을 확실히 찾지 못하는 주된 원인이 거기 있는 거죠.
최근에 북한의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말했다죠. “두 정상 간의 관계는 좋다. 왜 그런지는 미스터리지만 관계가 좋다”라고요. 뭔가 상황을 받아들이지도 내치지도 못하는 심리적 불안과 함께 어떻게든 트럼프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안간힘이 엿보이는 발언이죠. 그런데 미국의 외교문제에 대한 트럼프의 지식이 차츰 늘어난다는 얘기가 있어요. 기존 관례를 다 무시하고 지내왔는데 대통령을 하다 보니까 조금씩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얘기죠. 그렇게 되면 미국 외교의 오래된 틀을 트럼프도 답습할 가능성이 커지고, 한반도 문제가 더 풀리기 어렵게 될지도 모릅니다. 미국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서로 경쟁을 한다지만, 대외관계에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민주당 집권 시에 전쟁을 더 많이 했으니까요.
그런데 한반도 평화문제는 미국이나 유럽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대체로 관심이 없고, 서방 언론들도 우리한테 별로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미국의 주류 사회에는 우리의 우군이 없습니다. 있다면 한 사람 있는데, 트럼프죠. 문제는 그의 동기가 노벨평화상에 대한 욕심과 재선을 노린 계산이라는 거죠.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 기회를 좀더 근본적인 성찰의 시간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돌아보면, ‘촛불’의 힘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약속대로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섰고, 김정은 위원장도 어차피 이대로는 더 갈 수 없으니까 호응을 하게 되었고, 워싱턴 정가의 이방인인 트럼프도 일단 긍정적으로 나오면서 모처럼 절묘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여기까지 오긴 왔죠. 그래서 1년 동안 남북 정상이 세 번이나 만나고, 북미 정상도 두 번 만났죠. 사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에요.
그런데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당분간은 소강상태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도 자중하지 않을까 싶어요. 다시 장거리 미사일을 쏘거나 핵실험을 했다가는 10년, 2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그걸 모를 리 없잖아요. 트럼프도 다음 대선까지는 현상 유지를 하려고 할 거예요. 이런 상황을 우리 정부가 예민하게 분석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사활을 좌우하는데도, 하노이 회담 결렬 직후에 정부도 꽤 흔들리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니까 그게 더 걱정되더군요. 제가 잘못 보았다면 좋겠습니다.
한반도의 빛과 어둠
《미국은 왜 실패했는가》(녹색평론사, 2015)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모리스 버먼이라는 역사가인데, 10년도 더 전에 미국이 너무 나쁜 사회이기 때문에 더이상 기대할 게 없다면서 멕시코로 이주를 했습니다. 미국이라고 하면 대개 정치나 경제, 혹은 군사문제를 먼저 생각하지만, 미국인의 내면적 심리와 기질을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면서 굉장히 신랄하게 미국과 미국문화를 비판합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돈벌이라면 아무 거리낌이 없고, 남의 사정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사기꾼들, 즉 ‘허슬러’들이 모여서 사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게 건국 이후 쭉 계속돼온 미국인의 DNA라는 거예요. 이런 미국에 비하면 멕시코는 가난하고 거친 사회이지만, 매우 인간적인 사회라는 거죠. 미국은 제도적으로 복지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되는 사회인데, 멕시코는 상부상조가 몸에 밴 사회라서 어지간한 일이라면 동네사람들이 서로 도와주고 해결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이사를 했을 때도, 낯선 외국인이 왔는데도 경계를 하는 게 아니라 스스럼없이 짐도 옮겨주고, 쾌활하게 거들어주더랍니다. 못이 필요하고 공구가 필요하다 싶으면 자기들끼리 서로 연락을 하더니 어디서 가져다주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미국이야말로 정말로 고약한 사회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됐다는 거예요. 하기는 미국은 이제 끝나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완전히 망할 때까지 꽤 오래 걸릴 거라는 점이죠. 그러니까 그동안을 우리가 얼마나 지혜롭게 버티면서, 미국인들을 상대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까 얘기로 돌아가죠. 이 소강상태에서 우리가 차분히 생각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여태까지 우리는 남북 간에 평화체제가 구축되면 그 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대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남북경협 정도가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오랫동안 우리가 섬 아닌 섬에 갇혀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북방을 거쳐서 멀리로 뻗어 나가 민족의 기상을 한껏 펼쳐보자,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결국 우리도 부강한 나라가 돼보자는 거죠. 그런데 그런 욕망 때문에 통일하자는 거라면, 너무 웃기지 않아요? 대체 부강한 나라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게 정말 좋은 것인지, 좀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는 이런 근본적인 문제는 거의 생각을 하지 않죠. 그러나 이제는 무조건 정서적으로만 반응하지 말고, 좀 냉정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가 됐다고 봅니다. “통일을 하면 100년 먹을 게 생긴다” 등등, 그런 천박한 말은 그만하고, 좀더 보편적인 인간적 가치를 염두에 두고 한반도의 장래를 숙고해보자는 거죠.
물론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경제를 발전시켜야죠. 그런데 예를 들어, 지금 북한의 경제개발이 중국식이 될 것이냐 혹은 베트남식이 될 것이냐 하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사실은 둘 다 문제가 많거든요. 북한 당국은,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문을 열었으면서도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지 않는 걸 보고 중국이나 베트남식 개발 모델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겠죠. 그래서 그 방향으로 가기로 맘먹고 여러가지 고민을 하고 있을 겁니다. 남한의 우리들도 대개 북한이 그 방향으로 갈 거라고 보고 있죠? 그런데 딱 거기에서 이야기가 멈추는 게 문젭니다.
왜냐면 중국과 베트남식의 경제개발 방식이 정말 바람직하냐는 문제가 있으니까요. 무조건 GDP(국내총생산)만 올라가면 그게 성공일까요? 지금 중국은 굉장히 문제 많은 사회잖아요. 이미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곧 미국을 능가한다고 하지만, 엄청난 환경 오염과 파괴, 노동자 인권유린은 말할 것도 없지만, 무엇보다 언론자유가 없는 사회예요. 학술적인 활동마저도 정권에 비판적인 것은 일절 허용되지 않습니다. 원래 건강한 사회는 비판정신이 살아 움직여야 하는데, 중국이나 베트남은 그 점에서는 결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2015년에 《녹색평론》에 베트남전쟁 종식 40주년 기념 특집을 해보려고 베트남 관계 자료를 열심히 찾아본 적이 있는데, 그때 제가 많이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신문, 잡지, 언론이 하나도 없고, 밑바닥 민초들의 삶이 그간의 경제개발로 더 좋아진 것도 거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산당 간부들이나 공무원들의 부패가 극심한 모양이더라고요. 위에서 아래로, 관료주의적으로 경제개발을 하면 어느 사회나 그렇게 되지만, 베트남의 부패는 특히 심각해 보였습니다. 이런 말은 함부로 해선 안되겠지만, 그런 자료들을 보다가 이러려고 미국과 그 엄청난 전쟁을 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북한이 어떤 경제개발 노선을 택할지, 남한의 우리가 왜 고민해야 되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반드시 고민해야 합니다. 북한의 향방이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니까요.
야간에 한반도를 찍은 위성사진을 보면 휴전선 남쪽은 휘황찬란한데, 북쪽은 깜깜하잖아요. 흔히 우리는 이 사진을 남한은 발전하고 번영한 사회, 북한은 아주 낙후된 암담한 사회를 상징하는 기표로 보고 있지만, 오늘날 크나큰 위기에 처한 지구 환경문제를 생각하면 북쪽이 남쪽을 따라 할 게 아니라 오히려 남쪽이 북쪽을 따르는 게 순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무 생각도 없이 흥청망청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살고 있잖아요. 이 조그마한 나라가 식량자급도, 에너지자급도 못하면서, 석유 낭비가 구조화된 경제를 맹목적으로 확대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다 보니 결국 미국에 대해서도 할 말 제대로 못 하고 굴종적인 처지가 된 거란 말이에요. 미국인들이 이런 한국에 대해 존경심이 들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달성했다는 공허한 이야기나 하고 있습니다. 그런 수치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주권국가다운 존엄도 없고, 미래가 지극히 불투명한 지속 불가능한 사회가 돼버렸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보면 휘황찬란한 야경은 도리어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해야 옳죠. 한반도 전체가 이런 야경을 가진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면, 차라리 통일은 안하는 게 낫겠죠.
‘그린뉴딜’이라는 대안
저는 한반도 문제를 포괄적, 장기적인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녹색화죠. 이 ‘평화의 길’을 설립할 때 준비모임에서도 제가 여러 번 얘기를 했죠.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한반도 녹색화라는 큰 틀 속에서 접근해보자고요. 녹색화는 당연히 비핵화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녹색화의 이념은 근본적으로 무기를 버리는 것, 즉 반전·평화 사상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지금 세계가 직면한 최대의 현안은 기후변화 위기입니다. 유엔의 과학자들은 기후위기가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것을 막자면, 2030년까지, 즉 앞으로 12년밖에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현재의 탄소에너지 소비량의 절반 이상을 그 기간 내에 줄여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구상에서 어떤 형태의 문명도 존속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경제성장을 지상목표로 하면서 에너지 낭비를 강요하는 세계경제체제 속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단기간 내에 극적으로 감축시킨다는 게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어떤 방법으로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쨌든 기후변화는 먼 장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화석연료를 제일 많이 소비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공산당 당헌에도 ‘생태문명’의 필요성이 이야기되어 있고, 미국에서도 트럼프는 기후위기를 부정하고 있지만, 많은 지식인·활동가들이 다급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아마 틀림없이 차기 미국 대선에서는 기후문제가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럽도 마찬가집니다.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지금 녹색당이 약진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죠. 영국에서는 벌써 몇 달째 ‘절멸 저항’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고, 최근에는 청소년들이 동맹휴학을 하고 가두시위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미국에서 특히 화제가 되고 있는 게 있는데, 이른바 ‘그린뉴딜’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그린뉴딜이라는 아이디어는 이미 10년도 더 전부터 녹색활동가들이 제기해왔는데, 갑자기 최근에 화제가 된 것은 작년 말의 중간선거 때문이었어요. 그때 뉴욕시의 한 선거구에 출마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라는 29세의 여성 후보자가 기후문제를 핵심적인 선거 이슈로 제기하고 그린뉴딜을 주장했는데, 그게 뉴욕시민들에게 크게 어필했습니다. 원래 그 선거구는 민주당의 원로 정치가의 지역구였는데, 예비선거에서 아무런 정치경험도 없는 젊은 여성이 그 늙은 정치가를 이긴 것도 화제가 되었지만, 본선에서도 이기자 미국 전체가 들썩거렸어요. 동시에 그 신인 정치가가 내건 그린뉴딜이 큰 주목을 끌게 된 거죠. 그런데 그 그린뉴딜이 지금 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느냐 하면, 그게 환경문제뿐만 아니라 일자리나 복지문제를 포함한 많은 사회적 난제들을 다소나마 완화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까지 정밀하게 구체화된 것은 아니지만, 화석에너지 대신에 새로운 재생에너지를 대대적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에서부터 자동차 위주 교통시스템을 대폭 축소하고 전국을 고속철도망으로 연결한다는 계획, 그리고 하층민들도 골고루 혜택을 받도록 하기 위한 의료나 교육시스템의 재정비 등등을 약속하고 있거든요. 미국에서는 일찍이 서민들을 위해 이 정도의 과감한 정책을 제시한 정당도, 정치가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아직도 언론, 정치, 학계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역시 경제성장입니다. 하기는 당장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다급한 문제는 없죠. 하지만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계속 화석연료 소비를 늘려야 하고, 그러면 점점 기후위기를 완화하기는커녕 심화시킬 게 뻔합니다. 사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다양한 환경운동이 전개돼왔지만 거의 다 실패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이 문제를 풀지 못했기 때문이죠. 환경을 지키는 것과 경제성장은 완전히 상충되거든요. 흔히 사람들은 기후변화는 먼 미래의 일이고, 먹고사는 게 더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환경문제가 경제문제를 이길 수 없지요. 그런데 그린뉴딜은 좀 다릅니다. 이것은 경제와 환경을 어느 정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란 말이에요.
결국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의지입니다. 그런데 정치가 과두 기득권세력의 지배하에 있으면 새로운 개혁정책이 절대로 채택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득권세력은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산업·금융 시스템과 깊이 연루돼 있습니다. 만약에 그린뉴딜과 같은 프로젝트가 대대적으로 실행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벌써 다수의 기성 정치가들과 엘리트들은 그린뉴딜을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핵심적인 반대 이유가 뭐냐면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 거냐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미국의 국가부채가 막대한데, 그린뉴딜을 실행할 돈이 어디 있느냐는 거죠. 달리 반대할 명분이 없으니까, 비용문제를 가지고 개혁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려는 거죠.
‘현대화폐이론’
그래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일부 경제학자들이 혁신적인 경제이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비용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고 국가가 화폐를 발행하면 간단히 해결된다는 겁니다. 너무 놀랍고 간단한 이야기죠? 사실은 저 자신도 그 얘기를 듣고 굉장히 놀랐는데, 놀란 이유는 이게 엉뚱한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실은 10년쯤 전부터 《녹색평론》이 계속 주장해왔던 내용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늘 궁금한 게 있었어요. 즉, 정부가 돈이 필요할 때 왜 국채라는 것을 발행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국가가 주권을 가졌다면 화폐를 발행할 권한을 갖고 있다는 얘기인데, 왜 그냥 화폐를 발행해서 쓰면 되지 굳이 국채를 발행하여 부자들에게 두고두고 이자를 지불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었죠. 제가 무식해서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에 여러 나라의 화폐를 좀 들여다봤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동전은 한국은행이 발행 주체로 돼 있지만, 일본의 동전을 한번 보세요. 거기에는 발행 주체가 ‘일본국’이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일본의 지폐는 일본은행이 발행 주체로 돼 있습니다만, 동전에는 ‘일본국’이라고 명확히 표시돼 있습니다. 그리고 홍콩에서는 여러 종류의 지폐가 지금 통용되고 있는데, 그중에는 주요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도 있지만 홍콩정부가 직접 발행한 지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폐를 정부가 발행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원리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돈이 필요하면 국채를 발행하여 빚을 질 게 아니라, 국가가 돈을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여 쓰면 국가가 부자들에게 빚을 질 일도 없고, 국민의 세금으로 이자를 지불할 이유도 없습니다. 저는 기본소득의 재원도 이런 식으로 마련하면 된다는 이론을 오래전부터 소개하고, 저 자신도 그렇게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경제를 좀 안다는 사람들은 그건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고, 그냥 덮어놓고 무시해버립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국가가 화폐발행 주권을 되찾으면 된다는 이론은 1920년대 경제공황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경제공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일부 경제학자들이 이 이론을 이야기했지만, 소위 정통 경제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하고, 그 대신 뉴딜정책이 채택되어 대규모 토목사업 위주의 경기부양책이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1920년대에 일부 경제학자들이 구상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화폐이론이 지금 미국에서 그린뉴딜과 더불어 재등장했는데, 그게 지금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현대화폐이론’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국가가 빚을 많이 져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얽매여 소위 긴축재정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을 고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거죠. 지금 실업자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기업을 살려야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 갇혀 늘 국가는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펴고, 경제정의의 원칙도 깨뜨리고, 환경규제도 풀어버리고 온갖 이상한 짓을 다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드는 궁극적인 주체는 기업이 아니라 소비자입니다. 일반 생활인들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와 서비스를 시장에서 큰 어려움 없이 구매할 수 있다면 저절로 국민경제가 살아납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보통의 생활인들의 구매력이죠. 그 구매력을 높여주는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 국가의 임무입니다. 그런 구매력을 높여주는 방법은 정부가 많은 일자리가 생기는 공공사업들을 직접 시행하거나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방법도 있지만, 기본소득의 형태로 일정한 액수의 돈을 국민들에게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그린뉴딜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일반 시민들의 구매력을 높여서 실업자도 구제하고 경제도 살리겠다는 유력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죠. ‘현대화폐이론’을 주창하는 경제학자들은 그런 사업을 위해서 증세를 한다든지 특별히 부유세를 신설한다든지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국가 부채와 개인이나 가계의 부채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국가는 무엇보다 화폐발행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파산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인플레이션이 염려될 수 있지만, 그러나 시장에 돈이 많이 풀렸다고 반드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회에 인력과 자원이 있고, 그 인력과 자원을 필요로 하는 수요가 있는 한에 있어서는 인플레이션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은 지난 수십 년간 침체된 경기를 회복시키려고 소위 양적완화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엄청난 돈을 시장에 쏟아부었지만 인플레이션은커녕 여전히 디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화폐이론’에 의하면, 정말로 필요 이상의 돈이 넘쳐나서 악성 인플레이션의 위험이 있으면 국가가 세금 징수를 통해서 과잉 통화를 거둬들여 폐기해버리면 됩니다.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까 실제로 역사적인 선례가 꽤 있더군요. 그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 히틀러가 독일 경제를 부흥시킨 방법입니다. 히틀러가 집권을 하게 된 것은, 1차 세계대전 직후 폐허가 된 상황에서 연합국들한테 과도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기에 절망적인 경제위기를 겪고 있던 독일 국민에게 급진적인 경제부흥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틀러가 채택한 방법은 대대적인 공공사업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바로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제국은행(중앙은행)의 총재였던 얄마르 샤흐트라는 금융전문가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샤흐트는 ‘메포’라는 유령회사를 만들어 그 회사가 발행한 ‘교환권’을 국가의 법정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특이한 금융 메커니즘을 고안했습니다. 즉, 형식상은 한 회사가 발행한 채권이지만 실제로는 법정화폐와 다름없는 기능을 갖춘 돈을 만들어 국내의 각 사업장의 요구에 따라 화폐를 공급하고 시장이 활기를 띠도록 만들었던 거죠. 물론 그런 돈은 본질적으로 지역화폐이기 때문에 국제적인 교역에는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철광석이 풍부한 나라였기 때문에 철광을 수출하여 그 대가로 석유라든지 기타 필요한 물자를 들여오는 방법을 썼습니다. 그 결과, 단기간 내에 경제부흥을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산업국가들 중에서 가장 빨리 공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히틀러가 이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 그 방법을 확대하여 대대적인 군비증강을 원했다는 겁니다. 샤흐트는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히틀러와 언쟁까지 해가면서 반대했다고 합니다. 히틀러가 말을 듣지 않자 샤흐트는 결국 제국은행 총재직을 사임합니다. 나중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전범들에 대한 국제재판이 뉘른베르크에서 열렸을 때 샤흐트도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어쨌든 히틀러에게 협력했던 중앙은행 총재였으니까요. 그러나 히틀러의 군비증강 정책에 강력히 반대하고 사임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는 석방되었습니다. 하여간 그런 에피소드가 있는데, 일본에는 이 이야기를 주제로 한 책도 나와 있습니다. 요컨대, 이런 에피소드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국가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할 일을 하지 않고, 죄 없는 국민들을 도탄에 빠트린다는 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도 임기 초에 사람들이 잔뜩 기대를 했다가 이제는 많이 실망하는 분위기가 돼버렸는데, 경제정책이 시원한 게 나오지 않은 게 결정적인 이유죠. 취임하자마자 내놓은 게 소득주도성장 정책이었고, 그래서 최저임금 인상을 결행한 것은 좋았는데, 그 방법이 너무 서툰 나머지 인심을 많이 잃게 된 것 같아요. 최저임금만 하더라도, 서서히 추진하면서 자영업자들이 어떤 영향을 받을지, 그 피해를 어떻게 막을지 등등, 주도면밀하게 접근해야 하는데도 불쑥 일괄적으로 올려버리니까 엄청난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죠. 제가 어떤 영국 경제전문 저널리스트의 글을 보니까, 최저임금을 일시에 5% 이상 올려서 성공한 예가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데, 지금 정부나 민주당의 경제정책 담당자들 중에 이런 문제를 깊이 있게 살피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반도 및 세계의 녹색화를 위하여
어쨌든 기후변화에 대처하자면 세계의 산업국들은 그린뉴딜이나 그와 유사한 정책을 과감히 시행해야 합니다. 지구상에서 인류 문명이 존속할 수 있을지 여부는 앞으로 10년이 결정적인 기간이 될 것이니까요.
조금 냉정히 생각하면, 지금 한반도 평화구축이라는 과제는 우리에게는 절박한 이슈지만, 적어도 동아시아 바깥 지역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한반도 비핵화보다도 세계의 녹색화가 훨씬 더 긴박하고 절실한 현안이니까요. 미국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합니다. 한반도 비핵화를 원만히 해결하자면 미국의 양식 있는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자기들의 정부 정책에 영향을 끼쳐야 하는데, 소위 전문가들을 제외하고 일반 미국 시민들 중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한테는 초미의 관심사인데 외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도 없죠. 원래 인간은 그런 법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게, 바로 한반도 비핵화라는 문제를 세계의 녹색화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그 테두리 속에서 접근하면서 한반도 문제가 세계 전체의 녹색화를 위해서 빠트릴 수 없는 현안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설득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외국인들을 우리의 우군으로 만들 수 있고, 그들의 지지를 받는 것도 한결 쉬운 일이 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히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한 편법으로 녹색화라는 슬로건을 내걸자는 말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도, 앞으로 남북이 경제협력을 추진하게 되었을 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생각하는 데에도 이 녹색화라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북한에는 미개발의 상당한 지하자원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석탄 같은 화석연료 자원은 이 기후위기 시대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가 미세먼지 지옥이 되고 기후변화를 앞당기는 주범이 될지도 모릅니다. 북한은 아마 당장의 경제개발을 위해서 무차별로 그것을 개발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유혹을 억누르고 신중하게 자원이용을 하려면 남북 간의 지혜로운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혜롭게 접근한다는 것은 말은 쉽지만, 남한 사회 자체 내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도 없는 상태에서 그게 실현될 수 있을지는 극히 회의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더 깊게 학습하고,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거죠. 북한이 난개발로 치달을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도 우리 자신의 치열한 공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만약에 한반도 비핵화가 한반도와 세계의 녹색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추진된다면, 그것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우리는 세계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우리가 성공한다면 그때는 지금 세계가 공통적으로 처한 위기상황을 뚫고 나갈 좋은 모델까지 제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면, 이제부터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공감을 얻어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국제사회에서는 대의명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콩알 하나 가지고 밀고 당기는 식이 아니라 큰 틀 속에서 이야기를 하면 훨씬 설득력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그게 가장 실리적일지도 모릅니다. 이 자리에서 더이상 구체적이고 정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만, 왜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한반도 비핵화와 함께 녹색화를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가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한번 생각을 해보고자 오늘 제가 이런저런 군소리를 늘어놨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글은 2019년 3월 29일 사단법인 ‘평화의 길’이 주최한 강연회에서 했던 이야기를 녹취,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