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은 뒤 세상이야 망하든 말든 알 게 뭐야.”(프랑스 속담)
유례없는 폭염에 시달리던 여름이 가고 드디어 가을이 왔나 했더니 벌써 설악산에는 얼음이 얼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처럼 사계절이 아직은 큰 이변 없이 돌고는 있으나, 지구상의 계절과 기상에는 심상치 않은 조짐과 징후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 가을에 느닷없이 벚꽃이 만개했다고, 일본 어느 지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흥미롭다기보다 섬뜩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생태계의 이상 현상을 알려주는 이런 종류의 소식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지금 인류사회 전체의 최대 긴급 현안인 기후변화와의 관련에서 갈수록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최근 영국의 〈가디언〉은 세계 전역에서 곤충들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는 현상을 일반 보도기사가 아니라 사설(社說)로 다루었는지도 모른다. 〈가디언〉(2018. 10. 19.)에 의하면, 자연 생태계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온 대표적인 지역의 하나인 푸에르토리코의 우림(雨林)에서 지난 40년 동안 곤충의 수효가 약 60분의 1로 줄어들었고, 그 결과 곤충을 먹고 사는 새와 도마뱀 등도 3분의 1 내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심히 불길한 느낌을 억제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현상이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즉, 독일에서도 같은 기간에 무려 75%나 곤충의 수효가 줄어들고, 영국에서도 나비와 벌을 비롯하여 수많은 곤충들이 사라졌다.
더욱이 이런 현상을 확인한 조사·연구의 대상 지역이 도시나 도시 근처의 오염지역이 아니라 ‘인간의 간섭 범위’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연보호 지역들이라는 점은 더 충격적이다. 그러니까 살충제나 대기와 물의 오염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은 지금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렇게 곤충이 사라지는 데는 기후변화라는 요인도 크게 가세하고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곤충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가? 먹이사슬의 바로 위에서 곤충을 먹고 사는 새들이나 여타 작은 동물들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결국은 빈틈없는 연쇄구조로 연결되어 있는 생태계가 전면적으로 붕괴하고, 끝내는 인간을 포함한 고등 생물들의 삶도 조만간 끝날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면 참으로 암울한 시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근대적 문명생활이라는 것을 향유하고, 높은 생활수준을 즐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이 근대적 문명생활이라는 것이 확대되면 될수록 문명은커녕 기초적인 생존 유지 자체가 불가능해질지도 모를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너무도 역설적인 사태에 직면해 있다. 이른바 근대문명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에 기반을 두고 돌아가는 시스템인 이상, 이러한 상황이 언젠가는 도래할 것임은 벌써 오래전부터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므로 화석연료에 기반한 문명의 극복을 위해서 근본적인 방향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인류사회는 여러가지 이유로―그중에서도 특히 이 세상의 가장 강력한 힘, 즉 ‘관성’에 의해서―이제 벼랑 끝까지 와버린 것이다.
지난 10월 초 인천에서 열린 48차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총회에 참석한 과학자·전문가들은 세계를 향하여 또다시 다급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요지는 산업혁명 직전의 지구 평균기온보다 1.5도를 더 초과한다면 지구사회가 대파국을 면치 못할 것이므로 적어도 2030년까지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지금보다 40~50%까지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천의 이 회의의 결론이 주목을 받는 것은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1.5도 내지 2.0도 이내로 억제할 것을 목표로 했던 2015년의 파리기후협약에서 제시된 가이드라인은 장차 닥칠 최악의 상황을 저지하기 위한 대응책으로는 미흡하다는 새로운 과학적 평가에 따라 1.5도 이내로 억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유엔의 전문가들이 목표치를 재조정하면서 각 정부들에 화석연료 사용을 극적으로 줄여야 할 것을 강력히 권고한 것은 기후변화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해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기후 분야의 독립적인 연구자들 대부분에게는 오히려 이러한 유엔의 입장이 매우 미온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고, 심지어는 앞으로 10~20년 내에 급작스러운 기후변동에 의해서 식량생산의 자연적 조건이 전면적으로 무너짐으로써 인간의 생존이 아예 불가능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예언하는 과학자도 있다. 이런 끔찍한 예언을 하는 과학자의 견해로는, 자연적 질서의 변동은 반드시 선형적·점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예측 불가능하게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돌연히 전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언을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기후변화 속도가 10년 전이나 20년 전에 예견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진전되고 있다는 관련 과학자·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그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극지방의 빙하가 무서운 속도로 녹아내리고, 얼음판이 사라짐으로써 지구로 들어오는 햇빛을 반사하여 우주로 되돌려 보내는―그럼으로써 지구의 기온 상승을 막아주는―빙하와 얼음판의 기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알베도’ 현상이라고 불리는 이 기능이 무력화되면 동토 지대와 극지방의 해저에 갇혀 있던 (이산화탄소보다 30배나 더 강력한 온난화 유발 가스인) 메탄가스가 걷잡을 수 없이 대기 중으로 방출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지구는 문자 그대로 화덕이 될 것이라는 게 지금 과학자들의 최대 우려사항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정보와 지식이 거의 완전히 개방되어 있는 시대이다. 따라서 기후변화에 관련된 과학자들의 식견과 발언은 보통사람들도 온라인으로 쉽게 접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주류 미디어는 웬일인지 별로 취급하지 않고 있는 현상이지만, 매우 중대한 새로운 사회현상이 지금 세계 전역에서 역병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그것은 기후변화라는 엄청난 사태 앞에서 심각한 불안과 우울증, 혹은 불면증과 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이다. 심지어 여러 대학에서는 벌써 기후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영역까지 생겨났고, 그 분야의 학위를 가진 전문가들의 수요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이 문제가 심리학적 상담이나 치료를 받는다고 해결될 리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일찍이 인류역사에서 한 번도 경험해본 바가 없는 현상, 즉 이대로 가면 반드시 닥치게 돼 있는 문명의 전면적 붕괴 혹은 나아가 인류절멸이라는 사태를 예상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심리상담자의 조언을 구하는지도 모른다.
어이없는 것은, 이와 같은 정신적 불안 증세가 확산돼가고 있는 이면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세계의 특권층이나 부유층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화(禍)를 모면할 궁리에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미국의 초부유층 인사들의 모임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한 경험을 공개한 어떤 인공지능 연구자가 있었다. 그는 그날 강연회의 질의응답 내용을 소개하면서, 현재 초부유층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기후변화를 포함한 환경위기가 악화되었을 때 어떻게 자신들이 가족과 함께 피신해서 살 수 있을지, 그때 인공지능이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기는 이런 비화를 들어볼 필요도 없이, 우리는 지금 세계의 부유층 중에서 뉴질랜드나 알래스카 등으로 이주하거나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파국이 상대적으로 좀더 늦게 닥칠지는 모르지만, 과연 이 지구상에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장소가 있기는 할까? 그리고 특권층, 부유층만의 고립된 삶이 과연 인간다운 삶일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이야기도, 따져보면, 그래도 비교적 예민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후변화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둔감한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무섭고 두려운 사태―그것도 개인의 힘으로는 절대로 맞설 수 없다고 느끼는 사태―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인간의 뿌리 깊은 정신적 습벽에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또, 일반적으로 기후변화 문제가 언론의 관심 밖에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상업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날의 언론의 입장에서는, 대중들이 기피하거나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문제를 굳이 취재, 보도, 논평할 의욕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에 기후변화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는 남북한 화해, 교류, 협력, 그리고 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역사적인 전환기를 맞이하여 한국 현대사의 어떤 국면에서보다도 더 희망에 부푼 흥분상태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 구축이라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절박한 문제도 기후변화라는 인류 전체의 사활이 걸린 절체절명의 이슈에 비해서는 어쩌면 하찮은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기후변화 시대라는 초미의 비상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위엄 있는 삶을 유지하다가 이 세상을 떠날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삶은 과연 가능한가? 이것은 지금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 던져야 할 가장 절실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위에서 언급한 〈가디언〉의 사설은 결론적으로, 기후변화라는 엄중한 사태에 직면하여 우리가 개인으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손쉬운 일로서 〈캉디드〉의 작가 볼테르의 권유대로 우리가 각기 나름대로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 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부연 설명이 생략된 갑작스러운 결론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적절한 제안도 없을 듯하다.
물론 기후변화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집단적 노력과 해법 없이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인 이상, 무엇보다 ‘정치’를 바로잡는 게 급선무라는 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기후변화가 이토록 악화된 데에는 일차적으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주요 산업국들의 정치가들이 경제성장 논리에 매몰된 채 방향전환의 노력을 끊임없이 방기해왔기 때문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세계가 당면한 진정한 위기는 환경의 위기가 아니라, 정치의 위기라고 지적했던 전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의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행동은, 우리 각자가 무엇보다 능동적인 시민이 되어―선거법 개정이나 숙의민주주의 제도의 확대를 요구하는 등으로―정치를 바로 세우는 데 적극 개입하고, 국가적 차원과 동시에 지역적 차원에서도 실제로 정책결정 과정에 활발히 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끝없는 슬픔과 우울 속에서 생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이웃들과 더불어 번민을 같이 나누며 사는 법을 익히고, 또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열심히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일단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기후변화를 충분히 막지는 못할지라도 최악의 상황은 저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들이 실제로 허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비근한 것은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어떤 경작방식에 의한 것인지, 어떤 경로로 식탁에 도달했는지 등등을 곰곰이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최대한 육류와 낙농제품을 줄이고 가까운 논밭에서 수확한 유기농산물 중심의 식단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기후변화를 유발하는 온난화 가스의 주된 원천으로 흔히 지목되는 것은 화석연료에 기댄 전력생산시스템, 개인 자동차 중심의 교통수송체계, 그리고 2차대전 이후 세계의 농지에 광범하게 적용되어온 대규모 산업농시스템이다. 그러므로 재생 가능한 자연에너지시스템을 최대한 신속히 확대하는 것과 석유 의존 수송수단을 대폭적으로 축소하기 위한 혁명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것도 긴급한 과제이지만, 산업농시스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농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업화된 대규모 단작농사를 의미하지만, 과학적 연구결과에 의하면 생태계 파괴의 원흉이자 동물학대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한 대규모 축산산업이 기후변화에 끼치는 영향도 실제로 엄청난 것이다.
이 모든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가장 비근한 일상적인 문제, 즉 식단의 변화에서부터 시도해보는 것이다. 한때 농사의 환경적 의미에 민감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부엌에서 세계를 본다”라는 슬로건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 슬로건은 생각할수록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계가 어떻게 근본적으로 잘못 돌아가고 있는지, 자유무역이라는 이름 밑에서 세계의 농경지가 어떻게 사막화되고 농촌공동체가 파괴되고 있는지 등등을 인지하는 데에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날마다 일용하는 식품의 생산, 유통, 소비, 폐기 과정을 한 번만이라도 주의 깊이 들여다보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날이면 날마다 텔레비전 화면은 요리를 테마로 한 온갖 시끌벅적한 연예프로그램들로 넘쳐나지만, 개탄스럽게도 그 요리의 원료인 농산물의 실태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과 심층적인 분석을 보여주는 미디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끊임없이 사회적 적폐의 청산과 국가의 쇄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양심적인’ 정치가·지식인들조차 농사에 관해서는 절대적 무지상태에 갇혀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요컨대 지금 우리는 진정한 농사란 무엇이며, 생태계의 장기적 보존을 위해서 흙을 보호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리고 그 흙을 보호하는 데는 왜 대규모 농산업이 아니라 반드시 소규모 농민이 중심이 된 농촌공동체가 살아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무것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분위기에 균열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기후변화 시대라는 전대미문의 비상상황에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제 너무 늦었다고,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체념에 빠지거나 자포자기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그런 허무주의적인 태도는 가장 불경스러운 교만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성공의 열매를 거두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과 의무를 자각하고 끝까지 최선의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옛 선현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