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은 온 세계의 이목을 끌며 일단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한 번의 회담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중요하고, 어쨌든 상대방을 믿어보기로 결심을 하고 합의문에 서명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회담 직후 한 시간 넘게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회담의 성과를 의심하는 미국과 유럽의 저널리스트들을 향하여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의 전망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되풀이해서 천명하는 모습을 보면, 이 회담에서 두 지도자가 구체적으로 무슨 얘기를 했건 그들 사이에는 쉽사리 깰 수 없는 ‘불가역적인’ 약속이 있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직 넘어야 할 숱한 난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것들은 결국은 실무적인 영역의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북미 간의 관계가 이제 원칙적으로는 적대관계의 해소라는 길로 접어들었음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번의 회담은 두 적대국 정상의 최초의 만남이지만, 아마도 그것은 언젠가는 역사가들에 의해 매우 큰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던 상황이 급변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만남이 흔히 볼 수 있는 정부 수반들 사이의 우의를 다지기 위한 만남이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 기왕의 세계질서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2차대전 이후 지난 70년간 세계의 질서는 기본적으로 강고한 안보논리에 의해 지배되어왔고, 그 과정에서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든지 대다수 민중의 삶은 일그러지고 상해를 입고, 크나큰 훼손을 당해왔다. 이번의 북미 정상회담은 그러한 안보 우선 논리를 떠받치는 근본적 정신구조, 즉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사고의 끈질긴 잔재를 결정적으로 깨뜨리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도 회담은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되돌아보면, 지난 70년간 미국의 세계에 대한 패권적 지배는 단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에 의존한 것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2차대전에서 미국이 최대의 승전국이 된 다음에 소련이라는 새로운 적을 발견(혹은 발명)하여 안보체제를 강화하는 데에 편집증적으로 집중한 것에 따른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역사가들이 증언하듯이, 이 안보체제의 정비와 강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다름 아닌 6·25전란(한국전쟁)이었다. 세계대전이 종결된 상황에서 미국의 지배층은 국민들에게 새삼스레 거액의 안보 및 국방 관계 예산이 필요하다는 점을 납득시킬 대의명분이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한반도에서 때마침 전쟁이 터진 것은, 당시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했다는 말처럼, 그야말로 ‘천우신조’였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은 미국의 안보체제의 핵심 기구들―국가안보회의, 중앙정보국, 펜타곤 등등―을 신설하거나 강화하는 빌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이후 미국과 세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되는 ‘숨은 지배자’, 즉 ‘군산복합체’의 형성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리고 그 한국전쟁이 종결되지 않고, 정전상태로 오랫동안 계속돼왔다는 것은 미국의 패권적 세계지배와 군산복합체의 온존과 확대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비에트사회주의권이 붕괴함에 따라 급작스럽게 ‘적’을 잃어버린 군산복합체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의 긴장상태와 중동 지역의 불안정한 정세는 변경되지 않고 반드시 지속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이 두 곳에서의 전쟁 혹은 준전시 상황이 종식된다면 군산복합체가 유지되어야 할 명분 자체가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의 주류 언론을 비롯하여 기성 정치인, 관료, 학자, 지식인들 다수가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이 만나는 것 자체를 반대해왔고, 막상 회담이 끝나자 성과가 없다거나 지나친 양보를 하였다고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격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북미 정상회담을 거쳐 한반도의 긴장상태가 완화되고, 이 지역에 궁극적으로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수립된다면 결국은 군산복합체가 와해될 것이고, 그 결과 군산복합체와 다양한 형태로 얽힌 채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는 미국 및 서양의 지배층의 존립 토대가 허물어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전후 미국의 지배체제가 기본적으로 안보논리 위에 구축되어온 데에 연유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최근의 한반도를 둘러싼 해빙 분위기는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운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변화는 기왕의 허다한 정치엘리트들과는 거리가 먼 배경을 가진 인물이 새로운 미국의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여타의 엘리트 정치가들처럼 ‘군산복합체’라는 거대하고 뿌리 깊은 지배세력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면, 지금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주류 언론과 수많은 ‘전문가들’의 압도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과의 대화를 성사시키고, 나아가서 그 대화의 결실을 위하여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잠정적인) 중단을 결심까지 하게 된 것은 실제로 불가능했을 게 틀림없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 국민들의 트럼프에 대한 탄핵 찬성 여론은 40%인 반면에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지지 여론은 51%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여론 동향으로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이 적어도 자신의 재임기간 중에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지 않을 수 없음이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많은 난관이 있겠지만 한반도의 냉전체제는 조만간 종식을 고하고, 남북한이 화해·협력의 관계 속에서 활발히 교류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부터인지도 모른다. 평화체제가 성립되고, 북한이 개방적인 사회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과연 어떠한 발전모델을 택할 것인가,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사회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한 그 발전모델을 택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우리들이 협력할 것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등등, 숙고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들에 우리는 곧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모처럼의 남북화해 분위기 속에서 남한 사람들 중 다수는 대뜸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중국과 러시아로, 그리고 유럽으로 가는 철도여행을 꿈꾸고 있지만, 그런 꿈을 꾸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북한이 국가 주도의 시장개방과 경제발전 모델을 채택함으로써 과연 중국이나 베트남이 보여준 나쁜 선례를 답습하지 않고, 민주적이고 생태적으로 건전한 사회,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이 크지 않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그것이 한반도와 동아시아 전역을 지속 가능한 새로운 문명권으로 변환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꿈같은 소리가 아니다.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온갖 고난과 모욕을 당하며 살아온 한반도 주민으로서 우리에게는 남북화해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지금까지와는 본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상상해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책임이자 의무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한반도가 안보논리라는 근원적인 질곡으로부터 흔쾌히 벗어나는 게 가능할지 아직은 상당히 불안한 상황에서, 지금과 질적으로 다른 한반도에서의 새로운 삶을 구상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실현성 여부를 떠나서 늘 인간다운 삶에 대해 꿈꾸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따져보면 모든 인간현실은 결국 인간 자신의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호 《녹색평론》이 북한의 경제발전 방향에 관련하여 무엇보다 환경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농사와 지역 중심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들을 게재한 것은 비록 원론적인 수준이나마 이런 종류의 논의가 남북 양쪽에서 활발히, 그리고 진지하게 전개되기를 바라는 심정 때문이다. 그리고 불후의 변혁 사상가 맑스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두 편의 글을 마련한 근본 취지도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 역시 모처럼 열린 남북화해 시대를 맞아 더욱 절실해진 새로운 삶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