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행정부 관료들은 사석에서 북한이 경수로 완공 이전에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계획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외교 전문기자인 글렌 케슬러가 2005년 7월 13일에 보도한 내용의 일부이다. 1994년 북미 간의 제네바 합의에서 미국이 한 핵심적인 약속 가운데 하나는 “2003년을 목표 시한으로 총 발전용량 2000MWe의 경수로를 북한에 제공하기 위한 조치를 주선할 책임을 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미국은 이 약속을 이행할 의사가 별로 없었다. 경수로 완공 이전에 북한이 붕괴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네바 합의에선 “미국과 북한은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 있어서의 협력을 위한 양자협정을 체결”하기로 했지만, 미국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기실 제네바 합의의 이면에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깔려 있다는 점은 당시부터 비교적 널리 알려진 비밀(?)이었다. 그런데 미국만 북한붕괴론을 맹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김영삼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제네바 합의 이후 한미 양국의 대북정책의 초점은 ‘북한 연착륙’에 맞춰졌다. 북한의 붕괴가 예견되는 만큼, 그 붕괴가 전쟁과 같은 경착륙(硬着陸)이 아니라 한미 양국 주도의 통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시각이 강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대단히 크다. 흔히 북한의 전략·전술은 핵과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시간을 벌거나 끄는 데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위에서 소개한 내용은 이러한 역사인식이 엉터리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30년 가까이 지난 북핵 역사를 복기해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들도 많고 또한 잘못 알려진 사실들도 많다. 이러한 진실을 들춰내는 것이 불편할 수는 있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을 직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북핵문제의 본질도 제대로 볼 수 있고 또한 그 해법도 모색할 수 있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담판은 역사전쟁?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이 다가오고 있다. 아마도 월드컵 축구 결승전에 못지않은 금세기 최대 이벤트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북한 정권 수립 이후 70년 만에 처음으로, 그것도 올해 초까지 핵 버튼을 자랑하면서 전세계를 일촉즉발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광자들(?)의 만남이니 그럴 법도 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회담 일정과 장소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만나게 될 곳은 높고도 험준한 산의 정상(summit)이다. 만남 이후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정상에서 내려와 한반도와 세계를 평화의 길로 인도할지, 아니면 잡은 손을 놓고 한반도와 세계를 벼랑 끝으로 내몰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당연히 전자를 간절히 바라지만, 후자의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회담의 성패를 좌우할 요소들과 변수들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북핵 역사의 인식이다. 트럼프 행정부와 미국 주류를 지배하고 있는 사고는 “지난 25년 동안 북한의 시간 끌기와 시간 벌기 전략에 속아왔고 앞으로는 절대로 속지 않겠다”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1979년 이래 미국 정부와 민간영역에서 한반도 문제에 천착해온 데이비드 스트라우브가 “북한은 지난 30년간 우리를 바보 취급했다”고 말할 정도이다.1)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2017년 11월 8일 한국 국회 연설에서 “북한 정권은 미국과 동맹국에 했던 모든 보장, 합의, 약속을 어기면서 핵과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그의 최측근이자 국무장관으로 내정된 마이크 폼페이오는 올해 4월 12일 미 의회 인준 청문회에서 “(북한과의) 실패한 협상 역사에 대해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며, “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고 장담했다. ‘슈퍼 매파’로 불리면서, 제네바 합의 파기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기용되기 직전인 3월 초·중순에 미국 언론에 잇따라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3개월이든, 6개월이든, 12개월이든, 결승점을 통과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고 한다.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수락한 것은 그 기간을 단축하겠다는 것이다.… 협상이 하급에서 시작돼 중급으로 가고 결국 정상급으로 가는 데에는 지금부터 2년은 족히 걸린다. 이 사이에 북한은 운반 가능한 핵무기를 갖게 될 것이다. 이건 우리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트럼프가 회담에서 ‘북한이 시간을 벌려 하고 있구나’라고 판단한다면 시간 낭비를 피하고자 아마 회담장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인식은 정반대이다. 2017년 11월 17일자 〈노동신문〉은 “폭제의 핵몽둥이를 휘두르는 미 제국주의와는 오직 정의의 핵억제력으로 맞서는 것 외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 우리 군대와 인민이 조미(북미)대결의 역사를 통하여 찾게 된 결론”이라고 주장했다. 속은 쪽은 미국이 아니라 자신이며, 미국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핵억제력’부터 갖춰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결론이었다. 북한이 작년 한 해 미국 주도의 “최대의 압박”에 맞서 “국가 핵무력 건설 완성”을 향해 전력 질주를 했던 것도 이러한 인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진실은 무엇인가
트럼프는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등 전임 대통령들이 북핵문제를 ‘엉망진창’으로 물려줬다고 맹비난을 퍼부어왔다. 실제로 클린턴은 북한붕괴론에 함몰돼 제네바 합의 이행에 미온적이었다. 여기에는 1994년 11월 미국 중간선거에서 다수당을 장악한 공화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은 것도 주효했다. 뒤이어 집권한 부시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를 ‘악행에 대한 보상’으로 규정하고는 이 합의의 파기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다가 결국 성공했다. 기대를 모았던 오바마 행정부도 제네바 합의와 2005년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의 무산 책임을 북한에 돌리면서 “같은 말을 세 번 사지 않겠다”며 ‘전략적 인내’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런데 북핵문제를 ‘엉망진창’으로 물려줬다며 전임자들을 맹비난했던 트럼프는 정작 본인도 역사인식의 오류를 되풀이하고 있다. “북한과의 외교는 항상 북한이 원하는 것을 얻고는 합의를 깼기 때문에 실패해왔다는 점을 역사가 보여준다”는 인식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핵 상황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데에는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든 북한 정권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약속과 합의 위반으로 따진다면, 그 책임은 미국(그리고 때로는 한국)이 더 크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몇 가지 사례만 짚어보자.
북한이 1990년을 전후해 비밀리에 핵무기 2개 정도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 10kg 정도를 추출했다는 의혹이 여전히 정사(正史)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당시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신고한 90g이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 2008년에 확인되었다. 북한이 건네준 1만 8,000여 쪽 분량의 핵시설 가동 일지를 미국이 분석한 결과는, 북한의 플루토늄 신고는 “만족할 만하다”는 것이었다. 이를 근거로 부시 대통령은 딕 체니 부통령 등 네오콘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했다. 북핵문제의 발단은 미국의 허위 정보에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과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1992년 1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이었던 팀스피릿 중단을 약속했다. 이는 사전에 북한에 통보되었고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그리고 당시 한미 양국이 강력히 요구한 북한의 IAEA 안전조치협정 가입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그해 10월 양국의 대선을 앞두고 한미 양국의 국방장관들은 느닷없이 팀스피릿 재개 방침을 발표했다. 이는 이듬해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이어졌다.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북핵문제를 실기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대한 미국의 이행 성적도 낙제 수준이다. 매년 50만t씩 제공키로 했던 중유는 공화당의 반대로 번번이 늦춰지거나 축소되기 일쑤였고, 2003년까지 제공키로 했던 경수로도 30%의 공기도 채우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정치적·경제적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를 추구한다”는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북한에 핵무기 불위협 또는 불사용에 관한 공식 보장을 제공한다”고 해 놓고선, 이후에도 북한을 상정한 모의 핵 공격 훈련을 실시했다는 사실이 미국의 비밀해제 문서를 통해 확인되기도 했다.
2000년에는 북미 공동코뮤니케가 채택됐다. 이 합의의 핵심적인 미국 측 약속 가운데 하나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부시가 방북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 집권한 부시 행정부는 북미 공동코뮤니케를 헌신짝처럼 내버렸다. 그러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 선제공격 대상에 올려놓았다. 결국 실 끝에 매달렸던 제네바 합의는 우라늄 농축 문제로 북미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2005년 9·19 공동성명이 반전(反轉)의 기회가 되는 듯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방코델타아시아(BDA) 금융제재를 가했고 이에 북한이 격렬히 반발하면서 9·19 공동성명도 휴지조각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2007년 들어 북미 직접 대화에 나서면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북 강경책을 주도했던 네오콘들이 이라크전쟁의 실패 여파로 줄줄이 쫓겨난 것이 핵심적인 배경이었다. 그 결과 9·19 공동성명의 이행 조치들인 2·13 합의와 10·3 합의가 6자회담에서 채택됐다.
그런데 2008년 들어 북핵 검증 문제가 첨예한 이슈로 부상했다. 대개 알려진 상식은 북한이 검증 의정서를 수용하지 않아 6자회담이 파국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시 검증은 다음 단계에서 논의하기로 했었던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도 인정한 바이다. 2008년 6월 헤리티지재단 연설에서 라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3단계에서 다루기로 했던 검증과 원자로에 대한 접근과 같은 이슈를 2단계로 가져왔지요.” 경기 중에 골대를 옮긴 셈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중단된 6자회담은 10년이 지나도록 한 차례도 열리지 않고 있다.
과거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잘못된 정책의 기초가 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 잘못된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을 ‘악마화’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곤 한다. 부시 행정부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이 이에 해당된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가 무엇일까? 1974년부터 중앙정보국(CIA)과 국무부 정보국 등에서 북한문제를 다뤄온 로버트 칼린은 “사실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2001년 1월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나타난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함으로써 더더욱 실패한 정책을 야기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말한 ‘더더욱 실패한 정책’에는 전쟁도 포함된다.2)
미국은 왜?
만약 북핵문제가 해결되면 어떻게 될까? 북핵문제의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따져봐야 할 질문이다. 이것은 또한 북핵문제를 관통해온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냉전 종식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친 1990년을 전후해 벌어진 일이다. 당시 미국 내에선 냉전이 종식되고 있는 만큼 해외 주둔 미군의 대폭적인 감축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과 세계 패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해외 주둔 미군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약 4만 명의 주한미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무부와 의회는 〈동아시아 전략 보고서〉를 통해 3단계 주한미군 감축 계획을 입안했다. 반면 펜타곤은 〈국방계획 지침 보고서〉를 작성해 대규모의 주한미군 주둔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무게중심은 전자에 있었다.
그러자 펜타곤과 CIA는 반격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북한이 비밀리에 약 10kg의 플루토늄을 추출해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북한의 비밀 핵무기 개발설은 주한미군 감축을 중단시킬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구실이었다. 하지만 노태우와 아버지 부시는 팀스피릿을 중단키로 했고, 북한은 IAEA 안전조치협정에 가입했다. 남북관계에 이어 북일관계도 개선되고 있었다. 그런데 펜타곤은 중단키로 했던 팀스피릿을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한미 양국은 북핵문제를 이유로 주한미군 감축 계획을 중단키로 했다. 이 과정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딕 체니와 차관이었던 폴 월포위츠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아들 부시 행정부에선 부통령과 국방부 부장관이 되어 대북 강경책과 한미동맹 재편을 주도했다.
그런데 이들을 비롯한 공화당의 오랜 염원이 있었다. 레이건이 못다 이룬 ‘스타워즈’, 즉 미사일방어체제(MD)가 바로 그것이었다. 단언컨대 MD는 1990년대 이후 한반도 문제를 이해하는 데 키워드이다.3) MD와 북핵의 악연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0년 만에 의회 다수당 지위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미국 공화당은 그해 11월 중간선거를 40여 일 앞둔 시점에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정강정책을 내놓았다. 이 공약집에 담긴 외교안보정책 1순위는 이런 것이었다. “효과적인 MD를 만든다는 미국의 약속을 부활시키겠다.” 그런데 공화당이 공약을 발표한 지 4주 만에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 제네바기본합의를 체결했다. 공화당은 북한의 위협을 MD 구축의 최대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행정부가 북한과 덜컥 합의를 한 셈이다. 공화당의 제네바 합의에 대한 체질적인 거부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의회는 1995년 클린턴 행정부에게 ‘미국이 직면한 탄도미사일 위협에 대한 국가정보평가 보고서’를 제출토록 요구했다. 이에 따라 클린턴 행정부는 보고서를 작성, 제출했는데 결론은 “미국 본토에 대한 즉각적인 탄도미사일 위협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발끈한 공화당은 자신들 주도로 별도의 위원회를 만들었다. ‘럼스펠드 위원회’라고도 불린 ‘미국에 대한 탄도미사일 위협 평가 위원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위원장으로 기용된 도널드 럼스펠드는 ‘MD 보일러’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다.4) 그가 주도한 보고서가 1998년 7월에 나왔는데, 그 결론은 이랬다. “북한이 5년 이내에 미국 본토까지 다다를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성공할 것이다.”
한편 1998년 8월 들어 두 가지 사건으로 MD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하나는 〈뉴욕타임스〉가 정보기관 관계자들을 인용해 “북한이 금창리에 비밀 핵시설을 만들고 있다”는 의혹을 보도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기다리면 망할 것 같다던 북한이 건재함을 과시하듯 3단계 로켓(광명성 1호)을 쏘아 올린 것이었다. 북한이 비밀 핵시설을 보유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보도는 공화당이 그토록 저주한 제네바 합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쏘아 올린 것 역시 MD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호재였다. 미국 내 MD파들로서는 그야말로 ‘광명’을 만난 셈이었다.
이에 고무된 공화당 주도의 의회는 “가능한 한 빨리 MD를 구축하라”는 법을 또다시 통과시켰다. 그러자 클린턴 행정부는 ‘3+3계획’, 즉 3년간의 실험평가를 통해 이후 3년간 초기 국가미사일방어(NMD)를 실전 배치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이로써 NMD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듯했다. 그러나 반전이 찾아오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 끝에 1999년 두 차례에 걸쳐 핵시설이 의심되는 금창리 동굴을 방문했다. 결과는 ‘텅 빈 동굴’이었다. 또한 북미 간 미사일 협상도 본격화되면서 북한은 “북미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로켓 발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2000년에 들어서는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간의 특사 교환이 이뤄졌다. 한반도 평화 구축 과정이 본격화되면서 클린턴도 MD문제를 차기 정권으로 넘기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해결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2000년 10월 하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회담을 가졌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김정일이 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요구사항 대부분을 수용할 정도로 매우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밝혔다. 이제 남은 건 클린턴의 방북이었다. 미국정부도 약속한 바였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잡은 공화당은 그의 방북 길을 가로막았다. 그 이유에 대해 올브라이트는 이렇게 회고했다. “의회와 전문가 그룹의 많은 사람들이 북한과 하는 거래가 MD 구축의 명분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에 북미 정상회담에 반대했다.”
2001년 1월 취임한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의 협상을 없던 일로 해버렸다. 그리고 북한의 위협을 이유로 MD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대북 협상과 MD 구축은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하원에 출석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북한이 (탄도미사일 보유를 통해) 행동의 자유를 갖게 되면, 그런 행동에 나설 가능성을 나는 부인하고 싶지 않다.”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은 “탄도미사일 기술이 대규모로 확산되고 있는데, 이는 북한이 세계 각지에 미사일 기술을 팔고 다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은 “만약 금년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질 경우, 우리가 직면할 가장 가공할 위협 가운데 하나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위협이 될 것”이라며 조속히 주한미군을 보호할 MD를 배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북한위협론’을 부풀려서 MD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던 미국의 안보정책은 엉뚱한 곳에서 뚫리고 말았다. 작은 칼을 손에 쥔 테러리스트가 여객기를 납치해 뉴욕과 펜타곤을 공격한 것이다. 9·11테러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는 MD의 구실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백악관은 “부시 대통령이 대선 유세 때부터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해왔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것이 바로 대통령이 MD를 추진하려고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했다. 존 볼턴 국무부 차관은 “이라크가 가장 큰 우려이고, 북한은 극도로 불안한 국가”라고 주장했다. 급기야 부시는 2002년 1월 29일 자신의 첫 국정연설에서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시점에, 북한은 핵과 미사일 관련 합의를 비교적 잘 지키고 있었다. 핵무기 개발을 중단키로 한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고, 부시 행정부로부터도 중유를 받고 있었다. 2002년 말에 불거진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보유 여부는 여전히 논란거리이지만, 확실한 것은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언급하기 전후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탄도미사일과 관련해서도, 북미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발사를 유예하겠다고 약속한 1999년 베를린 합의 및 2000년 북미 공동코뮤니케를 준수하고 있었다. 9·11테러의 주범으로 지목된 알 카에다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흡수통일론’과 북핵
이처럼 북핵문제의 이면에는 대규모의 주한미군과 MD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이면이 있다. 바로 한국의 흡수통일론이다. 김영삼·이명박·박근혜 정부는 ‘통일몽’에 빠져 있었다. 특히 MB정부의 역사적 과오는 너무나도 크다. 돌이켜보면 MB정부는 역사적인 업적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선 극우에 가까웠던 부시 행정부의 변신이 있었다. 임기 초에 북한을 악의 축으로 불렀다가 임기 막바지에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한 것이다. 이는 한반도 핵문제를 비롯한 정전체제에서 빚어진 비정상을 정상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또한 2차 남북 정상회담 합의사항을 이행하면 그 공도 MB정부에 돌아갈 터였다. 그러나 MB정부는 역주행을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청와대의 머릿속은 딴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MB정부가 딴생각을 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김정일의 와병설이었다. 김정일이 2008년 8월 14일 군부대 시찰 이후 공개 활동을 뚝 끊고, 특히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 60돌 행사에도 불참함으로써 와병설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러자 국가정보원은 “김정일이 뇌졸중이나 뇌일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고 현재는 회복 중”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부축하면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거나, “양치질을 할 정도의 건강 상태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등 마치 김정일을 옆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상세한 언급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국정원을 비롯한 정보기관들은 정작 김정일이 2011년 12월 17일에 사망했을 때에는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국정원 직원들이 선거 등 국내 정치에 대거 동원되면서 가장 중요한 대북 정보를 놓치고 만 것이다.
김정일의 와병설이 불거지자, MB정부 안팎에서는 이 기회에 통일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서재진 통일연구원 원장은 2008년 9월 하순에 “김정일의 건강 이상설이 발표되면서 통일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고, 이기택 민주평통 수석부의장도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통일에 이제라도 서둘러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그동안 통일에 비해 평화의 가치를 과도하게 내세웠던 적이 있었다”며, “그러나 평화와 통일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추구해야 할 우리의 가치”라고 강조했다. 11월 중순에는 “자유민주주의하에서 통일하는 것이 최후의 궁극 목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김정일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고 그의 죽음은 북한 붕괴로 이어질 테니 한국은 이를 기다리면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김정일 와병설은 북한 급변 사태 대비론으로 급격히 옮겨붙었다. 이상희 국방장관은 11월 초에 “북한의 불안정 상황을 대비하는 게 군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12월 초에는 “북한에 급변 사태나 불안정 사태가 발생할 때 중국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해 조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급변 사태 발생에 대비해 개념계획인 5029를 작전계획으로 격상하는 것을 비롯해 대응책 마련에 나설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2008년 12월 31일 통일부 업무보고 자리는 MB정부의 흡수통일 야심을 여실히 드러낸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김하중 통일부장관은 남북대화 재개와 관계 정상화 방안을 보고했다. 2008년 내내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남북관계를 2009년에는 풀기 위한 방안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이명박은 “과거와 같이 북한에 뭔가를 주고 경제협력을 하는 것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된다”며 김하중을 강하게 질타했다. 그러면서 대화 재개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며, “통일부는 제대로 된 근본적인 전략을 세워보라”고 주문했다. MB가 말한 ‘근본적인 전략’이 바로 북한 급변 사태 대비 및 흡수통일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을 구체화하기 위해 김하중을 경질하고 현인택을 통일부장관으로 기용했다.
현인택은 2009년 7월 20일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를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이 앞으로 3~5년밖에 살지 못할 것 같다”면서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 시 한국과 미국 정부는 한반도 통일을 향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2010년 1월 11일 유명환 외교통상부장관은 로버트 킹 미국 북한인권특사를 만난 자리에서 “정확히 몇 명인지 확인해줄 수는 없지만 해외에서 활동해온 고위급 북한 관료들이 최근 한국으로 망명했다”고 밝혔다. 한 달 뒤 천영우 외교부 차관은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와의 면담에서 “중국은 김정일 사후 북한의 붕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며, “북한은 이미 경제적으로 붕괴되었고 김정일 사후 2~3년 후에 정치적으로도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통일몽에 심취해 있던 MB정부에게 북핵 협상은 부질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다리면 북한이 붕괴되어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핵 협상을 가로채고 만 것이다. 이에 따라 MB정부는 부시 행정부보다 더 강경하게 검증 의정서 수용을 북한에 압박했고, 이게 관철되지 않자 에너지 지원을 중단해버렸다. 또한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북미대화는 물론이고 6자회담에도 극히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박근혜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김정일과 김정은 부자는 남한의 두 정부를 거치면서 핵몽을 더욱 크게 키우고 말았다. 핵억제력 법을 제정해 핵 보유의 목적 가운데 하나로 ‘제도 통일’, 즉 남한의 흡수통일을 저지하겠다는 것도 포함시키면서 말이다.
북핵의 뿌리를 캐내려면
북핵문제는 반드시 풀어야 한다. 하지만 북핵문제‘만’ 풀 수 있는 도리는 없다. 이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와 미래에도 마찬가지이다. 북핵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뿌리를 캐내는 작업이 선행되거나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의 보도를 인용해 그 뿌리가 무엇인지 성찰해보자.
AP통신은 한국전쟁 발발 60년째를 맞이해 미국의 비밀해제 문서를 분석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1950년대부터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반복적으로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해왔고, 계획해왔으며, 위협해왔다.” 그러면서 “미국의 핵 위협은 북한에게 핵무기를 개발·보유할 구실을 주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5)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평화협정이 공식 체결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한국전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미국이 주도하거나 개입한 열두 차례의 전쟁 중 최장기 기록을 가진 사례”라고 지적했다.6)
우리가 핵을 가진 북한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골몰해온 지는 10년 안팎이 지났다. 그런데 북한은 70년 가까이 핵 위협을 가하는 미국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를 두고 고심해왔다. 전세계에서 가장 깊이 지하철도 파고 전 국토도 요새화했다. 그만큼 미국에 대한 두려움이 길고도 깊었다. 이를 외면하고 무시해온 사이에 북한은 결국 ‘신의 불’을 달구고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어 미국에 두려움을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또한 협정문 서언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정전협정의 취지는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교전을 멈추는 데 있다. 그런데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 체결이 65년째 이뤄지지 않으면서 한국전쟁은 세계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북핵을 머리 위에 이고 살고 싶지 않다면, 70년 가까이 북한이 머리 위에 이고 살아온 미국의 핵 위협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도 생각해봐야 한다. 전쟁도 평화도 아닌 휴전 상태를 어떻게 종결할 것인가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야만 북핵의 뿌리를 캐낼 수 있다.
1)〈중앙일보〉, 2017년 11월 21일
2)http://www.38north.org/2017/11/rcarlin110717
3)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졸저, 《MD본색》, 《사드의 모든 것》 참고.
4)럼스펠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국방장관으로 기용되었고 MD구상을 주도했다.
5)The Associated Press, October 10, 2010.
6)Newsweek, January 11,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