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이 이번호 《녹색평론》을 받아든 날은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린 직후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볼 때,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획기적인 성과를 얻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리하여 아마도 그때쯤에는 5월 말이나 6월 초로 예상되는 북미 정상회담의 개최 전망도 훨씬 더 구체화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회담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회담이 어떤 형태로든 좋은 결실을 맺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후는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징조가 좋다고 하더라도, 북핵문제라는 난제 중의 난제를 놓고 벌어지는 일련의 대화와 그 준비 과정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불과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전쟁 발발이라는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 짓눌려 있던 한반도의 정세가 이처럼 단시간에 급변한 것은, 생각해보면, 실로 경이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상황이 이처럼 급속히 바뀌게 된 데에는 일차적으로 평창겨울올림픽이라는 절호의 계기가 주어졌고, 관련 당사자들이 이 계기를 놓치지 않고 지혜롭게 활용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아야 할 것은 우리가 ‘촛불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민주정부를 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북한붕괴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근거로 북한이 저절로 망하기만을 기다리며 제1, 2차 남북 정상회담의 성과들을 허무하게 무너뜨려온 수구세력의 집권이 더 연장되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지금쯤은 극단적으로 악화된 한반도 정세 속에서 아무런 출구도 없이 갇혀 있었을 게 틀림없다.
한국의 수구집단이 오랫동안 배타적인 권세를 누리면서 시민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적대적인 남북관계 덕분이었음은 누구보다 수구세력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지금도 남북관계를 조금이라도 더 화해·협력의 관계로 변화시키려는 문재인 정부의 노력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헐뜯는 그들의 행태를 보면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재확인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의 긴밀한 관계이다. 즉, 우리가 민주주의를 살리면 남북관계가 보다 부드러워지고, 또한 남북관계가 부드러워지는 정도에 따라 남한의 민주주의가―궁극적으로는 북한의 민주주의도―더욱 번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 내부의 요인만으로는 한반도 정세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 변화에는 문재인 정부의 공로가 매우 큰 것이 사실이지만, 북한 당국의 판단과 결심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분위기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은 왜 이제 와서 자신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면서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려왔던 핵무기를―조건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포기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면서 ‘대화’를 적극 시도하고 있는가? 외부 세계의 그 누구도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결국은 이대로 더는 갈 수도, 가고 싶지도 않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판단에 이르게 된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적 봉쇄와 군사적 위협을 버틸 힘이 더는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고, 기왕의 핵과 미사일 개발 정도로도 이제는 외부로부터의 침략은 염려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는 자신감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경제발전에 보다 집중함으로써 ‘인민들의 생활상의 요구’에 보다 직접적으로 부응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게 있다. 즉, 지금 한국의 수구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해외의 상당수 주류 언론에는 최근의 북한 당국의 태도 변화가 실상은 ‘시간 벌기’를 위한 속임수라고 단정하거나 강한 경계심을 표명하는 논평기사가 연일 게재되고 있는데, 이것은 과연 설득력 있는 우려일까? 북한이 ‘시간 벌기’를 한다면 핵무기나 핵무기의 운반 수단인 미사일의 성능을 더욱 높이기 위한 시간을 확보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을 벌어 개발한 고도화·정밀화된 핵무기를 가지고 북한이 실제로 미국 본토를 겨냥해서 공격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정말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상식이 있다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핵무기란 본질적으로는 결코 사용할 수 없는 매우 특이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힘을 가진 상대끼리도 그러한데, 하물며 북한과 같은 취약한 국가가 자기방어를 넘어서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핵무기로 공격한다는 것은 완전히 미쳤거나 자살할 목적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한국 내의 수구파 언론이나 정치인들이야 그렇다 치고, 서양의 언론들이 계속 ‘시간 벌기’ 논리를 들먹이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설마 핵무기가 어떤 무기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결국 인종적·민족적·이데올로기적 편견이 개입돼 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세계적인 범위에 걸친 군산복합체 등 기득권층과 연결된 뿌리 깊은 이해관계 때문에 북핵문제의 해결을 통한 한반도 혹은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와 안정을 바라지 않는 그들의 속마음이 표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사에서는 합리적인 사고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황은 늘 있게 마련이지만, 국제관계는 특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북핵문제를 걱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평화를 위해서이다. 그런데도 트럼프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 이후 미국정부는 끊임없이 북한에 대한 선제적 군사행동의 필요성을 말해왔고, 그 결과 작년 1년 내내 한반도는 마치 전쟁 전야와 같은 공포 분위기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 전쟁을 한다”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은 논리(혹은 거짓논리)가 우리들의 목을 누르고 있는 상황이 계속돼온 것이다.
그 점에서, 남북관계의 개선과 ‘비핵화’를 위한 대화는 우리가 거짓논리와 몰상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다 인간다운 위엄을 가지고 진실 속에서 사는 게 가능한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인간답게,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다양하게 이야기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습관이다. 즉, 노골적인 거짓말 이외에 지나치게 거창한 말이나 관념적인 어휘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것 역시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행위가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목할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최근 발언이다. “남북이 함께 살든 따로 살든 서로 간섭하지 않고 피해 주지 않고 함께 번영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만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지난 3월 21일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회 회의에서 행한 발언이라고 보도되었는데, 우리는 이 말에서 너무나 닳고 닳은 직업정치인들의 상투적인 말을 들을 때와는 너무도 다른 신선한 느낌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이 말은 어떠한 가식적인 꾸밈도, 거창한 개념적인 어휘도 없이 매우 알아듣기 쉬운 소박한 일상어로 되어 있다. 그러나 쉬운 표현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희망과 실감에 매우 충실한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여기서 우리는 남북연합이니 연방제니 1국가2체제니 하는 남북 간의 관계설정에 관련해서 정치가들이나 전문가들이 흔히 쓰는 공식적인 어휘들을 접할 때와는 전혀 다른 ‘진정성’과 ‘절실한 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의 수구언론의 눈에는 대통령의 이 말이 ‘반헌법적’ 발언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들은 이 말이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라고 적혀 있는 헌법 66조 3항을 어긴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실로 기발한 주장을 하고 있다(〈조선일보〉 온라인판, 2018년 3월 21일).).
생각해보면, 실제로 ‘진정성’ 여부를 떠나서, 오랫동안 길들여져 습관화된 언어와 사고방식으로는 새로운 활로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우리는 최근의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주는 의외의 행동도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다. 항간의 관측대로, 지금 트럼프가 북핵문제에 관련해서 긍정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것은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도 해내지 못한 해묵은 난제를 자신만이 해낼 수 있음을 입증하고자 하는 자기과시 욕망 탓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미국의 기성 지배엘리트층 출신이었다면, 어떠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처럼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지는 않았을 공산이 크다.
다시 말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가 미국의 정치와 외교 및 군사 분야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이른바 파워엘리트들과는 거의 인연이 없는 ‘국외자’라는 점과 큰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미국의 기성 지배층이나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과 지지자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일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트럼프에게는 아무런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상, 신조도 없다는 점이다. 종잡을 수 없는 경박함과 무례함, 퇴영적인 언행으로 끊임없이 분란을 일으키면서도, 그가 여전히 상당한 대중적 지지 속에서 대통령직 수행을 계속하는 것은 미국의 평범한 시민들과 그 자신이 기성의 엘리트층에 대한 극심한 반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는 결코 우연적으로 등장한 인물이 아니다. 트럼프의 등장은 오늘날 미국을 위시한 서구세계의 민주주의―정확히 말하면 선거민주주의―가 직면한 위기를 상징하는 극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미국 시민 다수는 그동안 상류층 엘리트들이 온갖 논리로 미화해온 자유민주주의가 실은 대중을 배제한 엘리트들만의 민주주의임을 온몸으로 체득해왔고, 그 과정에서 쌓인 분노를 어느 모로 보나 엘리트와는 거리가 먼 트럼프라는 인물에게 표를 던지는 것으로써 표출한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미국에서는 전체 유권자들 중 절반 이상이 자신들의 생활이 나아질 수만 있다면 민주주의든 독재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니까 트럼프가 결국 민주주의의 심각한 패퇴를 표상하는 인물이라면, 그에게서 민주주의의 재생도, 좋은 정치를 기대하는 것도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인물이기에 트럼프는 지금 해묵은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미국의 엘리트 정치가, 외교관들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북핵문제에 접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기는 한반도가 65년 동안 휴전 상태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미국 대통령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심히 곤혹스럽다. 그러나 어쨌든 한반도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지도 모를 획기적인 변화가 이처럼 엉뚱한 인간을 매개로 그 물꼬가 트인다는 것은 실로 기묘한 아이러니이다. 하지만 이 아이러니가 한반도의 해빙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축복’임에 틀림없다. 논리적인 언어로는 예측도, 설명도 하기 어려운 역사의 전개 앞에서 새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