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가 함께 일하고, 서로서로 보살피며 지내는 삶이 좀더 큰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깨달음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데 있다.
― 이반 일리치
거의 일년 내내 선거분위기 속에서 지내다가 결말이 나고, 좀더 개혁적인 인물로 비쳐진 후보가 선출되자, 그에 대한 지지 여부에 관계없이, 이제 새로운 정치,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가 이 사회에 넘쳐흐르고 있다. 이것은 물론 환영할 만한 풍경이다. 오랜 군사 파시즘 치하의 악몽 같은 상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러한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이, 자유로운 경쟁과 선택을 보장하는 선거제도가, 험난한 경로를 거쳐, 우리에게도 이제는 당연한 상식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러한 분위기는 의회민주주의 전통이 견고하다고 알려진 북미나 서유럽 혹은 일본에서도 더이상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에게는 지금 선거가 하나의 집단적인 정화의식(淨化儀式)으로 기능하고, 따라서 다분히 축제 분위기가 될 만한 소지가 있다면, 이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는 서구 산업사회와 달리 어떤 설명하기 어려운 근원적인 활력, 혹은 인간적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오늘날 서구의 이른바 선진산업사회는 철저하게 제도화된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이기 때문에, 정치적 리더십이 개별 정치가들의 인간됨됨이에 좌우될 여지는 좁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대통령제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도, 본질적으로는,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선거를 둘러싸고 한국사회가 뿜어내고 있는 열기는 이른바 근대적인 시스템의 미비 혹은 미숙한 운용으로 인한 현상, 즉 ‘후진성’의 증표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모두가 늘 개탄하는 이 사회의 뿌리깊은 온갖 비리와 부패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결정과 사회적 관행들이 시스템의 합리성이 아니라 인간적 고려에 흔히 의존해온 데 큰 원인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번 선거에서 주로 개혁에 대한 대중적 원망(願望)에 좀더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는 대통령 후보가 당선 직후, 앞으로 개인이든 기업이든 청탁을 하는 경우에는 도리어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차기정부의 방침을 천명한 것은, 지금 부패와 사회적 불공정이야말로 한국사회가 가장 시급히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인간적 요소가 모조리 배제되고, 철저히 합리적인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는 사회가 과연 좋고, 건강한 사회일까 ― 한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물론, 부패문제가 방치되거나, 한국사회의 ‘후진성’을 극복할 노력이 포기되어도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이 사회에 넘쳐흐르는 욕망과 그 에너지가 향하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 좀더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속에서 한국경제는 30년이 넘게 높은 성장을 계속해왔고, 그 연장선에서 지금 “우리도 하루빨리 선진국 대열에 진입해야 한다”는 열망이 이 사회에는 팽배해 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갈망해 마지않는 그 ‘선진적’ 사회란 과연 어떤 사회이며, 지금 인류사회 전체가 직면한 생태적, 사회적, 인간적 위기에 관련해서 ‘선진국 따라잡기’는,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이른바 선진사회의 ‘선진성’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늘날 흔히 ‘남북문제’라고 불리는 선후진국 사이의 관계를 냉철하게 볼 때, 이 세계의 평화를 원천적으로 어지럽히고, 대다수 풀뿌리 민중의 삶을 불구로 만들고, 돌이킬 수 없는 생태적 파괴와 오염을 자행하고 있는 세력은 어디까지나 ‘선진국’이지 ‘후진국’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 자유시장 경제와 ‘세계화’를 주도하고 있는 다국적기업 경영자들과 정치엘리트들과 전문가들과 주류언론은 흔히 현재 가장 긴급히 해결해야 할 세계적인 난제가 ‘후진국’의 빈곤문제라고 말을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왜곡된 현실인식과 편견을 드러내는 것인지는 우리가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 북쪽 선진국들이 ― 그리고 이를 모방한 남쪽 후진국의 일부 특권 계층이 ― 누리고 있는 ‘풍요’는 근본적으로 남쪽의 풀뿌리 민중과 자연에 대한 약탈에 의한 것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있는 것이다.
더욱이, 결코 잊어서 안될 것은, 지금 시시각각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 앞에서, 그래도 이 지구상에 아직 “인간이 거주할 만한” 장소가 남아있다는 것은 극히 단순한 형태의 생존을 영위하고 있는 대다수 풀뿌리 민중의 ‘가난’ 덕분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이 탐욕과 폭력을 끝없이 조장하는 약육강식의 경제논리에 동화되어, 텔레비전과 냉장고와 자동차를 소유하고, 육식중심의 식생활과 골프와 스키와 관광을 즐기는 생활을 ‘선진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 광란의 잔치에 참가하게 된다면 과연 이 지구는 어떻게 되겠는가.
인류 대부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생활방식을 일부 인간이 독점적으로 향유한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범죄이다. 지난 5,000년 동안 인류사회의 일부에서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온 이러한 범죄의 역사와 그 파장은 오랫동안 국지적인 현상에 머물러왔다. 그러나, 콜럼버스 이후 지금까지 500년이 넘게 식민주의적 지배와 약탈, 근대화, 개발, 그리고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점차로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어온 이러한 범죄행위의 거침없는 진전의 결과, 특권적인 ‘풍요’의 향유는 이제 인류사회 전체의 존속 그 자체를 위협하는 재앙의 최대 원인이 되었다.
문제는 가난이 아니라, ‘풍요로운’ 소비문화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경제성장 없이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없으리라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박멸해야 할 바이러스처럼 가난을 무조건 혐오해왔다. 그 결과 ‘품위있는’ 가난과 그 의미에 관한 성숙한 인식은 이 사회에서 극도로 축소되었고, 우리의 삶은 외형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 ― 혹은 그 때문에 ― 내면적으로는 심히 병들고 공허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자립적인 생존의 기반이자 도덕적 삶의 원천인 농경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감각이 상실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식량자급률 25% 수준 ― 그나마도 석유에 의존해서 ― 이라는 한심한 농업현실로는 한 사회공동체의 장기적인 존속이 명백히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목전의 이윤추구에 혈안이 되어,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땅을 죽이는 일에 광분하고 있다.
우리는《녹색평론》을 통해서, 여러해 동안 우리가 왜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지 되풀이하여 말해왔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얘기는 흔히 비현실적인 꿈같은 소리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 정말 관심이 있다면, 무엇이 더 현실적인 태도인지,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빙산을 향하여 돌진하는 타이타닉호의 항로를 변경하거나, 엔진을 멈추자고 하는 게 현실적인 태도인가, 아니면 여객선 안의 사치스러운 향연에 도취한 채, 이 경고를 무시하고, 단지 갑판 위 의자 몇개를 옮기는 따위의 방책에 만족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태도인가.
새로운 정치, 새로운 사회의 실현이 더 많은 돈, 기술, 정책의 문제로 귀결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설령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비효율이 개선되어, 우리 사회가 ‘선진국 따라잡기’에 성공하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정작 그때 가서 우리가 직면할 사태는 훨씬더 끔찍하고, 훨씬더 비인간적인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 12월 2일 독일 브레멘에서 76세의 나이로 갑자기 숨을 거두기까지, 현대적 상황에서는 매우 희귀하게 독립적인 생애를 보낸 ‘떠돌이 학자’ 이반 일리치는 산업사회의 대적(大賊)이었다. 뛰어난 철학자이자 역사가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현인으로서, 그의 생애는 일관되게 근본적인 불경(不敬)과 부조리에 토대를 둔 근대적 산업체제를 뿌리로부터 거부하면서, 풀뿌리 민중의 토착문화를 비타협적으로 옹호하는 데 바쳐졌다. 일리치에 의하면, 토착 민중문화는 “함께 어울려 사는 삶의 행복”을 장구한 세월 동안 증언해온 보고(寶庫)였다. 주목할 것은, 그러한 “어울려 삶의 행복”을 가능하게 한 주된 원천은 결코 ‘경제적 풍요’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는커녕, 그 원천은 기초적인 생존유지 수준에서 영위되는 자급적 생활방식과 그러한 ‘가난한’ 생활방식이 자연스럽게 요구하는 풍부하고 다면적인 인간관계, 그리고 갖가지 삶의 지혜와 기술이었다.
우리가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수십년에 걸친 경제성장과 ‘근대화’와 개발의 결과, 우리의 삶 자체가 말할 수 없이 열악하고, 빈곤한 것이 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허망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존귀한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즐겁게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삶의 근본 전제로서, ‘가난’을 이 시점에서 왜 좀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