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형께
오래 만나지 못했습니다. 여름이 가면 한번 만나볼 수 있으리라 했는데, 어느새 깊은 가을입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몸과 마음이 갈수록 무거워져 가는 듯하여 새삼 서글픈 심정이 됩니다.
요즘도 북한산을 자주 오르시겠지요. 북한산은 많이 망가졌다고는 해도 원래 명산이니까, 지금쯤 가을의 정취가 굉장하리라 짐작됩니다. 하기는 높은 산까지 가지 않아도 어디서나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가을입니다.
문득 이제는 수사(修辭)는 모두 군더더기라는 느낌이 듭니다. 시인 예이츠는 50세가 넘어 쓴 어떤 작품의 첫구절을 단순히 “나무들은 그들의 가을 아름다움 속에 있다”라고 썼습니다. 젊었을 적에는 이 구절이 참 싱겁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학교에서 이 시를 학생들과 함께 읽다가 그 간결한 표현에 새삼스럽게 뭉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왠지 점점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이 아니라, 말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세상의 있음과 신비와 그로 인한 아름다움 앞에 전율을 느낄 뿐입니다.
세상은 본시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곳인데, 그런 세상을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깊어 가는 가을하늘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저 하늘의 오존층이 구멍이 뚫리고, 얇아져 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그래서 예컨대 지구상에서 개구리들이 급속히 멸종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 내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개구리들의 알은 햇빛에 노출되어 있는데, 지금 햇빛은 점점더 많은 자외선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알들이 제대로 부화를 하지 못합니다. 강화된 자외선으로 피해를 입는 게 개구리들만이 아니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피부암이 증가하고, 백내장 환자가 속출하는 게 모두 그것과 관계되어 있다는 유력한 견해도 있습니다. 앞으로 농사도 점점 어려워질 게 분명한데, 거기다가 지구온난화라는 무서운 재앙의 일상화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도 태평스럽습니다. 정말 워낙 통이 큰 사람들이어서 태평인지, 몰라서 태평인지, 알면서도 사실을 인정하기가 두려워서 짐짓 태평스러움을 가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토록 자멸적인 행동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나는 요즘 시내에서 경산의 학교로 오고가는 버스 속에서 아예 눈을 감고 있는 경우가 점점 많아져 갑니다. 잠깐 눈을 붙이려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길에서 보이는 산과 들이 마구잡이로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상처입지 않은 산과 들이 없습니다. 이 길을 오가며 지난 20년 동안 수없이 보아왔던 풍경의 손상임에도 불구하고, 또 나이가 많아져도, 나는 적응이 안됩니다. 산허리가 허옇게 드러난 모습을 보면 가슴이 미어 터지는 것 같습니다. 생명의 서식처가 이처럼 갈갈이 찢겨져 가는 데가 여기뿐만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나는 여행이고 뭐고 돌아다니는 것이 도무지 싫습니다. 재작년 가을인가, 원주에서 장일순 선생님 5주기 기념행사 때 소백산을 통해서 자동차를 타고 갔다온 일이 있었습니다만, 나는 그때 소백산의 깊은 오지(奧地)마저 고속도로 공사로 돌이킬 수 없이 거덜나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너무도 고통스러웠습니다. 하기는 요즘 시골에서는 더 살기가 고달파요. 경제 때문이라기보다 환경파괴가 더 노골적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여름인가 김해 근처 시골에 방을 하나 빌려 잠시 쉬어보겠다고 갔다가 하룻밤 자고 도로 대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시골이 조용할 것이라는 예상이 터무니없이 빗나갔기 때문입니다. 농약냄새가 사방에서 바람을 타고 들이닥치는 것도 참을 수 없었지만, 시골 동네가 근처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행상들의 확성기 소리가 이미 시골도 점령해버렸더군요. 한밤중에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황소개구리의 괴성은 말할 수도 없었고요. 언젠가 형이 했던 말, “사람의 자식이 머리 둘 곳이 없다”라는 말이 참으로 실감나는 세월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돌파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요며칠 노벨평화상 얘기로 떠들썩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 상황이 과연 평화상 운운할 형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소식을 듣는 순간 매향리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 ‘평화’라는 말 때문이었을 겁니다. 내가 매향리의 일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과 관심은 보잘것없는 수준입니다. 신문에서 보도해주는 것 이상 특별히 자료를 챙겨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MBC 토론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매향리 주민이 말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 발언이 너무도 감동적이었고, 그 이후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아마 형도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주민 대표로 청중석에서 발언할 기회를 얻었던 그분 말씀이 자기들은 6.25가 끝난 뒤에도 계속하여 50년 동안 내내 전쟁 상황 속에서 살아왔다는 거예요. 끊임없는 폭격 속에서 살아왔으니,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러면 이제 주민들이 원하는 게 뭐냐고, 보상금을 받아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미군 폭격연습장의 이전을 원하는가라는 토론 사회자의 질문에 대한 그분의 답변이 뭐였는지 짐작하시겠습니까. 그는 폭격연습장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를 간단히 설명한 다음 자기들은 폭격장의 즉각적이고 완전한 폐쇄를 원할 뿐이라는 거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곳에도 그런 폭격장이 더 있어도 안되지만, 자기들은 평화로운 삶을 뿌리로부터 부정하는 그러한 폭격장이 설령 미국으로, 미국의 사막지대로 옮겨간다 하더라도 반대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막에도 생명이 붙어살고 있고, 사막 자체도 생명일 텐데, 생명에 대해 무자비한 상해를 끝도 없이 자행하는 그런 폭력이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계속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야간수업을 마치고 밤늦게 들어와서 그날 뉴스라도 잠깐 들어보려고 텔레비젼을 켰다가 그 발언을 들었습니다. 기막히더군요. 엄청난 고통을 진정으로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 몇푼이면 만사가 해결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발언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나는 너무나 오랜만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감동적으로 마주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인간에게는 아마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하면 할수록 꺾어질 수 없는 정신력이라는 게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얼마나 큰 고통이었기에 저런 생각에 이르렀을까–하는 안쓰러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들 때문에 수십년 동안 밤낮없이 삶을 유린당해온 매향리 사람들이, 다만 그 일부라 할지라도, 저런 엄청나게 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미국 사람들이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번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북한의 최고 인민회의 김영남 의장이 미국 사람들에게 당한 수모 기억나시지요. 아무리 적성국가로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명색이 국가의 수반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비행기 탑승 직전에 옷을 뒤지고, 구두를 벗으라고 하는 요구가 어떻게 가능한지, 그가 만일 백인이었다면, 저런 대우를 할 수 있었을까 등등–며칠을 두고 쉽게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에 내 옹졸한 마음이 한결 더 졸아드는 기분이었습니다.
또, 바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데, 동두천에서 농민들이 길에 말리느라고 널어둔 나락을 미군 탱크들이 아랑곳도 하지 않고 짓밟고 지나갔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해 농사를 망쳐버린 농민들의 기막혀 하는 얼굴,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이 뉴스를 전하는 텔레비젼 화면에 비쳤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는 민족주의적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힘센 자들의 오만불손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기는 그들은 자기들의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논리도 가능하겠지요. 아우슈비츠의 나치스 친위대원들이 자기들의 가정에서는 다정다감한 어버이자 남편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대부분 또 자기들이 기르는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그들이 인간 역사상 전례 없는 참혹한 대량학살을 집행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주어진 직분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과해진 일에 헌신함으로써 자기자신의 삶이 어떻든 뜻이 있고, 보람있는 것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적어도 권위를 부정하거나 권위에 대한 불복종을 택했을 때, 설령 명백한 처벌을 면한다 하더라도, 거의 틀림없이 직면할 죄책감, 외로움, 소외로부터 미리 벗어날 수 있었다는 거지요. 사람이란 귀속감을 잃어버리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는 허약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직분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우리는 물어보아야 합니다. 더욱이, 그러한 충실성이 자기가 소속한 기관, 단체, 집단, 국가, 민족에 대한 맹목적 헌신이라는 것에 연결되어 있을 때는 그 결과는 무서운 질곡이자 재앙이 되리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애국심이니 국익이니 하는 말에는 무엇보다 먼저 부패의 냄새가 짙게 풍깁니다.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불허한다는 정부의 결정도 ‘국익’을 고려해서라고 합니다. 티베트를 강점하고 있는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 달라이 라마의 한국방문이 탐탁할 리는 없겠지요. 그런데, 노벨평화상을 받았다고 해서 국가적 경사 운운하는 상황에서, 바로 또하나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국익’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염치없는 논리란 말이에요. 하기는 염치가 있거나 말거나 그때 그때마다 내 편할 대로 살면 그만이라는 편의주의가 팽배해 있는 세상이니 이렇게 일관성을 따지고, 합리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릅니다.
이번호를 편집하는 도중에 뜻밖에 권정생 선생님이 시를 한편 보내주셨어요. 그동안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 듯 해서 원고청탁도 되도록 미루고 지냈는데, 갱지로 된 이백자 원고지에 반듯한 글씨로 쓴 시를 한편 보내오셔서 얼른 읽어보았더니, ‘애국심’을 비판하는 내용이더군요. 소위 애국심이라는 것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만이 꽃과 나무와 풀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아마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선생님도 요새 나하고 비슷한 심정을 느끼고 계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국익이니 애국심이니 하는 허깨비 같은 소리는 그만하고, 정직해지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은 아이들도 거짓말투성이에요. 가령, 입시 때 면접을 보면서 왜 이 학과에 지원했느냐고 물어보면, 모두들 장차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합니다. 기왕 거짓말 할 바에야 좀더 보편적 가치인 인류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하면 조금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학생은 물론 없습니다. 하물며, 자기 고향이나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대답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어요. 형도 학교에 계시니까, 내 말이 무슨 말인 줄 짐작하실 겁니다. 물론, 예전부터 우리 사회가 뿌리깊은 권위주의 사회니까 사적 공간에서 하는 이야기와 공적 공간에서 하는 얘기가 많이 다르고, 또 달라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은 권위주의의 질곡이 여러 면에서 퇴조를 보이고 있다고 하는 상황인데, 오히려 허세와 거짓말이 더 노골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지난 6월에 남북정상회담이 있기 직전, 중앙일보에 역사학자 이인호 선생이 쓴 작은 컬럼을 우연히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글에서 읽고 기억이 생생한 것은, 남북이 갈라진 이후 많은 불행과 비극이 계속되어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불행은 냉전체제 속에서 “우리가 한번도 진실을 끝까지 추구하는 습관을 길들일 수 없었다”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이인호 선생님과는 일면식도 없고, 그저 그분이 견실한 러시아사 전공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지만, 이런 말을 하는 선생의 심정을 잘 알 것 같았습니다. 학문이든 생활이든 우리의 삶의 토대는 허위와 기만으로 점철되어왔고, 이런 것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시도한다 하더라도 침묵과 무관심과 냉소주의의 벽을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실제로, 나 자신도 그래요. 누가 조금 날카롭게 원칙을 들고 나오면, 우선 피곤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단 말이에요. 적극적인 악행이 있다기보다도 변화시키기 힘든 관성의 힘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물론 이 모든 게 냉전체제와 직접 관계되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대체로 깊게 생각하고, 철저하게, 끈질기게 탐구해보는 태도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사회 전체에 완강히 뿌리박고 있는 금기 의식, 그로 인한 인식의 상투성이라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게 분명해요. 사실, 자신의 삶이 거짓 속에 뿌리박고 있다는 의식조차 없이, 우리는 정치적인 치매상태 속에서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고 살아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진실 속에 뿌리박은 삶이란 큰 용기와 지혜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지 모릅니다.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이 때늦은 상봉을 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고마워해야 할 경사지만, 그러나 여야를 불문하고, 뻔한 거짓말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 너무도 멀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지금 편리하게도, 민족이라는 말이 거침없이 쓰여지고 있지만, 과연 민족 전체에게 고루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남북간에 이제부터는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을 한다는 차원을 떠나서, 남북협력 사업이니, 경협이니 하는 단어들이 핵심이 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옵니다. 오랜 실랑이 끝에 남한과 미국이 대북협력 사업으로 설정한 최초의 일이 하필이면 원자력발전소 건설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착잡하기 그지없는 기분입니다.
물론 북한사회가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개방이 이른바 세계화 경제에 대한 종속관계의 심화를 의미하고, 남북화해와 협력의 구체적인 결실이 남한의 자본과 기술 플러스 북한의 노동력에 의한 국제경쟁력의 강화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약자를 억압하고 강자를 섬기는 이 야만주의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경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 확대되는 데 기여한다면, 그러한 방식의 ‘평화구조’와 통일을 위한 노력이, 적어도 풀뿌리 민중의 입장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어떻든 남북이 좋은 관계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예를 들어, 지난번 노동당 창건기념 행사 때 북한 당국에서 남한의 단체, 개인들을 초청하였을 때, 나는 그 명단을 유심히 보았습니다만, 남한의 노동자나 농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개인이건 단체건 빠져있더군요. 이것이 단순한 간과(看過)를 말하는지, 의도적인 제외를 말하는지 나는 짐작도 못합니다만, 명색이 노동자 농민의 이름으로 세워지고, 유지되는 체제라고 하면서, 이런 방향으로 간다는 것은 그쪽의 ‘진실’도 결국 경제문제, 쉽게 말해서, 돈에 있다는 걸 단적으로 말해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철도도 연결되고, 어느 정도의 자유로운 왕래도 곧 가능할 것 같은 분위기에 마음이 들뜨는 것은 사실이지만, 새로운 남북관계의 전개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마냥 편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휴전선 일대에 대한 개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먹이감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던 이리떼라고 할까요.
여러 가능성이 있다면, 역사는 나쁜 쪽으로 가기 쉽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근거가 있는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금 사람들 마음이 온통 사기(邪氣)로 차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힘들어서 하는 말입니다.
의사들의 파업도 그래요. 나는 의사들의 파업이 시작될 때, 마음 한구석에는 꽤 재미있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의사들이라고 해서 파업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법이 있을 수 없고, 파업행위를 통해서 정당한 쟁점이 드러나고 합리적인 토론이 시작된다면 그것은 건강한 삶에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사들의 파업 내지 폐업이 장기화됨에 따라 대다수 시민들처럼 나도 의사들의 진정한 요구가 무엇인지 점점더 알 수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들이 이 사회에서 의료 및 건강관련 종사자들로서 함께 일하고 있는 여러 다른 보건전문가들과의 관계는 간단히 무시하고, 유아독존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듯한 자세에 큰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약분업이 지금 단계에서 정말로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것은 별개문제입니다. (나는 의약분업으로 약물 오남용의 습관이 근절 또는 감소될 수 있다고 믿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의약분업이 실시되고 있는 이른바 구미 선진국에서도 약물 오남용은 지금 굉장히 큰 사회적 문제가 되어 있단 말이에요. 중요한 것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화학물질에 대한 의존이 심화된 데에는 거대 화학 및 제약자본과 거기에 결탁된 정치의 문제가 근본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의 건강을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의권’의 확립과 ‘완전한’ 의약분업–약사들의 임의조제, 대체조제를 완전히 금지하는–이라고 하는 의사들의 주장이 정말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의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이었습니다. ‘교권’이라는 말은 조금 구시대적인 느낌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성립 가능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독재정권으로부터, 권위주의적인 관료로부터, 자기중심적인 학부형으로부터 교사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무참하게 유린되어온 상황에서 교권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의권’이라고 하면, 누구의 무슨 권리를 말하는 것인지요.
‘의권’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보면 의사들이 자기들을 희생자로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런 사고방식에 공감을 느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의료보험 제도가 도입된 이래 의사들의 경제적 소득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은 잘 알려져 왔고, 의료보험 제도가 갖고 있는 모순은 합리적으로 개선될 필요가 있다는 데 대해서도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인 듯합니다. 그러나, 그나마 편법으로 또는 심지어 부정한 방법으로라도 어느 정도 이상의 수입이 보장되던 상황이 더이상 계속될 수 없게 되자 의사들이 돌연히 “국민의 건강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고, 자신들의 파트너인 약사들의 존재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자신들의 일방적인 주장의 관철을 위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면서, 들끓는 간청과 항의와 분노의 목소리 가운데서,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규모와 강도로 파업상황을 장기간에 걸쳐 되풀이하여 결행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설령 그들의 주장에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하나의 전문집단으로서의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정나미가 떨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우리나라의 의사들의 사회성의 문제를 테마로 한 연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의사들이 은연중 자신들을 특권적인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그들은, 예를 들어, 학교 교사들보다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높은 경제적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교사들 만큼 대우를 받는다 하더라도 이미 의사들은 그들 자신의 직분 속에서 돈으로, 물리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커다란 보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왜 기억하지 못할까요.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한평생을 살면서 정말 보람있는 삶을 경험하는 순간이 드물게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의사들에게는 그들의 일상적인 진료행위 하나하나가 보람의 순간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따져보면, 의사의 진료행위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은 환자보다도 오히려 의사 자신일지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마음에 교만이 들어올 여지가 없겠지요. 나는 의사단체에서 정부에 보내는 요구사항 속에 일반약품은 슈퍼마켓에서도 판매할 수 있게 해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말하는 ‘의권’ 확보와도 관계없는 문제에까지 간섭하려 들면서 약사들의 생존권은 철저히 무시하는 자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불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식의 결핍은 물론 의사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심화되고, 산업주의 문명이 기승을 부릴수록 인간관계는 냉혹하고, 황량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최근의 의사파업의 문제는 현대 서양의학의 근본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오늘날 의사들의 심리의 저변에 깔려있는 독선적인 자세는 현대 서양의학에 내재한 배타성과 긴밀히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깁니다. 현대 서양의학은 이른바 과학성이라는 무기를 뒷받침으로 하여, 질병과 건강을 자기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모든 다른 종류의 의료기술을 처음부터 철저히 억압하고, 무시하며, 불법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오늘과 같은 독점적 지위를 누려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러니까, 핵심적인 문제는 서양의학이 건강을 돌보고, 질병을 회복시키는 방법에 있어서 여러 있을 수 있는 방법 가운데서 한가지 방법이라는 사실을 몰각하고, 자기만이 유일무이한 정당한 방법이라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린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완고한 배타성이 실제로 가능한 것은 현대의학이 산업주의 체제의 핵심적 구성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건강과 의료는 무엇보다 상품이 되었고, 산업체제를 유지시키는 데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의 한 연구에 의하면, 지금 의료 및 건강관련 산업은 국방관계 다음으로 큰 산업이라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오늘날 빈발하는 질병들, 특히 퇴행성 질병들이 만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환경이–넓은 의미든 좁은 의미든–갈수록 악화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예방의학적 차원에서 환경을 보호하고 정화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왜? 환경파괴를 막고, 환경을 정화하는 노력은 돈이 되는 일이 아니고, 돈과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기성체제에 잠재적으로 근본적인 위협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의사들이 지금 악화일로에 있는 환경상황에 대해서 그들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집단적인 개선의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주목할 현상입니다. 물론 극소수의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과연 일반적으로 의사들이 질병과 건강의 문제에 대해 책임감 있는 자세로 깊이 생각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말입니다. 의사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이른바 첨단기술일 뿐, 질병 발생의 보다 근본적인 맥락으로서의 사회적, 환경적 상황에 대한 성찰은 너무도 희박한 게 아닌가 합니다. 따져보면, 이것도 개개인의 자질문제 이전에 서양의학 자체의 오리엔테이션에 관계되어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물론, 기술을 위주로 하는 현대 서양의학이 쓸모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여러 다양한 원천에 뿌리를 둔 민간 및 전통의술들과 공존하면서, 많은 건강관리 내지 치유방법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자기인식에 서양의학이 겸손하게 도달할 용의가 되어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버드 의과대학 출신으로, 지금 미국에서 저명한 자연의학자로 주목받고 있는 제임스 고든은 오늘의 주류의학, 즉 기술주의 서양의학은 질병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서 최후에 적용해야 할 기술이라고 언명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런 견해를 한국의 의학계에서도 조심스럽게 경청하는 분위기가 빨리 조성되기를 고대합니다. 왜냐하면, 의료문제는 우리가 생태중심의 새로운 문명사회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들 대부분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은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뿌리를 둔 기술주의 의학을 언제까지나 주류의학으로 계속 떠받들면서, 우리가 당면한 사회적, 생태적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왕절개 수술을 받는 산모가 전체 산모 중 절반에 이르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나는 따로 좀더 본격적인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만, 간단히 말하여, 이런 식으로 우리의 삶이 철저히 기술에 의해 간섭을 받는다면,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주체성, 존엄성의 문제는 더이상 운위할 수 없는 날이 곧 오게 될 것입니다.
일찍이 간디는 인도 사람들이 서양의학에 의존하면 할수록 노예상태를 면하지 못한다고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간디의 관점에서 볼 때, 서양의학의 근본문제는 그것이 인간영혼과 자연을 어지럽히는 근대 서구의 과학적 세계관에 토대를 둔 것인 한, 자연과의 근원적인 조화를 토대로 사람이 사람과 살아가면서 쌓아온 전통적인 삶의 기술–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보살핌의 지혜와 기술–을 조롱하고 억압하는 폭력의 기술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풀뿌리 민중의 삶과 공동체를 뿌리로부터 훼손하는 데 막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간디의 이러한 통찰력은 오늘날 이 사회의 일그러진 의료체제의 진정한 개혁을 생각하는 데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지금 급속도로 우리의 삶의 뿌리를 건드리고 있는 이른바 첨단 과학기술의 문제에 관련해서 깊이 음미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과학기술의 진보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유전자 조작기술이라는 것을 위시한 첨단 과학기술의 동향을 암시하는 새로운 소식들에 접할 때마다 솔직히 마음이 너무도 편치 않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직관적으로 나는 오늘의 이른바 첨단 과학기술의 세계가 인간의 인간다움의 원천이 무엇인지 완전히 망각하거나 무시하고 나아가는 극단적인 교만과 불경(不敬)에 기초하여 움직이는 세계라는 것은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디까지 손을 대고, 어디서부터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간단히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지만, 지금은 그러한 한계에 대한 의식 자체가 완전히 무너져 있는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20세기의 뛰어난 시인이자 트라피스트 수도승이었던 토머스 머튼은 <시인들에게>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시인을 정의하기를 “열매가 맺은 다음에 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꽃이 핀 다음에 열매가 맺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열매는 꽃이 핀 다음이라야 비로소 맺을 수 있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인데, 새삼스럽게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왜일까요. 지금은 모든 게 거꾸로 가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본말전도(本末顚倒)도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지금 모두들 죽으러 가는 길을 가면서 이게 살길이라고 착각하고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오늘의 문명은 인간이 제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연의 순리라는 잣대를 간단히 망각해버린 데서 타락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미신에 깊이 젖어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대부분 과학기술의 진보가 어떻든 불가피하고, 그것을 통해서 인류가 직면한 위기가 극복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일본 잡지 <세카이(世界)> 금년 9월호에 <과학기술의 새로운 전개>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지식인 세사람이 나눈 좌담이 실려 있어서 읽어보았습니다. 과학철학자, 물리학자, 경제학자로 된 참석자들이 요즘의 과학기술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좌담기록이었습니다만, 그 이야기 중에서 퍽 흥미롭게 느껴지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2,30년 전에 비하여 지금 일본의 자연계 과학자들은 핵문제나 환경위기 등으로 인해 과학에 대해서 좀더 조심스러워지고, 좀더 겸손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반면에, 오히려 인문사회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실제 요즘의 과학기술의 내용도 잘 모르면서” 과학기술 시대에 대하여 거의 맹목적인 순종 내지는 찬미의 소리가 높아지는 기현상이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자연과학 연구자들이 얼마나 겸손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일반적으로 지식인 사회에서 아마도 일본의 경우 못지 않은 경박한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이 아닐까 싶거든요.
이번호 <녹색평론>을 준비하면서, 나는 내내 이런 생각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기술계 내부로부터 근본적인 자성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메시지 자체는 암울하지만, 그래도 나는 빌 조이의 글 <왜 우리는 미래에 필요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를 번역하면서 결국 사람의 ‘깨달음’보다 더 값진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그 자체 크게 새로운 얘기가 아닐지 모릅니다. 적어도 산업주의 문명이 발흥한 이후 수많은 사상가, 시인, 예술가들이 고민해온 핵심적인 문제가 바로 이것과 관련된 주제였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 이른바 첨단 기술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이런 글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그도 다른 과학기술자들과 다름없이 오랫동안 자신의 일에 열중해 왔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자기와 비슷하게 각자의 분야에서 첨단에 서있는 연구자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나서, 그들의 작업이 전체적으로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에게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깨달음’이 왔던 것입니다. 이른바 전문가의 좁은 시야, 관심사에 파묻혀 있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던 문제의식이 싹튼 것입니다.
지금 이런 식으로 생명공학, 로봇공학, 나노테크놀로지 등이 걷잡을 수 없이 발전하다가는 조만간 인간존재 자체가 뿌리 째 망실될지도 모른다는 빌 조이의 견해가 반드시 정확한 예언이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거예요. 중요한 것은 그의 문제의식은 우리들이 대개 인간다운 상식과 체험으로 근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기본 방향이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잖아요. 정작 내가 빌 조이의 글에서 실제로 두려움을 느낀 대목은 아무리 비인간적인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닥쳐온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 상황에 결국 길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의 어떤 동료의 ‘낙관적인’ 견해에 접할 때였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몸이 실리콘으로 된다 하더라도 200년이나 300년쯤 수명을 누린다면,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얘기 같은 대목 말입니다. 만일 오늘날 과학자, 기술자들이 대체로 이런 생각, 이런 체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등골이 오싹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기술가 그룹의 핵심멤버로부터–첨단 과학기술의 ‘포기’를 제안하는 데까지 나아가는–가열한 자기성찰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은 퍽이나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은, 나는 이런 글이 발표된 것도 모르고 지내다가 지난번 초여름에 독일을 다녀오신 이필렬 교수에게서 들었습니다. 이필렬 교수는 독일 방문중에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이 글의 전문이 번역 게재된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독일의 언론상황과 시민적 관심사와 그 수준이, 우리의 형편과 비교하여 너무나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이런 글이 일간신문에 전문 번역 게재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생명공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이 갈수록 괴물이 되어가고,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이미 그것이 심각한 정도로 침범해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이런 문제는 일반적인 무관심 속에 관계 전문가들의 문제로만 처리되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예컨대, ‘생명윤리위원회’ 같은 기구가 마련되어 거기에 일임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터무니없이 안이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종류의 위원회는 처음부터 생명조작 기술을 합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출범한 기구임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생명조작 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종래의 새로운 기술들–가령 자동차, 텔레비젼 등–이 끼쳐온 해악(害惡)에 비해서도 엄청나게 차원이 다른 ‘악마의 기술’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성을 뿌리로부터 파괴해버릴지도 모르는 너무나 근원적인 문제인데, 이런 문제를 어떻게 간단히 몇몇 위원회의 구성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이 설령 정직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전문가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체제변호적인 데로 기울기 쉽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과학자들의 개인적 윤리문제도 문제이지만, 개인 윤리를 초월하여 그들의 과학자 내지 전문가로서의 신념체계와 기본가정들이 산업주의 체제를 유지, 확장하는 데 이바지해온 가치체계와 근본적으로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날 소위 전문가 내지 과학자들에게 특유의 체질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간혹 있어요. 그들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협소한 전문가의 시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는 데 길들여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시인이자 농부이며 지금 생존해 있는 가장 뛰어난 문명비평가의 한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웬델 베리에 의하면, 이 시대의 비극의 핵심에는 무엇보다 전문가의 득세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도일 뿐, 지도가 실지로 가리키는 땅과 공동체와 인간의 삶 자체가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물론 존중해야 하지만,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데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공학이나 핵문제, 의료문제, 심지어 수돗물불소화 문제 등에서 소위 전문가들이 취해온 태도에는 한심스러울 정도의 안이성과 무책임, 때로는 속임수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언론은 구체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몇몇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것으로써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언론이나 지식사회가 이런 문제에 둔감하고 무관심한 것은, 따져보면, 우리가 아직도 문화의 종속성, 즉 식민지적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어련히 미국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느냐, 미국정부와 전문가들과 주류언론이 보증하는 것인데 안심해도 될 것이 아니냐 하는 지극히 안이한 판단이 지배적이라는 말입니다. 이번호에 실린 중국계 영국학자 매완 호 교수의 ‘과학윤리’에 관한 글에서도 명백히 언급되어 있듯이, 지금 미국의 FDA를 포함한 정부 기관을 비롯하여, 기업이나 거대 권력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는 전문가, 과학자들의 비윤리성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의 눈에나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우리 각자의 자기초월 내지 자기희생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소리높이 자기를 주장하는 데 여념이 없는, 이 이기적인 욕망으로 짓이겨진 세상에서, 한가닥 희망의 신호가 있다면, 스스로 ‘자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아마도 빌 조이의 경우도 그렇다고 해야겠지만, 세계적인 반핵운동가 타까기 진자부로오(高木仁三郞) 선생의 생애는 그런 점에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지난 10월 초 향년 62세로 타까기 선생이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번도 상면한 적이 없는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슬픔에 잠겼고, 세계가 허전해진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러 해 전에 장일순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을 때, 또 내게 처음 에콜로지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독일 철학자 루돌프 바로의 죽음을 뒤늦게 알았을 때에도 나는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타까기 선생의 생애는 <시민과학자로 살다>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항암치료를 위해서 병원 입원중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집필한 이 자전적인 기록에서 특히 내게 감동적인 것은 그의 꾸밈없는 소박한 마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느껴지는 서술방식이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자본주의 산업체제의 확대와 함께 갈수록 체제 변호론적 논리가 일방적으로 강화되는 상황에서 고뇌하는 젊은 핵화학자 타까기에게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한 순결한 영혼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반핵운동을 포함한 시민운동이 아직 성숙되지도 않았고, 개인적 생계 수단마저 불확실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도립대학의 교수직을 버리고, 그럼으로써 거대 시스템에 봉사하는 과학자의 길을 거부하면서 풀뿌리 민중과 함께 하는 ‘체제 밖’의 과학자의 길을 선택했을 때, 타까기 선생은 현대사회에서 참다운 지식인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한 범례를 제시한 셈입니다. 그리하여,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핵문제에 관해 보다 날카로운 의식을 갖게 되는 데 그의 공헌은 막대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타까기 선생의 생애에서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것은 좀더 근본적인 것, 즉 그분의 철저히 겸손한 자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그분의 책을 직접 읽어보면 아마 실감이 날 거라고 믿습니다만, 또 타까기 선생과 오랜 친교가 있는 서울의 반핵정보자료실의 김원식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녹색평론사에서 <시민과학자로 살다>의 한국어판을 내고 난 다음에 나는 이 책에서 받은 감동 때문에 타까기 선생의 생태주의적인 사상이 좀더 본격적으로 서술된 책이 있으면 그것을 번역해서 출판해보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김원식 선생님에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김선생님이 일본으로 전화를 하셨던 모양인데, 전화를 통해서 타까기 선생이 “나 같은 사람에게 사상은 무슨 사상입니까, 사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라고 하면서 <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책을 추천하더라는 겁니다. 나는 이런 겸손한 말투 속에 그의 한없이 소박하고 맑은 인품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이런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였기에,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가려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쓸데없이 편지가 길어졌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2000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