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는 인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마을의 한 점성가는 그의 인생은 끝없는 여행이 될 것이며,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은 맞았다.
쿠마르의 부모는 아힘사(생물을 해치지 않음)의 원칙에 철저한 자이나교의 신자들이었다. 쿠마르가 네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이 일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후 쿠마르와 그의 어머니는 점점더 많은 시간을 절대적인 비폭력을 가르치며, 음식을 구걸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도는 자이나교 승려들 곁에서 보냈다. 승려들은 어린 쿠마르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그가 ‘영적인 혼’을 지녔다고 했다. 아홉살 때 몇몇 친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마르는 자이나교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모든 친지들과의 접촉을 끊고, 세속적인 관심을 멀리한 채 9년간 자이나교 승려로서 인도를 걸어서 횡단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세상과의 단절이 그의 영성을 더욱 깊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질식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종단을 떠났지만 걷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는 인도의 토지개혁운동에 참가하여, 수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다니면서, 불가촉천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줄 것을 부유한 지주들에게 요청하였다. 그의 걷기가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여러해 뒤 그는 핵무기에 반대하기 위해 돈 한푼 없이 인도에서 모스크바, 파리, 런던 그리고 위싱턴 디씨까지 걸어서 갔다. 후에 그는 영국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성지 순례여행을 물론 걸어서 했다.
지난 25년간 쿠마르는 생태적 사고와 전통문화, 그리고 자연의 지혜를 탐색하는 격월간 잡지《리서전스》를 편집하고 발행했다.
쿠마르는 또한 영국의 슈마허 칼리지를 설립하는 데 관계했다. 이 칼리지는《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E. F. 슈마허의 생태적 시각을 조명하고 가르치는 강연들로 시작해서 전일적인 국제적 에콜로지 센터로 성장했다. 학생들은 생태적 관점에서 경제, 철학, 사회 및 과학적 주제들을 공부한다. 학교가 지지하는 평등주의와 생태적 인식의 원칙을 실천하기 위해서 학생들과 선생들은 요리에서 빨래까지 모든 일들을 같이 하며, 함께 살고, 먹고, 일한다.
쿠마르는 그의 자서전《목적지 없는 길》을 포함한 많은 책들을 편집하고 저술했다. 그는 영국의 노스 디본에서 그의 아내 쥰 미첼과 같이 살고 있다.
나는 삼월의 어느 맑은 날 샌프란시스코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막 방송을 마친 참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작은 카페로 걸어가 케이크 한조각을 앞에 두고 앉았다. 나는 그의 온후함과 사소한 것으로부터 곧바로 생태적 문제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곧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미처 녹음기를 켜기도 전에 그는 생태적 문제뿐만 아니라 완전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데릭 젠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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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르 나는 매 순간을 창조적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예전에 내가 썼던 것이나 말했던 것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현재를 살고, 항상 주의를 집중하며 산다는 거지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듣는 것, 보는 것들을 항상 의식하는 겁니다. 내 주위와 정신과 감정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항상 깨어있는 것 말입니다.
젠슨 그건 너무 많은 일이 아닌가요?
쿠마르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된 일은 아니죠. 무감각하게 만드는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죠. 창조적인 일이고, 그래서 도전적이며 즐거운 일입니다. 삶을 ‘벼랑’에서 살기 시작하면, 그래서 진정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산다면, 매 순간이 모험이 됩니다. 물론 매우 힘든 삶의 선택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그런 삶을 통해 일 자체로 활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삶이 정해진 틀속으로 들어가버리면 ― 수입, 집, 생활, 책 등 모든 게 정돈되고, 계획되고, 조직된다면 ― 일의 양은 적어지겠지만, 아마 … 글쎄요, 당신의 느낌이 어떨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나라면 불만족스러워질 겁니다.
젠슨 어떻게 이런 삶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쿠마르 중국인들이 어떻게 만리장성을 쌓았습니까? 벽돌 한장을 놓고 그 위에 다시 한장을 놓았던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핵무기에 반대해서 평화행진을 하면서 인도에서 모스크바, 파리, 런던, 워싱턴 디씨까지 걸어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걸음씩, 한걸음씩 걸었던 겁니다. 도보여행을 하거나 소설을 쓰거나 인생을 살아가거나 모든 긴 여정들은 끈질기고 지속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시스틴 성당의 천장을 보면 “굉장하구나.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만, 그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한번 붓질을 하고 그 다음에 또 한번의 붓질을 한 겁니다. 매번 여기에는 어떤 색을 넣을 것인지, 어떤 질감을 나타낼 것인지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그게 창조적인 과정입니다.
예술작품을 창조해내는 일과 삶을 만들어나가는 행위는 매우 유사합니다. 책을 한권 쓰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일단 종이를 앞에 두고 앉아서 문장 다음에 문장, 문단 다음에 문단, 페이지 다음에 페이지를 계속 쓰는 겁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죠. 순간 순간, 하루 하루, 일년 다음에 일년, 그렇게 삶이 다할 때까지 사는 겁니다. 삶 역시 책이고, 예술작품이며, 창조적인 과정입니다.
이제 당신의 질문에 답을 하자면, 나는 활력있게, 주의를 기울이며, 열린 마음과 창조성을 통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딛어서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62년에 걸친 여정이었죠. 그 여정은 항상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삶을 창조하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젠슨 그럼 의식적으로 당신의 삶을 만들어왔다는 말씀인가요?
쿠마르 언제나 그래왔죠.
젠슨 그 점이 예외적인 것이라는 걸 느끼십니까?
쿠마르 나는 다행하게도 어머니나 교육에 의해서 억압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홉살에 자이나교 승려가 되는 것 같은, 위험하고 모험적인 길을 걸을 기회가 있었던 거죠. 그 당시에도 그것은 모험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예외적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삶은 다 예외적인 겁니다. 만일 단순히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예술작품의 창조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미 예외적인 것이 됩니다.
젠슨 삶의 과정이 바로 예술창조라는 개념은 여러 예술가들의 말을 연상시키는데요. 그런데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은 외부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만.
쿠마르 예술이 그런 식으로 세상과 분리된다는 건 매우 비극적인 일입니다. 나의 관점으로는 예술과 삶, 그리고 세상은 크게 보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스튜디오나 뭐 그런 곳에서 순간적으로 고립될 수는 있어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문화의 아주 커다란 오류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명상을 할 때 혼자 있다고 느끼기는 합니다만, 내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이런 점에 관련해 내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곳으로부터 고귀한 생각들이 내게 오게 하라. 그리고 그 보답으로 나의 고귀한 생각들이 온 세상으로 퍼지게 하라.”
책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도자기를 빚거나 혹은 인생을 살거나 모든 창조적인 예술가들은 보다 큰 세상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작가는 종이를 사용하는데, 그 종이는 나무에서 얻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음식을 소화합니다. 정신적, 감정적인 면에서도 작가는 사회를 들이마시고 있습니다. 예술은 우리 전체에 대한 반응이며, 그것을 사회에 보여주는 일입니다. 사회는 그에 대해서 반응을 합니다. 마치 우리가 나누고 있는 대화와 같죠. 당신이 질문을 하고 나는 거기에 대답을 합니다. 상호의존적이죠.
젠슨 만일 삶이 예술과 같다면, 삶은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까?
쿠마르 그렇습니다. 긴, 60년 동안의 대화이죠.
젠슨 누구와 말입니까?
쿠마르 타자들이죠. 이 타자들은 결국 모든 것입니다. 나무나 강, 새나 산, 배우자, 자식들, 조상들 모두입니다. 내 어머니 얘기를 했는데, 어머니도 이 대화 속에 있습니다. 죽어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나의 스승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베다에 대해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 모두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삶은 과거와의 대화이고, 미래와의 대화입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대화인 것입니다.
젠슨 당신의 생각들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입니까?
쿠마르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나누는 얘기들은 바로 내 삶에서 직접 나온 것입니다. 내 삶의 대화는 죽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네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주검과 어머니가 울며 상복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충격을 받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나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젠슨 죽음이 삶의 대화를 시작하는 보편적인 출발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당신의 경우가 특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쿠마르 모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특별합니다. 모든 대화가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각각 독특한 것입니다. 내 삶의 대화는 죽음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는, 내가 죽음의 공포와 그 존재, 그리고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상을 버려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홉살에 나는 자이나교 승려가 되었습니다.
자이나교는 약 2500년 전 인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이나교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해치지 않는다는 아힘사의 원칙에 굉장히 철저합니다. 그들은 비폭력주의자이고, 물론 채식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게 모두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나는 입을 여덟겹의 천으로 가리고 다녔는데, 그 까닭은 공기중의 생물을 우연히라도 해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천을 오직 먹을 때만 풀 수 있었는데, 먹는 동안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옷이나 다른 소지품들 ― 이불, 동냥그릇, 책들 ― 을 일일이 검사해서 벌레가 그 안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그리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얻은 것은 없는지 확인했습니다. 매우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어서 벌레나 풀을 밟지 않도록 했고, 앞을 잘 볼 수 없는 밤에는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실내에서도 내 앞을 부드러운 털로 쓸면서 움직였습니다.
승려들은 먹을 것을 구걸합니다. 규칙에 따라 우리는 문을 열어놓은 집에서 채소로 만들어진, 그리고 기쁘게 주는 음식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참을성을 기르기 위해서 다른 조건들이 덧붙여지기도 했습니다.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르는 노예로 팔려서 한쪽 발은 집밖에 다른 한쪽 발은 집안에 묶여있는 공주에게서만 음식을 받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있어야 하고, 물에 불린 콩을 대나무 접시에 담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승려로서 나는 옷을 빨지 않았고 다 닳아서 헤져 못 입을 때까지 입었습니다. 목욕을 하거나 양치질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느날 스승 옆에서 머리를 긁어 벼룩이 몇마리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생물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 벼룩들을 다시 머리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젠슨 섹스는 어떻습니까?
쿠마르 금지됩니다. 섹스는 세속의 것입니다. 자이나교에서는 목샤 ― 영혼의 구원 ― 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욕망과 몸에 대한 집착과 관계를 버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남편이나 아내, 아버지나 어머니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들 사이의 사랑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젠슨 제게는 상당히 끔찍하게 들리는군요.
쿠마르 그것은 자이나교의 죽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만일 삶이 삼사라 ― 탄생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 ― 라면 자이나교 승려의 목표는 그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젠슨 왜 자이나교를 떠났습니까?
쿠마르 주된 원인은 내 친구 하나가 마하트마 간디에 관한 책을 준 것이었습니다. 친구에게 종교적인 책이 아니면 읽을 수 없다고 했더니 그 책은 매우 깊은 의미에서 종교적인 책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읽었습니다. 간디는 바로 지금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현재의 삶과 세계에서 사람을 분리시키려는 종교는 단순한 현실도피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신을 대면하기 위해 승려는 이 세상에는 등을 돌려야 한다는, 내가 배운 바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었습니다.
큰 도시에 처음 가게 되었을 때 또다른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도시에서 우리를 안내하던 사람은 지팡이 속에 큰 칼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나는 스승께 물었습니다. 스승은 “우리는 칼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승려가 아니지 않느냐. 그는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후에 그 안내인에게 직접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당신이나 스승께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난 그저 구경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래도 우리는 비폭력을 믿지 않습니까?”
“우리가 당신들을 보호해주지 않으면 당신들은 비폭력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먹을 것을 만들고 요리하는 데 폭력적인 부분이 있다고 해서 음식을 만들지 않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 일을 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살 겁니까?”
그 안내인은 나에게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지적해준 겁니다. 우리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살고자 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우리 대신에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 세상이나 경험 또는 육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승려생활이 진리에 대한 추구를 도리어 엄격히 제약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는 교단을 떠나 세상 속에서 열반을 찾기로 했던 것입니다.
젠슨 그래서 더이상 세상을 포기할 수 없게 되었군요?
쿠마르 그러나 승려생활은 그 이후 나의 삶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생활의 경험으로 나는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사는 법을 체득하였습니다. 맨발로 뜨거운 땅 위나 가시밭길을 걷는다거나, 돈과 집, 부모 없이 살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일 말입니다. 그런 시기를 지나온 것은, 되돌아보았을 때, 내게 아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정신과 세상을 분리시키는 것 ― 영성은 성자를, 예술은 예술가를, 음악은 음악인을 위한 것일 뿐이며, 보통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것 ― 이 옳지 않다고 이해하게 되었을 때, 이 새로운 길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계속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시절을 승려로서 지낸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실은 그 경험에 대해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단들이 영성을 잃어버리고 그 조직의 규율에만 집착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찾는 것보다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되어버리죠.
젠슨 세상을 포기하는 것과 개인의 자유로운 영혼의 질식 사이에 관계가 있습니까?
쿠마르 내 경우에는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실제로 나를 아주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그 단계에서는 얼마나 적절하고 유익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영혼에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게 되자 내가 떠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 “나는 떠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승려의 삶을 떠나게 된 가장 핵심적인 깨달음은 삶으로부터의 도피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은 일상의 삶에서 단련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밖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 지구, 땅, 사람들 ― 아름다운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그 아름다움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깨달음은 사회,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적인 무대로 나를 뛰어들게 하였습니다. 나는 삶의 총체성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임을 확신했습니다.
젠슨 자이나교를 떠난 후에는 무엇을 했습니까?
쿠마르 나는 비노바 바브와 같이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간디와 함께 일했던 분으로, 간디의 정신적인 후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주로 가장 빈곤한 계층, 즉 하리잔 ― 불가촉천민 ― 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기 위한 토지개혁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도 전역을 걸어서 다니면서 하리잔들과 지주들에게 땅도 공기나 해, 물과 같이 신의 선물이며, 모든 사람들 ― 그는 ‘흙의 아들들’이라고 불렀습니다 ― 은 땅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의 위는 무척 작지만 가난한 자들의 위는 매우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5천만에이커의 땅을 요구했습니다. 300에이커를 소유한 지주가 단 1에이커만 내놓을 때에 그는 만일 사원을 짓는 일이라면 그것으로 되겠지만 가난한 이들이 땅을 갖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에 6분의 1은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땅을 내놓았습니다.
전에 내가 아직 승려였을 때, 삶과 영성은 다소 추상적인 개념들이었는데, 비노바 바브를 만나면서 그것들이 현실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새롭고 실제적인 질문들이 생겼습니다. 지주에게 예속되어 착취당하며 가난으로 고통받는 땅 없는 노동자들을 접했을 때, 나의 영성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 경제, 정치, 사회적 차별의 문제에 대해 비폭력, 진리, 영성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땅의 소유권이 천부의 것이고, 가난한 농민들은 일을 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 태어났으며, 이 모든 것들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믿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열 수 있을 것인가? 자신들의 처지를 운명 ― 전생의 업으로 인해 주인을 섬기도록 태어났다는 ― 이라고 믿는 불가촉천민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도 똑같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마음을 열어 그들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있으며, 당연히 다른 모든 이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세상과 대화하며 평등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이해시킬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내게는 꼭 해내야 하는 모험과 같았습니다. 토지개혁운동을 통해서 나는 승려생활의 개인적 영성을 집단적 영성으로 확대시킬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많은 지주들이 땅을 내놓게 했고, 또 많은 하리잔들이 그 땅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비노바가 요구한 5천만에이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4백만에이커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난하고 땅이 없는 천민들로 하여금 그 땅에서 경작하고, 우물을 파고, 곡식을 기르고 공동의 교육체계를 갖추도록 도왔습니다.
이런 노력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지주들과 천민들을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동반자적인 관계였습니다.
젠슨 그러나 동반관계란 그 개념에 있어서 서로 대등한 입장에 근거하는 게 아닙니까? 어떻게 한쪽은 부유하고 다른 한쪽은 가난한데 동반자 관계가 성립할 수 있습니까?
쿠마르 나는 영성적 동반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지주들이 소작인들의 선의와 선한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힘의 균형은 변하기 시작할 겁니다. 궁극적으로 진정한 동반자 관계는 사회적 정의와 경제적 평등을 요구하겠지만, 당장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비노바의 토지개혁은 영성적 변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반자의 관계로 살 수 있고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는 그런 미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작을 했습니다. 많은 지주들이 그들의 땅의 6분의 1이 아니라 전부를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젠슨 대화를 거부하는 지주들에게는 어떻게 했습니까?
쿠마르 우리는 그들이 “오늘은 대화를 거부해도 내일 일은 모른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앉아있는 이 카페에 들어오려면 먼저 출입문을 찾아야겠지요. 다른 곳으로 들어오려고 하다가는 벽에다 머리를 부딪히게 될 뿐입니다. 지주들의 마음을 여는 것도 비슷합니다. 기다리고 찾으면 약한 부분, 마음을 여는 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문을 찾지 못했어도 다음날은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문이 잠겨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열쇠를 찾았다 해도 녹이 슬어있을지도 모르며, 기름칠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일이 많기는 했지만, 우리가 한발자국씩 나아간다면 궁극적으로는 문이 열리고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만일 저항에 부딪히면 물러났다가 다음에 다시 그 지주의 친구 ― 이미 땅을 내놓은 ― 와 같이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지주는 우리의 말을 들을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아니라면, 다시 다음에 찾아가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면 끈질기고 참을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노바 바브는 1955년에 토지개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1985년까지 30년 동안 땅 없는 이들에게 땅을 찾아주려고 온 인도를 걸어다녔습니다.
젠슨 만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착취를 멈추지 않겠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면요? 히틀러 같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쿠마르 집이 불에 타서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물을 많이 끌어와서 불이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폭력은 예방책으로서의 원칙입니다. 집에 불이 붙기 전에 먼저 소화기와 탈출 통로, 비상구를 확보해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을 비폭력적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미디어도 비폭력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 불만을 가진다면 무시하거나 억압해선 안됩니다. “무엇이 문제냐?”고 묻고, “의논해보자”고 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히틀러라면 어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1차대전 이후의 독일의 문제가 무엇이었나를 짚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조약을 맺었습니까? 독일인들에게 “당신들이 전쟁을 일으켰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우리가 한 짓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서 하고 있는 일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새로운 히틀러의 씨앗을 뿌리는 짓입니다. 사담 후세인이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저항할 것입니다. 자기 나라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와 같은 이가 등장한 다음에는 비폭력에 대해서 생각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얘기하는 것은 비폭력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교육, 자비심, 너그러움, 평등, 위엄 그리고 남에 대한 배려의 방법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기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갈등에 대처하는 법도 어려서부터 배워야 합니다. 바로 아이들로부터 비폭력의 문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미디어, 광고, 정부, 경찰, 법정으로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관에서는 단순히 벌주기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비폭력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두 폭력이 자라나는 것을 그저 내버려두다가 히틀러나 사담 후세인 같은 인물이 등장하면 놀랍니다. 우리는 “그는 악마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히틀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를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입니다.
젠슨 아직 평화로운 토착문화가 많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희망적인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의 시메이나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오카나간스 같은 곳 말입니다.
쿠마르 이들 문화가 많은 경우 인간에 대해서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서도 비폭력적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도축장에서 동물들을 죽이고 공업의 형태로 농사를 짓고 동물들을 가혹하게 다룬다면, 그런 잔혹성이 우리의 마음에 배어들어 다른 인간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젠슨 우리가 먹는 것들이 결국 우리 자신을 만들지요.
쿠마르 모두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연과 평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비폭력은 히틀러와 관계된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죠. 비폭력은 삶의 방식입니다.
젠슨 비노바 바브와 함께 당신은 땅을 위해 걸었습니다. 1962년부터는 평화를 위해 걸었습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쿠마르 마치 지금처럼,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다가 신문의 글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90세의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핵 반대 시위를 하다가 투옥되었다는 글이었습니다.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90세에 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감옥에 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동료 프라바커 메논과 의논하여, 핵 강대국들의 수도인 모스크바, 파리, 런던, 워싱턴까지 평화행진을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버트란드 러셀에게 우리가 도우러 간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나는 매우 늙었으니 빨리 걸으라”고 답장을 했더군요.
우리는 기부금을 받기 시작했는데 비노바는 돈 없이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대륙을 거쳐,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종교를 믿으며, 다른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들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노바는 “만일 돈이 있으면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모텔에서 잠을 잘 것이 아니냐. 그러나 돈이 없으면 무방비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너희들은 남을 믿어야 하고, 두려움을 없애야 하며, 믿음을 가져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찾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돈 없이 걸어서 인도를 출발했습니다.
젠슨 그것이 당신의 삶의 패턴인 것 같습니다. 아무런 방비 없이 미지의 세상으로 걸어나가는 것 말입니다.
쿠마르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것과 토지를 구하는 것, 그리고 평화를 호소하는 것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땅을 내놓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베풀어줄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믿게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나의 삶은 믿음으로 이루어져왔던 것입니다.
젠슨 사람들이 실제로 도움을 주었습니까?
쿠마르 네,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온 마을 전체가 먹을 것을 들고 우리를 환영하러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우리를 위해 잔치를 열고 우리의 발을 씻어주기도 했습니다. 나는 난처하게 여겼지만 사람들이 굳이 그렇게 하겠다더군요. 신발을 만드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신발을 주었습니다. 우체국 직원은 우표를 주었습니다. 이발사는 면도를 해주고, 택시기사들은 우리를 태워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제안은 거절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었지만 그것도 또한 받을 수 없었습니다. 폴란드에서는 어떤 아이가 자기 집을 방문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정 코스에서 상당히 벗어나야 했지만 우리는 그 청을 받아주었습니다. 동베를린 경계에서 한 보초는 자신도 총을 버리고 평화를 위한 싸움에 동참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흑해 근처의 조지아에서는 여성들이 자기네가 일하고 있는 홍차 공장에 와서 얘기를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전 세계의 보통 사람들이 바로 핵폭탄의 짐을 지고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폭탄을 만들기 위한 비용을 부담하는 것도 우리들이고, 그로 인해 죽는 것도 우리들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목소리를 내어 그것에 반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얘기를 듣고 한 여성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뛰어나가 홍차 네상자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것들을 모스크바의 우리 지도자와 프랑스 대통령, 영국 수상, 미국 대통령에게 전해주세요. 그리고 이 말을 같이 전해주세요. 만일 폭탄을 떨어뜨릴 생각이 들면 잠깐 멈추고 이 차를 한봉지 타서 마시라고요. 그러면 세계의 보통 사람들은 폭탄이 아니라 빵을, 죽음이 아니라 삶을 원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겠지요.” 그녀의 말은 매우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했습니다.
젠슨 행진에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습니까?
쿠마르 우리가 만난 사람들 중 평화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한 마을에서의 일인데, 그 집의 남편이 우리를 초대했습니다만, 그 아내는 우리를 쫓아내더군요.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밤을 묵어갈 손님을 데리고오는 데 그만 질려버렸다고 말했습니다만, 실은 정치와 평화를 얘기하며 인도에서 온 비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조지아주의 올바니에서의 일인데, 나는 한 영국인 친구와 카페에 갔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치즈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웨이트레스는 주문을 받고 가더니 돌아와서 샌드위치가 다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커피만 달라고 했습니다만, 그것도 없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매니저에게 항의했지만, 그는 어떤 손님을 받을지는 자기가 정할 수 있으며 우리는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되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권총을 꺼내들더니 내 가슴을 겨누더군요. 내 친구가 나를 막아섰고, 다른 손님들이 우리를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그 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내 피부색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핵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었지요? 그 답은 아니오입니다.
젠슨 보통 사람들과 그들을 대변한다고 나선 이들의 반응은 어떻게 달랐습니까?
쿠마르 정부들의 반응은 우리를 친절하게 대접하는 데서부터, 문제는 자신들이 아니라 적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는 경우까지 다양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감옥에 갇혔다가 국외로 추방당했습니다.
젠슨 환경운동이나 반기업운동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차이가 나타납니다. 보통 시민들은 연어의 멸종을 원하지 않고, 다국적 기업들을 좋아하지도 않죠. 그러나 실제 행동에는 큰 차이가 …
쿠마르 한편으로는 기업과 정부기관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보통 사람들이 있죠.
젠슨 그리고 또 이런 기관들 내에서 활동하는 개인과 그 기관들 자체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쿠마르 그것은 일자리와 집과 자동차를 소유하고 저당권, 보험, 연금을 가지는 것이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도록 우리가 선전이나 광고, 교육, 미디어를 통해 심리적 조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이상하거나 반사회적이라고 믿도록 세뇌된 거지요.
젠슨 동감입니다. 나는 콜로라도 광산학교에서 물리학으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동창들은 대부분 핵잠수함이나 다국적 정유회사, 광산기업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틀에 묶여서 살 수 없었던 거죠. 어떤 이들은 내게 마련되어 있는 삶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용감하다고 합니다만, 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나는 불행했습니다.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함정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다른 대안이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통제하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쿠마르 두려움은 우리 사회의 지배요소입니다. 어린시절부터 부모, 학교, 정부가 두려움을 키워줍니다. 두려워하도록 양육되었기 때문에 안전을 갈구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아주 쉬운 형태의 거짓 안정을 제공합니다. 돈이죠.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달러의 독재 밑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은 공적 삶뿐만 아니라 사적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젠슨 이런 사고가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 걸까요?
쿠마르 광고가 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상품을 사면 행복해지고, 안전하고, 사랑받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며, 존경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매일 봅니다. 매일 10억달러가 광고에 쓰여집니다. 매일 말입니다! 일년에 3650억달러입니다!
젠슨 그런 수치를 들을 때마다 몇년 전에 읽었던 비교 수치가 떠오릅니다. 70년대 후반에 천연두를 없애는 데 약 3억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그보다 좀더 적은 비용으로 5억명의 어린이들에게 수두, 디프테리아, 홍역의 예방접종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매년 2500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10억달러면 제3세계의 5백만 어린이들을 1년 동안 학교에 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매주 광고에 들어가는 비용으로 깨끗한 물이 부족한 모든 사람들에게 물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쿠마르 단지 악하거나 부패한 지도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주들보다 하리잔들의 마음에 접근하는 것이 더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삶을 통제할 권리, 핵폭탄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살아갈 권리나 온전한 세상에서 깨끗한 공기와 물을 마시며 살아갈 권리가 모두 자신들에게 있음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 대신 그들은 세뇌되고, 조작된 대로 살아가고 있지요. 우리의 마음, 존재, 눈, 사고는 한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전지구적 단일문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생산자이고 제조자이며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해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용기를 찾아야 합니다. 용기는 각자의 신념에서 올 수도 있고, 실패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결혼의 실패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사회가 붕괴되는 데서 올 수도 있습니다. 혹은 당신이 그러했듯이, 비록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보여도 만족이나 성취감을 찾지 못하여 공허감이나 고통, 불행을 느끼는 데서 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단 그런 공허를 느끼기 시작하면, 사슬을 깨뜨리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영혼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엄청난 것입니다. 대량생산 사회는 몹시 추악합니다. 아주 작은 예로 세라믹과 폴리스틸렌의 촉감 차이를 비교해보세요. 폴리스틸렌 사용에서 생기는 쓰레기는 차치하고라도 말입니다. 맨발로 흙을 밟으며 걷는 것과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을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영혼은 굶주려 죽어버리게 됩니다.
젠슨 산업문명이 얼마나 더 지속되리라 보십니까?
쿠마르 소련은 붕괴했죠. 아파르트헤이트도 사라졌습니다. 이 산업주의, 물질주의의 단일문화가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영구히 노예상태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의 모든 시스템은 모래 위에 서있습니다. 생태적으로나 영성적으로나 이런 체제는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궁극에는 인간 영혼이 승리할 것입니다. 나는 현재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다방면에 걸친 환경재앙 때문에 결국 우리가 더 나은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유기농산물, 수공예품이나 예술작품들, 음악, 시, 그리고 땅으로 말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필요한 물건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삶과 자연, 사랑을 예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상호의존적으로 될 것입니다. 서로 돕고 살게 될 것이고 영혼을 살찌우는 사회로 돌아갈 것입니다.
젠슨 많은 환경운동가들은 회색곰이나 연어 혹은 그밖의 생물들이 산업문명이 붕괴할 때까지 멸종되지 않게 하여 그들에게도 삶을 지속할 기회를 주기 위해 일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 그때가 되었을 때, 다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남기기 위해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려 한다는 토착민들도 있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도 그와 같은 요소가 있다고 느껴지는데요. 공동체의 의미를 유지하고, 공동체적 삶의 형태를 보존하려는 시도 말입니다.
쿠마르 그런 문제에 관련해서 내가 사용하는 두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구명보트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업문명이라는 배가 침몰할 때 우리도 함께 가라앉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대안적 기술, 공동체, 예술, 작은학교, 수공예 ― 이런 것들이 바로 구명보트입니다.
또하나의 비유는 “어둠을 저주하기보다는 단 하나의 촛불이라도 켜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건설적인 계획 하나를 시작하는 게 세상이 얼마나 나쁜지 끝없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기술주의 대중사회를 비판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넘어 대안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잡지《리서전스》와 슈마허 칼리지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는 승려생활의 영성적 토대와 토지개혁운동을 통한 사회적인 관심, 세계를 걸으면서 추구했던 평화에 대한 이상과 땅 위를 걸으면서 발견한 생태적 관심을 아우르는 비젼을 널리 퍼뜨리려고 합니다. 땅 위를 걸어가면 나무, 강, 나비, 딱정벌레 같은 자연과 아주 가까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나는 내 두 다리가 내 신체에서 가장 창조적인 부분이고, 걷기가 에너지의 가장 창조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자연의 아름다움, 즉 생명과의 친밀한 접촉을 통해 얻어진 것입니다.
비폭력의 문화를 건설하는 데 비방(秘方)이나 지름길은 없습니다.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린 작업입니다. 참을성이 아주 많아야 합니다. 자비심도 필요합니다. 참을성과 자비심은 비폭력의 두가지 덕목입니다. 문화는 한사람, 한사람씩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하나의 운동, 하나의 큰 대화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김형수 옮김)
이 대담기록의 출전은 The Sun 1999년 8월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