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메이지유신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가 남의 나라의 역사를 새삼 들먹이고, 나아가 그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결코 남의 역사로 치부해버리고 말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이라고 하면, 흔히 우리는 일본, 그리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근대’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1868년 이후 지금까지 일본을 포함해서 동아시아 지역의 수많은 민초들이 겪어온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세월을 생각하면, 메이지유신이라는 것을 단지 ‘근대의 출발점’이라는 식으로 무미건조하게 정의해 놓고 지나갈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표준적인 주류의 역사교과서에 의하면, 19세기 중엽 이후 동아시아 쪽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서양 열강의 침략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본은 재빨리 국가체제를 변혁하여 온갖 문물제도를 근대적으로 혁신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실제로 그 일을 아시아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일찍, 그리고 성공적으로 성취할 수 있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메이지유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후의 일본국가가 밟아온 구체적인 경로와는 별도로, 메이지유신 자체는 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 걸친 ‘근대화’의 기점으로 마땅히 기념해야 할 사건으로서, 일본의 주류는 말할 것도 없고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각처의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대체로 높이 평가되어왔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지난 150년간 한반도를 비롯해서 동아시아가 겪어온 역사를 되돌아볼 때, 메이지유신은 또한 이 지역에서의 엄청난 ‘비극’과 ‘재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근대 일본’의 침략주의와 식민주의로 인해 참혹한 삶을 강요당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오늘날 일본에서는 오히려 메이지유신 이후 적어도 1931년 중일전쟁 개시까지를 ‘영광의 시대’로 보는 사람들이 허다한 것도 사실이다. 그들에게는 메이지유신은 물론,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도 일본인의 자부심을 한껏 높여주는 획기적 사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키나와, 대만, 조선, 만주를 침략하고 식민화한 것은 일본 자신이 서양의 식민지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불가피한 상황전개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대 일본의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과 지배는 이 지역이 ‘전근대’ 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의 지식사회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게 오늘의 엄연한 현실이다(최근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을 중계하던 미국인 방송저널리스트가 느닷없이 “한국인들은 오늘의 발전에 대해서 일본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라는 발언을 한 것은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 얼마나 널리, 그리고 깊게 퍼져 있는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지만, ‘식민지 근대화론’은 ‘근대적’ 삶이야말로―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건―옳고 좋은 것, ‘진보적인’ 것이라고 보는 관점을 그 저변에 깔고 있는 논리이다. 그런데 과연 ‘근대문명’이란 게 그렇게 찬미할 만한 것인가? 물론 전통적인 신분제 사회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질곡으로 작용했던 게 사실이고, 그 점에서 어떤 형태로든 변혁이 필요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난 150년간 일본이나 동아시아가 경험했던 ‘근대화’ 과정과 그 결과는 과연 우리가 긍정할 수 있는 것이었던가?
중요한 것은 언제나 누구의 눈으로 역사와 현실을 보는가 하는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지배층이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돌진한 결과는, 일본이나 동아시아를 막론하고 사회 저변의 민초들의 입장에서 간략히 요약하자면, 장구한 세월 동안 풀뿌리 민중이 의존해온 공동체적 삶의 기반의 파괴와 해체였다. 요컨대 일본이 시작한 동아시아의 근대화는 한마디로 지배와 침략, 식민지 지배와 전쟁, 그리고 개발독재라는 폭력으로 점철된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이끈 이념적·사상적 무기가 다름 아닌 ‘탈아입구’(“아시아를 벗어나 서양으로 들어가자”)의 논리였음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다.
하기는 ‘탈아입구’라는 용어에 내포된 사고방식은 메이지시대 일본 지배층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 말 속에 암시돼 있는 ‘아시아 멸시 사상’은 따져보면 인류사회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즉, 거기에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혹은 자기보다 뒤떨어져 있다고 간주되는 인간집단을 깔보는) 인간사회 특유의 속물적 욕망이 내포돼 있었다. 일부 역사가들에 의하면, 원래 ‘아시아’라는 말 자체가 그러한 용도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찍이 유럽인의 눈으로 볼 때 러시아는 틀림없는 ‘아시아’였고, 또 유럽 중에서도 동유럽은 ‘아시아’로 흔히 간주되곤 했다. 심지어는 상대적으로 일찍 근대적 국민국가 체제를 구축한 영국이나 프랑스인들의 눈에는 (통일국가 성립 이전의) 독일도 역시 ‘아시아’였다. 그러니까 서구식의 문명개화를 재빨리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근대화에 매진하고 있던 메이지시대 일본 지배층이 ‘탈아입구’라는 용어로써 자신들의 ‘권력의지’를 표명했던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탈아입구’의 논리(혹은 심리)가 아시아의 다른 민족사회들을 단순히 경시하거나 깔본다는 차원을 넘어서 결국 노골적인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1945년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의 참혹한 패배 이후 70년이 경과한 지금도 여전히 일본 지배층의 심리를 강력히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일본 정부와 지배층이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민족에게 저지른 숱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 흔쾌히 사죄를 하지 않는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의 내심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이 ‘아시아 멸시 사상’ 때문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한국이나 중국 사람들도 일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곧잘 드러낸다. 하지만 단순한 반한(反韓)이나 반중(反中)이 아니라, 한국이나 중국을 가리켜 ‘혐오스러운 나라’라고 부르거나 심지어 ‘치매의 나라 한국(?韓)’이라는 제목을 단 책들이 대형서점의 점두에 수북이 쌓여 있는 일본의 대도시 풍경은 그들의 ‘아시아 멸시 사상’의 뿌리 깊음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이 경과한 지금, 동아시아 지역은 어느새 세계 경제의 주요 중심축으로 부상했고, 그 결과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상당한 세계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각에서는 이제 수명이 다해가는 서구식 근대문명에 대한 대안적 모델이 동아시아에서 출현할지 모른다는 기대까지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지금으로서는 부질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동아시아인들은, 대부분의 비서구권 문화가 그렇듯이, 아직도 서구식 삶의 양식을 자신들의 삶의 표준적인 모범으로 삼는 정신적 예속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인도의 반식민주의 사상가 아시스 난디의 말을 빌리면, 오늘날 아시아인들은 서구 근대적 가치의 압도적 지배하에서 “신체뿐만 아니라 마음에서도 깊이 식민화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없는 식민주의’는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계속되는 식민주의’로부터 해방되려면, 무엇보다 우리는 근대문명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그 본질을 명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 인류사회가 직면한 가장 긴급한 위기, 즉 기후변화로 대변되는 생태위기에 일단 국한해서 말한다면, 서구식 근대문명은 ‘지속 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 결함을 내포한 문명이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문명은 조만간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대안을 찾을 것인가. 결국 물질의 막힘없는 순환을 근본 토대로 하는 영속적인 생존·생활방식, 즉 일찍이 《4천년의 농부》(1911)의 저자 프랭클린 H. 킹이 입이 마르도록 찬양했던 동아시아 특유의 친환경적 농사 원리를 적극 되살리고, 어느새 희귀종이 되어버린 농민과 농촌을 다시 소생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새로운 ‘농본주의’가 왜 필요한지를 우리가 새삼 깊이 음미하는 것이야말로 메이지유신에서 시작된 ‘침략의 근대화’를 가장 유익하게 되돌아보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