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일, 경칩을 사흘 앞둔 날 저녁, 대구의 도심 한복판 작은 광장에 있는 네그루의 느티나무 아래에 서른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섰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나무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은 ‘겨울나무’를 나즈막히 노래한 다음, 준비한 막걸리를 나무들에게 올리고 절을 했다. 금요일 저녁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꽤나 붐볐지만 이 낯선 광경에 눈길을 주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주위 분위기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듯한 이 제의(祭儀)를 준비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작년 11월 24일부터 이 날까지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집회’를 100일 동안 이어온 대구지역 녹색평론 독자들이었다.
여느 해에 비해 몹시도 추웠던 지난 12월의 칼바람, 연말연시의 소란함, 거기다 설 연휴까지 거쳐오면서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기도의 촛불을 밝히고 9천명 가까운 시민들로부터 지지 서명을 받은 이들은, 자신들의 ‘외침’을 적은 현수막―“쌀은 생명이다, 농민은 존엄하다”, “농촌은 뿌리다, 농사가 희망이다”, “민중을 쥐어짜는 한미 FTA 반대한다” 등이 적힌―을 날마다 매달았던 광장의 나무들에게 이렇게 조촐히 예를 표하였다.
물론 이 작은 제의는 서로의 수고에 대해 ‘사람’들끼리 서로 격려하고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의식이기도 했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견디고 서 있는다는 것의 의미를 묵묵히 몸으로 가르쳐준 나무들에게 진심어린 감사와 우정을 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지난 연말, 경찰폭력에 의한 전용철·홍덕표 농민의 죽음과 쌀협상 국회비준 강행처리 등으로 분노와 참담함이 뒤섞인 심정에 휩싸여 있던 녹색평론 편집실 식구들은, 대구지역 독자들 중심으로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이 촛불집회에 함께하면서 참으로 큰 힘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외부나 위로부터의 힘으로부터 커다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대신, “자신이 가진 힘을 의식하고, 그에 따라 개인으로서 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동할 수 있다”(본지 제57호, 마리아 미스〈힐러리에게 암소를〉중에서)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함으로써, 패배감과 절망감을 스스로 떨쳐버릴 수 있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사상을 몸으로 살고, 더욱 풍부하게 만든 뛰어난 아나키스트였던 애먼 헤나시(1970년 卒)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동안, 그렇게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는 냉소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했다는 대답, “아뇨,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나는 확신합니다”라는 그 대답(본지 제63호, 리 호이나키〈또하나의 전쟁〉중에서)을 수시로 상기함으로써, 우리는 추운 겨울의 광장에서도 ‘유머 감각’을 결코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녹색평론의 메시지가 이렇게 거리에서 독자들과 함께하는 소박한 실천을 통해, 더욱 풍부해지고 구체화되는 것을 확인한 것은 우리로서는 분명히 값진 경험이었다.
또한, 이 겨울 동안의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는 평택 황새울과 새만금, 천성산과 날마다 ‘함께하였다’. 비록 몸은 그 현장들과 떨어져 있지만, 그 각각의 현장에서 외치고 투쟁하고 기도하고 있는 모든 풀뿌리 형제들과 우리는 ‘촛불’을 통해 분명히 이어져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2월 말과 3월 초에는 비정규직 법안 날치기 처리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 그리고 철도 상업화에 저항하여 파업을 벌인 철도 노동자들의 긴급하고 절박한 호소를 이 촛불집회에서 공유하고, 비록 작은 목소리, 투박한 논리로나마 이를 시민들에게 전하기 위해 외치고 또 외쳤다.
감히 말하건대, 지금 이 땅 풀뿌리 민중(운동)에게는 ‘자기연민’도 ‘자기도취’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등 기층 민중운동뿐만 아니라 여러 시민사회운동 진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뼈아프게 반성하는 것을 우리는 더이상 미루어서는 안된다. 아니 상황이 긴박하면 할수록 더더욱 그러한 성찰과 반성 속에서 새로운 지혜와 비전을 탐색해야 한다. 그리고,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반성을 위해서는 자신을 비추어줄 ‘거울’ 혹은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 생존의 근본 토대인 농업과 지금까지 그 농업을 뿌리로부터 지탱해온 소농이 국가권력에 의해 사실상 조직적으로 ‘폐기’, ‘추방’되고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 농민?농업의 문제에 그동안 헌신해온 사람들에게도 이것은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번 호 녹색평론에서〈농업을 살리기 위한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라는 제목으로 좌담을 마련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절박한 문제의식의 표현이다. 물론 여러 면에서 부족함과 아쉬움이 없지 않은 자리였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기획이 ‘전농’을 중심으로 한 ‘주류’ 농민운동, 그리고 그와는 거의 별개의 길로 평행하여 달려온 ‘생협’을 중심으로 한 ‘유기농 직거래운동’이, 농업의 총체적인 위기 앞에서 더이상 서로의 존재를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문제의식, 그리고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서로간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그동안 각자가 쌓아온 경험(성과와 오류) 및 지혜를 바탕으로 창조적이고 힘있는 ‘사회적 연대’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문제의식을 우리사회에 던지는 데에 조금은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나아가 이번의 ‘대화’가, 우리의 삶을 끝없이 식민화하는 자본과 국가의 ‘독재’에 맞서 이 땅 풀뿌리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생존을 방어하고, 정치적·경제적인 자립·자치 능력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조직 및 투쟁의 전략을 모색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번 호의 다른 내용들 또한, 독자들께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숙독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이번 좌담 속에서도 누차 강조되고 있지만, 바로 지금 우리가 더이상 늦추지 말고 착수해야 할 ‘농업을 살리기 위한 사회적 연대’를 위해서는 농민과 일반시민들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전향적인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면, 민주노총 등 ‘주류’ 노동운동의 ‘구태’와 ‘관성’, 그에 기인한 ‘오류’와 ‘위기’ 따위를 언급하면서 “노동운동에 희망은 없다”는 식의 냉소적인 반응이 즉각 돌아오곤 한다. 또는 산업화 논리와 자본주의 체제 속에 근본적으로 편입·포섭될 수밖에 없는 산업노동의 속성, 그리고 기득권화?체제내화되기 쉬운 노동운동의 운명에 대한 회의론에 심심찮게 부딪히곤 한다. 물론 이러한 반응들이 분명히 어떤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더구나 녹색평론은 그동안, 본격적으로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산업화된 ‘노동’과 ‘노동운동’의 한계에 대해 비교적 자주 언급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작업은 산업화·기계화된 노동 속에서 자연과 생명의 가치,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소외시킴으로써만 존재를 유지하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운명에 결박당한 ‘노동자’들이, ‘족쇄로서의 시간’의 사슬을 스스로 끊고 ‘심장으로서의 시간’(본지 제84호, 백무산)을 살기 위한 성찰과 투쟁(‘생명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에 나서도록 돕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지, 다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해 더이상 길게 논할 여유는 없다. 그러나 아무튼 노동운동의 ‘희망 없음’을 되뇌면서 냉소적·비관적으로만 이 문제에 응대하거나, 노동자들의 모든 투쟁을 백안시하는 태도는 우리의 상황을 역전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다른 것은 다 접어두고라도, 최근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것이 비록 정부와 철도공사의 엄청난 이데올로기 공세와 파렴치한 탄압에 의해 단 나흘 만에 종결되고 말았지만, 그 파업의 최대 목표가 다름 아닌 ‘철도의 상업화’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엄연한 풀뿌리 민중의 공유재인 철도를 소수 대자본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려는 기도를 막는 것이야말로 이번 파업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는 것은, 그러나 우리사회 전체에 충분히 전달되지도, 알려지지도 못하였다. 그뿐 아니라 철도 노동자들은 또한번 고립된 채 ‘국민의 발’을 볼모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주류 언론들에 의해 매도당해 버렸고, 그 언론들이 주도한 ‘여론’에 우리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편승해 버렸다.
하지만 이번 파업의 전후 맥락을 조금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들이라면, 이번 투쟁에서 ‘사회 공공적 노동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충분히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좀더 복잡한 맥락과 논의가 그 속에 있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은 되지만, 어쨌거나 비정규직 악법 저지를 위해 ‘총파업’을 선언했던 민주노총이 이번 철도 노조의 파업에 효과적으로 연대하지 못했던 점, 그리고 우리 시민사회 전체가 철도 파업의 의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응원을 보내지 못했던 점 등은 물론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민중의 공유재를 민영화·상업화하려는 자본과 국가권력의 ‘로드맵’(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물 사유화’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에 대하여, 한국의 노동운동이 이미 오래 전부터 상당한 희생을 스스로 감수하면서도 끈질기게 저항해왔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저항’을 ‘제 밥그릇 지키기’라고 비난하는 것 또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먼저 싸워야 하고, 허황한 대의명분이 아닌 ‘일용할 양식’과 그 토대를 지키기 위한 싸움만이 가장 숭고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타자의 생존권과 토대를 약탈하거나 식민지화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과의 ‘긴장’은, 구조적으로 쉽게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 즉 ‘사회 공공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우리가 지지를 보내고 힘닿는 대로 연대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풀뿌리 민중의 생존의 토대인 땅과 자연, 우리의 공동체를 모조리 재물의 신 앞에 ‘봉헌’하려고 하는 이 자본과 국가권력의 미친 ‘기관차’를 실제로 멈출 수 있는 것이 누구인가. 우리사회가 자립·자치와 공존의 길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도록, 이 광란의 기계를 실제로 멈출 수 있는 것이 누구인가. 에너지 고갈이나 자연적 대재앙과 같은 ‘파국’이 아니라면, 실제로 그 ‘기관차’를 몰고 ‘기계’ 앞에 서 있는 노동자들이 아닌가.
우리는 바로 이 ‘사회 공공적’ 차원에서 현재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고 또 가장 다급한 문제가 다름 아닌 농업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철도 노조를 비롯한 노동운동이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그 ‘사회 공공성’을 방어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그러한 헌신성과 조직력이야말로, 우리 농업을 지키고 살리기 위한 사회적 노력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믿는다. 문제는 이 가능성이 말로만 하는 ‘노-농 연대’가 아닌 구체적인 ‘사회적 연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려면, 이러한 필요성에 먼저 눈뜬 모든 개인과 그룹들이 지금부터 서둘러, 그러나 끈기를 가지고, 효과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도록 여러 방면과 차원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노동운동’ 얘기가 나온 김에 독자들에게도 알리고 싶은 작은 소식이 한가지 있다. 지난 1월 말, 편집실로 반가운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경기도 소재 모 대규모 자동차 생산업체의 노조에서, 녹색평론사가 발간한 천규석 선생의 《쌀과 민주주의》를 노조원들이 함께 읽기 위해 1백여부 구입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노조의 한 조합원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이 결정은―물론 여기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고 기뻐하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태도일지도 모르고, 또 그 조합원들에게 오히려 실례가 되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책’ 만드는 일을 통해 사회적 토론과 연대에 기여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여기는 우리들로서는 작은 ‘보람’을 느끼도록 해준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변화’는 이렇게 작은 ‘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문제는 책임감과 확신을 가지고, 지치지 말고 각자의 위치에 발을 딛고, 서로 대화하고 연대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이겨낸 겨울나무는, 황지우 시인이〈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게로〉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이제 “영하에서 영상으로” 밀고 올라감으로써, “온몸이…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자기 온 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낙엽이 하나 지는 데도 온 우주가 용을 쓴다고 일찍이 누군가 말했던가. 그렇다면 저 겨울나무 검게 마른 가지가 연둣빛 새싹 하나를 다시 틔워내기 위해서는, 또 얼마만한 우주의 ‘협동’이 필요하겠는가. 봄의 소생을 위해 이 대지의 생명들은 또 얼마만큼 ‘힘을 모아’ 용을 쓰겠는가.
지난 겨울 동안 그러했듯이, 우리는 또다시 저 나무들로부터 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