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서울의 청계광장에서 시작된 촛불집회가 끊임없는 진화를 거듭하면서 두달 넘게 계속되고 있다. 첫날 10대 소녀들과 젊은 어머니들이 주도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성립된 촛불집회가 이렇게 확대되고, 끈질기게 지속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 더욱이 연일 대규모로 벌어지는 집회?시위가, 비록 몇차례의 우여곡절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처럼 평화롭게, 거의 축제를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실로 경이롭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장기간에 걸쳐서 이러한 평화로운 시위가 계속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그 철저한 자발성 때문일 것이다. 집회 참가자들이 누구나 인정하듯이, 이 촛불집회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이것이 어떤 특정한 정치세력이나 그룹에 의해서 조직되거나 지도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금 상당수의 시민단체들이 집회에 관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역할은 정부당국이나 수구언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집회의 원활한 진행을 돕기 위한 자원봉사식의 조력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지도부가 없고, 중심이 없다는 사실은 에너지의 집중을 어렵게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촛불집회는 바로 그 지도적인 중심의 부재가 오히려 더 강력한 에너지의 발산을 초래한다는, 매우 흥미로운 예를 보여주고 있다. 집회가 열릴 때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저마다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내고, 거기에 많은 목소리가 흥겹게 화답하는 이 집회의 분위기는, 소위 엘리트 지식인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무정부적인 군중집회의 혼란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민중적 축제의 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민중적 축제란 말 그대로 흥겨운 굿판이자 동시에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기저(基底)에 깔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21세기 산업국가의 대도시 한가운데서 이러한 전통이 변형된 모습으로나마 부활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사회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나라 민주주의의 위기에 직면하여, 민주주의의 원칙을 재천명하기 위해서 집결한 사람들이 광장과 거리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단지 이명박 정부의 오만하고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하고, 굴욕적인 외교자세를 직선적으로 규탄하는 공격적인 언어가 아니다. 거기에는 다채로운 해학과 풍자가 있고, 즉석에서 튀어나오는 갖가지 절묘한 아이디어, 제안, 구호와 노래와 그림들이 풍성하게 등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집회와 행진이 계속되는 동안 큰 소리의 구호와 경찰과의 긴장된 대치상황만이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촛불을 서로 나누어 갖고, 분노와 슬픔과 웃음을 나누고, 노래를 하고, 박수를 보내고, 음식을 나눠먹고, 서로의 안전을 걱정해주는 ‘호혜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소위 공권력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이 ‘무정부적’인 공간에서 사람들은 실로 모처럼 가장 큰 자유와 해방감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수구언론이 지금 수도의 중심이 무법천지의 ‘해방구’로 전락하였다고 개탄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는 이 민중의 자유로움이 한시 바삐 제압하지 않으면 안될 위험한 혼란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민중의 자유는 지배 엘리트들에게는 언제나 무질서를 뜻하는 것이다.
어떻든 2008년 봄과 여름 사이에 지금 우리가 보는 촛불집회는 아마도 역사상 유례가 없는 특이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이 사태의 전체적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경과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난 두달 동안 촛불집회에 관하여 많은 진단과 분석과 논평이 나왔지만, 이 사태에 대한 지식인들의 접근방식은 어차피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의지하고 있는 상투적인 세계인식의 틀을 가지고는 이번 촛불집회의 본질적인 의미, 그리고 그것이 출현한 배경과 진화과정의 독특한 성격을 온전히 해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지식인들은 이번 촛불집회의 ‘탈근대적’ 특성을 논하고, ‘다중’이라는 생경한 용어를 써가면서 촛불집회의 새로움을 강조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아마도 이 집회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비조직적, 비체계적 성격과 축제적 요소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요소들이 실은 풀뿌리 민중문화의 오래된 전통 속에서 항상 존재해왔던 특성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촛불집회에 ‘탈근대적’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풀뿌리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해야 할 것이지, 지식인들에게 필요한 관념적 유희 도구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좀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하여 섣불리 판단을 내리고자 하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지금 이 집회의 출현배경과 지속과정에는 실제로 쉽게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광우병 위험성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를 둘러싸고 촉발된 이번 촛불시위의 일관된 요구는 정부가 미국과 재협상을 하든지, 협상 자체를 파기하든지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촛불집회와 시위의 목적은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게 해달라는 요구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요구도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요구이다. 어떻게 보면 국가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국민적 권리를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이러한 주장은 그동안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드러낸 태도와는 모순적인 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불과 몇달 전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라는 냉소적 자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건 말건 “경제를 살려줄” 것처럼 보이는 후보자를 무조건 지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이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쇠고기 협상 타결을 서둘렀던 것이 아닌가.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이나 이후에 사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그가 민주주의에 대해 각별한 신념을 가졌을 거라고 믿은 유권자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던 것이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그가 민주주의를 무시한다고 규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물론 이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쉽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추측해볼 수 있다. 즉, 5월 이후 끊임없이 광장과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드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염원이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것에 있다고 한다면, 그들이 몇달 전까지 보여주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는 결국 보다 많은 민주주의, 보다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의 역설적인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비웃고, ‘경제 살리기’ 편에 손을 들었던 것은 ‘민주정부’ 10년 동안 오히려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이 심화됨으로써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기반이 크게 훼손되어버렸다는 광범위한 인식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제 살리기’라는 것도 그렇다. 이것은 무작정 돈을 많이 갖고 싶다는 게 아니라, 좀더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싶다는 염원의 표현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삶이 고달프고, 불행한 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믿기 쉽다. 하기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던 공동체의 호혜적 그물망이 훼손되거나 심각하게 축소되어버린 오늘의 상황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 돈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인지 모른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돈을 벌고, 부를 추구하는 데 열중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혹독한 경쟁관계로 만들고, 다른 모든 인간적 가치의 희생을 불가피하게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체험으로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어떤 대안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신념이 없는 이상, 어쩔 수 없이 돈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저 맹목적으로 ‘경제 살리기’라는 말이 구호처럼 우리의 사회적 삶을 압도적으로 지배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 미망 속에 갇혀 있을지언정, 우리 모두는 각자, 따져보면, 영적(靈的)인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 깊숙이 숨쉬고 있는 어떤 본능적인 충동을 끝내 억누를 수가 없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정말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근원적인 충동이다. 사실, 정말로 사람다운 삶이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의 영혼은 이미 다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만 그것을 우리의 사회적 자아는 때때로 왜곡되게,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촛불집회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작년 대선 기간 한국사회를 ‘욕망의 정치’가 지배했다고 한다면 지금은 ‘생활의 정치’가 부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극히 피상적인 관찰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대통령 선거 기간 전후에 ‘경제 살리기’라는 구호로 표출되었던 ‘욕망’의 정체는 결코 단순한 물질적 부와 권력을 확대하고 싶다는 욕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욕심이었다면, 지금 촛불을 통해서 이 나라 전역에서 분출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 치열한 열망의 출처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요컨대 한 사회 구성원들 다수가 지향하는 가치가 불과 몇달 사이에 그토록 극단적인 변화를 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경제 살리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진심을 자극하는 것은 단순한 경제논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미FTA와 쇠고기 문제의 관련성에 대해서 일반 대중이 보여주는 반응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정부와 수구언론이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이 한미FTA를 성사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사람들은 수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설령 한미FTA가 좌절된다 하더라도 쇠고기 문제를 이대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까지 생각하는 듯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직 대부분의 사람은 한미FTA의 본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채, 정권교체에 관계없이 이것을 추진하는 이 나라 지배층과 그들에 봉사하는 언론과 전문가들이 하도 요란하게 선전을 하는 바람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이 뭔가 큰 경제적 이익을 자신들에게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사람들의 이러한 기대심리를 이용하여 쇠고기 협상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설득작업은 별로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지 않다.
정말로 ‘경제 살리기’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면, 한미FTA를 들먹이면 사람들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실제로 정부도, 수구언론도 그 점을 노리고, 쇠고기 수입 문제를 이 정도에서 수용하지 않으면 한미FTA가 물건너 갈 ‘위험’이 있다고 대중들에게 ‘협박’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일반 대중이 한미FTA의 진상을 알고, 그래서 이것이 비준, 발효되는 날 그들 자신의 삶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것임을 꿰뚫어보고 있다면, 그들이 지금 보여주는 반응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미심쩍어 하면서도 한미FTA에 대한 기대를 상당히 품고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그런 혜택보다는 안전한 식탁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고,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존엄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훨씬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촛불집회의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중대한 의의를 갖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날 ‘구조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무역자유화’와 ‘민영화’와 ‘규제철폐’를 강제하면서 사실상 세계 전체를 글로벌 금융자본과 다국적기업의 식민지로 만들어가고 있는 시장경제 지상주의,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지배에 대한 풀뿌리 민중에 의한 강력한 저항운동의 하나로 이 촛불집회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촛불집회는 가령 프랑스의 68혁명과 비교될 수 있는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멕시코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 농민봉기에 비교될 수 있는 측면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파티스타 농민전사들은 1994년 1월 1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되는 날 새벽에 반란을 개시한 이래, 자기들의 조상이 물려준 토착적 방식대로 자립 및 자급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면서, 멕시코 정부로부터도, 신자유주의 체제로부터도 간섭받지 않고 살수 있는 완전한 자치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투쟁해왔다. 그들은 스키마스크와 목총과 인터넷과 시(詩)를 가지고 싸워왔다. 그들은 인터넷을 활용하여 그들의 메시지를 세계 전역의 변혁운동가, 양심적인 지식인들에게 전달하고, 그들과 교감하면서, 투쟁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어 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멕시코 정부를 바꾸는 것도, 권력을 장악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멕시코의 원주민 농민들이 자기들 방식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어 달라는 것이다.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세계 전역의 토착적 공동체를 파괴하고, 단종문화(monoculture)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논리이다. 그들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적 논리란 “인간성에 대한 범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파티스타 농민병사들이 NAFTA가 발효되는 바로 그날 봉기한 것은 그들이 이 ‘자유무역협정’이 가져올 파멸적인 재앙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확히 예견한 대로 NAFTA 이후 10년이 경과하면서 멕시코 농민사회는 결정적으로 파괴되었다. 무엇보다도, 미국정부로부터 막대한 보조금을 받는 미국산 옥수수가 헐값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130만의 멕시코 농민들은 생업을 잃어버렸고,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미국으로 불법월경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운명은 떠돌이 노동자가 되어 미국에서 가장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는, 가장 값싼 임금노예로 전락하였다. 농민뿐만 아니다. 멕시코의 민족문화와 서민경제의 기반은 NAFTA를 통하여 뿌리째 흔들리고, 모든 증거는 사회적 격차가 심화되고 있음을 갈수록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는 사파티스타 농민들의 요구를 경청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멕시코 정부가 이미 멕시코의 민중을 위해 봉사하는 정부가 아니라, 글로벌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정부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멕시코를 움직이는 권력 엘리트들이 원하는 방향이며, 그 방향은 북미자유무역협정 체제가 원하는 방향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민중의 저항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작년에 멕시코에서는 멕시코 사람들의 주식인 토르티야 가격의 인상에 항의하여 수만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금년 정월에는 두 차례에 걸쳐 멕시코의 교사, 대학생, 시민운동가, 농민, 목축업자들로 구성된 10만명의 시위대가 NAFTA 재협상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면서 멕시코시티의 중심가를 행진했다.
물론, 지금의 촛불집회가 아직 한미FTA를 주된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징후로 보아 현재의 쇠고기 문제는 곧 한미FTA 문제로 옮겨갈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다. 물론, 현재로서는 속단은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쇠고기 문제가 한미FTA로 옮겨감으로써만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촛불집회의 의의가 온전히 살아날 것이라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는 본질적으로 한미FTA의 문제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미FTA가 만약에 현실적으로 발효된다면,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사실상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국가간의 통상조약이란 원래 무서운 것이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눈에 띄지 않게 민중의 생존기반을 잠식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군대에 의한 노골적인 침략행위보다도 훨씬더 치명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여러 독립적인 학자, 전문가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한미FTA가 비준, 발효된다면, 이 협정의 극단적으로 ‘포괄적인 성격’으로 인해서 그 현실적인 효과는 결국 미국과의 사실상의 경제통합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리고 그 필연적인 결과는 한국문화의 정체성이 소멸되고, 풀뿌리 민중의 운명이 미국의 2등 시민과 같은 처지로 떨어지는 비참한 상황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물론 한미 양국 사이의 교역량은 증가하고, 그 결과 당연히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성장 그 자체는 원래 민중의 삶에 사실상 하등의 긍정적인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니 경제성장이 되면 될수록 사회적 격차는 더 벌어지고, 민중생활의 자립적 능력은 점점더 약화된다는 점에서, 한미FTA는 멕시코의 선례가 보여주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 FTA든 쇠고기 수입문제든 지금 자유무역의 논리로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은 야만주의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말이 좋아서 ‘자유’무역이지, 실제로는 글로벌 자본에 의한 세계 전역에 걸친 수탈의 메커니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메커니즘의 제어할 수 없는 확장운동에 의해서 가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사회적 약자만이 아니다. 지금 한국의 촛불집회는 광우병 위험에 대한 우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어쩌면 그보다도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산업축산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동물학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물론 광우병은 치유 불가능한 무서운 병이다. 게다가 더욱 두려운 것은 이 무서운 병이 종간벽을 쉽게 뚫고 전염될 수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잠복기가 긴 탓에 설령 광우병 증상을 나타내지 않는 소라고 하더라도 이미 감염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그것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이상, 사람이 그 고기를 먹고 언젠가 광우병에 걸릴지 모르는 것이다. 지금 30개월 이하의 소라면 특정위험부위(SRM)를 제거하면 안심해도 되느니 마느니 하는 얘기들을 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보다 더 어린 소의 살코기라 할지라도 안전하다는 보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특정위험부위라는 것은 광우병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변형 단백질, 즉 프리온이 덩어리로 커지기 쉬운 부위일 뿐, 그 나머지 살과 근육에서도 프리온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축산업자들과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 열심인 정부관리들이 여태까지 미국에서 발견된 광우병 소가 겨우 3마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실제 미국 사람이 미국 내에서 광우병에 걸린 사람이 없다는 점 등을 내세워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의심하는 것은 비과학적 태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과학을 모독하는 사기꾼의 언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는 광우병 검사를 전체 소의 0.01%에 국한해서 시행해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이처럼 광우병이 걸려 있는지 없는지 일찍이 살펴보지를 않았는데 어떻게 광우병 소가 발견된단 말인가. 더욱이, 소비자의 불안을 불식시킬 목적으로 자진해서 자기가 기르는 소들에 대한 광우병 전수검사를 하겠다는 한 축산업자의 제안을 거부하고, 그 검사를 금지하도록 명령하는 미국정부가 아닌가.
그런 정부이니만큼 우리가 독립적인 과학자들의 증언에 좀더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한국어 번역본도 나와있는 책이지만, 미국의 생화학자 콤 캘러허는《얼굴없는 공포, 광우병 그리고 숨겨진 치매》(2007년)에서 이미 인간광우병은 미국을 포함한 세계 전역에 만연되어 있는 질병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설득력 있게 제기한다. 그는 인간광우병의 초기증상은 치매증상과 흡사한 것임을 말하고, 지난 20여년간 미국에서 치매발생률이 무려 9,000%나 증가하여 미국에서만 지금 500만명의 치매환자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치매환자였던 사람의 시신(屍身)에 대한 해부검사의 결과, 그 중 5~13%가 인간광우병으로 판명되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캘러허가 말하는 것이 전혀 근거 없는 사실이 아니라면,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벼락에 맞아죽을 확률보다도” 크지 않다는 따위의 경박한 언설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책임한 것인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광우병 그 자체도 무서운 것이지만, 더 가공할 만한 것은 광우병을 일으키는 원인, 즉 초식동물인 소들한테 동물성 사료를 먹이는 오늘날의 소위 현대식 축산의 관행이다. 오늘날 이윤획득에 광분한 축산자본가들은 당연히 쓰레기로 처리해야 할 가축의 사체의 일부를 동물성 사료로 전환시킴으로써 막대한 비용절감 효과도 거둘 수 있는 데다가 그 사료가 가축의 성장을 촉진하는 데 기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의 본래적 생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소위 육골분이라고 하는 동물성 사료의 섭취를 강요하는 만행을 주저 없이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하기는 풀과 여물을 먹어서 되새김질을 해야 할 소들에게 옥수수를 주원료로 하는 곡물사료를 먹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폭력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의 3분의 2가 가축 사료용이라는 점도 세계의 임박한 식량위기를 감안할 때 더이상 용인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의 부유한 계층의 입맛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곡물을 축산사료로 전용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산업축산 때문에 소들이 당하는 폭력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제레미 리프킨의《쇠고기를 넘어서―산업축산의 번영과 쇠퇴》(1992년)를 보면 미국에서는 광우병이 문제되기 훨씬 이전부터 소들에게 온갖 것을 다 먹이고 있었다. 돼지와 닭의 배설물도 먹이고, 마분지도 먹이고, 심지어는 소의 체중을 3배나 빨리 불어나게 한다는 이유로 시멘트가루도 먹였다. 그리고, 비좁은 우리에 갇혀 지독한 악취를 견디며 운동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지내는 소들은 극도로 저항력이 약해져 질병에 걸리기 쉽고, 때로는 심한 신경증을 앓기도 한다. 그리하여 소들이 먹는 사료에는 끊임없이 항생제와 신경안정제가 투입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유전자재조합 성장호르몬의 투여라는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의 저명한 환경의학자 새뮤엘 엡스타인 교수에 의하면, 성장호르몬이 투여된 쇠고기나 우유에는 인체에 유해한 명백한 발암성분이 들어있고, 그 성분은 인체 내의 호르몬 기능을 교란시킨다. 실제로 유럽국가들에서는 광우병 못지않게 지금 소의 성장호르몬에 대한 경각심이 높고, 그 때문에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꺼리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소들이 당하는 학대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미국의 소들은 태어나자마자 대개 꼬리가 절단되는 비운을 겪어야 한다. 왜냐하면 축산업자들은 소의 꼬리가 작업을 하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파리나 모기떼를 쫓기 위해서 소가 꼬리를 흔들면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생겨서 소의 체중이 불어나는 속도가 느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들은 온몸에 곤충들이 엉겨붙어 괴롭혀도 속절없이 그 고통을 견뎌야 한다.
재작년 미국 축산업계에 대한 현지취재를 토대로〈얼굴없는 공포, 광우병〉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함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켰던 KBS의 이강택 피디는 어떤 강연에서 자신이 미국의 축산업 현장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육골분 사료공장의 내부를 어렵사리 잠시 들여다볼 수 있었던 체험을 언급하면서, 그때 그가 보았던 것은 ‘지옥’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을 조금 들어보자.
보호장구 차고 들어갔는데도 헉 했어요. 죽음의 냄새, 소뼈랑 머리랑 이런 것들이 산처럼 쌓여있더군요…불도저가 바닥을 섞는데 보니까 내장하고 뼈하고 같이 섞어요. 소 내장을 처음 보았는데, 뭐가 그리 큰지, 욕지기가 올라오더라고요. 그 다음에 잘게 부수어서 섞은 다음에 자동화로 올려요. 거기에 곡물들을 섞어서 다시 찝니다. 찐 것을 빻아 내리고 이런 과정이에요. 그 냄새가 정말 말도 못합니다. 온통 피에다가 역한 냄새가 올라 오는데…욱하고 [토할 것 같았어요.]… 그 지옥을 보고나니까 제가 인간이라는 게 슬프고, 인간이 이런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생각하니 너무 슬프고, 동물들한테 너무 미안하고, 거의 미치겠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짓을 더이상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와 지역》2008년 5-6월호)
물론, 지금 미국에서는 소한테 직접 소의 사체로 만든 육골분을 주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육골분을 돼지나 닭들한테 먹이고, 돼지나 닭들의 사체로 만든 육골분을 소들의 사료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소가 소를 간접적으로 먹을 수 있는 데 따른 ‘교차오염’의 위험성이 방치되고 있다. 왜 이처럼 그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런 동물학대를 계속하고 있을까.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윤획득을 위한 탐욕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계가 지옥으로 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가고 있는 게 자본의 논리이며, 그 자본을 위해서 기꺼이 봉사하겠다는 게 국가권력을 장악한 지배층 엘리트들의 논리인 것이다.
시인이자 농부인 웬델 베리는 일찍이 현대의 산업축산에서 가축에게 혹독한 학대가 가해지는 것은 모든 것을 이윤추구 수단으로 간주하는 산업주의 멘탈리티의 불가피한 귀결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산업주의적 마음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사람이 궁극적으로 물건처럼 취급되고, 물건이 궁극적으로 쓰레기처럼 취급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개개인의 자각과 관계없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자본의 논리에 맞서서 생명과 평화의 논리를 옹호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또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즉, 한국의 대도시의 광장과 거리에서 미국산 광우병 위험 쇠고기 문제를 둘러싸고 대대적인 저항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동안, 아이티,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식량부족 사태로 엄청난 소요사태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이다. 아이티에서는 정권이 붕괴되고, 파키스탄과 타이에서는 군대까지 동원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생각해보면, 지금 식량위기는 에너지위기, 기후변화위기와 맞물려 인류사회 전체에 밀어닥치고 있는 가장 임박한 위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아마도 한국사회도 지금 당장은 몰라도, 조만간 세계적인 식량위기의 직접적인 영향권 밑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지금은 비록 오염된 음식이지만 포식(飽食)에 길들여져 있어서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가까운 장래에 많은 한국인들이 굶주림의 고통을 습관적으로 겪거나 혹은 심지어 아사(餓死)를 면치 못하는 비극적 재앙을 맞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국의 식량자급도는 산업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20%대에 머물고 있고,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이 사태를 개선하고자 하는 어떠한 실질적인 노력도 행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직도 대대적인 농지축소를 초래하는 산업정책이 기승을 부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식량위기에 대해 정부가 구상하는 대책이란 게 기껏해야 해외에 식량생산 기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구상을 한다는 사실은 지금 현실로 닥치고 있는 세계적인 식량위기의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 이 나라의 정책입안자들이나 권력 엘리트들이 완전히 무지하거나, 아니면 민중의 삶에 대해서 전혀 무책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를 옳게 해결하려면 문제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세계의 주류권력은 아직도 식량위기는 시장경제 원리의 철저한 적용과 무역자유화의 확대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강변하고 있지만, 실은 바로 그 자유무역의 논리가 지금과 같은 식량위기를 낳고, 무엇보다도 세계의 사막화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실, 오늘날 인류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원인들을 점검해볼 때,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가 자유무역의 논리라는 것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깊이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자유무역의 이름 밑에서 미국을 비롯한 농업대국들의 잉여농산물이 헐값으로 국제 농산물 시장에 쏟아져온 결과 세계 전역에서 토착 농민들의 삶은 초토화되고, 각국의 자립적 농업기반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무역은 세계의 황폐화를 초래하고 있는 주범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미국의 책임이 제일 크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사실, 미국은 끊임없이 다른 나라의 농산물 시장 완전개방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지만, 정작 미국정부 자신은 미국의 농민들에게 막대한 보조금을 주는 관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도 지금은 모두 화학농업, 기계농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소규모 농민은 사실상 소멸하고, 미국 농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농들과 거대 기업농뿐인데, 이 대농들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미국정부와 의회는 농가당 연간 100만불 내지 200만불에 달하는 보조금 지급제도를 중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막대한 보조금을 받아서 엄청난 화학물질과 기계를 통해서 과잉생산을 하는 미국농업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소농들이 경쟁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제3세계의 농민들은 결국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거나, 인도의 많은 농민들처럼 자살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피해는 농민들과 도시 빈민들의 불행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폐농인구가 늘어나고, 그 결과 세계 전역에서 농경지가 급속히 사막화하는 불길한 사태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만 하더라도 2차 대전 이후 줄곧 기계?화학농사를 해온 결과 토양침식에다가 토지열화(劣化) 현상이 심화되고, 지하수가 고갈되고, 염해현상이 심화되면서 이미 농지의 3분의 1 이상이 사막화되었다는 보고도 나와 있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앞으로 머지않아 세계농업의 괴멸적인 붕괴가 불가피한 것이 될지 모른다. 작년, 금년에 들어서 곡물의 국제시세가 2~4배나 껑충 치솟아 올라 곳곳에서 식량폭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일시적인 요인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소농의 소멸을 구조적으로 강요하는 자유무역 시스템의 확대가 가장 큰 원인이었음이 분명하다.
명심해야 할 것은 소농이야말로 오랜 공동체에 뿌리박은 지혜에 근거하여 땅을 정성스럽게 보살피며,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지난 4월 세계의 농업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설립된 유엔 산하 ‘농업기술 및 개발에 관한 국제평가위원회’는 수년 동안 세계의 농업현황과 그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조사, 연구를 행한 끝에 그 결론을 담은 보고서를 공표하였다. 100개 국가에서 온 400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이 위원회가 작성한 최종 보고서의 결론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세계농업에 장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방면에 걸친 개선안을 제안하고 있는데, 그 중 특기할 것은 그들이 여태까지 정부기관이나 경제전문가들에 의해서 대체로 무시되기 일쑤였던 소농의 역할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와 기업에 봉사하는 전문가들은 늘 소농을 우습게 생각해왔지만, 이 보고서를 쓴 과학자들은 소농에 의한 농사가 땅과 공동체를 보호하고, 토착문화와 생물종다양성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알려져온 것과는 달리 기업농에 비해서 생산성도 높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실제로 소농의 생산성이 더 높다는 것은 이미 독립적인 연구가, 유기농 농민들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잘 알려져온 사실이다. 이 사실이 뒤늦게나마 유엔 산하 전문기구에 의해서 확인된 것이다.
지금 세계적인 식량위기 사태에 직면하여, 또다시 글로벌 자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유전자조작농산물(GMO)을 확대하려고 부심하고 있다. 그들은 더 많은 자유무역과 GMO만이 식량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고 요란하게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GMO의 인체 유해성 여부, 생태계에 대한 영향, 유전자조작으로 인한 종다양성 소멸 위험 등등, 반드시 사전에 검토되어야 할 문제들이 아직 하나도 정확히 해명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에 대한 탐욕 때문에 이것을 밀어붙인다는 것은 미치광이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땅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고, 지구를 구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소농 중심의 순환적 농법, 즉 유기농임이 분명하다. 쿠바의 예를 볼 때, 유기농 체제로의 대대적인 전환은 실제로 가능한 일이다. 이것을 가로막는 것은 산업주의적 생존방식에 중독된 정신이다. 우리가 이 중독 상태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임박한 재앙을 회피할 길이 없다. 이미 석유생산 정점을 지나고 있다는 징후가 뚜렷해지고 있는 지금, 어차피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해왔던 산업문명은 조만간 종말을 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전환기가 보내는 메시지를 잘못 읽음으로써 우리가, 개인으로서든 공동체로서든, 엄청난 고통과 재난에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쇠고기 사태에서 보듯이, 한국정부와 권력 엘리트들은 소수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에 연연하면서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하고, 공동체 전체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한 자세로 그들이 계속하여 구태의연한 경제성장론을 앞세워 건강한 공동체의 근본토대인 농사를 언제까지나 방기하고 농민의 존재를 우습게 여긴다면, 그 결과는 머지않아 걷잡을 수 없는 식량위기 사태에 속수무책으로 직면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만성적인 석유위기로 인한 고유가 시대에 한국의 수출산업이 예전처럼 잘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거의 전적으로 해외 농산물을 수입하여 먹어온 구조가 그때에도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 식량위기는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식량위기로 인해 굶주리는 사람이 속출한다면, 그때 광장과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은 더이상 촛불이 아니라, 횃불을 들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