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민생 이야기를 많이 한다. 진보·개혁 성향의 정치인, 지식인 중에서도 공공연히 “더이상 민주주의를 이야기해선 먹혀들지 않는다, 어쨌든 경제를 살릴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다음 선거도 가망 없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지금까지 언제 밑바닥 사람의 경제가 좋았던 적이 있었던가? 민생은 늘 좋지 않았다. 사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잘사는 사람들은 늘 잘산다. 문제는 밑바닥 사람들이다. 늘 민생을 걱정하는 사람은 많은데, 왜 밑바닥 사람의 살림은 나아지지 않을까? 정말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마련되지 못해서 민초들의 삶이 고달픈 것일까?
해방 후 이북에서 문필활동을 했던 소설가 박태원의 작품에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대하장편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한 20년 전쯤 남한에서도 출판됐다. 비록 픽션이지만 역사적 사실에 뿌리를 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894년 갑오년에 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30~40년간 조선 각지에서 농민을 주축으로 한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 소설 첫 부분에 1862년 전라도 익산지방에서 일어난 민란 얘기가 나온다. 그때 농민군 우두머리는 임치수라는 사람이었다. 농민반란군이 관군에 의해 진압당하고 그 지도자들이 모두 붙잡혀서 처형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망나니가 목을 베기 직전에 한마디 하라고 얘기하자, 임치수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와 전라감사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는 너희 놈들 손에 이 자리에서 죽는다. 그러나 언제고 너희가 우리 손에 죽고야 말 날이 반드시 있다는 걸 알아라. 이놈들아 똑똑히 들어라. 이제 우리를 죽이거든 우리의 눈알을 모조리 뽑아 전주성 남문 위에 높다랗게 걸어놔 다오. 앞으로 몇년 후, 몇십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 농군이 들고일어나서 너희 놈들을 모조리 때려잡으러 남문으로 몰려가는 광경을 우리는 기어이 이 눈으로 보고 말 테다.”
결국 그의 소원이 잠깐 이뤄지기는 했다. 갑오년에 전주성이 함락됐으니까. 그러나 그 후에 어떻게 되었나. 조선의 지배층은 자기 백성들 요구를 들어주어 내정을 개혁하기보다는 외세에 빌붙어서라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을 택했다. 그리하여 일본군에 의한 삼남 대토벌 작전에 동학군은 괴멸을 당했다. 본질적으로 이런 역사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세기가 더 지났지만 임치수의 소망이 실현될 전망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서사시 《금강》을 쓴 시인 신동엽은 우리 역사에서 잠깐 하늘이 맑게 갰던 순간들에 대해서 자주 언급했다. 그는 그것을 ‘영원의 하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잠시 갰다가 또다시 먹구름이 뒤덮는 역사가 100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게 우리 근현대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암담할 뿐이다. 먹구름이 물러난 맑은 하늘을 잠시 보고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고통당했나. 그러나 얼마 못가서 다시 먹구름으로 하늘이 닫히는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과연 역사에서 민중의 간절한 소망이 실현된다는 게 가능할까? 예수 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2천년이 흘렀지만 민초들의 해방이 역사 속에서 온전히 실현돼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비관할 필요는 없다. 하늘이 맑아지는 순간이 잠시뿐이라고 해서,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가 잠시 동안만 실현될 수밖에 없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포기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영물(靈物)이어서 그 잠시 동안의 맑은 하늘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마음속 깊이 그 기억을 평생 갖고 살면서 언젠가 그것이 다시 실현될 날을 꿈꾸고, 노력하고, 싸우는 게 인간이다. 인간다운 위엄이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충분히 진보적이려면
나는 우리나라 진보 진영이 과연 충분히 진보적인 정치세력인지 묻고 싶을 때가 많다. 민중을 먹여 살리는 것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민주주의라는 철저한 신념 없이, 어떻게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망치는 게 경제성장 논리라고 생각한다. 보수 진영의 경제성장 논리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효과적인 반론이 없기 때문에 대중들은 근거가 있건 없건 높은 경제성장을 약속하는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표를 주었고, 그 결과로 지금 죽도 밥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문제는 이 상황이 좀처럼 개선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4대강 문제, 정말 기막힌 문제다. 이것은 엄청난 돈을 써서 할만한 아무런 타당성과 합리성이 없는, 그냥 우리의 소중한 자연과 삶터에 대한 전면적인 파괴행위일 뿐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렇지만, 약간의 독립적인 발언을 할만한 위치에 있는 학자라면 예외 없이 말이 안되는 사업이라고 하지 않는가. 멀쩡한 강에 무엇 때문에 수십개의 댐을 만들고, 콘크리트 제방을 쌓고, 강바닥을 다 훑어내겠다는 것인가. 이것은 대운하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공사계획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다. 도대체 하천의 자연성을 다 파괴하고, 강물 정화의 자연적 조건을 다 망가뜨리면서 수질이 맑아진다느니 홍수를 예방한다느니 하는 따위,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국민을 전부 바보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공사를 그대로 진행하면 주변 농경지가 다 거덜난다. 지금 벌써 농경지가 수용되고 낙동강유역은 이미 급속도로 망가지고 있다. 팔당 인근 상수원보호구역에서 농민들이 수십년에 걸쳐 온갖 시련을 겪고 유기농 단지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없애고 자전거도로를 만들고, 생태공원을 만들겠다고 한다. 이런 미친 짓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중앙정부가 하는 국책사업이니까 협조하라는 게 지역민들의 항의에 대한 정부의 답변이라고 한다. 뭘 협조하라는 것인가. 그 사람들은 그곳이 생활과 생존의 근거지다. 그뿐만 아니라, 그곳은 수도권 최대의 유기농 농산물 공급의 원천이다. 이것을 크게 장려하지는 못할망정 파괴하겠다는 게 이 나라 국가권력이 하는 짓이다. 권력의 이 횡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더욱이, 농사를 이렇게 가볍게 아는 정부가 어디 있는가. 작년과 재작년, 세계적으로 식량위기 사태가 있었지만 앞으로는 빈발할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세계 전역에 걸쳐 심각하게 농토가 줄어들고 있거나 사막화하고 있다. 그나마 있는 것도 생물연료용 옥수수 단지, 축산 단지, 산업단지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또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앞으로 갈수록 농사가 어려워질 것임은 틀림없다. 게다가 지난 반세기 이상 농사의 주도권을 장악해온 기업농시스템 때문에 토질이 악화되어 농경지로 더이상 적합하지 않은 땅도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볼 때, 몇십년 안에 대재앙이 닥치리라는 건 너무나 명약관화한 일이다. 피크오일은 이미 시작됐다. 현대 산업사회는 기본적으로 석유에 기반한 문명이다. 비단 산업활동과 경제뿐만 아니라 온갖 정치, 사회, 문화, 심지어 교육에 관계된 일도 석유가 개입되어 있지 않은 게 없다. 농사는 말할 것도 없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끔찍한 대량 기아사태에 직면했는데, 북한의 식량자급률은 대략 65퍼센트이다. 남한보다 월등히 높다. 나머지 35퍼센트가 부족하면 대량 기아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남한은 25퍼센트 식량자급률도 그나마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앞으로 석유공급이 원활히 되지 않는 상황이 닥치면 25퍼센트 자급률은 어림도 없다. 해외에서 식량을 90퍼센트 이상을 들여와서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으로 나라가 유지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장기적으로 그토록 식량을 대량으로 수입해 먹는 게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내가 보기에 어림도 없는 일이다.
첫째, 한국의 수출산업이 지속적인 흑자를 누리는 게 과연 가능할까? 공황은 이제 시작단계라고 봐야 한다. 생각 없는 언론은 지금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좀더 객관적인 분석가들에 의하면 본격적인 공황이건 아니건 앞으로 세계경제가 예전처럼 호황을 누릴 가능성은 별로 없다. 공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제 불황이 항상적인 세계경제의 기본상황으로 굳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처럼 자동차와 핸드폰을 팔아서 번 돈으로 해외농산물을 사들여 먹는 패턴이, 안정적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보장은 절대로 없다. 기술혁신에 의해 새로운 상품을 만들면 될 것이라고? 물론 그런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미 지구상에는 그런 상품들을 소화해줄 소비자계층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새로운 소비자계층이 확대되기 전에, 지구생태계가 완전히 망가질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하나는, 설사 그런 기적 같은 일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해외 농산물시장에 언제까지 저렴한 농산물이 존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농토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고, 기후변화와 같은 환경위기에 대비해서 점차 모든 나라가 식량을 무기화할 생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산업국가 중 한국이 식량자급률이 제일 낮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골똘히 생각해야 한다. 우리보다 식량자급률이 낮은 나라는 딱 한군데, 아이슬란드다. 아이슬란드는 본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농업국들이다. 토지면적이 넓지 않은 유럽 국가들도 그렇다. 예컨대 독일과 프랑스는 150퍼센트 이상 식량자급률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도 문제는 있다. 다시 말해서, 선진국들의 농업도 지금은 모두 석유의존 농사이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이들 선진국이 식량의 자급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본받아야 할 대목임이 분명하다.
국내 옥토는 버리고, 해외 농토 확보?
지금 우리처럼 농업을 등한시하는 나라는 없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엘리트들, 지식인들 중 농업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정말 드물다. 그냥 막연히, 어디 안 보이는 곳에서 먹을거리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한 지금 한국정부의 대응은 해외 농지를 확보하겠다는 전략 외에 아무것도 없다. 정부기관이나 대기업들이 러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민주화되지 않은 국가들의 독재자들과 적당히 협상을 하여, 그 지역 민중의 생활근거지인 농토를 사거나 장기임대를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대우가 마다가스카르 농토의 절반 이상을 99년간 임대한다는 프로그램을 그곳 독재정부와 협상을 거쳐서 거의 실현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마다가스카르 정부는 자기 농민들의 땅을 사실상 빼앗아 외국자본에 넘겨주면서도 지역민들에게 아무런 의논도, 동의도 구하지 않고 협상을 진행하다가, 그 사실이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 등에 의해서 폭로되자 폭동이 일어났고, 결국 정권이 바뀌는 바람에 대우의 계획은 무산되어버렸다. 비록 실패한 계획이지만, 이것은 사실상 토지강탈 행위이다. 외국의 언론은 이런 각도에서 신식민주의적 정책이라고 비판을 하지만, 우리나라 언론은 이에 대해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가 기사나 논평을 쓰면 기껏 한다는 소리가, 외국사람들이 한국이 잘되는 꼴 보기 싫어서 하는 비판이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게 고작이다.
실제로 〈조선일보〉에서 그런 논평이 나왔다. 서양인들이 한국에 대해 시기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국익 우선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인간성과 윤리를 아예 망각한 자세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때 우리가 남의 식민지가 되어서 그렇게 인간적인 모욕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아직도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이처럼 약육강식의 논리를 거리낌 없이 옹호한다는 것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최소한 역사에서 배운 게 있다면 세계의 양심과 보편주의적 입장에 약간은 서 보려는 노력을 해봐야 할 게 아닌가.
국가라고 하면 장기적 생존, 적어도 몇십년 정도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식량위기 사태에 대비하여 기껏해야 해외 농토 확보, 그것도 제국주의적인 방법으로 하면서 세계인들의 비웃음을 사는 짓이나 하고 있는 게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국가는 경제성장을 한다면서 끊임없이 국내의 옥토는 황폐화시키고 있다. 더 문제는 이런 기막힌 사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이의제기를 하는 정치세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민중의 처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업
요즘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 정치인들이 생태·환경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좋은 일이지만, 대체로 노동, 여성, 소수자, 환경 등 종래의 주요 이슈에 하나 추가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생태적 위기라는 것은 여태 당연시해오던 가치의 위계구조를 전면적으로 뒤집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동안 늘 경시되어왔던 자립적 농사가 갖는 절대적인 가치이다.
그동안 농업이 너무 망가져버렸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농업이란 자립적인 소농과 살아있는 농촌공동체에 토대를 두고 있는 농사를 말한다. 이 나라 주류사회에서는 수십년간 영농규모의 확대, 기업농 육성, 기계화, 경쟁력 따위만을 얘기해왔다. 소농은 퇴출되어야 농업이 경쟁력을 가진다는 논리였다. 김성훈 장관 때 국가적 차원의 환경농업 얘기가 나왔지만, 그 뒤 다시 기조는 기업농, 국제경쟁력 따위의 공허한 얘기로 돌아갔다. 사실 이명박 정부만 이런 게 아니다. 역대 정권이 다 그랬다.
노무현 대통령이 저렇게 비명으로 갔을 때 물론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그가 대통령 재직 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완강하게 밀어붙이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다. 그 협정은 근본적으로 농업 포기하고 공산품 팔아서 외국농산물 사먹자는 논리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나 생태계를 보호해야 할 국가의 책무를 방기하고, 궁극적으로는 경제주권도 미국에 넘기고 말 협정인데도 불구하고 왜 ‘민주정부’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려는 것인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정부’건 아니건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에 예속되어 무역으로 먹고살자는 전략을 근본적으로 변경하지 않는 한, 반민중적이고 반생태적인 경제정책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상층부 엘리트가 아니라 밑바닥 민중의 처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면, 가장 중시해야 할 것이 농업이다. 민중이 자립할 수 있는 생존의 양식을 생각하면 농업을 축으로 한 경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태·환경을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21세기 최대의 난제인 환경문제를 온전히 극복하는 건 실제로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최악의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급격히 우리의 삶을 생태주의적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런 걸 따지면 성장경제 논리는 애초부터 말이 안되는 것이다. 지금 시급한 것은 순환경제시스템을 확보하는 것이다. 성장경제의 반대가 순환경제이다.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순환의 시스템 말이다. 그러면 자연히 공업 중심이 아닌 농업 중심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결론은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
《4천년 동안의 농부》라는 책이 있다. 20세기 초에 서양인이 동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인분을 거름으로 주는 걸 보고 놀란 경험을 얘기하고 있는 책이다. 자기들 상식으로는 생각도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 환경문제의 큰 원인의 하나가 배설물 처리다. 그런데 동양 사회에서는 인분이 다시 논밭으로 들어감으로써 농지가 쇠약해지지 않고 계속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풍성한 수확을 가능하게 해줬다. 이게 순환경제의 핵심적인 모델이다.
옛사람들은 땅에서 뺏어 먹은 만큼 양분을 땅에 되돌려주는 순환농법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인분과 축분이 단지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됨으로써 심각한 환경오염의 원인이 되어있을 뿐이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써서는 토질의 악화 내지는 쇠약화는 필연적이다. 땅으로 되돌려주어야 할 인간의 배설물이 지금은 그야말로 똥 취급만 당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서양식 근대산업문명의 논리가 관철된 결과이다. 밀란 쿤데라는 우리나라에서도 꽤 인기있는 서양 작가인데, 그는 어디선가 “하느님이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똥을 누게 하는 성가신 일을 하게 했을 리는 없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다. 서양 근대 지식인의 한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순환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런 근본적으로 무지한 발언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똥을 눈다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하느님이 완벽하다는 것을 뜻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똥이 없다면 세상이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 질병이 있다는 게 도리어 자연 질서의 완벽함을 표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간사회에는 약자도 있고 장애인도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이 필요하고, 그런 관계의 체험을 통해서 인간의 삶에 깊이가 형성되고, 우리의 인간성이 풍부해지는 것이다. 비극과 희극이 발생하고, 시와 철학과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석유가 끊어지는 날을 상상해보면
요즘 지식인 사회에서는 지금 이 나라 정치가 파시즘이냐 아니냐 하는 토론도 전개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지금 상황을 파시즘체제라 말하긴 어려울지 모른다.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국민 대중을 통합시키는 인기있는 리더십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시민들의 실감으로 이 정권이 하도 반민중적, 반서민적인 정책을 거리낌 없이 펴고, 공권력의 힘만으로 우격다짐으로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파시스트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대중적인 언어감각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자연하면서 개념의 엄밀성을 앞세우는 태도보다는 지금 민주주의가 얼마나 말도 안되게 훼손되고 있는지를 파시즘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절박한 대중적 심정에 공감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파시즘이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강권통치 내지 폭압정치로 해소하겠다는 기도라고 한다면, 지금 이 정권의 행태를 파쇼적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별로 이상한 것은 아니다.
실제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은 이제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가면 고용문제도 복지문제도 절대로 해결 안된다. 진보 진영에서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사민주의를 생각하는 모양이고, 국가복지체제의 정비를 지향하는 것 같다. 그러나 국가복지체제는 기본적으로 경제성장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근원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도 지금 세계경제 위기상황에서 급격히 퇴조하고 있다. 덴마크 같은 선진적인 사회민주주의 복지시스템을 가진 나라에서 이제 실업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한다. 계속적인 경제성장 이론을 펴는 사람들은 늘 고용문제를 얘기한다. 성장해야 고용할 수 있다, 서민은 고용되어 노동을 하고 거기서 나오는 임금소득으로 생활하며, 모자라는 것은 국가적 복지시스템에 의해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전제는 항상 경제성장과 완전고용의 이상이다.
지금 실업난이 일시적 문제라고 보는 것은 내가 보기엔 착각이다. 축적과잉, 생산과잉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유효수요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이제 복합적인 위기, 즉 기후변화, 에너지위기, 식량위기가 한꺼번에 결합된 형태로 몰려들기 때문에 더이상 이 시스템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본다. 당장에 석유생산정점 사태로 인한 산업문명의 기능마비 사태가 닥칠 공산이 크다. 석유는 에너지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의 기본 원료이기도 하다.
《장기(長期) 긴급상황》이라고, 하워드 컨스틀러라는 미국 작가가 쓴 책이 있다. 여기에 보면 값싼 석유공급이 중단되는 사태 때문에 곧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가 파국적인 상황을 맞을 것임을 예견하고 있다. 이 작가는 그 파국의 가장 구체적인 신호는 비행기 운행이 극도로 축소되거나 전면 중단되는 사태로 나타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비싼 석유 때문에 값싼 항공료 시대는 조만간 끝날 게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행기 운행의 축소는 산업문명의 종언을 고하는 카나리아 역할을 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이미 그때는 지구 전체가 비상상황에 들어간다고 봐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난 20세기 동안 공업화문제만이 아니라 공업화를 축으로 해서 형성되어온 우리의 생활 전반이 석유에 기반하고 있다. 아까 동대구역에 내려서 보니까 일년 전에 안 보이던 고층아파트단지가 또 올라와 있더라. 나중에 석유 끊어지면 저 고층 꼭대기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계단을 오르내리며, 또 아침에 눈 똥을 어떻게 처리할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지금 우리 생활에는 장기적인 안목과 그에 따른 합리성이 전혀 없다.
국가의 비인간성
결국 국가는 인간화될 물건이 아닌 게 분명하다. 아무리 이성을 차리라고 이야기해봤자 국가는 풀뿌리민중의 편이 절대로 되어주지 않는다. 이대로 가서는 임치수의 한(恨)이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말로 이야기하고 간청을 해도 국가는 절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국가권력이 민중의 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는 척 하는 것은, 이러다가는 다음 선거에 지겠구나 싶을 때뿐이다.
그래도 국가권력이 겉으로나마 공익을 표방하고, 나름대로의 자존심이 있으면 양심 있는 지식인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지금 이 정부는 아예 무시해버린다. 4대강 토목공사가 문제 많다고 아무리 합리적인 지적을 해도 대답도 안한다. 그냥 묵살해버리고, 기껏 ‘오해다’, ‘홍보부족이다’라면서 밀어붙일 뿐이다. 이 방면의 전문가들을 향해서 합리적인 설명과 답변을 하지 않고, 내용을 잘 모르는 일반대중을 향해서 엄청난 돈을 들여 일방적인 선전, 광고만 해댄다. 그래도 박정희 때나 군사정권 때는 그 나름대로 지식인의 말을 무서워하고 존중했다고 할 수 있다. 정권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는 지식인을 잡아다가 때리고, 감옥에 처넣은 것은 그만큼 말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이젠 아예 무시해버린다. 말 자체가 허망해져버렸다. 지금 창궐하는 것은 거짓말뿐이다. 지식인으로서는 이게 더 견딜 수 없는 상황이다.
내가 보기엔 이 정권은 경찰력, 즉 국가의 합법적인 폭력행사가 없다면 당장에 무너질 것 같다.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최소한 자유주의 정부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규칙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 거기다가 자본은 원래 생리가 돈 버는 데 목적이 있지 공익사업하는 데 있지 않다. 이 점을 우리는 똑바로 봐야 한다. 자본가를 보고, 기업을 보고 윤리적 경영을 하고, 사회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해봐야 소용없다. 그 말처럼 어리석은 게 없다. 자본의 폭주를 제어하는 게 본시 국가의 책무라고 하지만, 오늘날 국가와 자본은 결국 한통속이기 때문에 그것도 기대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국가와 자본은 밑으로부터의 압력이 없으면 절대로 인간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하는 것이다.
보통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자본의 폭주를 국가 공권력이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회에도 진보정당이 많은 의석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옳지만, 한편 더 생각해보면, 이게 잘되는 일이라면 왜 신자유주의가 나왔겠는가. 예를 들어, 케인스주의가 계속 먹혀들어가는 상황이었다면,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는 시장원리주의가 왜 활개를 치기 시작했겠는가.
경제성장 논리란 결국 지배자,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민중의 자립성을 구조적으로 약화시키고 파괴하는 메커니즘을 심화시킬 뿐이다. 밑바닥 사람들이 거기에 목을 매고 있어서는 영구히 노예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국가가 잘되고 대기업이 번영하면 뭔가 우리에게도 고물이 떨어지지 않겠나” 하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수십년간 속아 넘어가지 않았나. 자본과 국가는 항상 같이 간다. 근대국가는 자본주의 국가다. 폴라니가 순수한 자기조정적인 시장경제는 한번도 있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언제나 국가의 지원, 보호 안에서 자본의 힘은 성장하고 확대되어왔다.
연대와 협동 없이는 노예생활 청산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가도 자본도 아닌 길을 찾는 수밖에 없다. 폴라니도 얘기했지만, 결국 활로는 민중 자신이 스스로 연대하여 협동적인 살림살이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데 있음이 거의 틀림없다. 그래서 협동조합운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원래 산업혁명 시대부터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란 전통적으로 맑스주의자들이 오웬이나 푸리에, 프루동 같은 협동조합 사상―운동가들을 향해서 야유조로 부른 이름이지만, 맑스 자신은 실제로 협동조합의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맑스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산업의 국유화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에 의한 결사체, 즉 협동조합화였다. 그러나 나중에 맑스―레닌주의에 의해 주도된 사회주의운동 과정에서 맑스의 이런 생각은 은폐되고, 협동조합의 중요성은 극도로 폄하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분권적 참여민주주의가 아니고는 세계가 직면한 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깨달음이 광범하게 퍼진 오늘날의 상황에서, 협동조합 사상은 세계적으로 새삼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앞으로의 세상은 협동과 공생 아니고는 공멸밖에 없으니 말이다.
폴라니는 “시장의 폭주에 의해 결국 자연과 인간이 황폐화·피폐화된다. 그때 사회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그 ‘사회’가 바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말한 민중의 자발적 연대와 협동에 기반한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밑바닥 사람들이 자기들끼리의 연대와 협동을 통하지 않고는 노예적 삶을 극복할 길이 없다.
항상 국가권력은 밑바닥 사람들에게 억압적이다. 그 권력을 조금이라도 순화시키는 데는 밑에서부터의 압력밖에 없다. 그 첫째 방법은 거리로 나와 데모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년에 몇달 동안이나 촛불을 들고 나왔지만 공권력의 가차 없는 탄압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물론 촛불시위는 잠재적으로 우리사회의 큰 민주적 에너지로 남아있을 것이다. 어떤 형태든 언젠가 그 위력이 가시화될 것이라고 나는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에 권력이 무도한 탄압을 가해 오면 도리가 없다. 게다가 우리는 상시로 거리로 나갈 수도, 시위를 할 수도 없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어려운 것은, 시민들이 데모를 휴일이나 근무가 끝난 저녁시간에 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도 있다. 다시 말해서, 결사적인 의지로 하는 데모가 잘 성립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약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게 권력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대학생들이 침묵하고 있는데 결사적인 데모가 가능하겠나?
그러니까 데모만으로는 안된다는 얘기다. 더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저항의 차원을 넘어서 그야말로 대안을 만들어, 국가와 자본의 틀 바깥에서 자주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립적 공간을 창조하려는 행동이다. 요즘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 우리나라에 지금 대안학교가 6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물론 바람직한 형태로 다 운영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독립·자주적으로 살겠다는 사람들이 우리사회에 이처럼 많다는 것은 굉장히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아이들을 더이상 희생시키지 않고, 노예생활 안 시키겠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정신적 에너지가 가장 중요하다.
귀농, 귀향의 흐름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또 요즘 취직이 잘 안되기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도시마다 자율적인 세미나, 시민학교, 자치학교가 많이 생기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 노숙자, 교도소 재소자를 위한 자치적인 인문교양학습 운동도 점점 본격화되고 있다. 그런데 자립의 근본은 농촌과 농업이다. 도시거주자들도 이제는 텃밭 가꾸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한달 사교육비 몇십만원 들여서 결과적으로 아이들 망치지 말고, 아이들에게 텃밭 가꾸는 일을 가르쳐주면 훨씬 가치있는 학습을 재미나게 하고, 아는 것도 많아지고, 자립적인 힘을 기를 수 있다. 아무튼 지금의 주류의 흐름에서 이탈하는 게 진정한 활로이다.
성미산공동체―자발적 결사체에 의한 민주주의 실천
마지막으로 서울 마포 성미산공동체에 관해 얘기를 하고 싶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례이지만, 성미산공동체는 원래 동네 젊은 여성들의 공동육아에서 출발하였다. 사실 핵가족 시대에 도시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기른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성들이 상호부조의 네트워크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공동육아 출신 아이들이 자라서 학교에 가게 되니까 이제는 동네 공부방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부모들이 서로 만나 친해지고, 아이들과 가족들의 먹을거리에도 관심이 생겨 도농직거래를 위한 생협도 만들게 되고, 이러다 보니 점점 주민의 협업·자치 모임이 많아지고 나중에는 15개 이상이나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계기는 서울시가 제공했다. 서울시가 성미산에 배수지를 만들겠다고 산을 허물 계획을 발표하자 주민들은 반발하였고, 이를 막아보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지금까지 그저 이용 대상으로만 생각됐던 동네 뒷산에 대한 애정이 커지기 시작했고,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생태조사를 하고, 밤마다 모여서 대책을 숙의했다. 서울시에 항의방문을 하고, 간청도 했다. 언론에도 알리고, 지역신문도 발행하고, 배수지 공사의 타당성까지 독자적으로 조사했다. 그러다 보니 서울시가 완전히 주먹구구 계산으로 불필요한 배수지 공사 계획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서울시가 계획을 철회했다. 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서 서울 한가운데서 연대와 협동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동네의 주민회의 방식이다. 한 주민에 따르면, 그들은 누가 무슨 제안을 해도 쉽게 수긍을 안하는 전통이 형성됐다고 한다. 마지막 한명까지 납득해야 일 추진이 훨씬 효과적으로 되는 경험을 한 결과였다. 모여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게 습관이 됐고, 모든 사람의 궁금증이 해소될 때까지 밤새워서 회의를 했다는 거다. 환경단체 간사들이 참석해서는 뻔한 결과를 놓고도 결정이 한없이 지연되니까 짜증을 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민주적으로 훈련된 환경단체 간사들도 성미산공동체의 문화를 몰랐던 것이다. 거기서 주민들은 다수결 원칙이 아니라 합의제 민주주의, 즉 구성원 전원의 실질적인 참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4~5년에 한번씩 투표하는 것 외에는 행사할 수 있는 민주적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동안에는 권력을 쥔 인간들이 어떤 미친 짓을 해도 별 도리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대의제민주주의의 명백한 한계이다.
우리는 모두 성미산공동체처럼 자발적 결사체를 만들어 민주주의를 실천하면 된다. 다만 서울 한복판이기 때문에 텃밭 가꾸는 것 외에 식량을 자급하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서울과 같은 개인주의가 극심한 거대도시에서 이 정도가 어디냐. 나는 이 동네 청년을 개인적으로 몇명 아는데, 평생 다른 데로 이사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자기 동네에서 사는 게 너무 재미있다는 것이다. 요새 도시에서 자기 동네를 사랑하고, 거기서 사는 게 재미있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런데 성미산공동체 사람들은 퇴근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동네 라디오방송국도 있고, 지역신문도 발행하고 있다.
우리는 공동체라 하면 보통 시골만 생각하는데 서울 도심에서도 이런 게 가능하다는 것을 성미산공동체는 가르쳐준다. 이런 게 전국 곳곳에 무수히 생기면 절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튼튼해지고, 국가권력이든 자본권력이든 민중을 만만히 다루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대통령 잘못 만났다고 속태울 필요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이 독립하기 전 타운미팅시스템이 이와 같은 것이었다. 셀던 월린이라는 미국의 정치사상가에 의하면, 미국의 역사상 가장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던 때는 식민지 시절, 뉴잉글랜드의 타운미팅 시절이었다.
절차적 의미에서 민주주의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투표 자유롭게 하고, 정권이 바뀌는 가능성이 있으면 민주주의인지 모르지만, 그런 사고로는 아까 처음에 말한 임치수의 원혼을 절대로 풀어줄 수 없다. 사실 그 원혼을 푸는 데 한발자국이라도 다가가는 길이, 바로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다.
나는 진보진영 지식인들이 “우리를 진짜 먹여 살려주는 것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민주주의다”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널리 설득력 있게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 민주주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밑바닥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상호부조의 협동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자율적으로 사는 게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란 인민의 자기통치를 뜻한다. 복잡한 이론으로 사람 헷갈리게 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