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로 통하는 문(門)이 닫히는 순간, 우리들의 모든 지식은 파멸할 것이다.. ― 단테, 〈신곡(神曲)〉 지옥편, 제10곡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지방을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이재민이 되었고, 그들의 삶터는 괴멸되었다. 1995년의 한신(阪神)대지진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한 상황에서 또다시 일본사회는 엄청난 자연재해에 직면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지진이나 쓰나미를 예견하고, 늘 대비를 하면서 사는 것은 중요하지만, 거기에는 불가피한 한계가 있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운명이다.
아무리 잘난 척해도 우리는 결국 잔잔한 바다가 언제 폭풍의 바다로 변할지도 모르면서 바닷가에 앉아서 조그만 모래집을 짓는 데 골몰한 철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파도가 휩쓸고 간 모래집을 다시 짓듯이, 살아남은 사람들은 고통을 견디고 상처를 다독이며 허물어진 삶터를 일구는 일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되어야 하는 게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지만, 핵발전소 사고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지진과 쓰나미로 파괴된 삶터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사람들이 원한다면 결국은 복구 가능한 재난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방사능 대량 방출 사태로 인한 환경파괴는, 적어도 인간적으로 의미있는 시간 속에서는, 복구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다른 산업재해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재난인 것이다.
지금 후쿠시마 사태는 사고 발생 한달 보름을 넘긴 시점에서도 수습 전망이 여전히 안개 속이다. 이미 대기와 해양으로 방출된 방사성물질은 그 양이 체르노빌 수준을 현격히 넘어섰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는 마당에 이 상황이 기약없이 계속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심히 두려운 세계적 대재앙이 될 게 틀림없다.
아마도 사고가 난 발전소 주변 근접지역은 말할 것도 없지만, 어쩌면 일본 국토의 삼분의 일이 방사능오염 때문에 인간다운 삶터로서의 적합성을 상실할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사태지만, 현재 이러한 가능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비록 사석에서였다고는 하지만, 사고 발생 초기에 일본 수상 간 나오토는 ‘동(東)일본의 붕괴 가능성’을 언급했다고 보도되었다. 이것은, 국가적 대재난이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정부의 최고 책임자로서 할만한 발언인지는 모르지만, 그 자체로서는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드러낸 말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세계적 재앙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후쿠시마 사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기와 바다로 방출된 방사성물질은 국경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확산되어 무수한 생물의 서식처를 위협하고, 막대한 인명 손상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은 체르노빌의 경우를 생각하면 명확히 예견할 수 있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로 인한 피해는 인접지역에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 피해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의 인명을 대량 손상시키고, 방대한 옥토를 거의 영구적으로 거주 불가능한 불모지로 바꿔놓았다. 뿐만 아니라, 체르노빌이 내뿜은 ‘죽음의 재’로 인해 스웨덴의 순록과 영국의 양들이 집단 매장처분을 당하고, 유럽 각국의 우유가 폐기처분되었다. 게다가 북반구 전역에서 10년, 20년 시간의 경과에 따라 갑상선질환, 백혈병, 각종 암의 발병률과 기형아 출산율이 현저하게 높아졌다는 증거가 나타났고, 이런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원자로 1기가 폭발했던 체르노빌의 후유증이 이렇다고 할 때, 지금 원자로 4기가 망가진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앞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칠지 지금으로서는 예측하기도 두렵다. 후쿠시마에서 1,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서울에서도 벌써 하늘은 예전처럼 보이지 않고, 개나리도, 진달래도, 벚꽃도, 돋아나는 새싹들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봄비도 마냥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고농도 방사능의 대량 방출로 오염되고 있는 해양생태계는 어떻게 될까. 먹이사슬을 통해서 물고기들의 체내에 방사능 농축이 진행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당장에 바다에서 나오는 먹을거리가 걱정이다. 마시는 물도, 아이들에게 주는 우유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설혹 미량일지라도 대기를 통한 방사능 방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 나라 농토는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 혹시 이러다가 먹을 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비참한 상황에 직면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식으로, 아직 가시적인 피해가 드러나기도 전에 한국의 우리들 자신도 이미 심각한 심리적·정신적인 손상을 입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비단 후쿠시마 주민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사실상 이미 ‘히바쿠샤(被曝者)’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시인 브레히트가 말했듯이,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웃고 있는 사람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시된 경고의 목소리들
생각하면 통분을 금치 못할 일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양심적인 과학자, 지식인, 환경운동가들에 의해서 핵발전소의 위험성이 끊임없이 지적되어왔다. 특히 지진이 빈발하는 일본의 경우는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근년에 들어 더욱 긴박한 어조를 띠고 있었다.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발언을 하는 과학자나 전문가의 존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의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전문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오랫동안 집요하게 거론해왔다.
이미 고인이 된 저명한 ‘시민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郞)와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원자력자료정보실’의 활동가들을 먼저 주목해야 하겠지만, 그들 이외에 제도권 내의 연구자로서 이 문제에 적극 관여해온 학자들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학자로 《대지동란(大地動亂)의 시대》(1994)를 쓴 세계적인 지진학자 이시바시 가쓰히코(石橋克彦) 고베대학 명예교수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일본열도가 그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태평양 플레이트가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70~80년 동안 지속된 ‘평온기’를 끝내고 바야흐로 ‘활동기’로 접어들었음을 암시하는 역사지진학적 증거에 근거하여 지질학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장소에 건설되어 가동 중인 핵발전소들의 안전성에 큰 우려를 표명해왔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사회가 핵에너지 의존에서 하루빨리 탈각할 것을 되풀이하여 역설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집요하게 핵발전문제를 파헤쳐온 사람은 아마도 독립 저술가 히로세 다카시(??隆)일 것이다. 그는 후쿠시마 사고 발생 직후에 가진 민간TV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가 당국이 인정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 체르노빌 이상의 재앙이 될 것임을 예견함으로써 충격을 주었다. 실제로 그는 원자력에 관해서 20년 넘게 다각적인 각도에서 놀랄 만큼 치밀하게 심층적인 조사를 행하고 그 결과를 꾸준히 발표해왔다. 그 연장선에서 작년 가을에 내놓은 새로운 책 《원자로 시한폭탄》에서는 조만간 일본 핵발전소 어디에선가 반드시 대사고가 날 것이라는 자신의 ‘나쁜 예감’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하여 이대로 가면 “당장 내일 일본이 끝”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10년 후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꽤 확률이 높은 이야기로서 일본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기까지 했다. 불과 몇달 후 자기의 예언이 적중하리라고는 아마 그 자신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절박한 경고의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는 진지한 자세를 정부와 핵산업 관계자들은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 결과는 지금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미증유의 대참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납득할 수 없는 정신구조
그런데 정부와 핵산업 관계자들 혹은 유력 언론들은 어째서 이 경고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았을까. 핵발전의 안전성에 관한 그들의 과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사고가 날 경우 이것은 단지 화학공장의 화재 같은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재앙을 초래한다는 것을 그들이라고 해서 모를 리가 없다. 인간은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다. 누구든지 실수를 하고, 누구든지 결함을 갖고 살아간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인간조건이다. 그러한 인간이 만들고, 그러한 인간의 손으로 운영·관리되는 시설이 언제나 완전무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설마 존재할 수 있을까.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상정외(想定外)’의 사태라고 하는 것도 심히 무책임한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고란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 발생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예상을 초월하는 상황까지 반드시 염두에 두고서 안전문제를 고려하는 게 진정으로 책임있는 인간의 자세인 것이다. 한번 큰 사고가 나면 광대한 생물권이 거의 영구적인 손상을 입게 될 게 확실한, 극히 불안한 위험시설을 건설하고 운영하고자 할 때에는 다각적인 각도에서의 철저한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 이것은 기초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핵에너지 산업에 관한 한, 이 기초적인 상식은 일관되게 무시되어왔다. 핵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이 납득할 수 없는 정신구조이다.
핵발전 관계자들 자신이 실은 누구보다도 진실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핵발전소가 전력생산 방법으로는 너무나 엄청난 대가와 희생을 치러야 하는, 심히 부적당한 방식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원자로라는 것은 터빈을 돌려 전력을 생산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터빈을 돌리기 위한 수단은 이것말고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왜 하필 원자로라는 극히 위험하고 복잡하며 엄청난 비용이 드는 방식을 선택하겠다는 것일까.
실제로, 원자로 노심융해 같은 결정적인 사고는 아니라 하더라도, 핵발전소에서는 평소에도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방사능 유출사태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발전소 주변지역이 계속해서 오염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방사능공중보건프로젝트’라는 미국의 민간 환경문제 연구기관은 2000년 4월의 보고서에서 원자로가 폐쇄됨으로써 그 주변지역 유아들의 사망률이 현저히 감소했음을 보여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1987년에서 1997년까지 폐쇄되었던 미국의 7개 핵발전소를 대상으로 한 이 연구는 반경 80킬로미터 이내에 살고 있던 생후 한살까지의 유아 사망률을 조사한 것이었다. 이 조사에 의하면, 가장 큰 감소율은 1997년에 폐쇄된 미시건주 빅록포인트 발전소 주변이었는데, 54.1퍼센트나 감소했다. 이렇게 사망률이 감소한 것은 암, 백혈병, 이상출산 등 방사선 피해로 볼 수 있는 질병의 원인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와 핵산업 관련자들은 언제나 방사능 피해를 축소하고 은폐한다. 그들은 늘 방사선 허용기준치를 들먹이며, 저농도 방사능으로는 건강피해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상 최대 핵사고로 기록될 후쿠시마 사태에서도 똑같은 논리가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다.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불안을 느끼고 있는 시민들을 향한 당국자의 발언은 놀랄 만큼 닮았다. 그들은 대피지역 바깥에서는 우려할 위해(危害)가 없다고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반경 20킬로였다가 며칠 후 30킬로미터로 변경된 대피지역의 설정도 매우 자의적인 설정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방사성물질이 대기와 바닷물에서 희석되면 아무 걱정할 것 없다는 설명은 과학적이라기보다 다분히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허용기준치라는 말장난
허용기준치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주의해야 할 것은, 방사능에 관한 한, 생물학적 이상증상이 발현될 수 있는 최소 피폭량, 즉 역치(?値)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미량일지라도 방사선 피폭은 인체에 유해한 것이다. 이것은 방사선 의학전문가들의 거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러니까 허용기준치라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의학적 연구결과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핵산업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어용학자들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수치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방사능은 생명과 공존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46억년 전 지구 탄생 이후 생명체가 출현하기까지에는 10~20억년 정도가 경과해야 했다. 그것은 원시지구에 가득 찬 방사능이 제거돼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주로부터 끊임없이 방사선이 들어오지만 오존층이 차단해주기 때문에 지상에서 생물의 생존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아직 미약하나마 토양과 바위 등에 자연방사능이 남아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공방사능이 계속해서 생물권 속으로 유입되는 것이 절대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방사능은 세포를 손상시키고, 유전자 변형을 일으킨다. 이것은 기초적인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환경 속에서 측정되는 방사선량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호흡과 피부 혹은 음식 섭취를 통해서 체내로 흡수, 축적되는 ‘내부피폭’이다. 대기와 토양과 물이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다면, 호흡과 먹이사슬을 통해서 내부피폭을 당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당장에 눈에 띄는 상해가 없더라도, 장기적 피폭에 의한 체내 축적으로 당사자는 물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들에게까지 어떤 가공할 신체적·정신적 장해가 발생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농도 피폭에 의한 급성 방사능 장해라면 금방 원인을 파악할 수 있지만, 장기간에 걸친 저농도 피폭에 의한 만발성(晩發性) 장해는 그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악화일로에 있는 환경위기와 삶의 질적 저하 때문에 도처에서 온갖 괴질과 난치성 질환이 창궐하고 있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따라서 매우 엄격한 조사가 아닌 한, 방사능과 건강장해 사이의 연관관계를 명확히 규명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바로 이 때문에 핵산업계가 방사능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축소·은폐하는 게 가능한 것이다.
단순히 은폐하고 거짓말만 하는 정도가 아니다. 한술 더 떠서, 한국의 집권당 지도부는 방사능 피해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배후에 정부 전복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기상천외의 논리를 펴면서, 시민들의 자기보호 본능마저 우습게 여기는 발언을 하고 있다. 하기는 비상상황에서 진실이 더 확연히 드러나는 법인지도 모른다. 지금 일본이나 한국의 통치권력이 보여주는 무책임한 행태는 근대국가와 정부의 역할이 결코 생명의 가치를 옹호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생각해보면, 권력엘리트들이 원하는 국민은 언제나 얼간이들이지, 자주적인 인간이 아니다. 우리 각자가 진정 자유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비판적인 사고와 자주적 판단능력이다. 이 능력은 단기적인 사익(私益)을 위하여 지구생물권을 궁극적으로 불모의 공간으로 변화시켜버릴 게 틀림없는 기득권 세력의 폭주에 맞서 싸우는 데 불가결한 자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핵문제에 관한 한, 정부기관이나 업계 쪽에서 내놓는 정보란 거의 언제나 거짓정보이거나 왜곡된 정보라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일본이나 한국에 국한된 게 아니라, 세계적으로 공통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핵에너지 산업이 본래 거짓말이나 속임수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시스템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원래 핵발전은 1953년에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에 의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제창되면서 시작되었다. 되돌아보면, 이 시기에 미국이 특별히 평화로운 세계를 원했을 리 없다. 오히려 소련과의 치열한 군비경쟁이 시작되어 핵무기 개발이 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미국 정부와 군부가 핵무기 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천문학적 예산을 확보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국민들의 핵에 관한 이미지가 개선되어야 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의 처참한 대량 살상 이후, 핵폭탄의 가공할 위력을 알게 된 미국인들은 대체로 핵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기술은 전쟁뿐만 아니라 평화와 경제적 번영을 위해서도 불가결한 것이라는 논리로 국민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에너지 기술의 해외 수출에서 얻는 막대한 이익도 매력적인 것이었다. 동시에, ‘우방국가’들에게 원자로 기술을 제공하고 ― 가령 ‘국제원자력기구’ 등을 통해 ― 그것을 면밀히 감시하는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핵무기 확산을 저지하고자 하는 게 또다른 미국의 의도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평화를 증진시키기는커녕 세계를 갈수록 위험에 빠트리는 결과가 되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원자로란 전력 생산장치 이전에 기본적으로 핵무기원료 생산장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자로에서 우라늄 연료봉을 태우면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하여 터빈을 돌리기도 하지만, 핵분열의 결과로 생겨난 방사성물질을 분리·재처리하면 자연세계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극렬한 맹독성 물질이자 가공할 핵폭탄 원료인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도 있다. 실제로 1974년 인도가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의 원자력협정을 통해서 도입한 발전용 원자로를 이용한 결과였다.
그러니까 핵에 관한 한, 군수용과 민수용을 구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 모든 원자로는 잠재적인 핵무기 제조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도처에서 핵발전소 가동이 계속되는 한, 핵무기 감축을 위한 노력은 처음부터 한계가 명확한 것일 수밖에 없다.
크고 작은 핵사고로 인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가가 핵발전소를 포기하지 않고, 기를 쓰고 증설하고자 하는 데는 복합적인 동기가 작용해왔을 것이다. 핵무기 보유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는 국가의 군사적 야심도 중요한 동기였을 게 분명하다. 국가의 그런 요구와 핵 관련산업들의 이해관계가 결합되면 핵에너지를 둘러싼 강고한 기득권 체제가 성립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원래 핵의 평화적 이용이란 국제적인 차원에서 전개된 프로젝트였다. 그러므로 이 체제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자본가, 정치가, 관료, 과학자, 언론인으로 구성되는 강력한 국제적 기득권 동맹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이 국제적 기득권익 네트워크를 총괄하는 실무책임자가 바로 국제원자력기구(IAEA)라고 할 수 있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이런 위상을 감안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기구가 방사능 피해의 정도를 왜 늘 축소하려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전형적인 예는 체르노빌 폭발사고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방사능의 장기적 오염에 의한 피해상황에 대해서는 철저히 눈을 감고, 오로지 현장에서의 급성 방사능 장해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모두 46명이라는 보고서를 2005년에 유엔에 제출했다. 이것은 가령 ‘뉴욕과학아카데미’에 의해 출판된 좀더 독립적인 연구자들이 작성한 보고서의 조사결과와 너무나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는 결론이다. 2009년에 발표된 이 조사결과는 체르노빌로 인해서 20년 동안 사망한 사람은 98만명에 달한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것은 옛 소련의 과학자들을 포함한 연구자들의 슬라브어로 기록된 자료까지 대상으로 해서 조사한 연구결과였다.
원자력 기득권 체제가 방사능의 위험을 늘 과소평가하고, 실제 피해를 축소·은폐하는 데 급급한 것은 결국 핵산업을 계속적으로 유지·확대하겠다는 욕망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들이 방사능이나 핵에너지가 생물권과 인류사회에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치는 것인지 모르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이에 관련해서 흥미로운 증언이 하나 있다. 그것은 히로세 다카시가 겪은 젊은 시절의 경험담이다. 대학에서 응용화학을 전공했던 히로세는 졸업 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한때 프리랜서로 이공계 서적과 자료를 번역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그는 도쿄전력의 의뢰를 받아 경제협력기구(OECD)의 1970년대 보고서를 번역한 일이 있었다. 거기에는 “원자력발전소의 온배수는 바다로 배출되어도 열이 바다 속으로 바로 확산되지 않고 ‘핫스포트’라는 열덩어리가 되어 부유한다. 그 때문에 대륙붕의 생물이 심대한 영향을 받는다. 얕은 데에 있는 어란(魚卵)이나 치어는 2~3도라는 작은 온도변화에도 죽고 말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정확히 번역해서 제출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온배수의 문제를 핵발전소 운영주체인 도쿄전력이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핵산업체는 몰라서 환경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확신범’으로서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핵발전소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온배수가 대륙붕의 생물들에게 심대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해양생태계 전체를 파괴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중대한 문제를 지적한 보고서의 존재를 인지(認知)하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거침없이 핵발전을 계속해온 것이다.
‘청정에너지’라는 거짓말
기후온난화에 대응하는 ‘청정’에너지라는 핵발전의 자기광고가 완전히 속임수라는 것은 이 맥락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제창했던 시초부터 핵발전 추진세력은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환경파괴를 거침없이 자행해왔다. 20세기 말에 와서 범지구적 위기로 대두된 지구온난화 문제는 스리마일과 체르노빌 핵사고로 궁지에 몰려있던 핵산업계가 재기하는 데 필요한 빌미를 제공했을 뿐이다. 추진세력이 핵발전을 진심으로 ‘청정’에너지 시스템으로 여긴다면 엄청난 자기기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핵발전 그 자체는 이산화탄소를 내뿜지 않는다. 그러나 핵발전이 성립하려면 최소한도 거대한 발전소를 건설, 운영해야 하고, 우라늄을 채굴, 운반, 농축해야 하며, 핵폐기물을 처리해야 하고, 최종적으로는 수명이 다한 원자로를 폐쇄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소모될 막대한 화석연료를 고려하면, ‘청정’에너지 운운하는 것은 완전히 거짓말임이 금방 드러난다.
핵발전이 온갖 면에서 타당성을 결여한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내포한 전력생산 방식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원자로 노심융해 같은 엄청난 사고가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상적인 운전에 따르는 문제만 해도 그 장기적인 결과는 가공할만한 것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도 잠깐 언급한 대로, 핵발전소는 전력생산 시설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강이나 바닷물을 덥히는 가온장치(加溫裝置)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전체적으로 약 440기의 원자로에서 막대한 양의 온배수가 매일 쉴새없이 바다로 혹은 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것은 원자로의 냉각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게 궁극적으로 지구의 수중 혹은 해양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나아가서 이산화탄소 이상으로 지구온난화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 명쾌한 해명이 없이 핵발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정말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처치 불가능한 핵폐기물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핵폐기물 처리문제라는 게 있다. 이것은 난제 중의 난제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핵발전소를 가진 나라들의 가장 긴급한 현안이 이 문제지만, 고준위 핵폐기물은 말할 것도 없고, 저준위 핵폐기물조차 합리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왜냐하면 수십만년이라는, 인간의 시간으로는 거의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핵폐기물의 방사능이 소멸할 때까지 안전하게 보관할 방법과 장소가 이 지구상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재 대부분의 핵발전소는 저준위 핵폐기물마저 버릴 데를 찾지 못한 채 발전소 부지 내에 엉거주춤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반핵 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가 핵발전소를 ‘화장실 없는 맨션아파트’라고 불렀던 것은 이런 기괴한 정황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저준위 핵폐기물 영구저장 시설을 찾는 게 지난하다는 것은 원자로를 안전하게, 합리적으로 폐쇄한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임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수명이 다하여 폐쇄되는 원자로란 결국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덩어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미국과 같은 광대한 땅을 가진 나라에서도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장을 마련하는 데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핵기술이라는 게 원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괴물임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아마도 초기에 핵발전을 기획했던 사람들은 원자로를 가동하는 과정에서 조만간 이 문제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현대세계에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때 흔히 그러하듯이 일단 시작부터 해놓고 뒤따르는 부작용은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된다는 근본적으로 무책임한 안이한 사고가 여기에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처음부터 핵발전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도 대부분 운전 중의 원자로 안전문제를 가장 큰 관심의 표적으로 삼고, 폐기물 처리문제는 간과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만물은 생성, 성장, 노쇠, 사멸의 과정을 밟게 마련이다. 돌덩어리, 쇳덩어리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태어나면 죽게 마련이고, 탄생의 장소가 있으면 죽음의 장소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핵분열 생성물이라는 이 기괴한 물질만은 예외적이다. 지구생태계 속에는 이 인공 방사성물질의 안식처를 제공할 데가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창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한 지식이 창조해낸 물질이기 때문이다.
지금 후쿠시마의 재앙은 지구생물권이 더이상 이런 괴물과 동서(同棲)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태이다. 생각해보면, 이 재앙은 과학기술의 힘을 터무니없이 믿어온 어리석음의 필연적인 결과이자 근거 없는 자기과신의 당연한 결과임이 분명하다.
대안이 뭐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핵발전을 그만두면 대안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핵발전 추진세력의 논리가 설령 과장되거나 거짓된 데가 많다고 하더라도, 지금 전체 전력의 3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핵발전을 중지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갤럽이 최근에 행한 국제적 여론조사에 의하면, 놀랍게도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서 동북아시아에서의 핵발전 지지비율이 비교가 안될 만큼 현격히 높다. 물론 일본사람들 다수의 인식은 많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극히 당연한 현상이지만, 그러나 바로 인근에 있는, 그래서 어떤 다른 지역보다도 후쿠시마 핵사고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을 가능성이 큰 중국과 한국에서 핵발전 지지율이 현재 70퍼센트와 64퍼센트라는 세계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쉽게 납득이 안되는 현상이다. 아마 이런 현상은 정치경제, 사회문화 그리고 심리적 측면에서 깊이 연구를 해봐야 할 테마인지도 모른다.
하기는, 한때는 원자력이라면 덮어놓고 환호하던 순진한 시절이 있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도 원자력은 최고의 과학기술이라는 인식이 성행했고, 그것은 무한한 값싼 에너지를 공급해줄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이런 보편화된 인식은 1950년대 말 혁신정당이었던 진보당의 강령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진보당 강령 제5장 ‘제2의 산업혁명과 20세기적 사회혁명’은 “해방된 원자에너지의 동력을 활용한 산업혁명의 조속한 완수”를 통한 번영된 복지사회 건설을 낙관적인 어조로 전망하고 있다. 진보당 강령 속에 핵의 파괴력과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바로 핵의 가공할 파괴력 때문에 오히려 국제사회는 “각성을 하여 새로운 전쟁을 방지하고, 절충과 타협에 의한 문제해결” 방식을 찾아서 “인류사회의 평화적 변혁”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피력되어 있다. 요컨대 핵은 평화적으로 이용될 것이며, 평화적인 핵에너지는 복지사회 건설에 핵심적 기술이 될 거라는 것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세계 전체가 아직 ‘평화적 원자력’이라는 주술에 걸려있을 때긴 했으나 한국에서의 핵기술 신앙은 좀 지나친 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도 서구 근대 과학기술에 대한 뿌리 깊은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후진사회를 면치 못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결핍 때문이며,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첨단 과학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했던 것이다. 핵기술이 위험하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다수 한국인들의 머릿속에는 식민지로부터의 해방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핵폭탄 덕분이었다는 잠재적 인식이 들어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핵기술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우호적인 수용자세가 마련된 사회가 한국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사정은 일본도 근본적으로는 마찬가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 후쿠시마 사태를 보면서,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핵폭탄 피해를 입은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국가인 일본이 어떻게 핵에너지 기술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 저토록 방만한 운영을 해왔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일본 국민의 심리에 잠복해 있을 수 있는 어떤 논리를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의 처참한 패배는 과학기술력에 있어서의 패배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과학기술이란 핵기술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오늘날 일본이 어느 때든 마음만 먹으면 고성능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을 만큼 플루토늄을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에서 핵발전소가 단순히 전력생산 수단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국가주의 프로젝트
사실, 이런 국가주의에 토대를 둔 군사적 프로젝트는 비록 암묵적이라 하더라도 대중적 지지 혹은 적어도 묵인 없이는 성립하기 힘들다. 한국에 비해서는 감탄할 정도로 핵기술에 대해 공개적인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학자, 연구자, 지식인이 많기는 하지만,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핵기술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일본사회를 지배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대다수 지식인들과 일반대중이 그들과는 다르게 생각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라는 저명한 작가, 시인, 평론가가 있다. 그는 한국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엄청나게 왕성한 저술활동과 그때그때 사회적 현안에 대한 정력적인 발언 때문에 일본에서는 일부에서지만 ‘전후 최대의 사상가’라고 일컬어온 원로 지식인이다. 그런 그에게 《‘반핵’이론(異論)》(1982)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반핵운동 세력은 과학과 정치를 혼동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핵의 평화적 이용이 결국은 군사개발, 무기생산으로 연결된다”는 논리를 배격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과학이 핵에너지를 해방시킨다는 것은 즉각 핵에너지에 대한 통어력을 획득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고, 또한 물질의 기원인 우주 구조의 해명에 한걸음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는 원자력발전을 반대하는 것은 “문명사의 도달점에 대한 반동적 이념”이며, “원시적 자연으로의 퇴행”이라고 매도한다.
따지고 보면, 요시모토의 이런 발언은 핵기술에 관한 근본적인 오인(誤認)과 자신의 단순한 희망사항 이외에 아무런 실질적인 근거가 없는 허구적인 주장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발언이 꽤 영향력있는 발언으로 받아들여져왔다는 데 있다. 그게 받아들여져온 것은 그럴만한 풍토가 사회 저변에 조성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핵발전은 전력생산 방식 중에서도 가장 값비싸고, 가장 위험하며, 가장 비효율적인 방식이라는 것은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그동안 핵에너지 생산에 쏟았던 비용과 노력과 정성을 재생 가능한 에너지 개발로 전환한다면, 에너지문제도 조만간 해결 가능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합리적인 논리만으로는 핵발전시스템을 극복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핵발전을 통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해온 국제적·국내적 기득권 체제가 완강히 버티고 있고, 또한 ‘첨단’ 과학기술로서의 핵기술에 대한 대중적 환상이라는 게 여전히 남아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핵발전과 민주주의
그런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핵발전문제란 단순히 에너지문제가 아니라는 철저한 인식을 가능한 한 널리 공유하는 일이다. 그것은 우선 핵발전의 문제가 그 위험성이나 안전성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다카기 진자부로가 쓴 책 《우리들 체르노빌의 포로들》1987)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발언은 경청할만하다.
원전(原電)이 갖는 반인간성, 반사회성, 범죄성은 물론 그 위험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전은 생물과는 본래적으로 상용(相容)할 수 없는 방사능을 끊임없이 생산할 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를 침해하고, 민주주의를 철저히 파괴한다. 나아가서는 하청·재하청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쓰고 버리며, 인심을 황폐케 한다.
이것은 일찍이 원자력을 전공한 제도권 과학자로 출발했으나 결국 제도권 바깥의 시민과학자로 전신(轉身)하여 죽을 때까지 오로지 반핵운동에 몸을 바쳤던 한 양심적 지식인, 활동가에게서 나온 명쾌한 증언이다. 요컨대 핵발전소가 건설·운영되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없다는 뜻이다. 왜? 핵발전이란 위험성도 위험성이지만, 철저히 파고들면 아무런 합리성도, 타당성도 없기 때문에 정당한 민주적 절차를 밟아서는 절대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얻을 수 없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핵발전 추진세력은 끊임없이 기만적인 언어로 핵발전을 합리화하려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의 합법적 폭력수단을 통해서 민중의 의사를 노골적으로 억압하려고 한다. 핵발전에 관련하여 엄청난 홍보비를 끊임없이 지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거짓논리와 신화적 환상을 날조하지 않고는 처음부터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게 핵발전임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핵발전소가 언제나 인구 과소지역에 건설된다는 사실도 그렇다. 이것은 핵발전의 위험성을 추진세력 스스로가 실토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따라서 그러한 인구 과소지역 주민들의 동의를 얻는 것도 당연히 쉽지 않다. 그리하여 거의 어김없는 법칙처럼 온갖 속임수, 협박, 회유, 매수공작과 같은 비열한 수단이 동원된다. 이 과정에서 흔히 지금까지 조용하던 지역공동체는 분열되고, 시골인심이 극도로 황폐화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발전소가 막상 들어서면, 지역민들은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농토와 어장이라는 오랜 세월 유지되어왔던 자율적 삶의 기반을 잃게 됨으로써 이제부터는 싫든 좋든 발전소에 직접 간접으로 빌붙어 살아야 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하나 중요한 문제는 노동자 인권문제이다. 발전소 인근 지역주민이건 떠돌이 노동자이건 핵발전소의 위험구역 현장에 투입되는 작업자들은 대체로 하청·재하청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고농도 방사능 피폭위험이 상존하는 곳에서의 작업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는 매우 불운한 사회적 약자들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는 일은 일종의 강제된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현장에서 원자로 융해나 연료봉 폭발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필사적인 작업에 매달려 있는 현장작업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을 영웅이라고 칭송하는 것은 위선이라기보다 범죄행위이다. 사회적 약자에게 인간으로서 차마 견딜 수 없는 가혹한 노동을 강요해놓고, 그것을 미화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핵에너지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이 구조적인 인권유린은 결코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인간다운 사회와 양립 불가능한 핵기술
결론적으로, 핵발전이라는 것은 인간다운 사회의 존립에 불가결한 기초적인 가치를 구조적으로 철저히 유린·파괴하는 기술이다. 그것은 생명과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주의와 절대로 양립할 수 없으며, 또한 지속가능한 기술도 아니다. 실제로 우라늄도 이대로 가면 곧 고갈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지난 몇십년간 수많은 핵실험·핵사고 등으로 이미 경악할 만큼 지구생물권이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대로 핵발전이 계속되거나 확대된다면, 이 지구가 인간사회의 존속을 더이상 허락하지 않는 날이 조만간 닥칠지도 모른다.
아메리카대륙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토착민들은 적어도 지속가능성이라는 면에서 뛰어나게 지혜로운 생활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삶이 생태계에 미친 영향은, 어떤 문화인류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하늘의 구름이 땅에 미치는 영향보다 큰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손상시키지 않고 이 지상에서 지속적으로 생존·생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 즉 순환적인 삶의 방식에 철저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자손들로부터 잠시 빌려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늘 자신들이 선택한 일의 결과가 7세대 이후의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심사숙고한 뒤에 결정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배려는 근대 이전의 문화에서는 동서양 어디서든 별로 낯선 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예전에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삼림관리 대장(臺帳)에는 장차 보수하거나 재건축을 해야 할 주요 건물들에 쓰일 나무들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처음 건물을 세웠을 때 건축 책임자들은 거기에 사용된 목재들의 수명을 고려하여, 동종의 어린 나무를 미리 학교의 어느 곳에 심어서 수백년 이후를 대비해놓곤 했다는 것이다. 생태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이 이야기를 어디선가 인용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진정한 문화가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결국 이러한 의미의 지속가능한 문화를 근원적으로 되살리지 않고는 우리들에게 미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지구가 거주 불가능한 공간이 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한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만분의 일이라도 있다면, 우리의 삶은 이미 근저에서부터 붕괴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유롭고 건강하게 생을 향유할 후손들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면, 우리들의 지금 여기서의 삶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애써 쌓아온 삶에 관계된 온갖 지식·지혜는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전력이 부족해도 인간다운 삶은 얼마든지 계속될 수 있다. 그러나 핵분열에 의한 환경파괴는 삶의 종식을 의미한다. 핵발전소를 없애면 대안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지나치게 한가로운, 우둔한 물음이다. 대안이 있든 없든 핵발전은 시급히 중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