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생전에 뵌 적이 없습니다만, 안병무 선생님은 제가 젊었을 적에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분입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안병무 선생님과 그분의 동지들이 제창하셨던 민중신학은 우리가 군사독재라는 야만의 시대를 버티고 견뎌낼 수 있는 정신적 힘을 불어넣어준 중요한 사상적 자원이었습니다. 그런 안병무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는 모임에서 오늘 저를 이렇게 불러주신 것에 대해서 무척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만, 제가 별로 새로운 이야기를 할 것 같진 않습니다. 여러분이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물론 제 딴에는 중요하다고 여기는 얘기지만, 따져보면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왜 이 상식적인 이야기가 현재 이 사회에서는 별로 사람들이 터놓고 하는 이야기가 못 되는가 하는 겁니다. 아마도 너무 근본적이고, 보기에 따라서는 두렵고 막막한 이야기라서 쉽게 꺼내기가 망설여지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 쉬쉬하며 미룰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고, 그래서 활발한 공개적 논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이야기를 꺼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요즘 이런저런 기회에 이 이야기를 계속해왔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정리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경제위기, 일시적인가
오늘 강연 제목을 ‘성장시대의 종언’이라고 했습니다. 제목을 보고 이미 무슨 내용인지 짐작들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입구에서 도표를 한 장씩 받으셨을 겁니다. 그것은 좀 있다가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일본 잡지가 하나 도착해서 봤습니다. 그 잡지에 어떤 강연을 정리한 〈협동과 반자본주의〉라는 꽤 흥미로운 글이 실려있더군요. 필자는 와세다(早?田)대학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과정 재학중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이 글 내용에 관해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이 글 첫머리에 필자가 자신의 현재 생활형편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것을 인용하려고 이 잡지를 들고 왔습니다. 사실 요즘 젊은이들의 경제상황은 일본이나 한국 혹은 미국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지만, 이것이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 돼가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는 의미에서 이 일본 청년의 신상발언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이 청년은 지금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학자금이나 생활비를 어떻게 조달하는지 그것을 언급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빚으로 버텨나갑니다. 현재 이 청년이 갚아야 하는 빚은 일본 돈으로 840만 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작년에 자신의 수입이 얼마였냐 하면 10만 엔이었다고 합니다. 부채는 840만 엔인데 연간 수입은 고작 10만 엔이라는 겁니다. 그 수입도 대개 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장학금으로 받은 돈이겠죠. 이런 식으로 가서는 빚을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조만간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 교원으로 취직이 된다는 것을 가정해서 지금까지 대출도 받고 생활을 해왔겠지만, 취직할 전망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한해 박사학위 취득자가 1만5,000명 가까이 된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대학에서 채용하는 신규 교원은 연간 5,000 내지 6,000명이라고 합니다. 결국 박사학위 취득자 중에서 3분의 1 정도만 취직이 되는 거죠. 그 가운데 정규직 교원이라면 몰라도 비정규직, 즉 일본에서는 비상근 강사라고 부르는 그 비정규직 교원의 봉급으로는 생활도 어려울 지경인데, 빚을 갚는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암담할 수밖에요.
일본 청년의 이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매일 듣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여기 앉아 계신 젊은 분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연로하신 분들에게는 자식이나 손자들 이야기, 그리고 그 자식과 손자의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미 한국은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비중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현상이 앞으로 달라질 가능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자리 문제를 비롯해서 서민들의 경제생활이 점점 악화했으면 악화했지 근본적으로 개선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이 사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보수진영이든 진보진영이든 관계없이 대부분의 경제나 정책 관련 인사들은 이런 상황이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만간 극복될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전제 위에서 여러가지 제안이나 계획 혹은 정책 공약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하기는 민주적인 정치세력이 집권을 하여 지금보다 좀더 공정하고 합리적인 정치가 이루어진다면 이 상황이 다소나마 개선될 여지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근본적으로는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경제가 계속해서 양적 성장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끝났기 때문입니다.
요즘 제가 시내 나가서 돌아다니다 보면 제일 한심한 게 뭐냐면 새로운 고층빌딩들이 쭉쭉 올라가는 광경입니다. 수십 년 동안 우리가 보아온 장면이지만, 이제는 그런 공사 현장을 보면 단지 얼굴이 찌푸려지는 게 아니라 지금이 어느 때라고 저런 한심한 짓을 계속하나 하는 생각이 앞섭니다.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저런 공사를 벌이고 빌딩을 짓는 사람들은 큰 수익을 기대하고 투자를 하고 있겠지만, 곧 후회할 날이 닥칠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러는가 싶어요. 여태까지 수십 년 동안 경제성장을 하면서 반복해왔던 과정이 앞으로도 어떻든 계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 세월이 다소 부침은 있겠지만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라고, 아무 의심 없이 믿고 있으니까 저런 무모한 짓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지요. 앞으로의 세상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세상일 것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거죠. 그냥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낯익은 방식의 삶이 좀더 확대된 형태로 계속될 것이라고 믿고, 관성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관성처럼 무서운 힘도 없죠.
그동안 우리나라 정치가 너무나 거짓과 속임수가 판치는 야바위판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이 사회정의와 경제민주화의 실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정치가 약간이라도 합리적으로 돌아가기만 해도 서민들의 살림이 한결 나아질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지금 선출된 권력도 아니면서 사실상 나라 전체를 말아먹고 있는 재벌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불로소득자나 부유층에게 합당한 세금을 물리는 것만으로도 국가재정이나 국민경제가 지금보다 상당히 호전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제민주화를 현재의 정치시스템으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도 큰 문제지만, 설사 우여곡절 끝에 실현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래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제가 점쟁이가 아니기 때문에 꼭 박아서 말씀은 못 드립니다만, 아무튼 성장을 대전제로 하는 현행의 경제시스템 자체는 앞으로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종식될 것입니다.
결국은 지금까지 우리가 수십 년 동안 경험하고 보아왔던 이런 삶, 이런 경제는 더이상 계속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실을 좀 냉정하게 보고 직시하자, 그런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판단 위에서 장래를 설계하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라는 겁니다.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성장의 종식과 복지국가론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타이타닉호가 지금 빙산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는데 갑판에서 의자 몇개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소위 진보적 개혁을 지향한다는 사람들이 늘 되풀이해서 말하는 게 복지국가 건설입니다. 요즘은 여당 쪽 사람들도 말로는 복지국가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진심이라기보다는 선거전략인 것이죠. 그러나 어쨌든 복지국가 그 자체는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인가 하는 것은 생각해봐야 합니다. 제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저는 어려울 것이라고 봅니다. 복지국가도 결국은 경제성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현이 안될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불로소득자나 부유층이 세금을 많이 내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건 그래야지요. 그런데 경제 전체가 정체상태로 들어가거나 혹은 마이너스 성장이 계속되는 상황으로 들어갈 때, 세금을 걷는다는 게 쉬운 일일까요? 저는 조세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대 국가는 다른 말로 하면 조세국가입니다. 그런데 조세국가의 존립은 무엇보다도 경제성장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근대 국민국가 시스템이란 경제성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시스템이고, 동시에 그 경제성장을 토대로 국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그 세수(稅收)를 가지고 국부를 재분배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성장이 중단된다는 얘기는 국민국가의 작동원리가 붕괴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좀 어려운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적어도 몇십 년 동안 우리사회가 삶의 당연한 전제로 알고 있던 근본 틀이 완전히 달라진 상황을 우리가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 앉아 계신 연로하신 분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예를 들어 지금 40대까지만 하더라도 경제성장이 없는 사회가 어떤 사회일지 상상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태어나서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성장경제체제 속에서 쭉 살아왔으니까요.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사회적 차원에서든 개인적 차원에서든 물자든 서비스든 인구든, 뭐든지 더 많거나 더 규모가 큰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왔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경제개발이라는 것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대학생 시절을 보냈으니까, 앞으로 경제성장이 중단되면 어떤 장면이 벌어질지 막연한 대로 짐작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옛날과 같은 모습은 아닐 테니까, 정확히 어떤 상황일지 구체적으로 그려내지는 못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동안 많은 사회적인 모순, 계층 간 갈등과 대립, 이런 것들을 한국사회는 경제성장을 통해 해소하거나 완화해왔습니다. 파이를 크게 만듦으로 해서 저소득층에게도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혜택이 돌아가고, 그래서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던 거죠. 그게 지배층의 의도적인 전략이든 아니든 그런 관행이 계속되었습니다. 실제로 사회적 정의가 바로 세워지고, 진정으로 민주주의 원칙이 작동한 결과로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해소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인 폭발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경제성장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한국사회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닙니다. 거의 모든 나라, 모든 산업국가가 기본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국가체제와 사회질서를 유지해왔습니다. 껍데기뿐인 민주주의지만, 소위 자본주의 산업국가들에서 그동안 의회제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나마 기능할 수 있었던 기반도 결국은 경제성장의 지속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성장 시스템이 중단되면 독재체제나 파시즘이 등장할지도 모릅니다.
《성장의 한계》 40년 후
여기서 여러분이 갖고 계신 도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1972년에 로마클럽에서 출간한 《성장의 한계》라는 책, 모두 들어보셨죠? 아마 제목은 누구나 다 알지만 실제로 이 책을 들여다본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겁니다. 꽤 두터운 책인데 딱딱하고 별로 흥미로운 책은 아니죠. 저는 예전에 어떤 출판사에서 내놓은 축약본을 읽어봤습니다. 이 《성장의 한계》라는 책이 1972년에 처음 나왔으니까 금년, 즉 2012년은 이 책이 출판된 지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세계 여러 곳에서 이 책 출간 40주년을 기념하는 토론회나 심포지엄이 열리고, 새삼스럽게 중요한 화제가 되어 얘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미국의 스미소니언 협회라는 유명한 민간 학술문화단체에서 지난 3월에 개최한 국제 심포지엄입니다. 저명한 학자, 전문가, 언론인들이 모였고, 원래 《성장의 한계》를 집필했던 MIT 교수들 중 아직 생존해 있는 저자들도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 심포지엄에 관한 보도가 여러 매체에 실렸는데, 저도 그런 보도를 보고서야 금년이 《성장의 한계》 출판 40주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스미소니언 심포지엄에서 주목을 받은 것이 바로 여러분이 보고 계신 그 도표입니다. 이 도표는 지금부터 40년 전에 나온 책 《성장의 한계》 속에 들어있던 그래프입니다. 세계인구, 비재생가용자원, 1인당 산업생산물, 1인당 서비스, 환경오염 등 다섯 항목에 대하여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한 예측조사를 거쳐 그것들이 향후 2100년경까지 어떻게 증감 추세를 드러낼지 그려 보여준 게 이 그래프입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과연 어느 정도 그 예측이 맞았는지를 이번의 심포지엄에서 검토해본 거죠. 세상에는 별별 전문가들이 다 있는 모양입니다. 이미 세계 여러 곳에서 몇몇 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검토해왔는데, 그중 대표적인 학자로 그레엄 터너라는 호주의 물리학자가 있다고 합니다. 2009년인가 발표한 논문에서 터너 교수는 1970년부터 2000년까지 30년 동안 《성장의 한계》가 예측한 다섯 항목이 실제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추적하여 그 결과를 대조해보니 놀랍게도 예측치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1970년 시점에서는 예측이었지만, 2009년의 연구에서는 이미 실현된 역사적 사실을 재확인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객관적인 자료로 입증이 된 것이죠.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도표상에 1970년부터 2000년 사이의 곡선에 굵은 선으로 덧붙여 표시된 것이 터너 교수가 확인한 실제 현실에서의 추세입니다. 1970년에 《성장의 한계》가 예견한 같은 기간의 추세와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게 보이죠?
물론 사람들은 대개 마음속으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지구 자원이 빠른 속도로 고갈되어가고 있고, 그동안 증산을 계속해왔던 식량생산도 곧 역전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인구도 언제까지나 불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특히 산업국가들에서는 얼마 안 가서 인구감소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중에서도 특히 출산율이 낮고요. 이 그래프를 보면, 이 추세대로 가면 세계인구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르기 전에 한국의 인구가 먼저 정점에 이를 가능성이 큽니다.
어쨌든 1970년에서 2000년까지 동향을 조사한 2009년의 연구 결과에서 《성장의 한계》가 예측한 추세가 단순히 예측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화되었다는 게 입증됐다면, 앞으로도 현실은 예측대로 전개될 것이라고 보는 게 논리적으로 타당합니다. 그러니까 40년 전의 예측치가 무의미한 수치가 아니라 장차 인류사회가 실제로 직면할 상황을 미리 보여주는 유효한 자료가 되는 셈이죠. 달리 상황이 급진적으로 변화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대량생산, 대량유통, 대량유통, 대량폐기에 의존하는 지금과 같은 성장을 계속해서 추구해간다면 현실은 《성장의 한계》가 예측한 대로 될 것임이 명백하다는 거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 추세를 보면, 예를 들어, 환경오염 같은 것은 대략 2040년경에 절정에 이르렀다가 그 후에는 오염도가 확연하게 줄어들 것이라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은 고무적인 전망이죠. 환경오염이 줄어드는 것은 좋은 현상이잖아요. 하기는 지상에 인간이란 존재가 아예 없어지거나 크게 줄면 오염은 사라지게 마련이겠지만.(웃음) 지구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인구 추세를 한번 보십시오. 지금 제3세계의 인구는 증가하고 있다고 하지만, 제3세계까지 포함해서 세계 전체 인구가 이 도표를 보면 2030년경에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가 완만한 속도로나마 끊임없이 줄어들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세계 전체 상황이고, 한국의 경우에는 그보다 10년 정도 앞당겨질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 2020년 정도? 앞으로 10년도 안 남았어요. 10년 정도 있다가 한국의 인구는 절정에 이르렀다가 줄어들기 시작한다는 얘깁니다. 이건 무슨 뜻인가요? 간단히 말해서 생산에 종사할 노동력이 줄어들고, 소비자가 줄어들고, 납세자가 줄어들고, 연금이니 보험이니 하는 것을 불입할 인구가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지금과 같은 규모와 수준의 경제활동이 안된다는 이야기죠. 젊은 사람들이 들으면 기가 막히겠지만 연금제도를 위시해서 국가의 복지체제가 유지되기 어려워진다는 이야기죠. 더구나 인구가 줄어든다는 것도 어느 선에서 정지되어 일정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줄어들 것이므로 거기에 대응하여 어떤 안정된 복지체제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습관적인 사고로써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국가의 경제나 사회정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른 것보다도 인구가 줄어드는 문제에 대해서 제일 민감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출산장려금 따위로 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이런저런 대책들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다급한 소리들이 나오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 정책으로 출산율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한국사회에서 출산율이 자꾸 낮아지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돈 몇푼 받는다고 젊은이들이 서둘러 결혼하고, 아이들을 많이 낳고, 그렇게 될까요? 어림도 없습니다. 정책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문제를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보는 것 같아요. 지금 이 얘기를 할 여유는 없어서 생략하겠습니다만, 아무튼 국가정책 몇 가지로 출산율을 높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앞으로 인구가 줄어들 것은 명백합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 다음에 삶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모색해야 합니다. 자꾸만 지금까지 해온 방식에 매달려 그것만이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억지를 부려봤자 출구는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새로운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장 두려운 현상은 1인당 식량생산이 인구가 절정에 이르는 시기보다 앞서서 절정에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먹이기에는 턱없이 식량생산이 부족한 상황이 곧 도래한다는 거죠. 그래프를 보면 인구가 절정을 지나서 줄어드는 경향은 상당히 완만한 곡선을 보여주고 있는데 식량생산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가 내려가는 곡선은 가파릅니다. 이것도 잘 생각하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지금 세계의 농지들의 질이 계속 나빠지고 있고, 타 용도로 빠른 속도로 전용되고 있으니까요. 더구나 기후변화에 의해서 제일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게 농사라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요즘도 가뭄이 심하지만, 앞으로는 혹심한 가뭄과 홍수, 태풍 같은 것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농민을 괴롭힐 것이 분명합니다. 종래에 동토였던 시베리아나 캐나다의 그 넓은 땅들이 경작지로 변하면 농경지가 훨씬 확대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들을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지만, 그건 참으로 뭘 모르는 이야깁니다. 세계 전역에서 지금 사막화되고 있는 방대한 농지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안이한 생각을 할 처지가 못 됩니다. 질이 양호한 농경지가 얼마나 남아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상기후 때문에 농사가 뒤죽박죽으로 될 가능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읽어야 됩니다.
석유의존 경제의 위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 제가 중점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비재생 자원, 즉 재생 불가능한 자원들의 동향입니다. 이미 《성장의 한계》라는 책이 집필된 1970년대 초부터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죠? 인구나 식량생산이 정점에 다다를 시기보다 훨씬 앞서서 현대문명 생활에 불가결한 자원들, 즉 석유, 석탄을 비롯한 재생 불가능한 자원들의 잔존량이 급격한 하강곡선을 그리면서 내리막길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석유입니다. 세계적인 범위에서 피크오일이 언제 닥칠 것인가 의견이 분분했지만, 2009년에 발표된 국제에너지기구(IEA)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피크오일은 2006년에 이미 지나갔다고 합니다. IEA는 석유 생산자와 유통업자들의 기구입니다. 그들은 석유생산이 곧 한계에 이를 것이라는 따위의 정보는 석유를 팔아먹어야 하는 자신에게 이롭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현실을 부정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에 인정을 한 것이죠. 일부 연구자들은 2010년경에 피크오일이 닥칠 것이라고 예견해왔지만, 이 문제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IEA의 발표가 더 정확하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2008년 가을에 미국 월스트리트의 투자금융회사들이 파산사태에 직면하기 직전에 원유가격이 배럴당 140달러까지 치솟았던 것을 기억하시죠? 물론 투기꾼들의 농간이 개입되어 있는 점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런 투기행위도 결국은 피크오일 이후에는 석유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세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석유라는 자원 자체의 생산량 한계가 근본문제라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월스트리트 금융붕괴 사태 이후 세계경제가 얼어붙고 경기가 둔화되면서 석유수요가 줄어드니까 다시 유가는 내려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날처럼 값싼 양질의 석유가 풍부하게 공급되는 시절이 다시 올 리는 만무합니다. 세계경제의 호황 혹은 불황에 따라 부침은 있겠지만, 이제는 기본적으로 유가는 상승추세를 계속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도 계속 경제 규모나 산업활동이 종래와 같이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보면 매우 간단한 논리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이 저렇게 어렵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1990년대에 들어서서 그 이전에 소련으로부터 국제 시세의 10분의 1 정도 값으로 공급받아 오던 석유가 중단되었기 때문이잖아요. 하루아침에 완전히 모든 산업활동이 마비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두어 차례의 대홍수를 겪으면서 괴멸상태가 돼버렸죠. 몇십만이 넘는 사람이 굶어 죽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상황은 아직도 마무리된 것 같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보도를 보니까 금년에도 가뭄 때문에 농사가 엉망이 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북한의 농업은 전통적으로 옛 소련식 농업을 모방해서 기계농사·화학농사 위주로 돼왔었기 때문에 석유 떨어지면 순식간에 괴멸상태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구조적으로 그것부터 고치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수년 전에 북한을 다녀온 중국의 농업전문가가 쓴 글을 보니까 그 무렵에도 북한에는 가을에 농사를 다 지어놓고도 논밭에 수확물의 30%를 그대로 썩게 내버려둔다고 하더군요. 총력을 다해서 농사를 지어놓고도 운반할 수단이 없어서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수송 수단도 기름이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는 얘긴데, 얼마나 석유가 없으면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요? 기가 막힌 이야기죠.
그런데 이게 북한만의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에 남한에서 이 비슷한 사태가 벌어진다면 훨씬 더 비참한 상황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석유의존 경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거기다가 농산물 자급도는 OECD 국가들 중에서 최하위인 25% 수준입니다. 북한이 아무리 비참하다고 해도 식량자급률이 남한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높은 60% 이상입니다. 남한에서는 지금 농사도 다 석유로 짓는 농사입니다. 그러니까 석유 떨어지면 지금 수준의 자급률도 도저히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일본에서 어떤 학자가 조사를 해보니까, 지금 일본의 식량자급률이 40% 정도 되지만 만약 석유를 쓰지 않을 경우에는 1% 정도밖에 안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농사에서도 석유는 이렇게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미국의 통계에 의하면 석유 네 통으로 곡물 한 통 수확하는 게 현대 농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석유를 먹고 사는 셈입니다.
그런 중요성을 가진 게 석유인데, 그 석유 수급이 맞아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 세계경제가 곤두박질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바로 직격탄을 맞을 겁니다.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한국경제는 OECD 국가 중 무역의존도가 제일 높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모방해서 경제를 일으켜왔다고 하지만, 일본은 기본적으로 내수경제입니다. 일본은 무역의존도가 15% 정도밖에 안됩니다. 독일이 상당히 높죠. 독일이 무역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유럽 통합에 가장 적극적이었고, 또 EU를 통해서 유럽 국가 사이에 관세가 모두 철폐된 상황에서 수출을 가장 많이 해서 재미를 많이 본 경제가 독일경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로위기 상황에서 그동안 가장 이득을 본 독일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잖아요.
아무튼 지금 한국은 무역 없이는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었는데, 그 무역이란 게 내용이 뭐냐 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값싼 석유 들여와서 그걸 가공해서 만든 공업제품을 해외에 내다 팔아서 생긴 달러를 가지고 다시 석유를 사서 또다시 석유제품 만들어 내다 파는 식의 철저히 석유에 의지해서 돌아가는 경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어떻든 양질의 석유가 저렴하게 공급되는 상황이니까 이 경제가 돌아갔지만, 이제 그 석유공급이 어려워지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죠. 참으로 위태로운 풍전등화 같은 상황입니다. 이게 앞으로 5년 안에 닥칠지, 10년 안에 닥칠지 모르지만, 조만간에 반드시 닥칠 상황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남북한 모두 원리주의 사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생각나는 게 요한 갈퉁이라는 세계적인 평화학자가 1998년 1월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했던 발언입니다. 요한 갈퉁은, 다들 아시겠지만, 현재 생존해 있는 세계의 몇 안되는 현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분이 김대중 대통령과 교분이 있는 사이여서 그때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서울에 왔던 거죠. 그런데 그 무렵 한국은 외환위기에 빠져 IMF 통치를 받기 시작하던 때였죠. 그 상황에서 어떤 언론과 나눈 대담에서 갈퉁은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한국정부가 IMF로부터 지원을 받기로 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 돈을 잘 쓰는 게 중요하다. 김대중 정부는 그 돈을 또다시 무역 확대 정책에 쓴다고 낭비하지 말고, 국내 농업과 에너지 자급 기반을 다지는 데에 써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남한과 북한은 둘 다 편협한 원리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이다.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주체라는 원리주의, 남한은 무역 원리주의이다.”
물론 김대중 정부도, 그 다음의 노무현 정부도 요한 갈퉁의 이 충고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따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갈퉁이 우려했던 방향으로 맹렬히 달려갔습니다. IMF가 요구하는 대로 귀중한 국가 공공재산인 공기업들을 대대적으로 민영화하고, 무엇보다도 주요 은행들에 대한 지배권을 외국인들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의 글로벌화라는 게 시대의 대세라는 거짓 논리에 놀아난 나머지 별다른 숙고 없이 이른바 시장권력에 모든 것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심사숙고하지도 않고, 우리는 무역 아니면 살길이 없는 나라니까 시장개방을 확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농산물도 다 개방하면서 농업축소, 공업확대라는 수십 년에 걸쳐 일관되게 계속돼온 전략을 이어받아서 그대로 확대하는 데 열중했을 뿐이죠. 저는 이게 실제로 냉정하게 종합적으로 검토한 연후에 진행되었다기보다도 “우리는 자원이 없으니 무역으로 먹고살 수밖에 없다”는 강박관념에 의한 조건반사적인 반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관성의 힘은 무서운 것입니다. 이게 굳어지면 ‘원리주의’가 되는 거죠.
이 상황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무역협정을 자꾸만 맺으려고 하는 것을 보세요. 지속 가능한 농업대책이라는 것은 이 나라에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혀 없습니다. 농민과 농촌을 죽이는 전략밖에 없어요. 농사를 조금이라도 회복시킴으로써 건전한 경제로, 나아가서 지속 가능한 순환경제 시스템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가자는, 그런 사상과 철학을 이 나라에서는 어떤 정권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유무역협정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게 한미FTA인데, 그걸 노무현 정부가 시작했다는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해도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늘 설움을 겪어온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서 정치를 하겠다고 들어선 정부가 자립이나 자급의 근본인 농사 기반이 다 무너지면 장차 어떻게 위험한 상황이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안목도 없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경’의 소멸
지금 제가 들고 있는 것은 《거대한 변경(The Great Frontier)》이라는 책입니다. 월터 프레스콧 웹이라는 미국의 역사가가 오래전에 쓴 책입니다. 이분은 래디컬한 사상가가 아니라 아주 온건한 자유주의 역사가입니다. 미국역사학회 회장도 역임했고요. 그런 학자가 1951년에 발표한 책인데, 참 재미있어요. 최근에 제가 우연히 이 책을 보다가 그 선견지명에 상당히 놀랐습니다. 무슨 내용이냐 하면, 지난 450년 동안 유럽인들에 의해서 주도되어온 근대 자본주의 문명은 놀랄 만한 성장과 확장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해왔는데,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간단히 말하면 1492년 아메리카대륙 ‘발견’ 이후 남북아메리카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 등 실제로 서구인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었던 ‘거대한 변경’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럽이라는 중심에서 보자면 비유럽은 모두 ‘변경’인데, 그 ‘거대한 변경’에 대한 거침없는 약탈에 의해서 자본주의 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는 얘기죠. 그리고 그 성장하고 팽창하는 경제를 근본토대로 해서 의회제 정당정치 시스템을 비롯하여, 온갖 사회적, 문화적 시스템, 즉 서구문명의 상부구조가 존립해왔다는 것이죠. 요컨대 서구 근대문명의 번영은 ‘거대한 변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성립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번영의 시기는 이제는 끝났다고 이 책의 저자는 단언합니다. 1950년의 시점에서 그 이전 450년 동안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뒷받침해왔던 성장과 확대의 근본조건, 즉 ‘거대한 변경’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1950년경이라면 세계의 열강들이 식민지를 대부분 포기하고, 이른바 제3세계가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하던 시기였죠. 그런 점에서 ‘거대한 변경’이라고 했을 때 이 책의 저자가 주로 그 식민지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비록 식민지는 과거지사가 되었으나 이른바 신식민주의적 지배와 약탈이 계속돼온 20세기 후반의 세계적 현실을 생각하면, 월터 프레스콧 웹이라는 역사가의 관점은 퍽 나이브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보면 1950년 시점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 조건이 사라졌다는 판단은 성급했다는 게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어쨌든 경제성장 시대는 계속돼왔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1950년이라는 시점을 잡은 것은 판단 착오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적 메시지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구식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란 기본적으로 비서구 세계에 대한 침략과 약탈의 소산이라는 것, 그리고 침략과 약탈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 날이 반드시 오게 마련이고, 그때는 그 문명은 당연히 종식될 수밖에 없다는 이 책의 메시지는 사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더구나 그것을 지금보다 반세기도 더 전에 얘기했다는 것은 대단한 혜안과 용기가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지금 생각하면 《거대한 변경》의 저자는 확실히 석유의 중요성을 간과한 면이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했다면 성장경제의 종식 시점을 1950년대로 성급하게 잡지는 않았겠죠. 그러나 석유문제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던 탓에 시기를 좀 앞당겨 예견하였을 뿐이지, 그가 근대문명의 다가오는 종말에 대해 내린 예측은 본질적으로 정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석유공급 문제가 심각한 현안이 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그 예측과 판단은 훨씬 더 적실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변경’이라는 용어를 쓴 것도 재미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권력의 중심에서 보면 권력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변두리이고,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란 결국 권력의 중심에 의한 변두리에 대한 강탈의 역사임이 확실합니다. 이 점을 프레스콧 웹이라는 역사가는 아무 주저나 유보 없이 아주 명쾌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서양에서 자본주의 초기 역사를 얘기할 때 반드시 언급하는 게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오랜 세월 농민들이 공유해오던 땅을 권력자들이 강제적으로 사유화했던 이른바 ‘엔클로저’입니다. 그러니까 엔클로저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폭력적인 약탈행위 이외 아무것도 아니죠. 그것을 맑스주의 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 형성기에 필요했던 원시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맑스는 ‘원시적’이라는 형용사로써 그 난폭한 강탈행위를 암시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원시적’ 축적은 따져보면 자본주의 초기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지금도 날마다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란 그런 강탈행위로서의 ‘원시적’ 축적 없이는 하루도 존속할 수 없는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서구라는 중심이 비서구적 ‘변경’을 약탈함으로써 성장·발달해온 문명이라고 근대 자본주의를 간단명료하게 정의하는 《거대한 변경》의 저자를 저는 높게 평가하고 싶은 거죠.
사실 《거대한 변경》이 전하는 기본 메시지는, 예를 들어, 그보다 더 나중에 등장한 ‘종속이론’이라든지 혹은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론’과 같은 이론에 비하면 너무나 단순하고 소박한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변경》은 시기적으로도 이들 사회과학 이론보다 앞선 선구적인 저술일 뿐만 아니라, 그 단순한 논리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확연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큰 미덕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예를 들어,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론’은 결국은 같은 얘기를 하면서도 중심지역과 변두리지역 사이의 관계를 ‘분업’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그 격차의 원인을 ‘불균등 교환’이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이런 용어가 보다 과학적인 언어인지는 모르지만, 그 의미하는 내용은 결국은 약탈적 관계입니다. 그냥 약탈이라고 말하는 게 훨씬 정직한 태도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완곡어법으로 표현하면 학자들은 그게 무슨 소린지 알겠지만 보통사람들은 모릅니다. 저는 학문이라는 게,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이처럼 민중을 현혹시키는 언어를 구사한다면 그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학술적인 용어가 아니라 일상적인 언어에 익숙한 보통사람들의 감각으로는 분업이니 교환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무엇인가 고상한 느낌이 들게 마련이잖아요. 완전히 도적질, 강도짓을 하는데 그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해놓으니까 헷갈리는 거죠. 그런 점에서 《거대한 변경》이란 책은 훨씬 솔직하고 거침없는 표현, 즉 강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돋보입니다.
윤리·사회적인 한계
자본주의 근대문명이라는 것이 결국은 세계 대다수 인민들에게는 학살과 강탈의 역사였음이 분명합니다. 조금 다른 얘기일지 모르지만, 제가 이런저런 모임에서 강연을 할 경우가 있는데, 그런 강연에서 질문시간이면 가끔 듣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쨌든 환경문제나 사회문제에 비교적 잘 대응하고 있는 사회는 잘사는 선진국이 아니냐, 그 점을 생각하면 먼저 경제를 발전시켜서 선진국이 되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냐,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왕왕 있어요. 이상하게 대개는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 저는 이 사람들이 기초적인 역사공부도 안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제3세계의 빈곤의 원인이 무엇이고, 소위 선진국의 부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서양인들이 쳐들어오기 전에도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가? 물론 그런 사회에 기술문명 따위는 없었죠. 그러나 기본적으로 어디서나 상호부조의 원리에 따라 서로 돕고 함께 일하면서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 점을 확실히 하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세계의 앞날을 위태롭게 하는 근본문제는 후진국의 빈곤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선진국의 번영이라는 인식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 선진국의 번영이라는 게 몇백 년에 걸친 약탈의 산물이라는 것을 똑똑히 인식해야 합니다.
《성장의 한계》라는 책이 아니라도 지금 성장이 명확히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장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더이상 계속될 수 없습니다. 첫째는 생물·물리학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자원고갈 문제, 환경오염 문제 등으로 벽에 부딪친 것입니다. 또하나 성장이 중단되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경제성장에 따르는 윤리·사회적인 문제가 더이상은 허용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명백한 윤리적 임계점에 다다른 거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생각에 제일 바람직한 것은 생물물리학적인 한계에 부딪치기 전에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윤리적인 각성을 하여 비윤리적인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고, 인간해방을 이루어내는 길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인 성과는 있었지만,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집단적인 투쟁은 늘 왜곡되거나 실패로 끝나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습니다. 해방투쟁이 장차 어떻게 또다른 모습으로 전개될지 모르지만, 인간 자신의 그런 투쟁보다는 생물물리학적인 한계 때문에 먼저 자본주의가 붕괴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게 사실입니다. 어차피 자본주의는 이대로 갈 경우 제 무덤을 팔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인간 자신의 능동적인 각성과 단결된 노력에 의해서 극복되는 게 아니라 외적 한계에 봉착하여 무너질 전망이 더 큰 것은 유감스럽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그냥 지금처럼 살아온 관성대로 행동하기만 해도 조만간 자본주의는 붕괴합니다. 그렇게 되면 속수무책으로 파국을 맞이하겠지만, 아무튼 자본주의는 망합니다.
그게 바로 1972년에 《성장의 한계》라는 책의 저자들이 했던 말입니다. 그 책의 저자들은 좌익 혁명가도 아니고 녹색사상가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미국의 특권적인 대학에서 확고한 지위가 보장된 부르주아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객관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과학적으로 조사를 해본 결과 그런 결론이 나온 거죠. 근본적인 문제는 유한한 체계인 이 지구상에서 무한한 진보를 직선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인간들이 그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진보를 추구한다는 것은 절대로 화합할 수 없는 모순입니다. 그런 모순을 시초부터 내포하고 있는 게 근대 자본주의 문명입니다. 그러니 온갖 무리와 부조리가 따를 수밖에 없죠.
요즘 우리나라 대학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대학에서는 학과통폐합이니 뭐니 하면서 구조조정이 한창입니다. 특히 지방에 있는 대학들에서 이런 움직임이 심합니다. 저는 벌써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일입니다. 첫째는 앞으로는 대학에 들어올 학생 수가 갈수록 줄어듭니다. 인구분포가 그렇게 돼있어요. 그동안 무턱대고 대학을 확장하고 학생 정원을 늘려왔는데, 그게 벽에 부딪친 거죠. 이것을 진작부터 예견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도 경쟁적으로 무작정 학교를 키우다가 낭패를 당하게 된 거죠. 설마 하는 생각도 있었겠지요. 그리고 아직도 이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학과통폐합을 하면서 피부로 느끼는 게 있을 텐데도 기술적으로 잘 대응하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밀어닥칠 쓰나미의 전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단 적령기의 입학생 수가 줄어드는 인구문제뿐만 아닙니다. 사회 전체 경제활동이 대폭 축소되면, 그 필연적인 결과로 대학도 축소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예감으로는 앞으로 10년 내에 우리나라 대학의 절반 이상은 사라질 것 같습니다. 학생이 안 들어오는데, 어떻게 대학이 존립할 수 있습니까? 지금 대학 경영자나 교수들은 자기 학교만의 문제, 혹은 지방대학이라서 닥치는 위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의 전반적인 산업구조가 일시적인 퇴조가 아니라 영구적인 축소 지향의 길로 가는 상황에서 대학만이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니까 학과통폐합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는 쓸데없는 짓을 할 게 아니라 차라리 지금부터 캠퍼스에 가급적 많이 텃밭을 조성하여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농사체험을 익히도록 하는 게 장래를 위해서 훨씬 더 현명한 대비책이 될지도 모릅니다. 농담으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거의 틀림없이 대부분의 건물이 쓸모가 없어지고, 학교의 빈터는 모조리 농지로 전환해야 하는 날이 곧 올 것입니다.
1970년대의 중요성
그런데 되돌아보면 성장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미 1970년대에 모두 분명히 깨달았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허둥거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성장의 한계》라는 책이 출판된 것이 1972년이었는데, 그 연대는 우연한 게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1970년대 초는 세계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연대였습니다. 한번 꼽아볼까요. 베트남전쟁이 사실상 미국의 패배로 끝나가고 있었고, 68학생운동이라는 자본주의 문화와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세계적인 대항문화운동이 한창 때였습니다. 68학생운동은 치열한 반전운동과 반핵운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972년에 《성장의 한계》라는 책이 나왔는데, 이 책은 인류사적으로 굉장히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중요한 책들과는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이 책이 별로 문학적 흥취를 주는 책은 아니지만, 객관적인 자료에 의거해서 문명의 방향전환을 인류사회가 시도하지 않으면 조만간 파국에 이른다는 것을 명확하게 과학적으로 예측한 책입니다.
그리고 1971년에는 뭐가 있었습니까? 그해 8월에 미국 대통령 닉슨이 달러와 금의 태환(兌換)을 중지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완전한 금본위제는 아니지만, 미국 달러 1달러면 실제 금 얼마라는 식으로 교환할 수 있게 되어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달러 중심의 세계통화질서를 규정해온 브레턴우즈체제라는 게 그거였죠. 달러라는 지폐가 금이라는 희귀 금속에 연계되어 소위 고정환율제가 유지되고 있었죠. 그런데 1971년에 미국정부는 이 제도를 정지시켰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 비용 때문에 달러를 남발하여 심각한 인플레를 유발했고, 재정적자가 심각했습니다. 미국달러의 가치가 하락하니까 달러를 보유하고 있던 외국인들이 서둘러 금과 교환하려 했습니다. 그러면 미국이 갖고 있는 금의 유출이 심해지고, 이 상황이 계속되면 버틸 수가 없죠. 그래서 중단시켜버린 겁니다. 이것을 ‘닉슨쇼크’라고 부릅니다. 세계의 금융질서, 무역 및 경제질서에 대충격을 가하는 조치였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산유국들에게 석유 판매 대금을 미국달러로 받도록 강요함으로써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계속 유지하게 되지만, 그러나 브레턴우즈체제는 붕괴됩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지속돼왔던 고정환율제가 무너지고 이제부터는 경제력에 따라 각국의 통화가치가 끊임없이 재조정되는 변동환율제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 거죠.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통화질서가 바뀌면 뭐가 가장 문제냐 하면 금융의 규율이 무너지고, 끊임없이 변동하는 각 통화 사이의 환차익을 노린 금융투기가 성행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실제로 생산적인 부문에 돈이 투자되는 게 아니라 돈이 돈을 증식하는 카지노경제가 극성을 부리게 됩니다. 2007년의 통계를 보면 전세계적으로 하루에 약 4.5조 달러치의 외환이 거래됐습니다. 이 액수는 실제 그해 세계무역 총액의 86배에 해당되는 돈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생활에 필요한 실제 생산품과 서비스를 거래하는 무역을 위해 사용된 돈은 외환거래액 전체 중에서 극히 미미한 비중밖에 차지하지 않는 반면에 그 나머지는 전부 외환시장에서의 시세 차익을 노린 도박을 위해서 거래된 거죠. 결국 닉슨쇼크 이후의 세계경제는 금융투기꾼이 주도하는 거대한 도박판이 돼버렸습니다. 빈발하는 외환위기, 주택버블을 위시한 거품경제, 온갖 해괴한 금융파생상품 등등, 지난 수십년간 고삐 풀린 금융의 투기화에 의해서 세상은 온통 도박판이 돼버렸고, 모든 도박의 귀결이 그렇듯이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결국 세계는 전대미문의 부채위기, 금융위기, 경제위기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들은 이 위기의 원인이 금융에 대한 공적 통제의 결여에 있다고 흔히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닉슨이 달러의 금 태환 정지를 선언한 1971년 시점에서 미국경제의 기반은 사실상 무너졌습니다. 미국은 물론 2차 세계대전의 승자로서 전후의 세계경제를 주도해왔죠. 미국의 지원으로 독일과 일본을 비롯하여 많은 나라들이 부흥을 하고, 미국의 지위는 확고했습니다. 그러나 이기면 바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은 오만방자해진 나머지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합니다. 그 대표적인 게 베트남전쟁이죠. 베트남전쟁에서 완전히 수렁에 빠져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미국이 입은 상처는 회복 불가능할 만큼 심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도, 계속해서 미국식 생활방식을 확대한답시고 세계 전역의 토착 문화와 토착민의 삶을 유린하고, 세계 인민의 민주적 자치에 대한 열망을 분쇄하려는 횡포를 멈추지 않았죠. 그러면서 독일이나 일본이 전후재건에 성공하고, 자신들이 생산한 우수한 공업제품을 오히려 미국으로 대거 수출하면서 미국의 산업생산기반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한 것이 ‘경제의 금융화’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생산적인 경제와 관계없이 돈이 돈을 증식하는 카지노경제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돈이 넘치는 상황에서 미국은 세계의 거대한 소비시장 노릇을 하며 살아왔지만, 그러한 철저히 비생산적인 거품경제가 언젠가는 파탄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2008년 월스트리트 금융붕괴로 미국을 지탱해온 카지노경제도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지금 유럽이 위기에 빠졌고, 조만간 동아시아에도 그 여파는 쓰나미처럼 밀려들어올 게 분명합니다.
1970년대가 중요했다는 것은 1974년에 일어난 1차 오일쇼크를 생각하더라도 분명합니다. 이 오일쇼크는 물론 그때 중동의 석유산유국들이 종래의 패권적인 석유메이저들로부터 석유 주권을 되찾겠다는 결의 때문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것은 석유문명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태를 그렇게 이해한 지식인, 학자들이 적잖게 있었습니다. 일본의 교토대학에서 금속공학과 교수로 있던 쓰치다 다카시(槌田?)라는 분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전공인 금속공학이 궁극적으로 세계의 파괴를 앞당기는 데 기여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교수직을 그만둡니다. 그 후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지금까지 환경운동, 유기농산물 장려 협동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일쇼크는 1972년에 나온 《성장의 한계》 혹은 1973년에 출판된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같은 책이 제기했던 산업문명의 지속성이라는 문제에 관련해서도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던 거죠. 그때 제대로 신호를 포착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지금까지 인류사회는 40년을 허비했습니다. 그때 정신을 차리고 직선적인 산업경제가 아니라 자원 순환적인 경제시스템을 만드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허비된 시간
사실, 슈마허가 쓴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그것을 명백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한 책이었습니다. 원래 슈마허는 독일 출신의 경제학자인데 영국에 와서 20년 넘게 석탄공사의 경제자문을 했었습니다. 이분이 1950년대 후반에 버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어요. 버마에 와서 보니까 서양세계와는 살아가는 방식이 너무 다른 거예요. 서양에서는 이미 다 잃어버린 공동체적인 인간관계가 풍부하게 살아있고, 돈 없이 얼마든지 품위있게 살 수 있는 소박한 삶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거죠. 그동안 경제학자로서 유럽에서 활동할 때에는 산업경제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줄 알았거든요. 말하자면 문화적인 충격을 받은 거죠. 그 후에도 여러 저개발 사회를 방문할 기회를 가지면서 다양한 비서구적 전통문화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원래 인문적인 소양이 풍부했던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흥미로운 책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의 핵심 개념은 ‘불교경제학’입니다. 그것은 욕망의 무제한적인 추구 때문에 세계와 인간 자신을 파괴시키는 경제가 아니라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 위에서 자족할 줄 알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중시할 수 있게 하는 경제라는 뜻이죠. 말하자면 자본주의 산업경제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과 더불어 대안적 비젼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미 그 무렵 서양에서는 근대문명의 지속성에 의문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슈마허의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 책을 열심히 읽은 독자 중에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카터도 있었습니다. 카터는 우리가 흔히 보는 정치지도자와는 좀 다르게 진심으로 지구의 장래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기는 그러니까 현직 대통령이면서 재선 출마를 하지 못했는지도 모르죠. 미국의 지배계층이 그러한 카터를 달갑게 생각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어쨌든 카터는 슈마허를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한 시간 넘게 경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참모들에게 지시하여 대통령 지구환경보고서를 작성하게 했습니다. 그 책은 제가 오래전에 본 기억이 있습니다. 또 카터는 백악관 지붕 위에 태양광발전 패널을 설치했습니다. 상징적인 의미가 큰 행동이죠. 카터의 이런 의식과 행동이 다음 지도자들에 의해서 계승되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러나 그 다음 대통령은 레이건이었습니다. 레이건은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으로 들어오자마자 지붕 위의 그 태양광 패널을 제거하라고 했습니다. 그게 백악관에서 레이건이 행한 최초의 업무였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 후의 역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인류사회의 장기적인 미래를 생각하면 뭐니뭐니해도 미국의 정치적 리더십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레이건 시대를 통해서 세계는 온갖 면에서 역사의 후퇴를 강요당했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정책노선에 따라 레이건이 본격화한 퇴영적 정치는 인류에게 남은 아까운 시간을 어이없이 허비하게 만든 결과가 되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스미소니언 협회가 주최한 그 심포지엄에는 《성장의 한계》를 쓴 저자들 중에서 지금 생존해 있는 두 사람의 학자도 참가했다고 합니다. 그중 데니스 메도즈라고 원래 MIT 교수였다가 지금은 은퇴한 분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너무 늦었다. 우리가 책을 썼던 1970년대만 하더라도 정치지도자들이 정신을 차리면 방향전환은 가능했다. 그래서 그걸 돕기 위해서 책을 썼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은 이미 늦어버린 것 같다. 지금은 인류의 산업생산과 소비 규모가 지구가 용납할 수 있는 수용능력의 150% 이상이나 초과해버렸다.” 수용능력을 초과했다는 것은, 개인생활로 치면 마이너스 통장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얘깁니다. 개인이 장기적인 생활의 안정성을 유지하자면 원금은 건드리지 말고 이자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데, 지금은 원금까지 다 파먹고 아예 빚으로 살아가고 있는 형국이라는 거죠. 빚을 갚으려면 다시 빚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 악순환이 시작되고, 그 구조는 언젠가는 파열하게 마련입니다. 지금 인류는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는 꼴이죠.
‘이상을 결여한 정치’
문제를 들여다볼수록 정치적 리더십이라는 게 중요하고, 무엇보다도 건전한 정치적 이성(理性)이 기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도의 뉴델리에 가면 간디의 묘가 있습니다. 그 비문에는 생전에 간디가 했던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세계에는 일곱 개의 큰 죄가 있다. 첫째, 이상을 결여한 정치. 둘째, 노동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은 부(wealth). 셋째, 양심에 어긋나는 쾌락. 넷째, 인격이 결여된 학문. 다섯째, 도덕성이 결여된 상업. 여섯째, 인간성이 결여된 과학. 일곱째, 자기희생을 망각한 신앙.” 이 일곱 개 항목이 다 중요하지만, 간디가 특히 정치를 제일 먼저 꼽았다는 게 의미심장합니다. 실제로 정치가 잘못되면 모든 게 허사입니다. 간디는 그처럼 중요한 정치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요소가 ‘이상(理想)’이라고 본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정치는 현실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주의만이 전부라면 정치는 야바위꾼들의 권력쟁탈 이외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상황은 어쩌면 인류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는 지난 수백 년, 한국이라면 지난 몇십 년 동안,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당연지사가 중단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정치지도자들이 얼마나 정확히 꿰뚫고 있느냐 하는 것은 사활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런 안목은 대단히 높은 윤리의식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자본주의 근대문명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타자―동시대의 사회적 약자와 자연 그리고 미래세대―에 대한 무관심 혹은 무책임한 태도를 기초로 해서 전개돼온 극히 비윤리적인 시스템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안목입니다.
혹자는 근대라는 것을 일방적으로 규탄할 수 있느냐, 근대문명 덕분에 많은 사람이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도 갖게 되었고,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도 누리고, 높은 생활수준과 복지혜택도 누리면서 살게 되었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지식인일수록, 고등교육 받은 사람일수록 그런 관념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들은 근대문명이 계속돼온 세월 동안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인간들이 끝없이 학살을 당하거나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며 살아왔고, 그 상황은 지금도 변함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료를 보니까 지난 500년 동안에 자본주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물질적 혜택을 실제로 누렸던 사람의 수효는 지구 전체 인구 가운데 최대 15%를 넘어본 적이 없다는 통계가 나와있더군요. 그러니까 85% 이상의 인구는 항상 15% 이하 ‘특권층’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서 희생을 당하며 살아온 거죠. 이제는 마지막 국면이 되니까 그 15%에 속한 계층도 대부분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1% 대 99%라는 게 정확할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몰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병리적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즘은 미국이든 일본이든 서유럽이든 그동안 비교적 유복하게 살았던 사회들에서 거의 제3세계적인 양극화 현상, 대중적 빈곤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연간 자살자는 3만5,000명을 넘고 해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의료보험 미가입자가 4,500만 명이 넘고, 2012년 3월 현재 정부로부터 식비 보조(food stamp)를 받아야 하는 미국 시민의 수는 4,600만 명 이상이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실업문제의 심각성은 선진국들의 공통 현상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민자 배척 운동이 소위 선진국들에서도 급속히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경제상황이 나빠지면 인종주의, 민족주의, 혈통주의가 쉽게 발호하는 법이지만, 최근에는 복지선진사회라고 하는 북유럽 국가들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나 이민자들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의 퇴행이 시작된 거죠. 경제성장이 순조롭게 계속될 때에는 빵을 크게 함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지켰지만, 이제는 그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를 안정시키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을지, 정말로 지혜로운 정치가 기능을 하지 않으면 안될 엄중한 상황입니다. 그게 안되면, 파시즘이 창궐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은 틀림없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린 것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입니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논의가 꽤 진전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최근에 제가 읽은 일본 책이 하나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이 ‘성장 없는 시대의 국가를 구상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책은 여러 사람들의 공동 저술인데, 편집자는 지금 일본에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문제를 둘러싸고 가장 열렬히 반대논리를 펴고 있는 나가노 다케시(中野剛志)라는 경제학자입니다. 현재 교토대학 교수로 있는 이 나가노라는 사람은 원래 일본의 경제산업성에서 일하던 관료였습니다. 일본의 경제산업성이라면 우리나라의 재정경제부와 지식경제부를 합친 곳이라고 할만합니다. 요컨대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정부의 핵심 부서인 거죠. 그런데 이 사람이 아직 정부에서 일하던 수년 전에 몇몇 학자들과 경제산업성 간부들을 규합해서 연구회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일본은 벌써 1990년대 초 버블경제가 붕괴하면서 계속 저성장 내지 마이너스 성장 상태지만 여전히 국가정책은 성장 기조의 회복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장경제는 사실상 끝났다고 보고, 그 대신 성장이 중단된 시대를 어떻게 대처해나갈지를 궁리하는 게 절박하다는 문제의식 밑에서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년 동안 열번 정도 세미나를 개최하여 활발한 토론을 거쳐서 세상에 공개한 것이 《성장 없는 시대의 국가를 구상한다》라는 책입니다. 제가 놀란 것은 이 책의 내용보다도 정부의 경제정책을 다루는 현직 고위 관료들이 그 세미나에 활발히 참여해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지 생각하면, 일본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그리 만만한 사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에 대처하는 일본정부나 지도층의 무능하거나 무책임한 자세를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다가도, 이런 책을 보면 또다른 일본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이미 중요한 선각자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지만, 원래 대장성(大?省) 관료를 지내다가 1960년대 전반 일본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하는 이론을 체계화했다고 알려진 시모무라 오사무(下村治)라는 경제학자가 있습니다. 이케다(池田) 내각 때의 국민소득배증론(倍增論)이라는 것이 바로 시모무라의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고도경제성장 국가의 핵심적 경제이론가였죠. 그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1차 석유위기를 겪고 난 뒤에는 완전히 자세를 바꿔서 성장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경제는 더이상 가능하지도 않은 성장을 계속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중지하고, 이제는 ‘축소균형’의 길로 가야 한다는 논리를 설파했습니다. 그래서 식량과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고, 농업을 장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런 선각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지금 일본의 경제학자들과 현역 경제관료들이 비록 일부지만 ‘성장 없는 시대’를 위한 대안적 비젼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불쑥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진보’와 농업
그런 것을 생각하면 한국의 경우는 참 답답하고 한심합니다. 요즘 진보진영에 속한 몇몇 경제학자들 사이에 공개적인 논쟁이 진행되고 있어서 몇 꼭지 읽어봤는데 제가 무식한 탓인지 너무 시시하다는 생각이 듭디다. 재벌을 해체해야 하느냐, 경제민주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논의도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논쟁이 근본적으로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논의들 속에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가 닥쳤다는 데에 대한 인식이나 관심은 조금도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관료들마저 성장 없는 시대를 얘기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아직도 농업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매우 약해요.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그렇습니다. 아니 진보를 지향한다는 사람들일수록 농업문제에 대한 관심은 더 희박한 게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아직도 그들은 진보라면 도시문명, 기술문명을 생각하는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30년대에 활동하다가 나치스를 피해서 피레네산맥을 넘다가 자살한 발터 벤야민이라는 뛰어난 철학자이자 문예비평가가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 벤야민이 역사에 관한 성찰적 에세이 속에서 “맑스에게 있어서 혁명이란 진보를 추동하는 기관차였다. 그러나 내 생각에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혁명은 진보에 제동을 거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발언이죠. 이미 1930년대라는 시대에 그 자신 맑스주의 철학자이기도 했지만, 벤야민은 근대 과학기술 문명으로 표상되는 ‘진보’가 내포한 근원적인 파괴성을 예리하게 관찰했던 것이죠. 대단한 선각자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제는 농업 중심의 순환경제를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진보적 자세라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까 말씀드린 《거대한 변경》의 저자는 450년간에 걸친 서구의 번영이 ‘변경’의 소멸로 종식을 고할 때, 세계는 전례 없는 래디컬한 변화를 경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간의 근대문명이라는 것은 장구한 인간역사의 맥락에서 볼 때 매우 ‘비정상적인(abnormal)’ 시기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근대문명을 뒷받침해왔던 ‘성장’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비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사태가 결코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그것은 환영해야 할 사태입니다. 왜냐하면 ‘성장시대의 종언’이라는 것은 이제 비로소 인류사회가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 길로 들어서게 됐음을 알려주는 희망의 신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의 신호를 어떻게 구체적인 현실로 만들 것인가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월터 프레스콧 웹이라는 역사가도 ‘성장’시대가 종식됨에 따라 자립적인 농업과 농촌생활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정혜진 녹취)